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국현대시 8호 논문 3편/ 이선

2013. 4. 22. 14:55살다보니 이런일이/시(詩)를 위하여

발간사


현대시의 다양성(多樣性)에 대하여



                                        (사)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심상운


 

  『한국현대시』 8호를 발간하면서 현대시의 다양성(多樣性)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선(禪)의 심수(心髓)가 들어있다고 하는『無門關』(李喜益 1974년9월 25일 經書院)에는 “대도(大道)는 무문(無門)이라 천차유로(千差有路)하니 투득차관(透得此關)하면 건곤독보(乾坤獨步)하리라.”는 송(頌)이 있습다. 이는 불법 또는 진리를 목적으로 하는 대도에는 특별히 정해진 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전체가 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천 가지 만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를 철저히 깨우치고 행하면 진리의 세계를 홀로 걸어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詩)도 선(禪)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현대시는 형식과 내용의 다양성이 무한한 창조력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I.A.리처즈는 「시(詩)의 분석(分析)」에서 “위대한 시에는 이러저러한 것――깊은 생각, 훌륭한 소리, 또는 생생한 이미저리(imagery)――이 「꼭」 있어야 한다는 일반론은 한낱 무지몽매한 독단에 불과하다. 시는 생각이 없을 경우는 물론이고 의미가 없을 경우에도 거의 성립할 수 있고, 혹은 감각적(또는 형식적) 구조 없이도 ‘거의’ 성립할 수 있으며, 그런 경우에도 시가 도달할 수 있는 극점(極點)까지 도달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호의 시편들은 독자들의 눈에는 여러 개의 거울로 이루어져 있는 광학 장치인 만화경(萬華鏡)을 보는 듯한 즐거움을 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대시의 문이 다양하게 열려있다고 하여 시를 향한 시인의 시적 태도에 긴장감(tension)이 빠지는 것까지 허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긴장감이 빠진 시는 김빠진 맥주, 느슨해진 기타 줄 같아서 제대로 된 맛과 소리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한국현대시』8호는 시론을 축소하고 회원들의 시를 중심으로 편집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호는 발간비를 따로 받지 않는 연말 사화집(詞華集)을 대신합니다. 회원들의 다양한 상상력의 시편들이 놀라운 시적성과를 이루기 바라며 발간사를 줄입니다.


                                                       2012년 10월 20일 


                                  




한국 모더니즘 시의 흐름에 대한 고찰

                -시적 구조의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중심으로-


                                             김석환(명지대학교 문창과 교수)



 1.머리말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20세기 초에 일어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문화 운동 전체를 아우르는 용어이다. 문화의 한 부분이자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에서 역시 모더니즘 사조는 크게 일어났는데 영미주지주의와 대륙의 아방가르드 운동, 즉 미래파 다다이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을 종합적으로 일컫는다. 그런데 한국 현대시에 그러한 사조가 유입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930년대부터이며 영미주지주의 계열에 정지용, 초현실주의 계열의 이상 등을 당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그후 전후 후반기 동인을 필두로 해서 다시 일기 시작했으며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으로 변화되면서 더욱 다양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물론 한국 현대시의 현주소를 논하는 자리에서 모더니즘만으로 그 다양한 양상을 모두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 한국 현대 시단엔 이전에 풍미하던 리얼리즘적 경향이 쇠퇴하고 모더니즘적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그 이전까지 민주화 및 노동자 또는 소외계층들의 권익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일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는 사회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한국 사회만은 아니지만 1990년대 이후 컴퓨터를 추동력으로 하는 정보화 시대의 물결이 밀려 온 것도 원인이 되었다. 그러한 사회적 변화는 현실의 반영 또는 재현에 유용한 리얼리즘 시의 흐름을 약화시키고 모더니즘의 강세를 가져왔다. 따라서 한국 시단에 강하게 일어난 모더니즘의 조류를 살펴보는 것은 요즈음 시문학의 전체 흐름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본고는 모더니즘적 경향이 강한 시들을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구조의 구축(construction)과 탈구축(deconstruction)의 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시는 언어를 소재로 하는 예술로서 하나의 구조체인 일상어를 소재로 하여 새롭게 구축된 구조체, 즉 2차적 구조체이기 때문에 그 구조의 특성을 살피는 것은 곧 시적 특성을 살피는 일이다. 따라서 시의 특성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에 사용된 언어가 어떻게 시적 구조를 구축하는가 또는 탈구축을 하며 의미를 생산하는가에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특히 모더니즘은 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그러한 고찰의 타당성 또는 필요성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구체적으로 '구축'이란 시에 참여한 요소들이 대립과 유사성에 의해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갖고 시적 구조를 이루며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와 대립적인 '탈구축'은 그 요소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이 희미해짐으로써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여 전체성을 갖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 자체가 불확정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언어의 특징을 활용하여 새롭게 구축한 시어는 그 의미가 모호하며 암시적이요 다의적이다.  따라서 실제로 시에서 각 요소들, 즉 시어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의 정도를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은 임의성이 있으므로 구축과 탈구축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그런데 그 대립과 유사성의 정도를 살피는 것이 곧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살피는 일로서 의미가 있으며 그것 역시 각각의 시들이 갖는 특징을 고찰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2. 구조의 탈구축과 의미의 확장


  시인 이상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시인으로서 연작시 「오감도」를 연재하여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 '초현실주의'는 유럽에서 일어난 아방가르드 운동을 종합하여 최종 매듭을 지은 사조로서 무의식의 세계가 진정한 현실이라 여기며 이에 대한 탐색을 주요한 시적 과제로 삼았다. 다음의 시 역시 <오감도> 연작시의 한 편으로서 이른바 자동기술법으로 인간의 정신 심층에 내재된 무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1

나는거울없는室內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外出中이다. 나는至今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陰謀를하려는中일까.


2

罪를품고식은寢床에서잤다確實한내꿈에나는缺席하였고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놓았다. 


3

나는거울있는室內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解放하려고. 그러나거울속의나는沈鬱한얼굴로同時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未安한뜻을전한다. 내가그때문에囹圄되어있드키그도나 때문에囹圄되어떨고있다.

                                                         -이상, 「烏瞰圖 -시제15호」일부


  화자인 '나'는 거울이 없는 실내에서 거울 속에 있을 또 다른 '나'를 생각하고 있다. 거울은 이상적 자아가 존재하는 무의식적 공간을, 그리고 실내는 의식적 공간인 현실을 상징한다. 그런데 거울 속의 '나'는 이미 실내에 나와 있기 때문에 ‘外出中’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기 이전에 거울 속에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다른 '나'가 있으며,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왜냐 하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거울 속의 욕망하는  '나'가 '나'를 ‘어떻게 하려는 陰謀’를 하는 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室內에 있을 뿐만 아니라 거울 속에도 존재하는데 그 두 명의 '나'는 화합이 되지 않고 균열을 보이고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내가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나는 존재한다"는 라캉의 말을 빌자면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무의식에서 생각하는 '나'는 일치하지 않고 분열된 상태이다.  

  거울 속의 '나'와 일치하지 않은 '나'는 ‘罪를 품고’ 침상에서 잠을 자며 꿈을 꿈으로써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 '나'는 ‘缺席’하여 부재중이고 '義足을 담은 軍用長靴'가 '내 꿈의 白紙를 더럽혀 놓'은 것만을 확인한다. '軍用長靴'는 곧 거울 밖에 있다가 꿈을 꿈으로써 무의식의 공간인 '꿈의 白紙'로 들어간 '나'를 대신하는데, 욕망하는 '나'는 그곳에 없어 만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는 거울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가 거울 속에 있는 ‘나’를 ‘解放하려고’ 한다. 즉 분열된 채 존재하는 두 얼굴의 '나'가 부조화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들어와 미안한 뜻을 전하는데 서로 분열된 채 거울 속과 실내에 ‘囹圄’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얼굴의 '나'는 서로 만나 화합하지 못하고 분열된 채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 것이다.    

