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최강수군의 비밀 이순신의 사람들|

2014. 10. 20. 13:10아름다운 세상(펌)/고운글(펌)

스크랩] 최강수군의 비밀 이순신의 사람들| 모학당 공부방

모학선생 | 조회 253 |추천 0 | 2009.06.19. 23:53

역사추적


지난 2002년 첫 선을 보인 4천 톤급 한국형 구축함. 충무공 이순신 함으로 명명됐다. 이로써 구축함 시대가 열렸고 우리 해군의 제해력도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역시 우리바다를 지키는 잠수함, 잠수함은 이순신 참모들의 이름을 따서 정운함, 나대용함으로 명명됐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켜낸 이순신과 그의 장수들은 이제 대한민국 해군의 상징이 돼 있다. 최강수군 이순신 함대. 여기엔 이순신과 더불어 이순신의 사람들이 있었다.


최강수군의 비밀 이순신의 사람들


충무공 이순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물이죠.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절대 열쇠의 전력을 극복하고 해전에서 전승을 거둔 장수. 그리하여 마침내 나라와 백성과 역사를 구해낸 기적 같은 인물. 그러나 이순신의 빛나는 이런 업적들은 과연 그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 낸 것일까요. 이순신에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순신에게 열광하는 동안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이순신의 참모들이 있었습니다. 역사추적 오늘은 이순신과 함께 전라 좌수군을 최강 수군으로 이끌었던 이순신의 사람들을 만나보겠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한 달여 만에 벌어진 옥포해전. 이순신의 첫 출전이자 전승신화의 첫 신호탄이었다. 적선 26척을 격침시킨 최초의 해전 승리. 그러나 이순신의 첫 해전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다. 전쟁이 일어난 지 18일째인 5월 1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전라좌수영으로 장수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의 장수들이었다.1) 장수들은 하나같이 출전을 주장했다. 이순신 역시 장수들의 이같은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2) 그러나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부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조정으로부터 출전명령을 받은 상태였지만 이순신은 망설이고 있었다.


5월 3일 밤. 장수 중 한 사람이 이순신에게 단독 면담을 요청했다. 바로 녹도 만호 정운이었다. 정운은 출전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더 이상 출전을 미루다가는 후회하게 될 거라고 했다.3) 


조원래 교수 순천대 사학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전라좌수사와의 담판이죠.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5월 3일 녹도만호 정운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단독 면담을 요청한 배경은 실은 4월 30일자로 출전을 하도록 그렇게 계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라우수사 이억기 군(軍)이 합세해서 출동해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경우에는 이제 3일을 넘긴 셈이죠.”

 


정운과의 단독 면담 직후 이순신은 중의장 이순신을 불렀다. 중의장은 이순신과 동명이인이었다. 이순신은 그에게 출전 준비를 지시했다. 이순신의 출전결심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운.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임진왜란 당시 정운은 녹도진의 만호였다. 녹도진은 지금의 고흥에 있던 군사기지. 당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은 5관 5포로 이루어져 있었다. 행정구역은 5관과 군사기지인 5포. 녹도진은 그 5포 중의 하나였다. 전쟁 직전인 1592년 2월, 이순신은 휘하 부대 순시에 나섰다. 관할 지역을 둘러보는 이 순시에서 이순신은 특히 고흥지역을 중요시 했다.


조원래 교수

“전라좌수군의 전력, 전라좌수군의 승패여부는 고흥(지역)수군에 달려 있다. 그리고 뭐 이순신은 뭐 37세에 발포만호의 전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고흥수군이 차지하는 위치가 전라좌수군 속에서 어느 정도 위치,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충분히 전라좌수사 이순신으로서는 잘 알고 있었죠.”

 


특히 발포는 약 10년 전 이순신 자신이 만호로 근무했던 곳이었다. 만호는 종4품 무관벼슬. 당시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휘하에서 이곳 발포의 책임자로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당시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순시에 나선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군기검열은 치밀하고 꼼꼼했다. 발포에는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머물렀던 곳을 알려주는 비석이 하나 서있다. 1956년에 세운 기념비, 비석의 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지었다.


