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군 조도면 여미리 소재 서낭당(堂) 이야기

2016. 1. 23. 22:09나 그리고 가족/수필(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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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군 조도면 여미리(礖尾里) 소재 서낭당(堂) 이야기

 

                                                                                                                                                              글 麗尾박인태

 

 

 

유년의 추억

 

1960년 대 저녁 식사라야 바닷가에 흔하디흔한 갈파래에 통보리를 삶아 넣은 거친 죽, 국물은 그런대로 먹을 만하지만 갈파래 건더기는 입안에서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은 거친 느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글자로 표현해도 짐작도 못할 것이다. 파래국과 더불어 가을에 캐다 좁은 방구석에 밀집으로 둥그렇게 만든 두대통(저장시설)에 저장해 놓은 고구마를 무쇠 솥에 삶아 몇 알을 먹어 배를 채워도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면 어느새 배는 꺼져 그 긴 겨울밤이 허기로 잠이 오지 않았다. 억지로 눈을 감아 잠을 청하는 유년의 겨울밤은 어둡고 우울했다. 그래도 불행했다는 기억은 없다. 왜냐하면 그 허기지고 우울한 겨울을 또래 섬마을 동무들의 흔한 일이라서 상대적으로 불행한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의 긴 밤을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손주를 위해 밤이 깊어 잠이 들 때까지 들려주시던 할머니의 재미난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구수한 이야기보따리로 많은 위로를 받았다. 할머니님은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니지도 않으셨으며 서당 공부도 못하셨을 거다. 더욱 36년 동안의 일본 침략기를 보내신 암울한 시기는 공부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것이지만 한글을 아시는 분이셨다. 어떻게 한글을 익히셨을까? 조도 섬마을에서 할머니 연배의 노인분들이 대부분 한글을 모르시는데, 할머니께서는 국민(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셨다. 덕분에 국민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모두 쓰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는 내 손자가 이제 언문을 다 떼었다고 동네 사람들 앞에서 자랑 하시곤 하였다.

나중에 어렴풋이 듣게 된 사연으로 미루어 할머님의 친정아버님 허**님은 동네에서 식자가 높은 분으로 친정의 살림살이도 제법 넉넉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같은 동네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열심히 하는 가난한 집안의 혼기가 찬 총각을 눈여겨보시고 우리 할아버지와 혼인을 시키셨다고 한다. 서당 공부라야 진도나 육지에서 들어와 농한기나 주로 겨울에 천자문을 가르치는 임시 서당 이였지만 공부할 기회가 적은 섬에서 학문을 익히는 유일한 기회였을 것이다. 아마 그런 친정아버지 덕분에 어깨 너머로 한글을 익히시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할머니는 누덕누덕한 언문 이야기책을 여러 권 가지고 계셨으며 그 재미난 이야기에 할머니만의 독특한 이야기 풀이가 더 하여지면 얼마나 재미가 있던지. 그래서 우리 집 좁은 할머니의 방은 동내 조무래기들의 이야기 듣는 공간으로 하루도 한가할 틈이 없었다. 들어도 또 들어도 재미난 옛날이야기 호기심에 초롱초롱 빛나는 눈망울들이 아직도 그 이야기의 대부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가난한 농부의 혹을 천금을 주고 사간 도깨비 이야기/

장가가지 못한 나무꾼이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고 나서 결혼한 이야기/

지네 처녀와 지렁이 총각의 사랑 이야기/

천년 묵은 꼬리 아홉 달린 여우 이야기/

나쁜 관리를 혼내주는 박문수 박 어사 이야기/

 

모든 이야기가 다 기억나지 않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보따리는 끝이 없었다.

덕분에 유년 시절은 수많은 상상력으로 꿈을 키우느라 결코 불행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은하수를 바라다보면 저절로 견우와 직녀 그리고 오작교를 만드느라 머리가 벗겨진 까막

까치가 떠오르곤 했다.

 

 

할머니의 조도면 여미리 당집에 대한 구술

 

할머님의 이야기 중에 나이가 들도록 까지 많은 의문으로 자리 잡고 있던 우리 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내 고향은 진도군 조도면 여미리다. 초등하교 다닐 때만 해도 무려 60여 호의 초가집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평화롭게 고기잡이를 해왔고, 거친 밥이지만 굶지 않고 오손도손 살아 온 제법 괜찮은 마을이었다. 선착장에서 바라보면 비록 북향을 한 마을이지만 그 생김새가 마을 이름처럼 그렇게 고울 수가 없다. 앞 바다는 북쪽 바다 건너에 옥도(玉島)가 있어서 태풍을 피할 수 있는 지형이고 뒷산은 상조도(上鳥島)에서 가장 높다고 생각되는 돈대봉이라는 산이 있고 마을 좌측엔 온갖 나무가 우거진 당산 숲이 있다. 수령을 잘 가늠하기는 어려워도 동네 어른신들 이야기로 아마 삼백년도 더 되었을 거라 하셨다. 아름드리 동백나무는 겨울이 지날 무렵이면 빨간 동백꽃이 만발하게 피워주었고 그 꽃을 빨아 먹고 사는 동박새의 모습을 보면서 어린이들도 다디단 꿀물을 빨아 마셨으며, 뻘뚝나무(보리수)는 달콤한 열매를 풍성하게 제공했다. 그리고 가장 크고 굵은 팽나무와 잎이 넓은 아열대성 나무들은 원시림에 가까웠다. 그 숲 가운데에 마을을 지키는 서낭당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 당(堂)숲은 출입이 제한되는 장소라서 그 귀한 나무숲이 오래도록 잘 보전 되었으리라.