  '거울'과 등가치인 '꿈'의 공간은 생각하는 '나'만 있을 뿐 현실 속의 나, 즉 '내 위조'는 결석하여 늘 부재중이다.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나, 즉 '자아의 이상'은 현실 속으로 진입하면서 현실을 규제하는 법과 권력의 상징인 '아버지'의 개입으로 왜곡되기 때문에 서로 일치 할 수 없다. 그래서 화자는 아예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자살할 수 있는 통로인 '들창'을 가리키는데 그 들창을 통과한다는 것은 곧 자살이다. 들창 밖으로 나와 현실에 진입하는 순간 '나'는 다른 모습으로 왜곡되기 때문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현실에 '나'가 존재하는 한 살아 있으니 '불사조'에 가깝다. 이 역시 '생각하는 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언제나 분열된 채 무의식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일상적 층위에서 보면 비논리적이고 모순된 상황을 형상화하는 역설적 어법이 독자들에게 낯설음을 주지만 내적 논리로서 시적 구조를 구축하여 무의식의 세계와 그 흐름을 보여 준다.   

  한편 정지용 시인은 일본에서 유학을 하면서 영미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일본 시인들의 시들을 한국에 번역하여 소개하였으며, 동지사대학 졸업 논문에서 영국의 대표적 모더니즘 시인의 한 사람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연구하였다. 그렇게 일찍 영미모더니즘 시를 접한 그는 감정을 억제하고 이를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보여 줌으로써 회화성이 강한 시를 발표하며 한국 현대시단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영미 모더니즘은 아폴론적 경향이 강하여 디오니소스적인 유럽의 아방가르드 계열의 시에 비하여 인간의 내면에 대한 관심이 적으며 다양한 이미지들을 하나의 의미에 통합함으로써 구조의 견고성을 보인다. 그런데 다음 시는 그가 후기에 쓴 것으로서 한밤중의 산골 풍경을 회화적으로 그리면서 내면 깊이 잠재된 무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대 함끠 한나잘 벗어나온 그머흔 골작이 이제 바람이 차지하는다 앞남ㄱ의 곱은 가지에 걸리어 파람부는가 하니 창을 바로 치놋다 밤 이윽고 화로ㅅ불 아쉽어 지고 촉불도 치위타는양 눈썹 아사리느니 나의 눈동자 한밤에 푸르러 누은 나를 지키는다 푼푼한 그대 말씨 나를 이내 잠들이고 옮기셨는다 조찰한 벼개로 그대 예시니 내사 나의 슬기와 외롬을 새로 고를 밖에! 땅을 쪼기고 솟아 고히는 태고로 한양 더운물 어둠속에 홀로 지적거리고 성긴 눈이 별도 없는 것이에 날리어라

                                                                     -정지용,「溫井」전문


  화자인 나는 그대와 함께 한나절 동안 걸어 먼 골짜기를 벗어나 산방에 도착한다. 가지를 스치며 창을 치는 바람은 그곳에 도착한 화자의 심리적 변화를 암시한다. 밤이 이슥하여 화롯불이 아쉽게 식어 가고 촛불도 점점 희미해지며 어둠이 더욱 깊어지자 화자의 시선은 '누은 나'에게로 향한다. 그대도 ‘나’를 잠들이고 잠자리로 돌아가 홀로 남게 되자 '나의 슬기와 외롬을 고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화자가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은 그곳이 삶의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요 사방이 어둠에 가려진 한 밤인데 그대마저 곁에서 떠나 홀로 있기 때문이다. 즉 타자들의 욕망을 좇아 살던 현실이 차단되자 시인은 그 동안 소외된 채 '외롬'에 처해 있던 진정한 자아의 욕망을 찾는다. '땅을 쪼기고 솟아 고히는 태고로 한양 더운물'은 소외되었다가 솟아오르는 그  욕망의 상징이다.

  그렇게 화자는 비로소 '어둠속에 홀로 지적거리'는 진정한 자아의 욕망을 확인하는데 이는 곧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라깡에 의하면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대한 환상을 통해 형성되는데 소외된 욕망의 주체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 환상을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적 환상 속에서 타자의 욕망을 마치 나의 욕망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빼앗긴 나의 고유한 욕망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한다. 위의 시에서 타자는 타자의 욕망이 얽힌 현실로부터 차단된 산골의 밤에 자신을 성찰하며 고유한 욕망을 찾아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김상환, 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 비평사, 2008. pp.79-80 참조)  한편 별도 없는 어둠 속에서 '성긴 눈발'이 내리는 것은 그러한 자유를 얻은 시인의 내면을 암시한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3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 나의 하나님」 전문


  '하나님'은 '늙은 비애', '살점', '놋쇠 항아리', '어리디어린 순결', '연둣빛 바람' 등의 다양한 이미지에 비유되면서 시적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구체화 또는 확장된다. 특히 비유적 이미지들이 ‘늙은/ 어리디어린, 생물/ 무생물, 밝음/ 어두움, 구체/ 추상’ 등으로 대립되면서 일상적 논리를 벗어나 낯설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미를 지연시키고 그 폭을 확장시킴으로써 모호성이 극대화되어 그 통일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시적 전체성을 유추하기가 불가능한 탈구축 양상은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체험으로써 그 실재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 오히려 효율적이다.      


사과나무의 천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고

뚝 뚝 뚝 떨어지고 있고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움직이게 하는

어항에는 큰 바다가 있고

바다가 너울거리는 녹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비에 젖는 섣달의 산다화가 있고

부러진 못이 되어

길바닥을 뒹구는 사랑도 있다.

                                                     -김춘수, 「시 3」 전문


 사과나무의 사과알이 땅이 아니라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어항에 크나큰 바다가 있고, 바다가 너울거리는 녹음 등은 일상적 논리를 벗어난다. 그리고 ‘사과알, 금붕어, 산다화, 부러진 못, 사랑’ 등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이어지면서 낯설음과 시적 긴장감을 더해 준다. 그런 이미지에 의해 형성되는 시적 상황은 제목인 '시'와 비유적 관계를 맺으면서 '시'의 의미를 지연시키며 확장한다. 이처럼 이질적인 이미지의 전개와 그들 사이의 충돌과 논리를 벗어난 묘사와 진술로 탈구축의 양상을 보이며 '시'의 의미는 일상어로 규명하기 어려울 만큼 모호한 것임을 암시할 뿐이다. 즉 시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다만 존재하면서 독자들과 대화를 요구하며 무한한 상상과 다의적인 해석을 유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 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김종삼, 「나의 본적」 전문

 

  ‘나의 본적’을 비유한 다양한 이미지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것들의 유사성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즉 나의 본적은 ‘마른 잎, 거대한 계곡, 나무 잎새, 맑은 거울, 독수리, 고장, 교회당 모퉁이, 인류의 짚신, 맨발’ 등과  비유적 관계를 맺으며 그 의미는 계속 지연되고 수정된다. 그러는 중에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나의 본적'의 의미를 확장하며 그 모호성을 증대시킨다. 그리하여 나의 본적이 상징하는 인간 존재의 기원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암시한다.   