윤상은 씨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

“여기서 수군을 양성을 하는데 큰 공이 있을 뿐 아니라 또 나중에 임진왜란 때 여기서 훈련을 시켰던 병사들 수군들을 데리고 가서 휘하 장수들이 거의 다 여기 출신이라고 한다.”

 


여수 본영을 출발한 이순신의 순시는 9일에 걸쳐 진행됐다. 여도진은 지금도 5포 중에서 당시의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다. 사도진은 만호보다 한 계급 높은 첨사가 지켰던 곳이었다. 만호가 지켰던 다른 군사기지보다 규모도 크고 전략적으로도 더욱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사도진의 전쟁준비 상태는 허술했다. 이순신은 관련자들을 모두 처벌했다.4) 순시 초기 이순신은 녹도진을 먼저 찾았다.

 


만호 정운이 책임지고 있던 군사기지였다. 당시 녹도진의 성벽. 지금은 주택 담장의 일부로 남아 있다. 녹도진의 전쟁준비 상태는 완벽했다. 이순신은 정운을 극찬했다.5) 정운의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고 했다. 정운이 이처럼 전쟁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배경은 무엇일까. 임진왜란 발발 5년 전인 1587년. 고흥지역에는 이른바 손죽도 사건이 일어난다.


김덕진 교수 광주교대 사회교육과

“1587년 2월에 왜선 20척이 전라도 고흥 녹도진 앞 바닥에 출몰을 했고 이어서 손죽도를 점령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사건을 일반적으로 손죽도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손죽도 사건 이후, 조선 정부에서는 전라도 해안지방 방어책을 서두르는데 그 때 용력(역량)있는 장수 파견 문제가 집중적으로 거론됩니다. 그 과정에서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 정운이 녹도진 만호로 임명이 됩니다.”


손죽도 사건의 후속조치로 정운은 녹도 만호로 부임했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 완벽한 태세를 갖췄던 것이다. 정운 역시 이순신의 뒤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의협심 넘치는 선비이자 강개(慷慨)한 기개를 지닌 무장이었던 것이다.6)


조원래 교수

“두 사람이 선후배 간이긴 하지만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정운은 녹도 만호로 전라 좌수군 지휘부의 핵심 장수들로 서로 이제 성품이 비슷한 이런 두 장수가 만나서 임란 초기 해전을 치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순시 도중 이순신은 정운과 함께 술을 마시고 대포 시현도 함께 보았다.7) 둘의 관계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녹도 만호 정운. 그는 이순신의 심중을 가장 잘 헤아리는 장수였으며 이순신 역시 군의 선배인 정운을 가장 신뢰하고 의지했던 것이다. 이순신의 첫 출전은 바로 이런 정운의 진언에 의해 결행됐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이순신의 첫 출전. 그 첫 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녹도 만호 정운이었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것이 녹도 만호 정운의 영정인데요. 꼭 다문 입술에 날카로운 눈매, 전형적인 무장의 모습입니다. 정운 장군은 이순신보다 두 살 연상으로 무과 급제로 따지면 군 경력에서 6년 정도 선배가 됩니다. 자신보다 비록 계급과 직책은 낮았지만 이순신은 이런 정운을 전적으로 신뢰했고요. 그의 주장에 따라서 출전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이순신의 군 선배이자 최측근이었던 녹도 만호 정운. 그는 전장에서도 역시 빛나는 전공들을 세우는데요. 녹도 만호 정운의 활약상입니다.