 

당 숲은 어린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문론 당집 가까이는 가지 않았지만 해가 하루 종일 잘 비쳐주어 겨울에도 따뜻하여 자치기 놀이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었다. 때문에 시간만 나면 당 숲 외곽의 비교적 넓은 공터는 자치기놀이와 술래잡기 놀이 장소였다. 당 숲 나무는 자르거나 땔감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어른들의 당부를 마음속에 잊지는 않았지만 자기치 용 나무와 팽이 재료로 사용되는 동백나무의 유혹은 견딜 수가 없었다. 적당히 굵은 동백나무 가지를 베어 어른들 몰래 팽이를 깎곤 했지만 그 정도는 어른들도 모른 체하셨다. 다만 팽이를 깎아도 나무 부스러기는 부엌 아궁이에 들어가지 않도록 탈탈 털어 당 숲에다 되 갖다 버렸던 것을 기억한다.

 

개구진 어린 마음에 늘 궁금한 사실은 우리 마을 지키고 있다는 스님을 모시는 당신(堂神)에 대한 호기심 이였고 자랄수록 더욱 커져갔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와 둘이 당집을 살펴보기로 하고 살금살금 당집 가까이 기어들어갔다.

당집은 돌담으로 둘러친 두어 평 남짓 조그만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고 돌담 안에 초가집이 있었다. 당집으로 들어서는 돌담 대문에는 항상 두터운 새끼줄에 흰 천 조각을 꼬아 만든 금줄이 걸려 있다. 스님의 혼령이 사신다는 당집은 항상 문이 닫혀 있었고 그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려 노력했지만 구멍이 숭숭 뚫린 창살 사이로는 어렴풋 보였고 한 번도 제대로 본적이 없었다. 아마 그 당집에는 수염을 휘날리며 승복을 입은 신령이 한손에 구불한 지팡이를 들고 눈을 부릅뜨고 누가 들어오나 지켜보고 있으리라.

당집은 높은 바위 벼랑이 병풍처럼 늘어 선 구석 가장 은밀하고 음침한 곳으로 기억된다. 당집 옆에는 커다란 썩은 고목이 바위 절벽을 기댄 채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높이는 약 3미터를 넘었으며 나무는 원형의 모습이 아니라 쪼개진 상태로 보아 본래 나무의 3분의 1이나 4분의 1 정도 남은 부분의 넓이만 하여도 약 2미터 이상은 되어 보였다. 여미마을 어디에도 발견할 수 없는 거대한 나무의 잔해였다. 추정해 보면 그 나무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그 둘레가 어린이 6-7명이 안아야 될 정도의 둘레기 약 7-8미터는 되었을 성 싶었다. 이렇게 큰 나무가 당 숲에 있었단 말이다. 그 사실이 너무 궁금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 기어코 할머니께 당에 들어갔던 이야기와 궁금해 하던 썩은 고목에 대한 이야기를 졸랐다.

할머니께서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아가! 당집 가까이 가면 안 된단다. 당 신령님이 노하시면 마을이 화를 당하게 된단다.”

 

한참을 생각하시던 할머니께서 옛 기억이 떠오르는지 당집 옆 나무에 대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아가!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네가 태어나지도 않고 이 할머니도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란다. 할머니도 할머니의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라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구나.

그러니까……. “

아마 지금부터 약 200년 인지 400년 더 오래전에 우리 마을엔 가뭄으로 밭농사가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소나무 껍질과 칡뿌리를 캐먹고, 바닷가 톳을 캐서 삶아 먹으며 어렵게 살던 시절이 있었단다. 먹지 못해서 배고파 퉁퉁 부은 사람들이 힘이 없어 굶어죽고 돌림병까지 창궐하여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육지 흉년이 들면 바다도 흉년이 드는 법이라 고기잡이도 신통치 않아 조도에서 더 먼 바다로 닻배를 타고 조기잡이 갔던 어른들이 풍랑으로 스무 명도 더 죽었단다. 그 시절 얼마나 어려웠겠니? 온 동네 집집마다 초상집이 아닌 곳이 없고 통곡소리는 이집 저집에서 울러 퍼지고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마을에 떠돌이 스님 한 분이 들어와서 이 마을의 참사를 목격하고는 동네에서 제일 어른의 집을 찾아갔더란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이 마을은 용왕님의 노여움을 받았으니 그 사연을 말하면 해결할 방법을 알려 주시겠다”고 말씀 하셨단다.