曲馬團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는

'코스모스의

地域


코스모스

아라스카의 햇빛처럼

그렇게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緯度


참으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一生


코스모스

또 영

돌아오지 않는

少女의 

指紋

                                                      -박용래, 「코스모스」 전문


  한편 시 「코스모스」에서 1연은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공간인 ‘곡마단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를 제시한다. 그리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긴 꽃대 위에 핀 ‘코스모스’와 아슬아슬 곡예를 하고 마술을 부리는 ‘곡마단’이 비유적 관계를 맺게 한다. 이어서 코스모스 꽃은 하얀 눈이 덮인 ‘아라스카의 햇빛’과 그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위도’와 다시 비유적 관계를 맺고 다시 ‘사랑했던 사람의/ 일생’과 그 ‘소녀의/ 지문’과 비유적 관계를 맺는다. 지구의 북극에 가까운 '아라스카의 햇살', '위도', '지역', '소녀', '지문' 등으로 점점 축소 또는 확대되며 이어지는 공간적 이미지의 비약적인 변화와 서술어의 생략에 의한 여백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질적인 이미지의 충돌과 생략은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면서 코스모스의 시적 의미를 무한히 확장할 뿐 어느 의미로 한정하기에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시는 어느 대상에 대한 욕망이나 그것으로부터 경험된 의미를 독자적인 언어적 상징체계를 구축하여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의식적 자아는 그것을 현실을 판단하는 의식이나 초자아에 의해 인정되지 아니한 욕망을 교묘한 수단으로 엄폐하면서 나타낸다.(김형효,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 인간사랑, 2008. p.327 참조) 따라서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며 상징계로 진입할 때 타자들의 욕망이나 상징계를 지배하는 법에 의해 억압을 받아 왜곡된다. 그것은 언어의 양면인 기의와 기표가 일치하지 않고 떠도는 원인이 되는데 어떤 기표로 의미나 욕망이 드러나지만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욕망이 남아 있어 또 다른 기표가 요구된다. 그래서 시에서 하나의 기의에 다양한 기표, 그 역으로 하나의 기표에 다양한 기의가 나타난다. 따라서 독자들은 다양한 기표의 연쇄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동시적으로 고찰하여 그 기의, 즉 시인의 욕망 또는 시적 의미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의 실재(reality)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시를 구축하는 기표, 즉 다양한 이미지들은 다만 그 실재의 흐릿한 얼룩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재’란 없으면서도 있는 것으로서 그 일부가 기표로 상징계에 나타나는 순간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3. 구조의 구축과 시적 의미의 집중


  영미모더니즘의 시의 구조는 산업혁명의 근원지인 당대 영국의 사회적 구조와 상동성을 갖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신흥 자본가들이 부상하고 물신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혼탁해지던 유럽에서 선구적으로 산업혁명을 이끈 영국은 대륙의 여러 나라에 비하여 비교적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영국에서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되 전통을 존중하며 질서를 세우고 사회적 통합을 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이러한 현실에 부응하여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모더니즘 시는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선택하여 배열하면서 하나의 의미를 향해 집중시키고 구조의 전체성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이론가이자 시인인 엘리엇(T.S. Eliot)의 「황무지」는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준다. 그 시에는 성서, 신화, 오페라의 대사, 일상적인 군중들의 말 등 이질적인 요소들이 배열되어 텍스트를 구축하면서 산업혁명으로 혼란해지는 시대상을 비판하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집중되고 있다. 그 '이질적인 요소들의 통합'은 영미모더니즘 시의 구조적 특징의 핵심이며 한국 현대시단에서도 영미모더니즘 시의 영향을 받은 시들은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꽃이 열매의 上部에서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作亂을 한다

 

 나는 發散한 形象을 求하였으나

 그것은 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伊太利語로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叛亂性일까

 동무여 이네 나는 바로 보마

 事物과 事物의 生理와

 事物의 數量과 限度와

 事物의 愚昧와 明晣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 「孔子의 生活難」 전문


  꽃이 지고 열매가 맺는 게 자연의 순리이지만 그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다는 것은 결과와 원인이 전도된  모순이다. 그런 현실을 두고 '너'는 제 자리에서 상승과 하강 운동을 반복하며 줄을 돌리는 '줄넘기 作亂'을 한다는 것은 무지하고 무책임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기표인 '發散한 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모순된 현실과 싸워야 하는 '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렵다'. 같은 대상을 두고 한국에서는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 하는 것처럼 그 지시체 또는 기의와 기표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표를 통하여 정확한 기의를 알 수 없듯이 사물의 가시적인 형상으로 그들의 관계와 진정한 의미의 실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사물과 사물의 생리적 관계, 그 수량과 한도를 바로 보겠다고 한다. 알고 보면 사물은 우매하여 형상 뒤에 숨은 본질, 그 명절성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다. 아니, 그것을 보는 인간이 우매하여 형상을 보며 그 뒤에 숨은 실재를  명확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위의 시에는 서로 이질적인 상황 또는 이미지들이 병치적으로 나열되면서 긴장감을 주고 시적 의미를 확장시키며 그 해석을 어렵게 하는데 그것은 이 시가 갖는 독특한 미학이다. 이 시는 언어의 불확실성과 그로 말미암아 인간이 겪어야 하는 소외를 암시하고 있는데, 그러한 경향은 모더니즘 시의 한 경향이다.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딩구는

 우렁 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下棺

 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박용래, 「下棺」 전문

 

  이 시는 미메시스(mimesis)적 차원에서 보면 이미지들이 환유적으로 배열되면서 추수가 끝나고 살얼음이 어는 초겨울의 들판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시는 일상어를 소재로 하여 새롭게 구축한 구조물로서 그 풍경을 이루는 이미지들이 내포한 이차적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이미지들이 다른 것 또는 전체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시 전체를 구축하는가를 파악하여야 한다. '볏가리가 걷힌 논두렁'은 벼들의 한 해 살이가 끝난 죽음의 현장이요 '남은 발자국'은 죽은 이가 남긴 흔적이다. 그리고 '수레바퀴에 끼인 살얼음'은 유동성이 있는 물이 고체화 된 부동의 물이며 우렁 껍질도 죽은 우렁이가 남긴 것이다. '바닥에 지는 햇무리'는 하루가 저물어 가는 저녁 무렵의 햇살로서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살던 곳을 떠나기 위해 지평선 위를 날아가는 철새인 기러기떼 역시 지상의 삶을 마감하고 이승의 세계로 떠나가는 죽음을 암시한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모두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 계열체들로서 주검을 매장하는 절차인 '하관'과 은유적 관계를 맺는다. 그리하여 일상적으로는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죽음의 의미에 집중되며 시 전체를 구축한다.


 한 귀퉁이


 꿈 나라의 나라

 한 귀퉁이


 나도향

 한하운 씨가

 꿈속의 나라에서

 

 뜬구름 위에선

 꽃들이 만발한 한 귀퉁이에선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구스타프 말러가

 말을 주고받다가

 부서지다가

 영롱한 날빛으로 바꾸어지다가

                                                     -김종삼, 「꿈속의 나라」 전문



  '꿈 속의 나라'에서 공간을 지시하는 '한 귀퉁이. 꿈 나라의 나라, 꿈 속의 나라, 뜬 구름 위' 등이 서로 비유적 관계를 맺는데 모두 지상과 다른 비현실적 공간이다. 그곳들에 등장하는 이들은 '나도향, 한하운, 지그문트 프로이드, 구스타프 말러' 등 국내외의 소설가, 시인, 심리학자, 작가 등이다. 작가와 시인은 상상력을 중시하며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쓴 이들이다.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주장한 정신분석학자인데 무의식은 꿈을 꾸는 정신적 영역이며 초현실의 세계이다. 따라서 인물들과 그들이 머물러 있는 공간들은 모두 비현실성을 내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곳은 또한 말을 주고받는 세계, 즉 현실이 아니라 '영롱한 날빛'이 존재하는 비현실적 또는 상상의 세계로서 무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음 시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시를 선구적으로 발표하며 한국 시단에 새로운 충격을 주던 황지우 시인의 실험적인 의도를 강하게 엿볼 수 있는 시이다.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와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황지우, 「심인」전문


  이 시는 화자인 '나'가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누면서 신문의 광고난에 실린 '심인' 광고문을 보고 있는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그 광고문을 그대로 옮겨 놓았는데 서로 다른 이들이 가출한 이들을 찾고 있다. 가족들이 애타게 가출한 가족을 찾고 있는 광고문의 내용과 그것을 읽으며 똥을 누는 상황이 대조를 이루며 시대의 부정적인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서로 우연히 인접하여 실려 있을 뿐 각각 다른 사정을 갖고 있는 광고문이 그대로 시의 일부가 되었다. 이는 패러디의 일종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크게 부상한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준다. 최근에 이런 광고문뿐이 아니라 만화, 영화, 유행가, 음악 등 문학의 주변 예술 또는 대중예술이 시와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는 현상을 많이 보이고 있다. 그러한 상호텍스트성이 주요한 미학으로 부상한 것은 해 아래서 새로운 것은 없으며 모든 텍스트는 이전의 텍스트에 나온 것들을 직조한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모든 텍스트는 이전 또는 동시대의 다른 텍스트들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그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전문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원텍스트인 샤갈의 그림을 패러디 하고 있다. 그림의 분위기를 차용하고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을 새롭게 변용하여 눈이 내리는 샤갈의 마을 사람들이 꾸는 부활의 꿈과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3월에 눈이 오는데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욕망의 피가 활발하게 돌아 정맥이 돋는다. 하늘에서 내려 온 축복의 메시지인 눈은 겨울이 가고 봄이 곧 시작됨을 알리며 사나이의 가슴에 겨우내 억압되어 있던 욕망의 피를 새로 활발하게 돌게 한다. 그리고 지붕과 굴뚝을 덮으며 사나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새 봄을 맞으려는  욕망을 더욱 익히고 다듬을 것을 권한다.

