보배섬 진도(珍島)의 슬픈 역사 (虎豹之文來田)

2016. 7. 18. 17:04나 그리고 가족/수필(자작)

보배섬 진도(珍島)의 슬픈 역사虎豹之文來田」                                                          麗尾박인태

 

황산벌이라는 영화에서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속담의 해석이 뒤집어진 사례가 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다.

이 속담은 호랑이가 죽은 다음에 귀한 가죽을 남기듯이 사람은 죽은 다음에 생전에 쌓은 공적으로 명예를 남기게 된다는 뜻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전에 보람 있는 일을 해놓아 후세에 명예를 떨치는 것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영화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장군이 신라와의 마지막 전쟁을 떠나기 전 이미 기운 백제의 운명을 예견하며 처자식을 자기 손으로 먼저 희생시키고자 할 때 부인과 나눈 대화가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그러니까

우리도 적에게 잡혀 부끄러움을 당하느니 장렬하게 먼저 죽어 불세

이 말에 대해서 부인이 절규하듯 비장하게 계백 장군을 향해 남긴 말이 명언이다.

! 이 미친놈아! 당신이 우리 가족(백성)에게 뭐 호강시켜 주었다고

이 어린 새끼들과 같이 죽자 지랄이냐?”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명예) 때문에 죽는 것이여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역전인가?

 

진도(珍島)는 보배 섬이라서 슬픈 사연이 많다.

 

장자응제왕편에 나온 글 중에서 虎豹之文來田호랑이와 표범은 아름다운 무늬 때문에 사냥꾼을 부른다고 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원숭이의 너무 민첩함 때문에 묶임을 당하는 것처럼 보배섬 진도 역시 이 같은 처지를 불러 온 셈은 아니었을까?

 

진도의 여러 역사적 자료 중에 그 흔적이 생생히 남아있는 삼별초에 대한 생각이다. 고려시대 1254년 경 최 씨의 무신통치 기간에 최우가 집권할 당시에 그의 아들 최항이 법명을 만전(萬全)이라 짓고 진도 용장사 주지로 있으며 할아버지와 아비의 권세를 이용하여 진도 주민에게 횡포가 도를 넘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강화도에서 난을 일으킨 삼별초가 전선 일천여척을 몰고 12708월 느닷없이 진도로 입도함에 따라 진도 사람들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진도가 보배 섬만 아니었어도 끼리끼리 편하게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진도 사람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느 날 진도는 고려 정부 입장에서 볼 때 적괴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힘없는 백성은 시퍼런 칼날 앞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삼별초의 동패가 되어야했을 것이다. 삼별초 입장에서 보면 진도는 그들의 권력기반을 유지하며 반란을 성공시킬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을 다 갖춘 곳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진도의 용장사는 풍수설에 의하면 다섯 마리의 용이 구슬을 다투어 품고 있는 오룡쟁주의 명당이라고 하고, 육지와 떨어져 있으되 결코 멀지 않은 해역의 거센 물살 울돌목은 적을 방어하기에 완성맞춤이며, 전라도 남해안과 경상도 등지에서 개경으로 올라가는 조운선(漕運船)의 길목이라는 여러 가지 우수한 지리적 여건과 미리 와서 민심을 휘어잡고 있는 고려 무신 정권의 아들이 은밀하게 준비한 행위도 유리한 조건의 하나로 예상된다.

여하튼 꿈에도 생각 못하고 생업에 열중하던 대부분의 진도 백성들은 하루아침에 그들의 노예가 되어야 했고 달콤한 정치적 괴설(怪說)은 결코 축복이 아닌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근근이 농사짓고 물고기 잡고 미역 따서 먹고살던 주민들의 양식은 군량으로 빼앗겼을 것이고, 시집 갈 날을 받아 둔 처녀들은 왕과 그 권력자를 위한 노리개(궁녀)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고려 정부군과 몽고군의 침입을 대비하며 남자란 남자는 모두 차출되어 졸지에 병사가 되었거나 강제노역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평화의 섬 진도는 전쟁터로 변하게 된다.

삼별초로 말미암아 보배섬 진도 백성은 죽을 운명에 처했으니 도대체 명분과 명예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삼별초에 저항해도 죽고 삼별초가 토벌되는 상황에서도 정부군에 의해 죽어야 될 진퇴양난의 운명이 된 것이다. 처음부터 삼별초의 난은 진도백성의 전쟁이 아니었다. 최 씨 무단통치 권력이 누구인가? 외세의 침략과 이 나라 통치자들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이 제발 굶지 않고 살게 해달라고 방방곡곡에서 아우성을 하였고 이러한 백성들을 민란이라는 이름으로 잔혹하게 억압하기 위해 야간에 은밀하고 강압적으로 백성을 감시하던 야별초라는 사병을 둔 그들이 아닌가?

