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추억

2010. 5. 15. 10:06나 그리고 가족/수필(자작)

 

한여름 밤의 추억


모깃불 연기 자욱한 여름밤


마당 한쪽에 밑이 빠진 양동이 화덕이 연기를 사정없이 자욱이 뿜어대고 뻘벌 땀을 훔치면서 어머니는 금방 밀어낸 밀 칼국수 가락을 애호박이 팔팔 끓고 있는 양은 솥 안으로 살살 쏟아 붓고 계신다.

재빨리 아직도 불길이 맹렬한 솔가지에 물을 살 살 뿌려 불을 조율하신다.

푸시식 푸시식 화덕속의 불기운이 사그라지면서 하얀 수증기가 밤하늘로 흩어진다.

덕석도 아니고. 밀짚으로 성글게 만들어진 거적을 마당에 깔고 온 식구들이 까만 하늘아래 둥그렇게 앉았다.

눈이 매울 만큼 자욱한 생쑥 태운 모깃불이 온 마당을 가득 채운다.

후루룩 후루룩……. 밀가루 국수는 어찌 그리도 목구멍 속으로 잘 넘어가는지, 솥에 남은 것 좀 더 퍼 묵고 싶지만……, 꺼억 배 꼭지가 동네북이 되었다.


“에헴……. 아따! 인자 저녁 잡수신 당가요?”

사맆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이웃집 아제가 저녁 인사를 했다.


아부지는 사맆쪽을 바라보며

“동상! 저녁 안했으면 조끔 뜨고 가시게 워여 들어 오랑께”


“아니여 라아……. 배가 터지게 지금 묵고 나온 참이요.“


뭐! 먹을 것이 그렇게 많아서 배터지게 묵고 나왔다고 그란 데야…….

어린 내 맘속에도 어른이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더위가 물러가는 시간이면 밀대로 짜여진 거적이 주는 등짝에 느껴지는 그 시원한 청량감은 돈대봉 당 샘물로 등목 하는 것에 비길 바가 아니다.

누워서 바라보는 북두칠성의 국자 모양도 뚜렷하고 이야기책에서 읽은 별자리 모양을 찾아보는 즐거움도 대단하다.

무서운 옛날이야기를 해주시던 할머니께서 갑자기 오른 손 가락을 저 쪽 옥두 섬을 가리키신다.

뭔지 모를 불길한 느낌과 함께 차가운 한속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기처럼 관통하며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진짜였다. 분명히 여름밤에 보면 옥두 섬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바구지(바구니) 만한 도깨비불이 빙빙 돌면서 번쩍 번쩍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누구의 혼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이 땅을 헤매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때 

밖에서 놀다 들어 온 막내 동생 놈이 뭣을 급하게 처먹어서 그런지 갑자기 불록한 배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며 사정없이 울기 시작했다.

금방 묵은 밀 국시를 토하면서…….

할머니께서 등짝을 두드리고 집게손가락을 목구멍에 집어넣어 우웩질도 시켜보고 엄지 손가락 끝을 실로 묶고서 바늘로 폭 찌르기도 하셨다.

어지간하면 우 욱……. 하고 트림을 하면서 속이 내려가는 것이 보통이련만 이번엔 정도가 심한 모양이었다.

어머이는 빨리 가게 가서 까쑤명수를 사오라고 하신다.

달콤하고 가슴이 팍 뚫리는 까수명수……. 침이 넘어간다. 내가 묵었으면 좋것다. 까수명수 병뚜껑을 쪽쪽 빨면서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 분위기가 보통 시끄러운 것이 아니다.

동생 놈은 낯바대기가 새파랗게 되어가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아 보였다. 더럭 겁이 났다.

으짜으면 좋으까? 다리가 후들 후들 떨린다.


그때 유재(이웃) 아짐이 오셨다.

쑥물과 향물을 담은 쪼빡(바가지)과 함께 정재(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나오신다.

그리고는 큼직한 식칼로 동생을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고 하는 시늉을 하시면서 쪼빡을 두드리며 알 수 없는 주문을 열심히 외우기를 오랫동안 하신다.

"훱쎄……. 훱쎄……. 물러 가거라!

오다가다 엥긴(붙은) 귀신 밥 굶어 죽은 걸구귀신…….

타관 객지서 집 못가고 죽은 귀신 물러가거라 휍쎄…….

정든 집 보고 잡아서 집주위에 어른거리는 조상귀신……. 어린 자손 너무 이쁘다고 너무 뽀짝 보듬지 마시고 물러가시오……. 휍쎄……. “


얼마를 그렇게 주문을 외우시던 유제 아짐이 사맆를 향해서 정지 칼을 휙 던졌다.

쑥물 향물을 담은 바가지를 조심스럽게 들고서 사맆을 향해 걸어 나가셨다.

식칼은 정확히 사맆 밖을 향해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쑥물과 향물을 붓고 바가지를 식칼 자루위에 덮어 놓으시고는…….

“식은 밥 있으면……. 반찬 몇 가지와 조그만 재사 대자리 위에 한 상 차려 놓으시오.”

“후 우……. 인자 되었어라…….”


동생 놈은 언제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둥 벌써 새근새근 어머니 무릎위에 잠이 들었다.


정말 고마운 유재 아짐.


어제는 울 어머이가 막 욕하더니 오늘은 아짐한테 가서 귀신 물려 달라고 사정하고……. 그래도 뛰어와서 땀 흘리고 뭣이라 말도 없이 훠이 훠이 총총히 돌아가신다.


아따! 우리 아부지가 아짐네 안골 밭……. 쪼금 우리소로 갈아 줬으면 좋것어라…….


“오냐……. 알았다”


나는

꿈속에서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내 몸에 꼭 맞는 이쁜 지게를 하나 지고 조그만 바작이 지게 위에 얹어 있었다.

바작 가득히 알이 꽉 찬 진줄(바다 단맛의 해초)을 지고 유재 아짐네 마래 앞에 척 부려 놓았다.

아짐께서 진줄이 참 맛있게 보인다며……. 오히려 나에게 한 움큼 주셨다.

삐들 삐들 마른(덜 마른) 통통한 꼭지 진줄이 입안에서 까만 단물을 쏟아 주었다.

쩝 쩝……. 다디단 진줄을 원 없이 묵고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설마 꿈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