  샤갈 마을 사람들의 욕망의 실체인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아낙들도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피며 생명이 새롭게 부활하는 봄을 기다리게 한다. 이처럼 샤갈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인물들은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변용되며 집중적으로 겨우내 억압된 욕망의 실현을 암시한다. 샤갈의 그림을 페러디 한 이 시는 그림과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는데 김춘수 시인은 이 외에도 화가 이중섭의 생애나 그림 또는 토스토에프스키의 소설 등 다양한 원텍스트를 패러디 한 시들이 많다.

  한편 하이퍼(hyper)시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심상운 시인의 다음 시에 서로 이질적인 네 가지 국면이 제시되고 있다. 이는 디지털 기술에 의해 새로운 화면으로 전환하기 용이한 하이퍼텍스트와 구조적 유사성을 엿보게 한다.

 

  초여름 감자밭 고랑에 앉아 포실 포실한 흙 속으로 맨손을 쑤욱 밀어 넣으면 화들짝 놀라는 흙덩이들. 내 난폭한 손가락에 부르르 떠는 촉촉한 흙의 속살. 나는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때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내 손가락에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흙 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흙 속에 숨어있는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있을 거라고? 그럼 붉은 피는 어둠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 몇 장의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는 하얀 침대에 누워 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자신의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아니면 비오는 밤, 검정고양이가 청색 사파이어 눈을 번득이며 잡동사니로 가득한 헛간을 빠져나와 번개 속을 뛰어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불빛이 번쩍하는 순간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린다. 비가 그치고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몸을 피하는 게 희뜩희뜩 보이는 밤이다.

                                                        -심상운, 「헤드라이트」 전문


  위의 시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국면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어둠/ 빛’의 대립상이 내재된 계열체들이다. 첫째로 화자인 나는 감자밭 이랑에서 감자의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리고 그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 있을 거라고?’ 질문을 하며 그 ‘붉은 피’는 ‘우주의 꽃빛 파일’이라고 한다. 다음 국면은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화자는 그녀가 자신이 헌혈한 피가 누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검정고양이가 '헛간을 빠져 나와 번개 속을 뛰어 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를 궁금해 한다. 그녀가 헌혈한 피와 '헛간'에서 나온 검정고양이는 서로 비유적 관계를 맺으며 무의식 속에 내재된 욕망이 현실로 진입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세 번째 국면에서 화자는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리는데 이 역시 위의 두 가지 국면과 비유적 관계를 맺는다.

  이상의 국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주체들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으며 사건 또는 상황이 이질적이다. 이는 화면의 전환이 자유롭고 용이한 하이퍼텍스트의 특성과 상통하는데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며 비약적인 상상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 이질적인 세 국면 속에는 모두 닫힌 공간에 내재되어 있던 '어둠'의 계열체들이 빛의 계열체가 되어 열린 공간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감자가 묻힌 흙속, 그녀의 혈관, 고양이가 머물러 있는 헛간, 화자가 머물러 있는 승용차는 모두 그 무의식적 공간을 상징한다. 이처럼 세 국면은 표층적으로 보면 이질적이지만 구조적 상동성(homology)을 갖고 모두 무의식적 공간에 내재된 욕망들이 현실로 진입하는 것을 암시한다.

  시인의 비약적인 상상은 그렇게 새로운 국면으로 이동하면서 그 속에 내재된 것들이 빛이 되어 열린 공간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통하여 욕망이 현실,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는', '부르르 떠는', ‘깜짝 놀라면' 등은 욕망이 질서와 규칙으로 얽힌 현실로 진입하는 순간 받아야 하는 억압의 무게와 그로 인한 고통을 보여 주는 징후들이다. 또는 그것을 이기고 현실로 진입한 주체가 느끼는 경이감과 환희를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시인은 그녀의 '붉은 피'를 '우주의 꽃빛 파일'에 비유한 것에서 보듯 무의식적 공간에 내재된 어둠이 암시하는 욕망이 오히려 빛의 세계인 현실을 움직이고 조정하는 힘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이선 시인의 다음 시는 디카시이자 하이퍼 시의 일종으로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차용하여 시의 일부로 배열하고 그 원텍스트를 패러디하며 시를 완성하고 있다.


        그림: 프리다 칼로의 <다친 사슴>


보름달을 삼킨, 앞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별들의 왕녀인 안드로메다가 가장 사랑한,

라임나무 열매를 훔쳐 먹은 죄로, 나는 노새사슴이 되었다

목자자리, 아르크투르스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디에고 리베라”

휘핑크림 바른 라임 파이(Lime pie), 

혀끝에 부드럽게 감기는, 한 조각

이름


노새사슴 몸통은, 사냥꾼들의 표적

목에 꽂힌 화살

허리에 박힌 화살

나는 신음소리를 뱉지 않고, 꿀꺽 삼킨다


달빛 커텐, 내 꿈을 가리는 밤

내 뿔은 1cm씩, 나의 별을 향해 그리움을 키운다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빼지 마세요제발”

-상처는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붓

-고통은 잘 섞은, 물감

배경처럼 서 있는 멕시코만, 푸른 바다

남색꽃 만발한, 클리토리아 초원


다시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은 마피미 분지에 내던지고

말랑말랑, 새 뿔 왕관으로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릴 터,


-귀를 쫑긋 세우고

                             -이선, 「프리다 칼로 2-자화상․다친 사슴」전문


  보름달을 삼켜 앞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라임나무를 훔쳐 먹은 죄로 ‘노새사슴’이 된 나는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그 별은 '디에고 리베라'와 동일시되며, 그 이름은 '라임 파이'에 비유된다. 따라서 ‘보름달, 라임나무, 별, 디에고 리베라, 라임 파이’ 등은 모두 노새사슴의 몸통 안에 저장된 욕망의 대상을 대신하는 계열체적 기표들이다. 욕망의 기의는 다양한 기표들에 의해 드러나면서 그것을 더욱 구체화하고 확장한다. 그런데 노새사슴의 몸통은 타자들의 상징인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어 목과 허리에 화살이 박힌다. 그러나 그 고통을 참으며 별을 향해 1cm씩 그리움의 뿔을 키우고 오히려 상처와 고통을 화구로 삼아 이상세계인 푸른 바다와 클리토리아 해변을 그린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을 내던지고 새 뿔 왕관을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려 그 욕망의 대상에 이르고자 한다. 

  화자인 노새사슴이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그리며, 다시 뿔을 키우고 낡은 뿔을 가는 것은 욕망의 끝없는 분출을 암시한다. 시인은 이처럼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제시하고 이를 패러디하며 자신의 '자화상'이라 밝힌 노새사슴을 통하여 타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극복하고 이상세계를 향하려는 강한 욕망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의 산물인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하여 찍은 사진에 시를 덧붙이는 디카시가 새로운 장르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시는 그의 일종이다. 또한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원용하여 쓴 '하이퍼 시'라고 볼 수 있는데 화가의 그림 사진이 시텍스트의 일부가 됨으로써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만 디카시들이 흔히 자연풍경 사진을 원텍스트로 하는 데 비하여 화가의 그림 사진을 원텍스트로 하고 있다. 아무튼 이 시는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시의 소재와 기법이 더욱 확대되고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유카 초목의 꽃들은 단 하룻밤 동안만 벌어진다. 유카 나방이는 그런 꽃들 중의 하나에서 그 꽃가루를 꺼내 반죽해 조그만 덩어리로 만든다. 그런 다음 나방이는 다시 또 한 유카 꽃을 찾아가, 그 암술을 찢어 열고 배추들 사이에 제 알들을 낳고서, 고깔 모양으로 생긴 암술의 터진 틈을 그 꽃가루 반죽덩어리를 메워넣어 막는다. 제 일생 중 단 한 번 유카 나방이는 이 복잡한 일을 행한다.”(칼 구스타프 융,『사이키의 구조와 역학』에서 인용)


 1. 현대 문명적으로 해석하자면, 이것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유카 나방이의 필요가 유카 꽃을 발명한다.