여미리 마을 촌장님이 여러 생각을 하시고 나서 말씀 하시기를 약 반년 전 우리 마을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셨지. 너도 알 것이다마는 섬에는 물고기는 귀하지 않았지만 육지 고기를 먹을 기회가 드물잖니. 섬 마을 사람들은 기름기 섭취가 부족하던 중 어느 장마기간 많은 비가 쏟아지던 날 커다란 누런 구렁이 한 마리가 저 건너 옥도 섬에서 우리 마을 앞바다로 헤엄쳐 왔고 우리 마을에 살던 검은 구렁이 한 마리도 옥도의 구렁이를 만나기 위해 바다로 헤엄처 나가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발견했단다. 그리하여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는데 마을의 흉조를 알리는 요물이라고 죽이자는 사람도 있고, 큰 구렁이는 바다에서 나온 이무기라서 해코지 하면 마을에 나쁜 일이 생긴다고 서로 의견이 갈렸는데, 젊은 사람들이 고집을 부려서 배를 타고 나가 여미앞 바다에서 그 구렁이 두 마리를 낫으로 처 죽였단다. 죽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구렁이 고기를 마을로 가져와서 삶아 묵은 사람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스님께 말씀드렸지. 스님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보통일이 아니라 쉽사리 용왕님의 화가 풀리기는 힘들지만 자신이 구렁이가 나온 숲에 절을 짓고 염불을 열심히 하면 액운이 넘어갈 거라고 알려주셨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이 돈과 곡식을 정성껏 보태어 지금의 그 숲에 조그마한 초가집 절을 지어 스님의 불공을 도왔단다. 그 후 그 스님이 음식도 안 먹고 석 달 열흘을 기도에 정진하셨단다. 드디어 약속한 백일기도가 끝나고 여러 날이 지나도 마을 밖으로 나오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스님이 계신 절을 찾아 갔더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미 스님은 돌아가신 후였지. 마을 사람들은 스님을 후히 장사지내고 그 자리에 있던 절을 당집으로 바꾸고 우리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기 시작했단다. 그 후부터 당집에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초사흘까지 온 마을 사람이 힘을 합해서 오늘날까지 제사를 드리고 있지. 그러자 우리 마을에 다시 풍년이 들었단다.

 

조도면 여미리 당제사(堂祭祀)

 

어릴 적 기억에, 아버님께서도 마을을 대표하여 당 제주(祭主)로 선정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 1962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으로 기억된다. 마을회의에서 당 제사 제관으로 선정되는 것은 매우 엄격한 조건이 필요했다. 부정을 타지 않은 정결한 사람으로 몸에 부스럼도 없어야 한다. 제관으로 임명되면 당 제사 한 달 전부터 여자와 술을 금하고 장례식 등 부정한 곳에 출입하여서도 아니 된다. 남들은 설을 맞아 바쁜 초하룻날 새벽 미명에 마을 사람들이 깨어나기 전 은밀하게 230미터 높이의 돈대봉 당 샘을 찾아 가서 얼음을 깨고 차가운 물로 목욕을 하고,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을 길어서 당집으로 들어가 청소하고 당 제사를 준비해야 된다. 당 숲 주위에 왼쪽으로 꼬아 만든 새끼줄로 금줄을 치고 사람들이 왕래하는 낮 동안에는 당 숲의 금줄이 처진 곳 안에 있어야 하며 밤이 되면 새벽 2시경에 다시 당 샘으로 가 매일 목욕 후 물을 길어 3일 동안 정성을 다해서 당신(堂神)을 정성껏 모셔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대변을 보면 목욕을 다시 해야 되고, 소변을 보면 손을 반드시 씻어야 하기 때문에 먹는 량을 줄이거나 아예 3일 동안 아무것도 안 먹는 사람도 허다했다. 당제사의 제물로는 스님을 모시는 까닭에 육고기를 제외한 마른생선 찜, 쌀밥, 떡, 감, 사과 등 과실과, 도라지나물, 고사리나물, 콩나물 등 채식 위주로 차린다. 이렇게 제사를 모시는 중에 혹여 실수를 하거나 부정한 짓을 하면 최악의 경우 제주가 그 자리에서 죽는 경우가 있으므로 제주는 온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에서 제주로 선정되고 나면 집안 식구들은 혹시나 아버님이 잘못되시지나 않는지 그해 설은 숨죽이고 경건하게 보내야 했다. 이쯤 되니 당 제사에 제관으로 선정되는 것을 그렇게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마을에서 마련한 보리쌀 몇 가마의 대가를 받게 된다. 정월 초사흗날 새벽 2시경이 되면 마을 군고패가 당 제주를 맞이하려 풍악을 울리면서 당 숲으로 들어간다. 3일 동안의 외로웠을 당 제주(祭主)가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광경이 눈에 그려진다.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가족과 함께 설 명절을 보내지도 못하고 조상의 차례도 포기하고 오직 본인의 희생으로 온가족은 다가오는 춘궁의 배고픔을 면하게 된다. 군고패의 농악 소리가 온 동네를 쩌렁 쩌렁 울러 퍼지면 온 마을 사람들은 부스스 잠에서 깨어 마을 큰 길로 나와 제주를 맞이하려 가는 농악 패를 배웅한다.

 

마을사람의 정성어린 제사를 잘 받으시고 내년에도 우리 마을에 농사풍년, 물고기 풍년, 미역 등 해산물 풍년과 모든 사람의 건강을 기원했다. 그 동안 쳐있던 금줄이 걷혀지고 당집으로 행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행진하는 동안 군고패의 길 군악이 연주된다.

 

“ 덩 궁더 꿍”

“ 덩 더 궁더 꿍”

“ 덩 더 궁더 궁더 궁더 궁더 궁더 꿍”

“ 덩 더 궁더 꿍”

“ 덩 덩 덩”

 

제사를 무사히 마친 제주를 맞은 군고 패는 이제 제주를 모시고 가겠다고 당신(堂神)께 고하고 나서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당굿을 시작한다. 횃불이 훤하게 밝혀지고 당 숲에서 비교적 넓은 당굿 마당에서 신명나는 당굿이 펼쳐진다. 마지막으로 제사 음식을 골고루 조금씩 나누워 당 밑에 있는 바다에서 용왕님께 음식을 드리는 퇴성을 하면 모든 제사가 무사히 마치고 되고, 제주와 함께 다시 길 굿을 하며 돌아 온 군고 패는 마을 사람들과 합류하여 제사 음식을 골고루 나눠 먹으며 정월 초사흘날 아침 춤을 추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축제는 정월 보름까지 이어진다.