정운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이순신 함대는 출전을 감행했다. 그리고 사흘 뒤 첫 전투 옥포해전을 치렀다. 옥포는 부산에 도착한 왜군들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승철 거제 향토연구소장

“왜적들은 이쪽에 정박해 들어와 마을에서 분탕질을 하고 불을 지르고 약탈할 때 이순신 장군 배가 이쪽으로 들어와 뒤에서 협공하던 항구가 바로 이 항구입니다.”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던 조선 수군에게 첫 싸움은 쉬운 해전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대형화기인 총통을 앞세워 왜군들을 압도했다. 판옥선 역시 적선에 비해 탁월한 전투 능력을 지닌 전선이었다. 옥포해전의 전과는 놀라웠다. 32척의 적선 중에서 26척을 격침시켰다. 전라좌수군은 전사자 없음. 부상자 한 명이었다.


이승철 연구소장

“이순신 장군 뿐 아니라 전라좌수영에 있던 휘하 장군들이 전부 다 이순신의 뜻과 같이 ‘갑시다. 우리가 경상도에 가서 왜구를 막아야 됩니다. 그 곳도 우리나라 땅 아닙니까’ 하며 나와서 싸웠기 때문에 승리를 했고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기 때문에 대승리를 했고 왜적과 싸웠을 때 가는 곳마다 전부 전승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옥포 해전 직후 이순신 함대는 합포 해전, 적진포 해전에서 연이어 승전했다. 첫 출동해서 일군 세 차례 해전 승리. 이것은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뀌는 중요한 계기였다. 옥포 해전에서의 정운의 활약은 특별했다. 조선후기 조선수군들의 훈련 상황을 담은 삼도수군조련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도 수군의 배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박형균 통영 충렬사 이사장

“여기 나오는 깃발은 전라도군이냐 경상도군이냐 충청도군이냐 또 이를테면 전라도의 좌수영이냐 우수영이냐 그러한 표시도 함께 있습니다.”

 


옥포해전 당시 녹도만호 정운은 후부장 즉 함대의 맨 뒤에 배치돼 있었다. 그런데 다른 전투선이 감히 적을 공격하지 못하자, 정운이 군사들을 독려 선봉으로 나섰다.8)


조원래 교수

“후부장에 배치했지만 장계에 여기저기 쓰여 있는 대로 정운의 경우는 자기 자신이 앞서 나서서 돌진하고 그만큼 큰 전과를 거두었고 그랬던 건 사실이죠.”


한산해전은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꾼 전투였다. 그 유명한 학익진으로 대승을 거둔 전투. 조선 수군은 한산대전에서 적선 59척을 격침시켰다. 왜군의 수륙병진전략을 완전히 분쇄한 전투였다. 정운은 이 전투에서도 큰 전과를 올렸다. 왜구 대선 2척을 격침시키고 포로까지 구출해 냈다.9) 정운은 조선 수군의 핵심 장수가 됐다. 1592년 9월. 조선은 이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부산포 공격이 감행됐다. 부산은 일본의 보급기지. 이곳의 적만 섬멸한다면 전쟁을 끝냈을 있다고 판단했다.


나동욱 부산박물관 학예 연구관

“임진왜란 당시의 부산포해전이 있던 곳이 바로 이 앞바다입니다. 1592년 9월 1일 가덕도를 출발한 이순신장군의 함대는 장림포와 다대포 그리고 서평포를 지나서 바로 절영도와 지금 현재 이 천마산 사이의 좁은 수로를 통해서 부산항으로 진격하게 됩니다. 부산지역은 바로 일본과 조선을 연결하는 보급기지의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당시의 조선을 침략했던 병선 중에서 470여척이나 되는 선단이 바로 여기 정박해 있었습니다.”