 2. 이것은 저 유구한 문제의 또 한 변형판이다.

 심(心)이 먼저인가 물(物)이 먼저인가,

 심(心)이 있으매 물(物)이 있나 물(物)이 있으며 심(心)이 있나.

 사실은 그것들은 하나이며, 자웅동체이다.

 유카 나방이/ 유카 꽃의 관계는 빛/ 그림자, 양/ 음, 생명-력(力)/ 생명-형태, 영(靈) /혼(魂), 마음/ 육체, 이성/ 정서, 의미/ 이미지 등등의 관계와 같다.


 3. 내가 왜 이런 것을 시(詩)라고 쓰냐 하면,

 내가 한 마리의 유카 나방이-융을 받아들이는,

 하룻밤 동안만 벌어진다는, 한 송이의

 유카 꽃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나는 저 물(物)만이 아닌 심(心)이 보태진 유카 꽃,

 자웅동체의 유카 꽃이 된다는 것을,

 내 자신에게 의식시키기 위해서이다.

                                                         -최승자, 「유카 나방이」


  1연에서는 ‘유카  꽃’과 ‘유카 나방이’와의 미묘한 상생 관계를 밝힌 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사이키의 구조와 역학'에 있는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2연에서는 그러한 생태를 현대문명적으로 해석하고 3연에서는 ‘유카 나방이/유카 꽃’의 관계를 ‘심(心)과 물(物)의 관계’에 비교하며 '그것들은 하나이며, 자웅동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여러 이항 대립상에 비교하며 그 자연 속의 상생 원리가 철학, 사상, 예술에까지 잠재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4연에서는 그것을 자신의 시 쓰기와 관련시키고 있는데 자신은 '유카 나방이 -융을 받아들이는,/ 유카 꽃'이요,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화자는 '물(物)에 심(心)이 보태진' '자웅동체의 유카 꽃'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의식시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유카 나방이와 유카 꽃의 생태를 밝힌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이를 해석하고, 심(心)과 물(物)과의 관계에 비교해 보고, 다시 시 쓰기와 관련시키며 시를 완성하고 있다. 사실을 밝히는 학문적인 문장에 시인의 해석과 비유적 상상력이 더함으로써 시가 되는 것이다. 즉 유카나방과 유카꽃이 서로 ‘자웅동체의 유카꽃’을 이루는 상생 원리로써 시 쓰기의 과정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주와 삶의 원리로 작용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학술적 문장을 도입하여 패러디하고 연에 번호까지 부여하면서 ‘유카 나방이’와 ‘유카 꽃’의 관계에 다양한 논리적 관계를 병치하여 비유적 관계를 맺어 시를 완성한 이 메타시는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준다. 그러한 시의 구조 안에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이질적인 요소들이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전체성을 갖는다.


  4. 결론


  이상에서 한국 모더니즘 시에 나타난 구조의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이상 시인의 「오감도- 시제15호」와 김춘수 시인의 「나의 하나님」등의 경우에 다양한 이미지들이 하나의 의미에 집중되지 않은 채 구조의 탈구축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들은 유럽 대륙을 중심으로 일어난 아방가르드 시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한 시들은 오히려 독자들에게 다양한 상상을 유도하고 대상이 내포한 의미를 확장함으로써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반면에 김수영 시인의 <공자의 생활난>이나 박용래 시인의 <하관>을 비롯한 여러 편의 시텍스트에서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유지하며 견고하게 구조가 구축된 시들이 있다. 이는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보여 주는 영미모더니즘 시와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박용래, 김춘수, 김종삼 등의 시인의 경우를 보면 위의 두 가지 경향을 갖고 있는 시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패러디를 한 시 또는 하이퍼 시 등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이 강한 시들에서도 그 구조를 견고하게 구축하는 시들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구축 또는 탈구축,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추상적인 기준으로 시의 특성을 구분한다는 것은 자칫 그 구체적 특성과 시적 효과를 간과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된 나라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모더니즘과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구조적 특성이나 문예사조 또는 소재나 기법의 특성으로 시의 예술성과 가치를 논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다. 시란 굳어버린 일상어의 어법으로 다 보여주지 못하는, 오히려 그 아래 가려져 억압받는 인간의 진정한 욕망이나 대상이 갖고 있는 의미의 실재를 보여 주기 위해 언어로 구축한 2차적 상징체계요 예술이다. 시인은 죽어서나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다는 그 실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새로운 어법을 창조하여 언어의 그물을 엮는다. 시는 예술이기 때문에 창의성과 개성이 필수적 요소이지만 궁극적으로 미적 감동을 주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모든 시적 요소들은 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소재나 기법이 새롭다 하더라도 독자들의 상상력을 실재에 가까이 이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독자들의 눈길을 일시적으로 끌기 위한 화려한 포장지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시의 죽음을 논하기에 앞서 고급스런 시를 쓰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독자들의 얇은 감성을 자극하고, 요설적인 문장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낭비시키는 시들이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깊이 가려져 있는 그 진실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는 시, 그곳으로 가는 데 꼭 필요한 이미지 또는 문장으로 쓴 고급스런 시만이 문화 창달의 선구적 역할을 감당하며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것이다.       

 

     















           ‘하이퍼 시’의 시사적 위상과 그 미학


                                      

                                         오양호(문학평론가. 인천대 명예교수)


 


 ‘하이퍼 시’는 월간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현대시 혁신 신시운동이다. 현재 한국문단에는 근 3백여 종류에 이르는 문예지가 발행되고 있지만 ‘하이퍼 시’라는 이름의 시 갈래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시문학』의 이런 신시운동은 이 잡지가 내걸고 있는 ‘현대시의 길 닦기, 길 잡기, 길트기’와 호응한다.

 문학은 종적인 지속성과 횡적인 변화 속에 존재한다. 앞 시대의 문학적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한 시대의 변화를 수용한다. 그러니까 문학은 과거의 것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것이다.

한국 현대시사에서『시문학』이란 이름의 시 전문지는 3개다. 첫 번째는 1930년 박용철이편집 겸 발행인으로 창간한 동인지『시문학』이고, 두 번째는 1965년 4월에 문덕수가 주재 편집하고, 정태진이 발행한(청운출판사)『시문학』이며, 세 번째는 1971년『현대문학』(현대문학사)의 자매지로 조연현 주간으로 발행된『시문학』이다.

 첫 번째 『시문학』은 박용철, 정지용, 김영랑, 정인보, 이하윤 등이 중심 멤버였고, 두 번째는 순수심리주의 경향, 또는 현실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시적 미학으로 내면세계를 개척하고 있던 교수시인 문덕수가 신진의 적극적 육성, 시단의 전위적 역할을 내세우며 발행했던 문예지다. 1966년 12월 통권 20호로 종간된 이 시 잡지를 통해 시단에 나온 시인으로 양왕용, 홍신선, 오순탁, 민윤기 등이 있다.

 세 번째 『시문학』은 통권 제 24호부터 현대문학사서 독립하여, 발행인 김규화, 주간 문덕수에 의해 시문학사에서 발행해 오고 있는 문예지다. 2012년 10월 현재 통권 495호를 발행했다. 이 문예지를 통해 시단에 나온 문인을 열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현대 한국시단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시인을 거의 다 열거해야 하는 까닭이다.