급기야 굶주린 백성들은 화적 산적(초적)이 되었고 그 수가 점점 많아지자 야별초를 나누어 좌별초와 우별초로 편제하여 백성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착취를 일삼는 것도 부족하여 몽고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죽지 못해 도망 처 온 그 광기어린 고려가 버린 사람들을 신의군이라는 이름으로 편성하여 무신 정권을 더욱 곤고히 하니 이들을 통칭하니 삼별초가 된다. 그들은 애초부터 몽고에 항복한 개경 정부와 침략자 몽고의 눈에 가시었기 때문에 강화도에서 내려 올 때부터 백성은 눈에 보이지 않고 무장 해제될 경우 그들로 부터 받을 몰락을 피하고 누리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진도를 탈취한 것이다.

삼별초가 진도를 그들의 아지트로 삼은 배경에는 앞에서 언급했지만 첫째로 진도가 해상활동에 유리한 군사-지리적 요충지이며 육지와 가까웠고, 둘째로 과거 최씨(최이)의 아들인 용장사 주지 만전이 무뢰한 중 무리와 오직 재산 취부에 몰두한 결과 진도 지역에 많은 농토를 보유하고 있었을 테니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으며, 셋째로 고려시대 때 유행한 도참설중 판태사국사 안방열의 점술인 ˝용손(龍孫)12대에 끝나는데 남쪽으로 가서 제경(帝京)을 이룩한다˝ 龍孫十二盡向南作帝京의 영향을 받아 해도재천(海島在天)의 명당이라는 명분도 있었다고 한다. 넷째로 가장 중요한 진도가 비옥한 토질과 물산이 풍부하여 자급자족이 가능한 섬이라는 점이다.

바로 네 번째가 문제라면 문제인 것이다. 옥주(沃州)라고 하는 진도는 밖에서 볼 때 보배의 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도사람에게는 삼별초의 무력침탈로 인해 겪게 되는 려몽 연합군과의 몇 번의 전쟁 끝에 그들이 토벌되자 모든 피해는 진도 사람들에게 전가되는 얼룩진 슬픈 역사를 남기게 된다.

몇 번의 승리와 몽고군의 해전 경험 부족을 오판하며 방심한 용장산성에 터를 잡은 삼별초는 자신들이 정통성을 가진 정부라고 현혹하며 조세를 강제하고 전통적인 농사꾼과 어부들을 차출하여 군인으로 징발하였을 것이다.

 

삼별초는 만약의 경우 진도를 버릴 것을 염두에 두고 미리 제주도까지 진출하여 피신할 방안까지 세워 두었지만 진도 사람들이야 어찌 그들의 속내를 알았겠는가.

고려 원종12(1271) 1월 개경과 밀성(밀양)군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2월에는 대부도에서 발란이 일어나며 그들이 진도의 삼별초 정부로 귀부하려는 움직임에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기름에 불을 붓듯 이 나라를 점령한 몽고군은 주로 곡창 지대인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더욱 백성을 수탈 하였으니 이 지방의 민심이야 이미 개경 정부를 떠나고 있었다.

이에 힘을 얻은 삼별초는 진도 본섬 외에 주면의 비교적 큰 섬 30여개소를 공략하여 자신들에게 복속시키며 기세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그러나 진도 정부 최후의 날은 금방 다가왔다.

몽고 장수 혼도와 고려장수 김방경이 벽파진을 선제공격하니 좌군에 고려출신 몽고 장수 홍다구가 공격하고 우군에는 대장군 김석과 만호 고을마가 세 방향에서 화공(火攻)을 하며 쳐들어오자 몽고군의 해전 부족을 이유로 완전히 나태해진 삼별초는 몽고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게 된다.

삼별초 주동자들은 부랴부랴 도망을 하지만 그들의 허수아비 왕인 왕온과 그의 아들은 얼마를 도망가지 못하고 고려를 배반하고 몽고에 투항해 부기영화를 누린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에게 잡힌다. 몽고군과 함께 들어온 고려의 왕자 영녕군 준이 자기 형은 살려달라고 그렇게 애걸했다는데 홍다구는 몽고에서 당한 자기 아비(홍복원)의 원수를 갚겠노라 논수곡(論首谷)에서 고려 진도 왕의 목을 처 죽인다. 매국노의 출현이 늘 그러하듯 본디 자기 민족을 압제하고 주살하여 피바다를 이루게 하는 차라리 남보다 못한 압잡이가 된다. 몽고군에 쫓겨 진도를 가로질러 굴포까지 패주한 삼별초의 주역 배중손 장군도 잡혀 도륙 당하였지만, 운 좋게도 김통정은 금갑으로 도망하여 요행히 살아 미리 계획 된 제주도로 줄행랑을 치고 만다.