 

아버님의 고생 덕분에 우리 가족은 춘궁의 보릿고개를 그렇게 잘 넘기게 하시고는 음력 4월이 되자 돈을 많이 벌어 오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아버지는 투망배를 타고 멀리 칠산 바다로 조기잡이를 떠나셨다.

 

 

여미리 마을 당목(堂木)을 베어간 서양 오랑캐

할머님의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 고맙고 신령하신 당신(堂神) 덕분에 우리 마을은 매년 풍년이 들고 큰 불편 없이 오손도손 잘 살았단다. 그러던 어느 해. 아마 올해가 1965년 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음력으로 하면 병오년 음력 8월 15일(양력1816년) 팔월 한가위 대보름이 지난 다음날 새벽에 있었던 이야기란다. 아직 해가 뜨기 전 이였는데 아침에 바닷가로 나가서 갱번(갯가)를 살펴보던 동네 사람이 급하게 돌아와서 우리 마을로 산더미만한 크기의 시꺼먼 배 두 척이 들어오고 있는데 혹시 해적일지 모르므로 마을 사람들은 모두 피신하라는 통문이 돌았단다.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을 뒷산으로 모두 숨어야 했지. 그 중에 마을에서 나이가 많고 학식이 있는 어르신 몇 분만 마을을 지키기로 했다는 구나. 여미리 마을의 부속 형제 섬인 안갈미(내병도)와 바갈미(외병도)섬 사이에 정박해 있던 무섭게 생긴 큰 배가 우리 마을 포구로 들어왔단다. 그런데 배에서 내려진 댄마(전마)선에는 그동안 가끔 봐왔던 훈도시에 칼을 찬 일본 왜구도 아니고, 짱고리선(중국배)을 타고 다니는 중국 해적도 아니였다. 몸 생김새가 키는 구척이고 얼굴은 붉거나 희고, 검고 붉은색으로 치장한 옷과 괴상한 모자를 쓴 생전 처음 보는 저승사자 같은 사람 이였단다. 큰 칼도 옆에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승에서 온 야차 같았다는 구나.

 

어른 몇 분이 그들을 막아서며 우리 마을로 들어오지 말라고 손도 휘저어 보고 긴 막대기를 들고 때리는 시늉을 해보았지만 막무가내로 마을로 들어와서는 이미 피신해 주인도 없는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더니 당 숲으로 가더란다.

 

“참 당 숲 큰 팽나무 이야기를 해주려다가 잠깐 다른 이야기를 했구나.”

 

그 큰 팽나무는 말이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의 지팡이가 자라나서 싹이 나 자란 나무라고 하여 소원을 빌고 매우 신령하게 300년도 더 오래 전 부터 당목(堂木)으로 섬겨왔단다. 그런데 이상하게 생긴 오랑캐 놈들이 당 숲에 가서 300년을 마을과 함께했던 당 나무를 잘라 자기들이 타고 온 배를 고치고 나서 이틀이나 마을 사람들을 귀찮게 하다가 돌아갔더란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 마을 신령님이 가만히 있었겠니? 그 배가 저 아랫녘으로 도망가던 중에 신령하신 당신(堂神)의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바다로 가라앉아 버렸단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당 숲의 나무는 절대로 자르지 않고 아무리 땔감이 없어도 아궁이에 불을 때지도 않는 단다.

 

“아가, 그러니 함부로 당 숲에서 나무 가지를 자르지 말거라.”

“네~~~ 알았어라.”

 

조도면 여미리를 찾아 온 영국의 이양선(異樣船) (재구성)

 

할머니의 이야기는 단순한 옛 이야기도 아니고 전설도 아니란 사실을 할머님의 이야기가 잊혀갈 무렵 어른이 돼서야 겨우 그 이야기 대해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근거가 있는 역사의 한 토막을 구전에 의해 전설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1816년 2월 9일 영국의 에머스트 경이 인솔하는 중국사절단인 함선은 상하 두 갑판에 포를 무장한 쾌속 범선 알세스토호와 라이너호을 타고 영국을 출발하여 같은 해 8월 9일 청나라에서 유일하게 개항한 광저우의 백하(白河)에 입항하지만 사절단 이 외의 군인들은 너무 오랫동안 사절단을 기다릴 수 없어서 중국과 인근 나라의 해역을 조사하기 위해 조선으로 향한다. 바다를 건너 조선을 향하여 9월 1일 서해 대청군도(소청도)를 거처 9월 3일 비인만의 외연도에서 며칠을 머물다가 9월 6일 외연도를 떠나 남해를 향해하여 내려왔다. 두 척의 범선 알세스토호의 맥스웰 함장과 라이너호의 바실홀 함장이 그 주인공 이였다.

이들은 9월 7일 오후 4시경에 조도 군도에 도착하여 우선 안갈미섬(내병도)와 바갈미섬(외병도) 사이에 임시 정박하면서 안전하게 정박하며 조선인을 관찰할 장소를 물색하다가 옥도와 상조도 사이가 태풍을 피할 수 있고 비교적 수심이 깊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고 나서 병오년(조선 헌종12년) 음력 8월 16일 양력으로 1816년 9월 8일 오후 5시 경에 진도군 조도면 여미리 마을 앞바다 약 400미터 앞에 정박을 하게 된다.