운명을 건 전면전이 벌어졌다. 부산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적선 120여척을 격침시켰다. 그러나 부산포해전은 조선 수군에게도 어려운 싸움이었다. 협공하기로 했던 조선 육군은 끝내 출동하지 않았다. 왜군은 육지에 포를 설치하고 포격을 가해왔다. 은봉전서의 부산기사. 정운의 죽음을 첫 문장에 적고 있다. 전투도중 녹도 만호 정운이 적탄을 맞았다. 그리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고흥군 녹도항에 쌍충사. 이곳은 손죽도 사건 때 21세의 나이로 전사한 이대원을 모신 사당이었다. 이순신은 이 사당에 정운도 함께 모실 것을 조정에 건의했다. 늠름하고 맑은 기상을 가졌던 녹도 만호 정운. 그의 진면목을 후세에 알리지 못한다면 매우 애통할 것이라며 배향을 건의했다. 정운의 전사를 두고 이순신은 국가가 오른팔을 잃었다며 애석해 했다.


조원래 교수

“정운의 부산포해전에서의 이와 같은 전사는 당시 임란초기에 전라좌수군 장수들 가운데서는 최초의 사례입니다. 그리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가장 아끼는 그리고 가장 가까운 선배이죠. 따라서 그 이후 전라좌수군의 정신전력을 강화시키는 데 있어서 녹도만호 정운의 장렬한 전사야말로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이순신은 직접 제문을 지어 정운을 추모했다.


‘믿고 의지했던 것은 오직 그대였는데 앞으로 어이하리. 진중의 여러 장수들 원통해하기 그지 없다오. 슬픔 머금고 극진한 정성 담아 한 잔 술 바치니 아 슬프도다.’


이순신의 최측근으로 그의 심중을 가장 잘 헤아렸던 정운은 이처럼 임진왜란 초기 너무나 일찍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임진왜란초기 정운 장군의 전사는 조선 수군의 큰 손실이자 이순신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은봉전서 부산기사에는 정운 장군의 전사 순간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 이순신이 돌아가려 하는데 정운이 나가 싸우려 했다. 이때 정걸이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고 돼있습니다. 이순신이 가장 믿었던 정운 장군의 전사현장에 있었던 정걸. 정운을 말렸다는 정걸. 그는 또 누굴까요.

 


전남 고흥군 포두면. 정걸이 태어난 마을에는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종가에는 대대로 간직하고 있는 가보가 전해져 온다. 그것은 바로 교지였다. 정걸과 정걸 가문에 내려진 교지. 교지는 모두 34점. 정걸에게 내려진 6점의 교지를 포함해서 정걸의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손자 때까지 내려진 교지다.


이상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정걸 장군이 이제 활약을 함으로써 정걸 장군에게 교지가 여러 가지 벼슬에 승진되는 과정을 볼 수가 있고요. 그 역시 아들의 경우도, 처음에는 정걸장군의 후광으로 벼슬자리에 나가지만 또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 다음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연차적으로 승진하고, 국가에 공을 세우는 그런 과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었던 1593년에 받은 가선대부교지. 놀라운 것은 이때 정걸의 나이가 이미 79세였다는 것이다. 


“거의 정걸장군은 이제 노령으로 인해서 은퇴할 때가 됐지만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의 중대한 일을 맞이해서 일선에서 수군장수로서 크게 활약을 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공로를 충분히 보상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팔순을 바라보던 정걸은 이미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사를 지낸 화려한 군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1593년 초에 행주대첩. 정걸은 이 때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0배나 많은 왜군을 맞아 행주산성의 조선군은 적의 공격을 하루에 7차례나 막아 냈다. 그러나 전투 막바지 화살이 떨어졌다. 이때 충청수사이던 정걸이 배 2척에 화살을 가득 실고 한강을 건너왔다.10) 행주대첩에 빛나는 승리를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순신과 정걸은 어떤 인연이 있을까?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던 당신 이순신은 47세였다. 당시 정걸은 이순신보다 31살이나 많은 78세. 난중일기에는 정걸이 조방장으로 처음 등장한다.11) 조방장은 장수의 자문역할이었다.


조원래 교수

“정걸의 경우는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이런 분을 조방장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죠. 따라서 조방장의 경우는 자기 휘하의 군사는 없는 셈이죠. 단독으로 주장인 현지 사령관을 돕고 자문하고 그런 역할을 했다고 봐집니다.”


