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독자가 이해하는 시가 명시이다

2014. 9. 5. 13:06살다보니 이런일이/시(詩)를 위하여

독자가 이해하는 시가 명시이다 / 開東(개동)



시(詩)란 읽는이에게 감동과 시인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는 명시(名詩)가 아닐까 한다. 물론 시 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의 문학이 글쓴이의 암호화된 일기가 아니라면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시가 되었든 수필이 되었든 혹은 소설이 되었든지 간에 일단 어느 매체를 통해서라도 발표를 하게되면 우선은 그 글을 읽는 독자가 있을것이고 또한 공식 비공식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자신의 글이 읽혀지기를 바라는 시인이나 작가라면 당연히 그럴것으로 알고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간혹 글쓴이 자신 말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 글을 쓰는 시인들의 글을 보게 되는데 이는 시인 자신이나 독자 모두 불행할 수 밖에 없다.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글을 왜 발표해야 하는지, 혹시 시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미사여구나 끼워 맞추어 놓은것은 아닌지 궁굼하기도 하다.

시와는 달리 수필이나 소설에 대해 재미와 감동 그리고 작품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읽어보면 누구라도 바로 알수가 있다.

소설과 수필을 독자가 읽을수 없을만큼 어럽게 쓰는 작가가 있을리 없고 그래야할 필요도 없을 것 이다.

어느 독자가 수필과 소설을 머리 싸매고 보겠는가?

그러면 왜 시는 쉬우면 안되는가?

그렇다고 쓰기를 쉽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시란 중학생 정도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져야 한다’ 는 글을 어디서 본 듯 하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필자는 지난 몇 달 동안 하루 평균 15시간 이상을 문학관련 사이트를 뒤지고 거기에 실려진 글들을 읽어왔다.

30여년 문학도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꿈을 이뤄 보고자 초등학생들의 밀린 방학숙제 하듯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있는 것 이다.

당연히 자습이다 보니 체계적이지도 전문적이지도 못함은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인들의 시를 탐독해왔는데 필자의 한계도 있겠지만 솔직히 태반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에 한문세대나 읽을수 있는 난해한 한자를 한글 삽입도 없이 뒤섞어 늘어 놓은 시도 꽤 있었다.

아무리 부족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시인인 필자가 태반을 이해할 수 없었다면 일반독자는 그 시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미뤄 짐작하고도 남는다.

물론 독자들 중에는 시에 대한 식견이 시인 못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 이다.

그렇다고 이해하기 힘든 시를 머리 싸매고 시험치루듯 보는 독자는 없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위해 고혈을 짤 때는 분명 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랄 것 이다.

그렇다면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


이 글을 누가 읽을지는 알수 없지만 읽는다면 그 중에는 시인도 있을 것 이다.

반론을 하는 사람도 공감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 이다.

필자는 문학평론가가 아니다.

단지 수십년 긁적거리다 얼마전 등 떠밀려서 시와 수필에 등단이라는 형식을 밟았을 뿐이다. 

그러면서 뭘 안다고 건방 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 이다.

맞는 지적이다.

사실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는 아직도 멀었다는 자책과 고백을 위함이다.

위에 열거한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글을 쓴 장본인이 필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자의 의도와는 다른 해석으로 읽히고 이해되는 것을 목격하고서 부터다.

한마디로 나만 아는 글을 써놓고 내가 의도하는대로 이해하길 바란 것 이다.

필자는 며칠전 ‘빛은’ 그리고 ‘고구마를 먹으며’라는 두 편의 시를 몇 군데 올린적이 있다.

그러면 아래 두 편을 차례로 살펴보며 필자가 썼던 의도와 독자에게는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짚어 보기로 하자.


<빛은>

 

 

 

 

 

 

 

 

 

 

 

태초에는 빛이

없었다

광은 누군가가 내지 않으면

저절로 나진 않는다

진주는 진주조개의

살점 이고,

사람이 없던 태초에는 별이

없었다. (전문)


‘빛은’ 의 전문 이다.

이 글을 쓸 때의 의도는 민중의 고통이 하늘에 올라 별이 되었다는 것 이었다.

‘진주는 진주조개의 살점’이라고 표현한 것은 진주의 가치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진주조개의 고통을 상징하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은 ‘누구든지 노력을 해야 성공한다’로 귀결되고 있었다.

필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다음은 ‘고구마를 먹으며’ 전문이다.


<고구마를 먹으며>

 

진흙공예 체험학습에서

아이들이 주무르다 만 

제멋대로 둥글길쭉한,

허리를 자르면

푸석 퍼석 하얀 찐밤가루가

구미를 당긴다

 

 

 

 

 

 

 

한 입 베어물다

두 개가 한 끼의 식량이었던 기억은

메인 목에 물을 붓는다

고구마는 밥이었고

생존이었다, 한 때

이 조차 달랑대던.

 

 

 

사실 이 글을 쓰기 직전 시장에서 일곱 개 들이 한 봉지에 2,000원하는 고구마를 사다가 쩌서 먹고 있었다.

한 입 베어 먹다가 가난의 대물림으로 너무도 가난했던 시절, 고구마 두 개가 점심이었던 때를

기억하며 목이 메었고 메인 목은 ‘고구마를 먹으며’라는 즉흥 졸작을 쓰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은 독자의 반응은 일부는 필자가 느꼈던 가난했던 시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한 편에서는 그 때를 회상하면서도 6.25와 가난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을 힐난하는듯한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댓글을 달아 놓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나무랄 수는 없다.

해석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일테니 말이다. 더구나 빌미제공은 그렇게 느낄수도 있게 얼버무린 필자의 오류임에야.

필자는 사실 문학을 전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해해서 외면당하는 시 보다는 유치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쓸 것 이다.

 

시를 쓴다는 것, 그것도 많은이들이 쉽게 이해하면서도 감동과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시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 인지, 수십년을 써 온 원로 시인들이 주옥같은 한 편의 시를 쓰기위해 얼마나 많은 고혈(膏血)짜야 했었는지 이제 조금이라도 이해가 될 것 같다.

독자들이 읽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시를 짓는 시인은 고혈을 짜되 이해하기 쉬운 시를 쓴다는 것 이다. 필자도 언젠가는 이런 시인의 대열에 끼고 싶은 희망을 가져 본다.

 

06/09/13

출처 : 개동의 시와 수필
글쓴이 : 군포아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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