 

첫째 날(1816년 9월 8일)

 

추석 다음날 마을 사람들은 이미 괴상한 전함이 우리 마을을 향해 들어오기 전부터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이 마을 포구에 닻을 내리기 전에 주민들 모두 이미 안전한 북쪽 숲이 우거진 당 숲으로 피신한 후였다. 우리 마을의 신령한 당신(堂神)이 마을을 지켜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시커멓고 괴상한 돛을 여럿 달고 있는 이양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마을을 호기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웅성이며 천리경인 듯한 물건을 눈에 대고 한참을 관찰하더니 조그만 댄마(전마)선을 이용하여 10여명이 선착장으로 노를 저어 들어오고 있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키질을 하다가 팽개치고 부엌에서 저녁밥을 지으며 군불에 생선을 굽던 것도 내팽개치고 모두 집을 비우느라 난리 법석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난리란 가…….”

“오메 저 놈들 봐 저승사자 같당께....”

“잘 보시오 저 놈들 모두 옆구리에 칼을 찼당께요”

“어서 당 숲으로 숨어야 된 당께…….

“어린이가 있는 집은 따로 마을 넘어 더 안전한 안골로 도망 하랑께.”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와 몇 분의 어른들이 그들이 들어오는 길목을 막아섰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두 손을 저으며 마을로 들어오지 말라는 시늉도 해보고 들고 있던 지팡이를 휘저으며 적대 감정을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선창에 내린 이양인들은 선착장에서 맨 처음 집에 들어가더니 기웃기웃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초가집 섯가래 등 집을 지은 모습에 관심을 보였으며 특별히 부엌을 오래도록 관찰하였다. 무쇠 솥과 유기 밥그릇 그리고 초벌구이 종지와 벽에 걸린 옻칠한 교자상을 살펴보며 여기저기를 만져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낚시를 위해 정리해 놓은 주낙바구니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마을 사람들이 알아들 수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키득 키득 웃기도 하는 걸 보아 저승사자가 아니고 사람인 것은 알아챘다. 어떤 놈은 부엌 뒷문도 열어보고 부엌 천장에 거미줄과 함께 지저분한 시커먼 검댕이를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리기도 한다. 그리고는 마당 구석에 있는 절구통과 키를 만져보며 매우 흥미로운 듯 종이에 적기도 하였다.

마을 촌장님이 먹을 갈아 종이에 한문으로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고 써 보이자 고개를 절래 흔들며 멍한 표정을 짓는 듯하더니, 눈치 빠른 대장 같은 한 사람이 다소 익숙한 표정으로 앵글랜드라고 말했지만 어른들은 그들이 무식한 놈들이라 필답하기를 포기했다. 오직 손짓으로 그만 그 집에서 나오라고 밀쳐 내자 못이기는 척 나오는데 어떤 놈은 추석 다음날이라 집안에 아직 음식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부엌 아궁이에 굽다가 내팽개친 생선 세 마리를 들고 나오며 동료들에게 나눠 먹으며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잘 처먹어라 이 오랑캐 놈들아…….

노인 한분이 동네로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길 가운데에 덕석을 깔고 새나구(새끼줄)를 꼬고 있는 척 하고 있었다. 무관심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들 중 한명이 다가왔다. 희죽 웃는 모습으로 보아 뭔가 말을 걸고 싶은 표정이라고 직감했지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처다 보지도 않았다. 그 사람이 다가와 오른 손을 펴서 손 한번 잡아 보자는 시늉을 하였으나 무관심해 하자 어깨를 살짝 감싸며 친한 척 하는 것이 아닌가. 가까이서 보니 눈알은 약간 새파랗고 머리카락은 붉거나 금색이며 코도 크고 얼굴에 수염도 다소 많아 옛날 어르신들의 이야기 속 손오공을 보는 듯 흉측했지만 악의는 없어 보였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 동안 본적이 없는 서양 오랑캐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 사람이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반짝 반짝하고 색깔이 고운 단추 같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닌가.

금돈이라도 되나 살펴봤지만 어디 별로 쓸모가 있어 보이지 않아 받자마자 무릎 밑에 팽개쳐버렸다. 그러자 자기들 담배를 한 대 불을 붙여 피우라는 시늉을 하였다. 까짓것 못 피울 것이 없지 않나. 담배라고? 끌 끌……. 심심하기가 우리 것에 비길 바가 아니지만 약간의 향은 좋은 것 같았다.