이순신은 군 경험이 풍부했던 정걸이 필요했고 정걸 역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이에 응했던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정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무려 29번이나 나온다.


“임진왜란 전에 정걸의 경우에는 이미 병수사를 다 지냈습니다. 그리고 또 전라 좌수사를 임진왜란 전에 지냈고요. 뿐만 아니라 고흥 출신이고 그러면 해역의 사정이랄지 해전의 기술이랄지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그 원로 무장인 정걸로부터 배울 것이 대단히 많았을 겁니다.”


정걸 역시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한산해전에서는 왜군의 총탄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조정에선 정걸에게 상을 내려줄 것을 임금에게 요청했다. 팔순의 나이에도 전쟁에 참여하는 정걸에게 상을 내린다면 군사들이 감동할 것이라는 것이었다.12) 정걸은 실전 경험 뿐 아니라 전함과 무기 운영에도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제장명 교수 해군교육사 충무공리더십 센터

“정걸 같은 경우는 1555년에 있었던 을묘왜변, 달량포 왜변 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이 때 직접 정걸이 참전에서 전투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 때 왜구들의 전술 같은 것들을 봤을 것이고 그 당시에는 판옥선에 총통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우리가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런 것에 대한 경험 이런 것들이 아마 이순신에게 전수 되지 않았을까.”

 


정걸은 전쟁이 끝나기 1년 전 83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후 그의 아들과 손자로 전투에 참여 전사했다. 1년 반 만에 3대가 연이어 순국한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조방장을 지냈던 정걸은 당시 78세의 노장. 그러니까 이순신보다 무려 31살이나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순신보다 20년 앞서서 수군절도사를 지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그의 오랜 군 경험 특히 해군 지휘관으로서의 경험이 필요했던 것이겠죠. 그런데 정걸은 임진왜란 당시 주력함대인 판옥선을 개조하고 신무기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해집니다. 정걸이 이렇게 판옥선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그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선박건조 전문가이자 거북선을 만들 당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나대용장군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전쟁이 나기 하루 전 날 이순신은 거북선 총통시험 발사를 마쳤다.13) 거북선은 탁월한 돌격선이였다. 총통과 당파전술로 왜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바로 이 거북선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나대용이었다.


나갑주 나대용 후손

“충무공이 정읍 현감으로 계시다가 1591년 전라 좌수사에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서 거북선 연구를 하시다가 어느 정도 완성이 되어서 자기 종형제 치용하고 같이 여수 좌수영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이충무공을 만나게 되죠.”

 


고향 나주에서 전선을 연구하던 나대용은 스스로 이순신을 찾아갔다. 당시 조선의 주력 전함은 판옥선. 갑판 아래 선실에는 격군들을 배치했고 전투요원과 총통은 갑판 위에 배치했다. 전투요원들이 적에게 노출되는 구조였다. 판옥선의 하부 구조에 뚜껑을 덮고 옆을 막은 것이 바로 거북선이었다. 전투요원들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구조가 된 것이다.


정의연 남해역사연구회장

“그 당시 거북선은 나대용 장군이 판옥선을 개조를 해서 만들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거북선 내에서도 이러한 총통을 발사할 수 있는 아주 위대한 위력을 가진 무기라고 볼 수 있죠.”


적진 한가운데로 돌격해 들어가 근접 포격을 하는 거북선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왜군의 등선 육박전선을 막기 위한 장치도 있었다. 등 위에 쇠못을 꽂아 왜군들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순신은 이러한 거북선에 구조를 임금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정면에 용머리를 설치하여 포를 쐈으며 등에는 쇠못을 꽂았다.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승선 요원들의 안전도 확보했다. 그래서 적진을 마음대로 돌진해 들어갈 수 있었다.14) 4차 출전인 사천해전에서 첫선을 보였던 거북선은 이후 수많은 해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전라 좌수영의 선박을 건조하던 선소. 거북선 역시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이순신은 선박전문가 나대용을 군관으로 임명했다.