 세『시문학』을 관통하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그 첫째는 순수시의 지향이고, 두 번째는 전위 시의 지향이다. 한국시문학사에서 ‘시문학파’로 지칭되는『시문학』은 우리가 잘 알듯이 카프의 목적성, 도식성, 획일성에 반대하여 순수문학을 옹호한 모태가 된 동인지다. 정지용으로 대표되듯이 이 잡지는 한국시사에서 시를 언어의 예술로 자각하고, 그것을 심화시키는 창작 활동과 함께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한국시를 변화 발전시키는 기수 역할을 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시문학』은 실재로 문덕수의 시 쓰기로 대표된다. 두『시문학』을 관리한 문덕수의 도저한 순수지향의 글쓰기를 여기서 논하는 것은 췌사贅辭이다. 한국문단이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문덕수가 앞서고『시문학』출신 시인 일단이 그와 동행하고 있는 현재의 ‘하이퍼시 클럽’의 시 쓰기는 사정이 다르다. 1930년대 이래『시문학』이란 이름을 단 세 종류의 잡지가 모두 그 나름의 전위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하고 있지만 ‘하이퍼 시’만큼 한 시대의 시에 전위성이 강한 창작 활동을 집단적으로 벌린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또 이 일단의 시인들이 생산하고 있는 새로운 형식의 시를 상당수의 사람들이 예의주시하고 있는 까닭이다.

 1930년대 박용철의 『시문학』이 목적문학의 대척점에 있었듯이 문덕수의『시문학』은 참여문학과 맞서면서 한국 시문학의 한 축을 떠받쳐 왔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의『시문학』이 남긴 문학사적 위상을 현재의『시문학』이 계승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연유로 나는 현재 시문학 출신 시인 일단이 전개하고 있는 이 ‘하이퍼 시 클럽’을 편의상 ‘신시문학파’로 명명한다. 1930년대의 시문학이 모더니즘 실현으로 시단의 전위 역할을 하였듯이 현재의 시문학도 하이퍼 시로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렇게 선언적 진술을 한다. 그러나 문제가 간단한 것은 아니다. 30년대『시문학』의 모더니즘은 한국현대시사에서 아주 뚜렷한 의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지만, 현재『시문학』의 신시운동은 범 문단의 공인 속에 그런 양식의 시 쓰기가 아직 확대, 심화되는 조짐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을 신시문학파의 엔솔로지『하이퍼 시』(시문학사, 2011)를 중심 텍스트로 그 시사적 위상과 미학을 간단히 검토해 보겠다.


  1, 하이퍼 시의 정체성


  하이퍼 시는 공간적으로 서정시와 동일 상한象限에 놓여있고, 시간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병치되어 있다. 그리고 창작 방법으로는 사물시를 모태로 한다. 그렇다면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이 사물시事物詩·physical poetry다.

 ‘사물시’란 무엇인가. 모두 주지하고 있겠지만 논리 전개상 이 용어에 대해 간단하게라도 언급해야겠다. 사물시는 랜섬J,C Ransom이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에 반대되는 시를 사물시physical poetry와 관념시platonic poetry로 구분하면서부터 규정지어진 용어다.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로 이루어지는, 곧 언어에 의한 조형의 시가 사물시다. 사물시의 대표적인 예가 이미지즘 시이고, 이 이미지즘 시의 기법은 흄T.E.Hulme, 파운드E.L.Pound의 이론으로 대표되듯이 이 시는 관념보다 시어의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한다. 시에서 주관적 주체인 시적 자아는 뒤로 물러나고, 사물들이 객관적인 진술을 통해 엄격히 묘사되는 이런 시의 기법은 릴케R.M.Rilke의『신시집』(1907)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경우 김춘수의 초기 시가 그러하고, 문덕수의 시가 이런 시학에서 출발하였고, 지금은 21C의 시의 키워드로 사실, 생명, 현장을 제시하면서 시인의 사상,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에서 새로운 시의 원점을 찾는 진중한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1)

 사정이 이러하다면 ‘하이퍼 시’는 현대시의 적통嫡統의 자리에 서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일 상한에 서 있는 공간성이다.

 포스트모던이 무엇인가. 그건 바로 이 시대 예술전반을 통어하는 전위성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이퍼 시는 언어예술로 나타나는 전위시 운동의 한 현상이라 하겠다. 전위성이 아직 익숙하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관습에서 멀고, 이해가 어려운 것이라면, 하이퍼 시의 정체는 이런 신기성新奇性·novelty, 곧 ‘전위성’과 관련된다. 하이퍼 시의 한 수용자가 이 시를 비판한다며 글의 표제를 ‘아방가르드 시의 몰락’이라했다는 사실이 하이퍼 시의 이런 성격을 반영한다.

 한국이 IT 강국이 되어 PC가 널리 보급되던 1990년대 중반부터 몇몇 앞서가는 문인들에 의해 ‘신기성’의 하이퍼텍스트 문학, 특히 하이퍼텍스트 시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말의 컴퓨터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keup language(HTML)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하는 시다. 이런 시는 하이퍼링크, 곧 연결기능이 들어있어 그것이 텍스트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 기계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글쓰기를 그 때 몇 몇 문인들이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글쓰기는 시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의 언어는 컴퓨터 부호로의 변신을 독촉 받고 있는 언어다. 중심 매체가 붕괴된 문화적 장르에 대하여,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고 이름 할 수 있을까?2)


 사정이 이러하지만 오남구, 김규화, 심상운, 최진연, 이솔, 안광태, 송시월, 이선을 중심으로 한 신시문학파, 특히 하이퍼 시의 미학을 줄기차게 탐색하고 있는 심상운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이런 폐기선언에 새로운 시학으로 맞서며 ‘종이 하이퍼 시’를 들고 나왔다.


그는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디지털의 감각과 이미지의 결합, 하이퍼텍스트의 문학적 기능을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하이퍼+시는 현실을 바탕으로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3)


 심상운의 이 말을 요약하면 그가 주장하는 하이퍼 시는 ‘극사물시’ 또는 ‘극하이브리드 시’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극사물시’를 ‘완전한 탈 관념 지향 시’로 ‘극하이브리드 시’를 ‘이질적 이미지의 폭력적 결합’ 또는 ‘이질적 이미지의 과감한 결합에 의한 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시의 기법은 아직 ‘신기성’으로 기호분해가 되지 않는 상태에 놓여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물시’가 랜섬, 흄, 파운드, 릴케와 관련되어 있고, 우리의 경우 이런 하이브리드hybrid문제는 시문학파의 이미지즘으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고, 그것이 조향, 김춘수, 문덕수로 수용, 변화, 지속되면서 그 적통성이 이어졌다고 할 수있지만 오늘의 하이퍼 시는 경우가 좀 다르다. 극하이브리드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신시문학파의 시학은 ‘이방가르드’성의 긍정만이 아니라, 그 변화와 굴절이 너무 강하여 독자와 시가 이반될 부정적 요소도 함께 가지고 있다.


  2. 하이퍼 시의 몇 가지 문제점


  1) ‘하이퍼 시’ 란 용어

 하이퍼 시는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와 종이(책) 위에서 구현되는 종이 라이퍼텍스트 시로 구분된다.4) 그런데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바로 위에서 보았듯이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하기는 어렵다며 이미 폐기된 글쓰기 형식이다. 그러나 심상운으로 대표되는 신시문학파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를 ‘하이퍼 시’로 발전시키면서 이 포스트모더니즘적 신시창작 기류를 ‘현대시 혁신의 뜨거운 대열’ 이고, ‘하이퍼적 몸짓은 한 마디로 경이롭다’5)며 자평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이 현대시 혁신의 대열에 참가하고 있는 시인은 신시문학파 외에는 별로 눈에 뜨이지 않고, 연구자들도 하이퍼텍스트 시 연구를 하면서 전자하이퍼텍스트 시만 대상으로 삼고 있다.6) 이런 현상은 하이퍼 시의 시미학과 관련되는 문제겠지만, 그것보다 종래의 한국 서정시와의 심한 편차성 문제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사실 오늘의 많은 독자는 아직도 관습적 시 읽기, 가령 서술시적 시에 익숙해져 있다.  80년대, 저 시에도 ‘역시 문제는 리얼리즘이다’라고 외치던 현실주의 문학의 그늘이 아직 우리문단에 짙게 깔려있고, 실재로 거의 일 만 명에 육박할 시인들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시운동을 전향적 반성 위에 공격적으로 논리개발을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2) 하이퍼 시의 상이한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에 의한 다선구조로 초래되는 무의미성; 하이퍼 시의 내력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김춘수의 무의미 시, 문덕수의 이미지의 상호충돌의 전위성과 관련된다.

