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문경새재아리랑

2014. 11. 25. 11:25아름다운 세상(펌)/고운글(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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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아리랑박물관 유치나서 “상징성·접근성 측면서 적지”
문경새재아리랑
문경시 아리랑박물관 유치나서 “상징성·접근성 측면서 적지”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가 지난 4일 문경시 옛길박물관 앞마당에서 열린 ‘길 위의 노래 고개의 소리 아리랑’ 기획전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2000년에 결성된 이 단체는 전수자 송옥자씨가 꾸려가고 있다.

 
◆ 길 위의 노래, 고개의 소리 아리랑
우리 민족의 소리, 우리 민족의 DNA인 아리랑은 어떻게 역사를 만나고 문화를 이루었을까?
 
조선시대에는 임금도 아리랑을 즐겼다. 조선 말 황현(黃玹)이 지은 ‘매천야록’과,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지은 ‘한양가’에는 왕도 즐겼던 노래로 아리랑이 등장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나운규에 의해 ‘아리랑’이 영화로 꽃을 피웠다. 이때 영화 주제가‘아리랑’은 억눌린 시대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후에 아리랑은 항일 노래로 불렸다. 그리고 1930년대 격동기 중국 혁명가들을 취재한 미국의 작가 님 웨일즈와 그녀의 작품 ‘아리랑’ 주인공 김산에 의해 아리랑이 메아리치며, ‘광복군 아리랑’으로 이어진다.
 
이후 아리랑은 문학·음악 등 예술작품 전반으로 재생산되고, 학용품과 생활용품, 심지어 담배와 성냥에까지 스며들었다. 팔도강산 방방곡곡에서 아리랑이 불리고 한국인이 살고 있는 그 어느 곳에서나 아리랑은 존재하게 됐다.
오늘날에는 1953년 휴전회담 조인식 직후 북한과 유엔군이 동시에 아리랑을 연주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응원가로 불리면서 전 세계에 울려 퍼졌다. 우리민족의 노랫가락에서 지구촌의 한국 대표 브랜드로 자리 잡은 아리랑은 2012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됐다.
 
문경의 안태현 옛길박물관 학예사는 “아리랑은 우리 민족 구성원들의 내면 깊숙히 흐르는 대표적인 DNA다. 아리랑은 우리의 역사이고 문화이며 삶”이라고 아리랑을 설명했다.
 
◆ 60여종 3천600여곡 아리랑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은 강원 정선, 전남 진도, 경남 밀양 아리랑을 일컫는다. 정선아리랑은 단조롭고 유장하다. 가사는 구슬프고 애절하다. 섬마을 사람들의 삶을 관통하는 진도아리랑은 구슬픈 가락에 흥겨움이 담겨 있다. 밀양아리랑은 너른 들에서 일하는 고단함을 달래주던 농요로 빠르고 경쾌하다. 그래서 만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들이 광복군아리랑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그러면 이들 3곳의 지방을 제외하고 아리랑이 불리고 있는 곳은 없을까?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의 ‘문경아리랑의 정체성’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60여종 3천600여곡의 아리랑이 전승되고 있다.
 
문경에도 아리랑이 있다. 보통 아리랑이 아니다. 해외에 전해진 최초의 아리랑이다. 1896년 고종의 특사였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 박사가 펴낸 조선유기(朝鮮遊記)에는 ‘아라릉 아라릉 아라리오 아라릉 얼싸 배 띄워라/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 다 나간다’란 아리랑 채보 기록이 있다. 아리랑 가사에 등장하는 박달나무가 문경새재에 있었고, 대원군의 경복궁 중수 때 민초들의 상실감을 담아낸 노래가 문경새재 아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내용도 있다. 이 때문에 문경새재는 아리랑의 원조 지역이고, 문경새재아리랑은 국내 아리랑의 원조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잇는 연결로로 이용돼 고갯길의 대명사로 알려진 점에 주목해 아리랑고개의 원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최초의 아리랑 악보 채보자인 미국인 헐버트의 악보에 따르면 첫 사설이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라고 한 점으로 미뤄 아리랑의 원조는 문경아리랑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문경새재에 물박달나무/문경새재는 웬 고갠지/구비야 굽이굽이 눈물이 나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문경새재아리랑의 일부분이다. 아리랑은 길 위의 노래이고, 고개의 소리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500년간 한양과 지방을 잇는 연결로로 사용된 길이다. 최근 아리랑의 가사에서 사용된 고개의 그 고개로 추정된다는 근래 학계의 설이 부각되고 있는 이유다.
 
일부 학자들은 아리랑의 근대 민요적 성격을 형성하는 시점을 경복궁 중건(1865~1872) 때라고 설명한다. 김연갑 이사에 따르면 경복궁 중수 당시 문경새재는 인적·물적 관문이었고, 3남 지방에서 올라온 부역자의 수는 한양거주 남성의 4배에 달했다. 또 중수 공사현장에서 많은 도구가 사용되면서 자루로 사용된 문경새재의 박달나무는 집중적으로 공출 당했다. 이 당시 문경에 살던 사람들은 공출 물자를 새재를 넘겨 충주 나루까지 운반하는 데 동원돼 반감을 갖게 됐다. 이 때문에 문경인들은 자신들이 부르던 아리랑에 ‘문경새재 박달나무는 홍두깨로 다 나간다’는 어구로 상실감과 저항감을 반영했다. 이 아리랑은 전국에서 강제 동원된 부역꾼들에게 동변상련(同病相憐)의 공감을 얻어 전국으로 확산됐다. 결국 7년 이라는 경복궁 중수기간이 바로 문경아리랑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처럼 문경아리랑은 당시 경복궁 중수에 동원된 민초들에게는 신세타령이었다. 한 공동체의 불만이 쌓인 저항의 노래였다. 또 우리나라 첫 민중가였고, 고개 넘어 기다리고 있는 희망을 기대하는 희망가였다.