조원래 교수

“임진왜란 당시에 군관은 자발적인 종군이 대단히 많았고요. 특히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의 군관들의 역할은 엄청났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해전에 직접 뛰어들어서 수사와 함께 사력을 다해서 전투를 벌였다거나 나대용 같은 겨우는 전선감조군관으로서 군기수리제작, 전선수리 제작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고요.”

 


이순신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거나 직접 임명했다. 고흥군 대전마을. 고령 신씨 집안에서는 이순신과 관련된 소중한 유물이 한 점 전해온다. 이것은 이순신 친필 첩자. 이순신이 직접 쓴 임명장인 것이다.


신일호 신군안 후손

“신군안 의병장 첩자입니다. 의병을 모집해서 7개 읍의 의병들이 모여서 장수로 있으면서 공로가 지대하시고 이순신 장군께서 주신 친필입니다.”

 


신군안을 고흥의 의병장으로 임명하며 명령을 어기는 자는 직접 벌을 주어도 좋다는 임명장. 일심이라는 이순신의 수결까지 쓰여 있다.


이상훈 학예사

“현직에 있는 일선의 수령이라든가 지휘관이 직접 민간인에게 내리는 여러 가지 명령을 이르는 것이 첩자입니다. 그 중에 임진왜란 중에 첩자가 몇 개 있는데 신군안 첩자는 해상의병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서 이순신 장군이 직접 친필로 이 문서를 작성을 하고 말미에 자신의 수결을 놓았다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친필을 볼 수 있는 의미에서 또 한 가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

 


나대용의 능력을 알아본 이순신은 그를 선박건조 책임자로 임명했다. 나대용 역시 자신을 알아주고 신뢰하는 이순신을 만나 거북선이라는 당시 세계 최고의 전투선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제장명 교수

“나대용은 전략 전술에도 뛰어났습니다. 지략에도 뛰어나가지고 이순신의 여러 가지 전술을 보좌하는 참모역할도 수행을 합니다. 직접 전투에 참여해서 특히 제2차 출전, 사천해전 때 부상을 입어가면서 전투의 선봉에 서서 활약하는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나대용은 거북선이 처음 출전한 사천해전에서 부상을 입었다.15) 그 부상이 악화되어 전쟁이 끝난 다음 교동 수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대용을 기리는 비석. 거북선 형상의 돌이 떠받치고 있다.


순천부사 권준, 광양현감 어영담, 낙안 군수 신호, 보성 군수 김득광, 그리고 흥양 현감 배흥립과 동명의 이순신, 김완, 정운 등등 이순신의 전라 좌수군에는 이처럼 숱한 전공을 세운 참모와 장수들이 즐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대용과 정걸 등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 곁에 있었죠. 그 덕분에 이순신의 수군은 최강수군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임진왜란의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한 참모가 있었습니다. 군관 출신으로 나중에 전라좌수사가 되는 송희립 장군입니다.

 


전남 고흥에 재동서원. 여산 송씨들의 문중 서원이다. 나란히 모셔져 있는 두 형제의 위패. 송희립, 송대립이다.


조원래 교수

“송희립이 가운데고요. 송희립 3살 위의 형, 그 분이 바로 송대립입니다. 송대립 당시 임진년에 43세, 둘째 희립이 40세 그리고 막내 송정립 모두 3형제가 이순신의 군관이었죠.”

 


이순신의 군관이었던 송희립 역시 정운과 마찬가지로 이순신의 첫 출전을 종용했다. 송희립은 전라도 경상도 등 관할지역을 따지지 말고 적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 전쟁이 나자 형제들과 함께 의병들을 이끌고 이순신 휘하로 들어갔던 송희립. 일찍 전사한 정운 대신 이순신의 핵심 측근이 되어 전란 내내 그와 함께 했다.