 김춘수의 경우 시의 언어는 기호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그림과 같이 어떤 실재로서 만들어진 사물로서 그냥 거기에 존재시켜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싸르뜨르가 ‘시의 언어는 사물이다’는 산문의 언어와 다른 조립된 언어가 시의 언어이며, 이 언어들은 무엇을 의미하기 위하여 성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추상화된 구성물로서 단지 거기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란 그런 논리에 따르고 있다. 이렇게 자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시는 의미론적으로 어디에도 연관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게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언어를 균형과 불균형의 결합으로 시를 조립했다7). 「물또래」와 같은 작품이 전형적인 예다.


  물또래야 물또래야

  하늘로 가라

  하늘에는

  주라紀의 네 별똥 흐르고 있다.

  물또래야 물또래야

  금송아지 등에 업혀

  하늘로 가라.

                천 구백 팔십 일년 봄

                             大餘 金 春 洙8)


  ‘물또래’와 ‘주라기의 별똥’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금송아지 등에 업혀 하늘로 가라’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을 ‘ 하늘로 가라.’고 되풀이함으로써 무의미의 리듬을 형성시킨다. 모순된 이미지가 겹쳐져서 사물자체가 그냥 거기에 존재하고 있듯이 설명할 수 없는 시인의 내면 풍경이 존재하고 있다. 어떤 의미가 전제되어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몇 개의 이미지들이 병치되어 있을 뿐 그것들의 통일된 의미는 없다. 시간적 원리에 입각한 언어의 통사적 기능을 배제하고, 이미지들을 하나의 동시성의 공간 속에 둠으로써 그것들의 자유로운 움직임, 곧 무의미 뒤에 음향적인 잔상만 남아있는 형태다. 의미의 인식보다는 주술적 율동이 더 강함으로써 독자들은 ‘별똥, 주라기, 금송아지’ 등의 이미지를 통해 자기 나름의 의미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문덕수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벌써 20대부터 ‘맑은 허무’ 또는 ‘이름 붙이기’ 등으로 불리는 시를 썼고, 자신은 그런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 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심리적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9).


 이미지를 하나의 실재로 보는 점은 김춘수와 같고, 이런 작품을 허무의 응시, 가치중립, 불명의 존재로 보는 점도 김춘수와 다르지 않다. 이런 점은 문덕수의 제2시집『선·공간』(1963)에서 특징적으로 형상화된다. 연작시 <선에 관한 소묘,1~5>를 통해 잠간 살펴보자.


 벽 못에서

 풀려나온 노끈이

 누나의 모가지를 졸라 죽였다.

 그때의 누나의 눈알

 그리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창녀의 치마끈이 되었던

 한 가닥

 선이,

 경부선 레일로

 시장댁市長宅 뜨락의 살의殺意의 나뭇가지로

 10년전의 누나의 얼굴로

 돌아갈 수 없는

 한 가닥

 선이,   

                          「선에 관한 소묘,Ⅴ」에서


  우리가 이 시에서 어떤 명확한 의미를 추출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이 ‘노끈’으로, ‘치마끈’으로, ‘경부선 레일’로, ‘살의 나뭇가지’로 연상되는 수법은 앞에서 말한 ‘이름 붙이기’라 할까 아니면 일상적 관념이 거세된 심층심리의 세계가 자동기술로 나타난 형태, 그래서 결과적으로 ‘내면세계의 미학’이 시적 성취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선· 공간』은 순수시의 시사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할 시집이다. 문덕수의 이런 시 쓰기를 한 연구자는 이렇게 평한다.


  서로 이질적인 이미지를 병치시키며 그 이미지의 상호충돌에 의해 돌발적인 의미의 충격을 주는 수법을 구사하는 것이 그의 시법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이러한 시 작법은 당연히도 시인의 주제의식이라든가 세계관을 작품에 선행시키지 않는다. 어느 정도, 무의미 내지 탈의미의 시가 시도되는 것이다.10)


  사정이 이렇지만 김춘수가 말년에 ‘나의 무의미 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또 의미의 세계로 발을 되돌릴 수밖에 없게된11) 그런 변용이 문덕수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정제되어 가는 상태다.

 그래서 마침내 문덕수는 한국시는 이제 ‘사물자체가 아니라 사물이 거느린 관념을 보는 경향이 우리문화나 시창작의 대세가 되어 있습니다. 이 폐단은 개혁되어야 합니다’12)라는 탈관념의 단계에 다다라 있다. 그는 이런 시쓰기 기법을 장시「우체부」에 적용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2012년 시월 바로 현재 이 하이퍼시 운동을 ‘현대시 혁신의 뜨거운 대열’로 평가하면서 하이퍼시클럽이 벌리는 ‘본의의 세계에서 유의의 세계로 초월transcendence하고, 다시 두 세계를 통합하는 본의의 세계로 돌아오는 하이퍼적 몸짓은 한 마디로 경이롭다’고 극찬한다.

 3) ‘탈관념은 시가 아니다’는 반응에 대한 반론의 시학. 곧 보편성적 시론 형성 문제

 하이퍼 시 쓰기와 이론을 병행하는 심상운은 이 창작 기법을 ‘의식의 흐름이 들어있는 옴니버스omnibus 기법’으로 명명한다. 그는 30대의 문덕수가 쓴 문제적 평론 <내면세계의 미학>이 키워드로 내건 ‘대상에서의 해방’을 내면세계의 무의식의 표출이라면서 이것을 하이퍼 시 운동의 원천으로 삼는다. 그의 시작 노트를 참고 해 보자.


  하이퍼 시는 현실적인 공간과 시간의 질서를 뛰어넘는해방된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시에 담아보려는언어작업의 산물이 된다. 그 작업은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관념의 제로지대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서 현실이 배제된 순수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기호의 세게가 초현실의 새로운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존재의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져서 객관적 공감을 얻지 못할 때, 언어의 박제剝製가 되어 허무 속으로 빠져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노출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상의 세계, 객관적 공감, 언어의 박제’ 이다. 가령 해리포터 시리즈가 공상소설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권선징악이란 주제가 깔려있다. 시에서의 객관적 공감 역시 리어리즘의 논리가 완전히 배제되면 이해불가능이 된다. 언어의 박제도 의미의 소통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다. 시가 이렇게 나타날 때 아무리 무목적의 목적이 목적이라 하더라도 그런 시는 결국 독자로부터 멀어진다. 심상운은 이런 문제점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 ‘언어의 박제’현상을 피해야 한다고 스스로 경고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상 이런 3가지 점을 전제하면서 하이퍼 시 몇 편을 통해 현재의 실상을 검토해 보겠다.


  3. 하이퍼 시의 현장

 

 이 글의 중심 텍스트가 된 하이퍼시 클럽의 엔솔로지『하이퍼시』(시문학사. 2011)에는  시인 20인의 작품 100수가 수록되어있다.『시문학』이 2008년 5월부터 2009년 7월까지의 <특집 하이퍼 시>, 2009년 11월부터 2010년 2월까지 기획 특집으로 발표한 <확산 하이퍼 시>가 그렇다. 이런 신시 운동의 뒤에는 「매미소리」(『시문학』 2008,8)와 같은 시니피앙 하이퍼시를 창작하면서 지면을 대폭 할애한 『시문학』의 발행인 김규화의 시적 야심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 그룹의 합동시집이 간행된 바는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엔솔로지는 시사적 자리가 유별나다. 우선 시의 기법이 종래의 그것과 아주 다른 변화refraction에 기인하는 참신성 때문이다.


  나의 가방은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지

  내 몸의 태엽을 풀어 놓고

  나는 권태로운 생일을 관리한다.


  지하철 입구 젖은 양동이에 담겨

  나이 수대로 계산되는 꽃송이처럼

  나는 국수를 세며 먹는다.


  혼자 듣는 뻐꾸기 소리는 저녁과 함께 사라졌다.

  등을 보이지 않는 소리의 끝을 따라

  나는 거울 속을 통과하고 있다.