1916년 1차 대전 때 러시아군에 징집된 한국인들 중 독일군에 포로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 김 그레고리 등 한국인 포로들을 독일의 언어학자 겸 민속학자 알베르트 되겐(1877~1967) 박사가 인터뷰한 음반 2장과 당시 상황을 기록한 책에 아리랑이 나온다. 당시 조사된 자료들은 독일 훔볼트대학교 부속 베를린 라우트 아카이브에 보관돼 있다. 독일 라우트 아카이브의 소장인 델라니 교수와 고윤환 문경시장이 지난 4일 ‘아리랑’ 기획전 개막식에서 음원자료의 활용과 관련해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있다.
 
◆ “국립아리랑박물관 새재에 와야”
문경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립아리랑박물관 유치에 나섰다. 그것도 아리랑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앞둔 시점에서다. 문경시는 문경새재도립공원 초입인 문경읍 진안리 1만3천여㎡의 땅에 1천200억원을 들여 아리랑박물관을 건립해 아리랑 문화의 중심지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이다.
 
지역별로 아리랑 전수관은 있으나 한 자리에서 각 지역의 다양한 아리랑 노래를 보고 들을 수 있는 박물관이 없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문경시의 이 같은 계획은 학계에서 문경새재를 아리랑고개로 추정하고 있고, 조선시대 말 경복궁 중건 때 문경아리랑이 전국으로 퍼졌다는 근거에서다. 또 세계 최초로 서양에 소개된 아리랑도 문경새재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경시는 국립아리랑박물관 유치를 위해 새재에 아리랑비를 세우고, 민요와 아리랑연구서를 발간했다. 또 우리나라 최초로 문경새재아리랑을 오케스트라로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 2008년부터 해마다 문경문화원과 함께 ‘문경새재아리랑제’를 열고 있으며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의 활동도 활발하다.
 
지난 1월28일에는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국립아리랑박물관 왜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문경에 국립아리랑박물관을 건립해야 하는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정책토론회도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한국전통문화대학 최종호 교수는 “우리나라에는 60여종 3천600여곡의 아리랑이 전승되고 있지만 아라리와 아리랑의 본향은 문경새재”라며 “국립아리랑박물관의 입지는 문경새재 인근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접근성에서도 문경이 적지라는 주장이 나온다. 고성환 문경문화원 사무국장은 “문경새재는 한 지역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한국인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고개라는 보통명사이고, 지금도 전 국민이 즐겨찾기 접근성이 좋은 곳이기 때문에 아리랑의 허브에 적격”이라고 주장했다.

[인터뷰]김연갑 한겨레 아리랑연합회 이사
“아리랑 확산시킨 근대로서의 아리랑은 문경아리랑이다”
 
지난 30여 년간 아리랑을 연구해 온 김연갑(59)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는 ‘아리랑 메신저’로 통한다. 그는 아리랑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리랑의 후렴구 ‘아리 아리 쓰리쓰리’의 아리는 모든 아리랑의 기본이며, 아리랑은 아라리에서 나온 말이다. 강원도, 경상도에서 불리던 토속민요 중 하나인 아라리는 근대에 와서 어떤 계기로 새로운 노래로 재탄생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아리랑이다”
 
그는 이런 계기로 만들어져 불리던 노래가 문경아리랑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경복궁 중수 기간 대원군에 의해 고향부모를 두고 떠나온 아픔과 노동의 고단함으로 승화된 것이 문경사람들이 부른 아라리였다는 것이다.
 
그는 또 아리랑 고개가 문경고개라는 것도 확신한다고 밝혔다. 그것은 문경새재는 경복군 중수 이전에는 경상감사 등 특수한 사람들이 넘었던 고개였지만 경복궁 중수 기간 7년 동안에는 삼남의 신분을 초월한 하층계급이 넘었던 고개, 바로 고난의 고개였다는 것이다. 결국 아리랑고개의 노래는 문경아리랑인 것이다.
 
“아리랑의 어머니는 아라리가 분명하다. 오늘날 아라리의 1차 거점은 강원도 정선이라는 것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아라리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모든 아리랑을 확산시킨 어머니 아리랑, 근대로서의 아리랑은 문경아리랑이다”
 
정리하자면 아리랑의 어머니는 아라리이고, 아라리의 1차 거점은 정선이며, 아리랑의 근원지는 문경인 것이다.
 
그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아리랑을 위해 정부가 아리랑의 격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정선은 시원성, 진도는 토속성, 밀양은 동시대성, 문경은 변혁성 등 각각의 특성이 있는 만큼 우리나라의 아리랑을 위해 국립아리랑박물관을 설립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는 국립아리랑박물관의 장소로 천연의 좋은 스토리텔링이 있고, 지리적 접근성이 좋은 곳은 문경이 최적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정선, 밀양, 진도 등도 아리랑박물관의 장소로 적합하다. 하지만 문경은 새재고개의 기막힌 스토리를 갖고 있고, 접근성이 좋다. 문경은 박물관 유치를 제일 먼저 서두른 도시이고, 변혁성이라는 아리랑의 시대적인 의미가 있는 만큼 국립아리랑박물관의 장소로는 문경이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대구일보 4월16일 14~15면 보도 김형규 기자 kimmark@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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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유곡 산토끼
글쓴이 : 신상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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