김덕진 교수

“이순신 사람을 얘기한다면 좌정운 우희립, 송희립은 제1 참모로 여기는 것은 이순신의 옆에는 항상 그림자처럼 송희립이 따라다녔습니다. 송희립 없는 이순신은 늘 고독과 외로움에 지쳐 있는 그런 장수가 될 것 같습니다.”

 


경남 남해의 관음포. 이순신이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 1598년 11월. 이순신은 순천의 고니시유키나가 부대를 해상봉쇄하고 있었다. 이를 구하기 위해 최소 300여척의 왜 선단이 진격해 왔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을 통 털어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쫓겨 들어간 왜군을 소탕하다가 적탄에 왼쪽 겨드랑이를 맞았다. 그리고 대장선 갑판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관음포 언덕에는 작은 사당이 하나 서 있다. 이순신의 시신이 처음 뭍으로 올라왔던 곳에 세워진 이락사.


이락사 옆에는 이순신의 그 유명한 유언이 새겨져 있다. ‘전투가 급박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 최후의 현장에 이순신의 아들 조카와 함께 바로 송희립이 있었다. 이순신이 쓰러지자 송희립은 그의 죽음을 감췄다. 그리고 이순신의 갑옷과 투구를 입고 대신 독전고를 울렸다. 이순신의 전사는 싸움이 끝난 뒤에야 알려졌다.


정의연 남해역사 연구회장

“바로 이 바다가 관음포 노량해전 해역입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바로 이곳에서 순국을 하게 되자 군관 송희립이 이순신을 대신해서 북을 치면서 왜적을 무찌르는 독전을 했던 곳이 바로 이 관음포 해역입니다.”


이순신의 전사와 함께 노량해전도 끝이 났고 임진왜란도 조선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 송희립이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최후까지 함께 했던 최측근 송희립. 전란이 끝난 다음 그는 전라 좌수사가 됐다. 처음 만났을 때 이순신이 맡고 있었던 바로 그 직책이었다.


이순신의 최후. 이는 우리 한국사에 명장면이자,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 이순신은 영웅이 됐습니다. 하지만 영웅 이순신 옆에는 수많은 참모들 이순신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격군들과 해상의 의병들까지 이순신의 승리는 바로 이들의 승리였으며 이들이 있었기에 이순신은 가능했던 겁니다. 아직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이순신의 사람들.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와 평가가 내려 질 때 이순신의 진면목 또한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 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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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해루에 앉아서 방답 첨사, 흥양 현감, 녹도 만호 등을 불러들었다.’

2) ‘모두 격분하여 제 한 몸을 생각하지 않으니 실로 의사들이라 할 만하다.’ 난중일기 1592년 5월 1일.

3)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통분한 마음 이길 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늦추다가는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난중일기 1592년 5월 3일.

4) ‘여러 가지 전쟁 준비에 탈난 곳이 많다.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줬다. 첨사를 잡아들이고 교수를 내보냈다.’ 난중일기 1592년 2월 25일.

5) ‘녹도 만호(정운)의 애쓴 정성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난중일기 1592년 2월 22일.


6) 은봉전서 호남의록 중에서

7) 난중일기 1592년 2월 22일.

8) ‘(정운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북을 울리고 노를 재촉하여 여러 배들 앞으로 달려 나갔다.’ 운봉전서 중에서

9) ‘녹도만호 정운은 적선 대선 2척을 깨고 3명을 목 베고 2명의 포로를 구출했다.’

10) 난중잡록 1593년 2월 12일.


11) 난중일기 1592년 2월 21일.

12) ‘전 수사 정걸은 80세의 나이로 나라 일에 힘을 바치려고 아직도 한산도 진중에 머물러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도 아울러 은사가 내려진다면 군사들의 마음이 반드시 감동할 것입니다.’ 선조실록 1594년 9월 21일.

13) 난중일기 1592년 4월 12일.

14) 당포파왜병장.

15) 난중일기 1592년 5월 29일.


16) 선조수정실록 1592년 5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