원래 삼별초라는 조직이 백성을 위해 몽고와 싸운 작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귀와 영화를 보전하기 위해 백성의 아픈 하소연을 진압하던 그런 무리였으니 비상시에 백성을 버리고 도망하는 일이야 처음부터 당연한 일이였다.

진도 정부를 몰살하려 작심하고 달려든 세계 제국 몽골과 고려 정부군에 의해 엉뚱한 진도 사람들만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

당시 진도의 추정 인구는 *강화도에서 1000여 척의 배를 타고 왔다고 하니 한 척의 승선인원을 10명으로만 잡아도 1만여 명, 여기에다 진도의 원주민과 삼별초 정부에 귀순해 온 사람 등을 더하면 3만 명 이상은 되었을 것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몽골군은 많은 士女와 백성 및 珍寶(진보)남녀 1만여 명과 전함 수십 척, 糧米 4000석과 많은 財寶(재보器仗(기장)을 거두어 개경으로 포획했다고 하니 아마도 전쟁의 직접 피해자와 포로 및 도망자 등을 포함하면 전 섬주민이 몰살되거나 거의 공도가 되었음을 쉽게 짐작하게 한다.

 

* 진도고등학교의 교사와 진도신문 발행인을 지낸 박명석, 향토사학자 이학렬

 

 

지금은 작은 웅덩이로 남아 있는 궁녀둠벙은 삼별초가 강제로 끌고 와 그들의 왕 승화후 온을 위해 바친 불쌍한 진도 처녀(궁녀)들이 신라가 외세와 야합하여 벌인 나당 전쟁으로 패망한 백제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죽은 삼천궁녀처럼 모조리 수장 되었으니 그들의 한이 서린 둠벙에서는 지금도 가끔 통곡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아직도 삼별초 때문에 죽은 수만의 백성들이 묻힌 떼무덤 속 망령의 한을 진도는 씻김굿으로 아직도 달래고 있질 않는가.

 

과연 진도가 보배 섬이라 마냥 자랑스럽기만 한가?

오히려 보배 섬이라서 진도 사람들은 처참히 영문도 모르고 떼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솔직히 고려 왕 왕온에 대한 진도인의 동정도 그렇고, 삼별초의 항몽 애국정신 운운하는 것도 사실을 가려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

그들은 결코 우리 진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끌고 가기 위한 저승 야차인 셈이다. 자기만 살겠다고 허겁지겁 도망하며 자신들의 왕도 버리고 제주도로 도망갔다.

진도는 고려 이후 조선조에서도 보배 섬임에도 불구하고 늘 중앙정부에서 버려진 섬이었다. 왜구의 노략과 임진란의 최대 피해지가 되었으며 도저히 군사력으로 지킬 수 없는 땅이라고 백성까지 강제로 섬을 비우게 하고 모든 전답과 가옥을 불 질러 짐승도 머물지 못하게 80년을 주인 없이 버려지기도 하였다. 호시탐탐 보배 섬을 탐하던 왜구들이 결국 이 나라를 집어삼키자 나라 잃은 백성들이 근대에 와서 참다 참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고 조도의 어부도 동학군이 되지만 그럴 때 마다 침략자 외세와 그 앞잡이들은 또다시 무참히 진도인을 몰살하였으므로 이름 모를 떼무덤만 더욱 늘어 만 갔다.

 

그래도 진도는 보배의 기름진 섬이다.

호랑이가 그 잘난 가죽 때문에 사냥감이 되었듯이 보배 섬이라서 진도는 늘 짓밟혔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살아남기 위해 도망가다 죽임을 당한 삼별초 장군 배중손도 명분이 없어 보이고, 강제로 잡혀 온 허울뿐인 불쌍한 진도의 왕 왕온에 대한 동정어린 의식도 달갑지 않다.

차라리 호랑이(외적)의 피해로부터 진도를 지켜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하늘을 감동시켜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일으켜 마을사람을 구한 뽕할머니로 상징되는 바로 우리 진도인의 조상만이 위대할 뿐이다.

 

최 근년에도 인천에서 출발하여 제주도로 가던 여객선은 왜 하필 진도 앞바다를 지나다가 조도(鳥島) 먼 섬 맹골수로에 가라앉아 수많은 아까운 생명을 수장하고 그에 대한 혹독한 악명은 진도인의 몫으로 고스란히 떠 넘겨져야 하는지……,

이제 억울하게 먼저 간 진도 사람들의 혼을 위로하여 한을 씻기고 선조들의 고장사랑 정신을 이어받아 진도는 정화될 것이며 진정한 보배 섬 주민으로 우뚝 일어나 어떠한 거센 해풍도 꿋꿋하게 이기고 부흥하는 고장이 되리라 기대한다. .

 

추신 : 향토사 이해가 부족한 필자 개인의 견해이므로 기존 역사관과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삼별초의 진도 입도 배경과 저항활동저자명 박종일, 학위논문(석사), 한국교원대학교 |2008외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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