그들은 우리 마을 사람을 보며 신기해하고 있을 테지만 사실 우리도 그들의 모습이 신기하지만 혹시 모를 행패를 생각하여 무관심한 척 해야 했다. 우리가 그들을 달가워하지 않은 것을 눈치 챘는지 모자도 벋어 써 보라는 몸짓도 하고 신발도 벗어 보여주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과 친해보자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이 신고 온 버선을 힐끗 살펴보니 정말 좋은 천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을 노인 한 분이 모자를 만져보면서 큰 소리로 “좋다……. 겁나게 좋구마” 라고 말하자. 그들도 따라서 “호타”라고 말하며 손뼉을 치는 모습이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런데 난감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그들이 우리 마을 사람들이 숨어있는 당 숲을 가리키며 그 쪽으로 같이 가자고 손목을 잡아끄는 것이 아닌가. 당 숲에는 젊은 처녀들과 나이 든 아낙네 들이 있어 절대로 그곳으로 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것은 기필코 막아야 했으므로 손목을 쥔 사람의 팔을 휙 뿌리치며 움직이지 마라 “부동(不動)”이라고 외쳤다. 당황했는지 그놈도 자기들 말로 “페이션스 써”라 외치며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방금 주낙질을 마치고 노인들과 합류한 젊은 총각이 노인네 앞을 막아서며 똑같이 “페이션스 써”라고 되받아 소리쳤다. 그러자 그 놈들도 크게 놀라 두 손을 가볍게 흔들며 겸연쩍은 듯 소리치는 것을 멈추고 얼굴 표정을 바꿔 억지로 웃는 모습을 지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촌장 어르신이 이제 해도 지고 잠잘 시간(오후 8시) 이므로 빨리 마을 떠나라고 잠자는 모습을 하면서 코를 고는 시늉을 했다. 그들도 우리 동작을 이해한 듯 선창으로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휴 이제 가려는 모양이다 갈 테면 빨리 가거라. 청년 두 명이 서양 오랑캐들 배를 휙 하고 힘껏 바다로 밀어버렸다. 돌아가는 그 놈들이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잘 있으라는 뜻으로 받아드리며 마을 사람들도 빨리 가라고 두 손을 높이 흔들었다.

오늘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지만 지혜로운 촌장님과 나이 드신 노인들 덕분에 별다른 피해가 없으니 얼마나 다행이다. 이 모든 것이 신령하신 우리 마을 당 신령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당 숲과 안골로 피신했던 마을 주민들이 모두 돌아와서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촌장님의 간단한 설명에 이은 지시가 떨어졌다. 아직 저 양놈들의 배가 마을 앞바다에 머물고 있으므로 안심할 수 없으니 젊은 청년들은 번갈라 밤에 번을 서되, 이상한 징후가 있으면 군고 나팔을 크게 불어 마을 사람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정월의 보름달은 여전히 그 밝은 빛을 잃지 않고 있었고 이양선의 모습은 또렷이 관찰되었다. 선체를 밝히는 밝은 불빛은 밤이 새도록 꺼지지 않고 무섭도록 여미리 앞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둘째 날(1816년 9월 9일)

다음날인 음력 8월 17일 아침이 밝자 동네 사람들은 새벽밥을 급히 먹고 다시 산으로 숨어들었다. 지난해 같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추석을 맞아 마을 군고패의 지신밟기 놀이며 동네 여인네들의 강강술래로 온 마을이 들썩일 판인데 금년 추석은 우울하기만 하다.

 

서양 오랑캐 놈들도 아침밥을 먹었는지 어제처럼 댄마(보트)를 타고 10여명이 마을 앞 해변으로 들어왔다. 오늘도 촌장님과 건장한 남정네 10여명이 마을을 지키며 다시 그들과 마주했다. 어제 분위기로 보아 그놈들이 결코 우리 마을 사람을 해코지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마을 여기저기에 몽둥이와 쇠스랑을 숨겨두었다. 비상시에 최소한의 대항을 위해서였다. 그 들을 살펴보니 어제 동네 사람들과 만났던 얼굴이 보이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웃음을 보이면서 그들은 우리 마을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다정한 척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어제 보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대장이 마을 촌장님께 당 숲을 가리키며 그 쪽에 가보고 싶다는 몸짓을 하였다. 한사코 손을 저의며 만류했음에도 그들 일행은 성큼 성큼 당 숲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갔다. 과연 이들이 당 숲에 들어가서 무슨 짓을 하겠다는 것일까?

당 숲은 우리 마을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제신(祭神)을 모시는 곳으로, 평상시 출입이 제한되는 금지된 구역이 아닌가. 그들은 당 숲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이 약300년이 넘은 팽나무 당목(堂木) 옆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촌장이 그들의 앞을 막아서며 들어가지 말라고 강력한 몸짓으로 막았지만 그들이 우리말을 모르니 통할 리가 없었다.

그러자 촌장님이 당목(堂木) 옆 돌무더기 앞에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서낭당 제신께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제신님이시여 이 무례한 서양 오랑캐로부터 우리 마을 사람을 보호해 달라는 기도였지만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서양 오랑캐들도 촌장님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며 자기들 끼리 뭐라고 지껄이더니 대장은 더 이상의 행동은 마을 주민과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손짓으로 마을 뒷산을 가리키며 그 쪽으로 가자는 지시를 하는 것 같았다.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참 다행이다 당 숲 북쪽 끝에 마을 사람들이 일부 숨어있는 모습을 들키지도 않고 당집도 해코지를 당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힘이 센 마을 청년들 10여명이 그들을 안내하며 상조도의 주산인 돈대봉(도리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이 당부하시기를 양이(서양 오랑케)들이 섬사람들의 전 재산인 소를 탐낼 수가 있으니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그런 일이 없도록 막으라는 신신 당부를 청년들은 되새기면서 걸음을 옮겼다. 돈대봉 가는 길 산등성이에 평평한 잔디가 깔려 풀이 잘 자란 저토골 잔등을 넘어야 한다. 양이들은 저토골 오르는 길옆에 늘어서 있는 쨋밥나무에 관심을 보이며 마침 나무에서 떨어진 쨋밤(잣밤)을 먹어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이기도 한다.

