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진열용 시 쓰기가 시를 망친다

2014. 9. 5. 13:04살다보니 이런일이/시(詩)를 위하여

진열용 시 쓰기가 시를 망친다


                 글/개동(開東)

                   

시(詩)가 외면당하기 시작한 것은 이름만 시일 뿐 광고문구와 같은 뻔한 나열들, 미사여구의 조합 여기에 진열하기 위한, 보여주기 위한 시작(詩作)에서 비롯된다.

인터넷의 다양한 기능들이 긍정적인 부분도 많지만 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부각되는 것이 현실이다.

국내 대표적 포털사이트 중 하나인 [다음]만 해도 수백만 개의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가 개설되어 있고, 이들 카페와 블로그 대부분의 게시판에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시가 올려져 있을 것이다.


아직 시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시인, 문학 평론가들이 시에 대한 정의를 나름대로 주장하지만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뿐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는 아닐 것이다.

미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에드거 앨런 포의 “시란 미(美)의 운율적인 창조이다.”와 영국의 시인이자 문학, 사회 비평가인 매슈 아놀드의 “시는 인생의 비평이다.”가 현재의 대체적인 또는 포괄적인 정의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시에 대해 명확한 정의가 없다고 아무 소리나 형식에 끼워 넣으면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란 형식도 중요하지만 메시지가 없다면 그것은 이미 시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형식이 다소 서툴러도 메시지가 담긴 시가 형식만 갖춘 메시지 없는 시보다는 훨씬 낫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시들의 대부분은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이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단어를 남녀 간의 연애 정도로 한정시켜 격하시키고 있다.

아가페적 사랑은 오간데 없고 오직 에로티시즘(eroticism)적

 사랑타령이 홍수를 이룬다.
사랑이란 과연 남녀 간의 연애일 뿐인가?

사람살이는 없고 연애편지만 난무하는 것이 이들 시의 특징이다.

왜 사랑의 본질이고 실체인 나눔과 배려, 희생과 봉사는 뒷전으로 밀려나야 하는가?

이들로 인해 시가 훼손되고 화장실 낙서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창조는커녕 미사여구만 조합한 글들, 인생에 대한 비평은커녕 인생 자체가 없는 글들이 시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그것도, 누리꾼들의 호평을 받으며 인터넷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이런 시들은 형식은 있되 내용이 없는, 즉 메시지가 없는 것이 공통점이다.

어찌 보면 화장실 낙서 수준도 안 되는 이런 글들은 당장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미사여구의 조합에 익숙해진 독자들을 스포츠 면이 신문의 전부인 냥 착각하게 한다.

이는 순진한 독자들에게 시의 본질을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한 편의 시를 위해 고혈을 짜는 시인들의 노고를 모독하는 것이다.

이런 유치한 시들이 횡행하는 이유는 진실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겉치레 인사성의 댓글과 조회 수를 의식한 이들의 상업적(?) 글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시가 아닌 누리꾼들의 입맛에 맞춘, 감성에 호소하는 삼류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 나물에 그 밥인 연애편지는 그만 쓰자.

시는 가슴으로 쓰는 것이지 머리로 꾸미는 것이 아니다.

시상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잠시 쓰기를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

조급하다 보면 자칫 형식에 끼워 맞추는 내용 없는 시가 되고 습관화되면 시를 모독하는, 명함만 시인인 대열에 자신도 모르게 합류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 달에 한 편, 혹은 1년에 한 편을 쓰더라도 진열용이 아닌 진심을, 내 글을 써야 한다.

시인은 남의 입맛 맞추는 요리사가 아니다.


07/02/01

출처 : 개동의 시와 수필
글쓴이 : 개동시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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