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퇴고에 대하여

2014. 9. 5. 13:08살다보니 이런일이/시(詩)를 위하여

 

 

퇴고에 대하여


           글 / 개동

 

습작하고 있는 예비 작가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퇴고의 중요성, 필요성에 대해 필자의 졸작 한 편을 살펴가며 어떻게 퇴고가 이루어지는지를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퇴고란 그 자체가 곧 창작의 연속이다.

따라서 퇴고가 없는 시는 쓰다만 시가 되는 것이다.

또한 퇴고란 처음의 주제를 뒤집어 다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작한 작품을 다듬는 일이다.

어떤 이는 마지막 점 하나가 남을 때까지 퇴고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기성이든 신인이든 혹은 아마추어든 퇴고를 위해 얼마를 고민해야 하는지 먼저 아래 예문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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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윤동주)는 한 마디의 시어 때문에도 몇 달을 고민하기도 했다. 유명한

 

 

<또 다른 고향>에서

 

 

 

 

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라는 구절에서 '풍화작용'이란 말을 놓고, 그것이 시어답지 못하다고 매우

 

 

불만스러워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고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두었지만, 끝내 만족 하지를 않았다.”<현대시 200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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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다른 시어를 찾지 못해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지만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지를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필자도 나름대로 수차례, 혹은 수십 차례의 퇴고를 거듭해 보지만 항상 만족하지 못함은 어쩔 수 없는 한계라 생각한다.

합평회(합동 평가회)라는 것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퇴고를 거듭했으나 자신의 글에 대해 다른 문인(기성, 신인, 아마추어 포함)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의견을 묻고 듣는 행사다.

글에 따라 혹독한 비판도 감수해야 하고 수정과 보완을 하는 작품들도 있는데 오늘 주제는 이 수정과 보완, 즉 퇴고에 관한 이야기다.

문제는 지적받고 수정과 보완을 한다며 무조건 다른 이의 의견을 삽입하거나 배열하다 보면 자칫 남의 시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고 처음 창작 의도와는 전혀 다른 시로 변해버릴 수도 있다.

개인적이든 합평회에서든 반드시 이를 주의해야 한다.

 

최근 모 문학회에서 실시한 합평회에 필자의 시 한 편을 제출했었다.

제목은 ‘봄’으로 주제는 봄이 오는 과정을, 소재(素材)는 갓 피어나는 사춘기 청소년에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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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드랑이

두세 가닥 잔털

행여 누가 볼세라

바지 앞 단 구박하는 머슴애의

가랑이 사이

초경 계집애의

부푼 가슴 솜털 같은 거웃에서

부는 따 순 바람

대지는 잠이 깨고

싹 틔우고 꽃 피우고.

 

(‘봄’ 전문, 합평회에 처음 올렸던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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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에 대해 참여한 시인들의 비평은 2행 ‘잔털’의 애매모호한 시어, 전혀 상관없는 3행 ‘행여 누가 볼세라’와의 이어짐으로 인한 오해의 소지를 지적했었다.

사실 ‘잔털’이라는 시어를 놓고 몇 날 며칠을 고민했으나 떠오르는 시어가 없어 그대로 제출했었다.

‘털’이라는 스스로 쳐 놓은 울타리 안에서만 시어를 찾으려 했던 결과이다.

시인들의 권고는 ‘잔털’을 ‘솜털’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퇴고를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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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개동

 

 

겨드랑이

솜털 벗은 두세 가닥 ---------(잔털을-솜털 벗은으로)

 

행여 누가 볼세라

바지 앞 단 구박하는 머슴애의

가랑이 사이

 

초경 계집애의

풋사과 반쪽씩 엎어놓은 가슴 -(부푼 가슴을-풋사과 반쪽씩으로)

                                                (최종 퇴고에서 ‘양’ 삭제)

솜털 내친 거웃에서 부는-------(솜털 같은에서-솜털 내친으로)

따 순 바람

 

대지는 잠이 깨고

싹 틔우고 꽃 피우고.

 

(3연 2행의 ‘양’이 있는 퇴고작, 최종 퇴고에서 ‘양’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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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선 원문의 ‘잔털’과 ‘행여 누가 볼세라’가 이어지는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연을 가르기로 했다.

그리고 ‘잔털’을 ‘솜털’로 고쳐 보라는 권고에 대해서는 애당초 ‘솜털’을 생각했으나 ‘솜털’의 이미지가 청소년의 겨드랑이와 거웃을 형상화하기는 너무 미약하다는 생각에 포기했었던 것이다.

궁리 끝에 ‘솜털 벗은.......’으로 바꿔 보았다.

‘솜털’을 벗었다는 것은 여린 상태를 벗어난 새로운 단계의 성장을 의미할 수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원문에 ‘솜털 같은 거웃’도 ‘솜털 내친 거웃......’으로 수정해 보았다.

권고(비평)를 수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나만의 시어를 창작해 원문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본 것이다.

 

그러나 1차 합평회 퇴고를 거친 작품에 또 하나의 지적이 따랐다.

3연 2행의 ‘풋사과 반쪽씩 엎어놓은 양 가슴’에서 ‘양’이 문제가 된 것이다.

양쪽 가슴을 의미하는 ‘양 가슴’이었으나 읽는 이에 따라 자칫 ‘......엎어 놓은 양/가슴’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왜 ‘양’이 들어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쪽씩’이라면 이미 복수이므로 ‘양’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양’을 삭제하고 창작 의도는 살리면서 합평회의 권고를 참고하되 필자만의 창의적인 퇴고로 마무리 지었다.

마무리 지었다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퇴고를 하다 보면 처음 주제와는 전혀 다른 시가 될 때도 있는 데 이는 퇴고가 아니라 다시 쓰는 것이다.

퇴고는 주제를 바꿔 새로 쓰는 것이 아니라 창작한 작품을 수정, 보완하는 과정이다.

이점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퇴고를 거듭해야 작품을 만드는 법을 알게 된다.

윤동주 시인처럼 한 마디의 시어 때문에 몇 달씩은 아니더라도 하나의 작품을 위해 최소한 며칠 정도는 고혈을 짜는 연습이 필요하다.

말머리에 언급했지만 퇴고는 그 자체가 곧 창작의 연속이지만 다시 쓰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마지막 점 하나 남을 때까지’ 퇴고를 거듭해 보자.

퇴고를 게을리 한 작품은 쓰다만 글이 되고 이는 곧 독자를 무시하는 행위이다.

명심해야 할 것이다.

 

 

07/02/16


 

출처 : 개동의 시와 수필
글쓴이 : 개동시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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