마침 소 먹이는 애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마을로 내려간 까닭에 저토골 잔등에 소 몇 마리가 주인도 없이 말뚝에 메어 있는 모습을 본 양이들이 손가락질하며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대장이 마을 청년에게 소 한 마리를 자신들이 가지고 온 동전과 나중에는 권령귀나 천리경과 교환하자는 듯 옷도 벗어 청년에게 주는 행동을 하며 소고삐를 끌어 보이는 행동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이 무얼 원하는지 대번에 눈치 챌 수 있었지만 고삐를 낚아채고 고개를 저으며 거부의 몸동작을 격하게 하자 그들도 더 이상 보채지 않았다.

 

약 40여분을 걸어가며 목이 말라 돈대봉 당샘에서 목을 축이고 산을 더 올라 중 절터에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야 산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정상에 오르자 새떼가 하늘을 날다 바다에 내려앉은 듯 조도군도의 섬들이 한눈에 조망되었다. 가을의 맑은 바람과 상쾌한 공기가 그들도 극히 반가운가 보다.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원더풀……. 원더풀…….” 탄성을 지른다. 아마 이곳이 무척 맘에 드는 것 같았다.

대장이 기다란 천리경을 눈에 대고 사방을 조망하기 시작했다. 부하 중 여러 명은 조선의 북쪽 진도 본섬을 가르치고 나서 북쪽에서부터 서남해 그리고 동쪽까지 눈에 보이는 조도군도의 섬을 관찰한 후 그림책에 그리기도 하고 그림위에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다.

 

아! 가을의 맑은 날씨 덕분인지 멀리 남쪽으로 제주의 한라산이 구름위로 선명히 보였다.

 

점심 먹을 시간이 이미 지난 까닭에 그들도 배가 고팠는지 내려가자는 동작을 보이자 동행한 군인들이 “예 써” 하며 모자에 오른손을 펴서 붙였다.

마을로 내려오자 마을 촌장을 비롯한 아까 보다는 더 많은 남정네들이 당 숲 아래 갯가 옆에 홀로 서 있는 커다란 팽나무 그늘에 자리를 깔고 음식을 준비하여 돈대봉으로 올라간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광목천에 감물을 먹인 풍선(風船)의 돛을 깔았고 그 위에 교자상 몇 개, 상 위에는 추석 때 만들어 보관중인 송편과 섬에서 귀한 흰쌀밥, 구은 생선, 도라지나물, 콩 톳나물, 돼지고기 편육 등 섬에서 차릴 수 있는 음식을 충분히 준비한 것이다. 상차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구마를 이용해 담근 고구마 막걸리도 한 동이 준비되어 있었다. 양이들은 장만한 모든 음식을 골고루 먹어보며 즐거워하였다. 그 들과 여미리 마을 주민은 어느덧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서서히 걷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식사 중에 촌장님께서 자신의 허리춤에서 담배쌈지를 꺼내어 잘 썰어진 담배잎을 곰방대에 비벼 넣은 후 부싯돌로 담뱃불을 붙여 몇 모금 쭈욱 빨고 나서 서양 오랑캐 대장에게 손을 내밀어 피우라고 권했다. 그러자 대장은 쭉 빨아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보이더니, 자신들의 권련인 말이 담배를 촌장님께 다시 건넸다. 촌장님은 기세 좋게 힘차게 빨더니 긴 연기를 후우하고 길게 뿜었다.

장만한 식사와 막걸리를 맛있게 마신 것에 대한 보답 이였는지 양이(서양오랑캐)들은 그들이 가지고 온 유리병에 담긴 맑은 술을 개봉하더니 동네 노인들에게 한잔씩 돌렸다. 촌장님이 한 모금 마시더니 병을 이리 저리 살펴보시고는 큰 소리로 “좋다” 라고 크게 외쳤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여기저기서 “좋다”를 연발했다. 그 술은 적당히 도수가 있고 은근한 산머루 냄새가 입안에 감돌았다. 서양 오랑캐 대장이 촌장님의 잔에 자신이 들고 있는 유리잔을 살짝 부딪치자 경쾌한 소리가 쨍~~ 울렸다. 양이 대장도 우리말을 흉내 내며 “호타”라고 외쳤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너무 웃겨서 허리를 감아쥐고 여기저기서 킥킥 웃어댔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대장이 수첩과 새의 날개깃이 달린 붓을 들고 촌장님께 다가왔다. 글쓰기를 할 모양이다. 그러더니 자신의 모자를 벗어 손가락으로 가리키다가 촌장님이 쓰고 있는 갓을 가리키며 “왓” “왓” 이라고 묻는 표정을 지었다. 촌장님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지네들 모자와 우리가 쓴 갓이 같은 용도라는 뜻인지? 아니면 서로 바꾸자고 하는지, 이름이 무어라고 묻는 것인지 분간하기는 어려웠지만 짐작하건데 들리는 그들의 말은 분명히 “갓”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촌장님은 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신의 갓을 만져 보이며 “갓”이여 라고 말해줬다. 그러자 몇 번을 더 촌장님의 갓을 가리키며 “갓?” “갓?” 촌장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는 부하를 시켜 뭐라고 적었다.

그리고는 여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팽나무를 쳐다보며 아까와 똑같은 방법으로 물었다 “트리?” 촌장님은 틀린 것은 무엇이냐는 뜻으로 이해하고 “그라제 갓하고는 틀린것이제” “팽나무” 여 이놈들아.

두어 번을 서로 대화를 하다 보니 아무리 모르는 말이라도 이렇게 묻고 답하면 되겠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여러 가지를 줄기차게 물어왔다.

에라, 양놈들에게 조선말 좀 가르쳐주지 뭐 까짓것…….

 

“차렷(부동), 물, 머리, 눈, 입, 코, 쒸엄(수염), 쎄 .쌔바닥(혀), 귀, 이빨, 띄(잔디), 좋다, 흙, 칼, 적삼, 정강이, 보선, 행전, 물(독), 담배쌈지, 부채, 닭, 소, 돼지, 댄마(배), 도팍(돌石), 가시나(처녀), 머이마(총각)……. 등 아마 100여 마디도 더 말을 한 것 같다.

 

더러는 알아듣고 적기도 하고 더러는 못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기도 했다.

한동안 만국의 공통 언어인 몸짓으로 별 불편 없이 몇 시간을 그렇게 양이들과 지내다 보니 벌써 해가 서산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촌장님은 어제처럼 이제 잠잘 시간이 되었으니 돌아가라고 두 손을 모아 자는 시늉을 하면서 코고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그들도 알아듣겠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바다 가운데 있는 본선을 향해 기를 흔들었다. 본선에서 댄마(작은 전마선)가 도착하자 그들은 모두 옮겨 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배에 오르려던 대장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촌장님을 향해 오른손 바닥을 바르게 펴고 까불거리며 불러 세우더니 자기 옆구리 혁대에 차고 있던 권령귀(나침판)를 촌장님께 건네주었다. 점심 먹을 때 촌장님이 신기해하며 자주 만져 보았던 것을 기억하고 선물로 주고 가는 듯 했다.

청년들이 그들의 전마선을 바다를 향해 힘껏 밀었다.

그리고 안도감과 아쉬운 손을 흔들었다. 그들도 손을 흔들어 답을 하였다.

그들의 배는 그날 밤을 보내고 다음날 새벽에 우리 마을을 떠나 제주가 있는 아랫녘 바다로 멀어졌다.

 

여미리 허영지님의 구술(口述)

 

할머니께서는 이야기를 마치시고 쌈지에서 담배를 꺼내시더니 다 쓴 공책을 네모나게 잘라 침을 발라 대롱처럼 말아 만든 몰초(담배)에 불을 붙이시며 한숨 섞인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 내셨다.

 

“근디 말이다 그 때 서양 오랑캐 대장이 주고 간 권령귀(나침판)를 동네에서 그렇게 귀하게 전해 오며 한 50년 후까지 마을 사람들이 조기잡이를 위해 칠산 앞바다로 연평도로 다녔는디……. 어느 해 그 투망배가 파선되어 어부들과 더불어 바다로 실종되어 부렀단다.”

 

“ 참 내 정신 봐라 중요한 이야기를 까먹을 뻔 했구나. 그리고 말이다 그 서양 사람들이 떠나간 후에 마을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마을을 둘러 봤는디……. 아 글씨! 그놈들이 어느 사이에 우리 동네 당 숲의 그 오래된 당나무를 베어간 것을 뒤늦게 알았다는 거여.”

 

“하지만 당 신령님이 그렇게 심(힘)이 없는 그런 분은 아니였제……. 그 놈들이 떠나가고 며칠 후 큰 태풍이 불었지야. 원래 태풍이 지나간 후에는 바다가 뒤집어져서 오징애(갑오징어)가 물위로 나오면 물속으로 다시 못 들어가서 막 갱번(바닷가)으로 떠밀러 오거든. 그래서 동네 청년들이 긴 대나무에 그물 쪽대를 만들어 오징어를 건저서 말리기도 하고 오징애국을 끓여서 먹곤 했는데, 그 때는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겁나게 많이 잡았지야, 하루 아침에도 지게 한 바지기는 너끈했제.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 새벽에 우리 동네 총각들이 마을 북쪽에 있는 목 너머 갱번으로 오징애 건지러 갔더란다. 그런데 웬 외국 배가 사고를 당했는지 양코백이 놈들의 대구(시체)가 갯가로 여럿 밀려와 있었단다.”

 

“당 나무를 베어 갔으니 천벌을 받은 거여. 암 그렇고말고.”

“아마 지금도 그 때 묻어준 독집(돌무덤)들이 목 너머 해안가에 몇 개는 남아 있지 야.”

 

그랬었구나. 그랬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 때 진지하게 잘 들을 것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그 날처럼 창문 너머 까만 밤하늘에 흰 눈이 소복이 내린다. 끝.

 

2016년 1월 22일 진도 조도 여미인 박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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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소개)

- 성명 : 박인태(朴仁太), 아호 麗尾(여미)

- 태생 : 전남 진도군 조도면 여미리 1213(천안시 거주)

- 시인(2007), 공무원

- 저서 : 시집 “당신이라는 나(2008년), ”징하게 좋은 사랑(2015년)“

- 활동 : 팔도문학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천안문인협회 이사 외

- 전래 이야기 화자 : 허영지(박인태의 조모) 사망

 

(참고 문헌)

- 10일간의 조선항해기(김석중 역)개정판, 발행사 삶과 꿈

- 조선왕조 실록 및 일성록, 진도군 문화원 자료 등. 





 

 

진도군 조도면 여미리 소재 서낭당(堂) 이야기(편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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