                               위상진 <가방 속의 탁상시계> 7~10연


이 작품은 현대 대도시인의 소외(‘나는 국수를 세며 먹는다’), 가방 속에 들어간 탁상시계 같은권태(‘내몸의 태엽을 풀어 놓고’) 를 문제로 삼으면서 그런 사회의 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감성보다 이성이 강하여(‘등을 보이지 않는 소리’), 주지적이고, 진술에 의하지만 시적 긴장이 늘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주제의식이 다선구조로 교차됨으로써 시적 상상을 여러 갈래로 풀어 재미를 준다. 도시의 삶을 문제 삼는 종래의 시가 감성에 너무 기대는 것과 많이 달라 감정의 추락을 막는다. 그래서 주지적이다. 이 엄혹한 현대를 감성으로 산다면 살아남을 자 얼마나 될까.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이 시대의 앞자리에 서 있다.

 신시문학파 중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다고 할 수 있는 심상운의 경우는 어떤가.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린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  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 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 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께를 감싸고 있다.

 

  (                                                                                     )

                                                         「맨살에 링크하기」 전문


이 작품은 네 연으로 되어있다. 제1연의 중심 이미지는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이고, 제2연은 ‘맨살의 향기’며, 제3연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이다. 그러나 제 4연은 (  )로 비어있다. (  )로 구성된 부분은 독자가 링크할 연이다. 그래서 작자는 작품 끝에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 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라는 주를 달아 놓았다. 이 작품은 하이퍼 시의 작법과 감상법의 기법의 한 제시로 보인다. 하이퍼 시의 시성詩性poeticity 담론을 충실히 수행하는 시 쓰기, 곧 상이한 이미지의 충돌에 의한 다선 구조, 독자와의 소통, 공간이동, 연결고리link로 주관적 의미와 정서로부터 탈출을 모색하면서 시적 상상력 확산에 의해 가독성可讀性 촉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작에 오면 이런 현상이 심화, 확대된다.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신전神殿의 원형을 복원한 화려한 채색 조각상 그래픽이 TV모니터 속에서 가볍게 빙빙 돌고 있는 오전 10시 30분


  횡단보도를 건너온 30대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구겨진 풍경화風景畵에서 청계산 숲속 산새 몇 마리 나와 삐삐삐 쪼로롱 삐삐삐 쪼로롱 허공에 반짝이는 초록물방울 뿌리며 빌딩사이를 지나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K화백이 지난 밤 하얀 화선지 위에 내려놓은 검은 묵향墨香의 산 속에서는 걸망을 맨 한 사내가 나와 사방을 둘러보다 징검다리를 건너 빨간 노을이 물든 여진女眞의 마을 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이른 봄 햇살의 눈부신 바늘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저수지 수초 속에서 발가숭이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나오는 그림을 그리다가 채소장수의 확성기 소리에 창밖을 본다

                                                       「오전 10시 30분의 그래픽」전문


이 시는 의식의 흐름이 중심이 된 옴니버스omnibus 기법이라 하겠다. 현실적 공간과 시간의 질서를 뛰어넘는 상상과 공상, 현실성이 배제된 이미지가 형성하는 초현실적 세계, 관념의 제로지대를 무의식의 표출에 의해 형상화하고 있다. 마치 한 사발의 물을 증류수로 만드는 작업과 같다. 도덕, 관념, 일상의 잡다한 현실이 사상捨象된 속에 한 이미지의 순수성이 다른 이미지와 병행되면서 그걸 뛰어 넘는 또 다른 유의의 세계 형성을 지향하고 있다, 이런 점은 대상에서 해방되고, 현실의 통제에서 벗어난 자율적인 순수이미지를 시적 가치로 삼고 있다는 점, 특히 하이브리드hybrid를 통한 단선구조의 탈출이라는 면에서 문학적 성취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증류수는 미네랄이 없는 죽은 물이라 우리 몸에 무해무득하다.

 이 시는 대체적으로 외래적 체취에 휩싸여 있다. 시제詩題에서부터 ‘그리스 신전’, ‘빌딩’, ‘여진 마을과 같은 어휘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시 전체를 지배하는 어조語調·tone 역시 외래(서구)적 성향을 띄고 있다. 얼른 조향의 <바다의 층계>의 시적 취의趣意·sense가 감지된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다분히 문화에서의 변화refraction의 축이 그 중심부에 가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굳이 프레이저Frazer의 논리13)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문학은 과거의 것이면서 오늘의 것이다. 지속과 변화, 이 원리는 시인이나 작품이 갖추어야할 역사성 그 자체다. 이런 점에서 심상운의 시 기법은 앞 시대의 조향의 어떤 면을 연상시킨다. 이런 성격은 그 나름의 지속성이라 해도 좋겠다. 그러나 조향의 시는 한국의 전통시 미학으로 보면 여러 가지 한계점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심상운의 시 역시 그런 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더니즘의 전형前型에서 벗어나 가상현실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디지털의 감각과 이미지를 결합하는 과정을 벌써 통과했고, 이제는 하이퍼 시라는 새로운 기법을 단단히 구축해 가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도전적 전위성을 띄고 있다. 그러나 그의 하이브리드적 시 쓰기는 그가 우려하는 것처럼 ‘언어의 박제’ 위험 앞에 놓여 있다.

 이 문제를 문덕수의 경우를 통해 검토해 보자. 우리가 잘 알듯이 문덕수의『우체부』의 기본 기법은 하이퍼 시의 그것이라 하겠다. 이 시의 캐릭터 우체부가 현실(현상)의 실상을 ‘불연속적인 공의 변화’라는 랜즈를 통해 응시하고 있다는14) 심상운의 지적에 우리는 동의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문덕수의 최신 시집『아라의 목걸이』(시문학사,2012)는 경우가 다르다. 이 시집에는 하이퍼 시의 기법에 기대고 있는 시가 많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시도 많다.


  칼칼하면 몽고정 물 한 모금으로 족하고

  땀 밴 옷 홀랑 벗어 애들처럼 다 내어놓고

  합포만에 알몸 던지리

  저만치 돌섬을 헤엄쳐 네댓번 안아보고

  중앙부두 쯤에선 그날의 의거의 발자국을 따라

  우체부 가방 덜렁거리며

  남성동 비탈길이 다 닳아 내려앉도록 오르내리리

  내 꿈의 무지개 마산서

  우체부로 떠돌고 싶다

                              「마산에 가고파」에서


 나는『아라의 목걸이』에서 「마산에 가고파」를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다. 우선 쉽고 재미있다. 누가 그건 당신의 시 감상수준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 문제는 시인과도 관계가 있다. ‘감상수준’ 이란 말을 한 속내에 은근한 부정적 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까닭이다. 한 시집이 명편으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리고 명편은 독자가 만든다. 평론가도 독자고, 일반 독자도 독자다. 독자가 많으면 명편에 가까워진다. 내가 왜 이 시에 강하게 끌렸을까. 아마 그건 내 무의의식 속에 잠재된 한국시의 지속적 요소, 어떤 의미의 발견 때문일 것이다. 아니 그 보다 이 시의 캐릭터 우체부가 내뿜는 무상의 행위, 다르게 말해 도덕 이전의 세계, 불가사의한 삶의 원리에 끌리는 언어 이전의 정서가 내 속의 낭만적 기질bohemian temper을 자극한  때문인지 모른다. 낭만적 기질은 인간의 본성, 본질적 의미가 아니던가.

 한 시대 문화가 외래적인 변화만 중시되고, 종적인 지속을 상실한다면 그것은 전통의 단절이 된다. 상이한 이미지의 상호 충돌에 의한 다선구조가 아닌 무엇, 쉽게 잡히는 주제가 독자를 끌어안았다고 한다면 그건 뒤진 정서 때문이라기보다 이 시가 내포하고 있는 보편적  인간 감성, 불변의 가치 때문일 것이다.

 사정이 이렇지만 이런 성격은 이 시집에 많은 시조가 수록된 사실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조가 가장 한국적인 시형식이라고 할 때 그 기법이 비록 하이퍼 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비한국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한국시의 미학을 대표하는 기본형식을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문덕수는 이와 같이 지속과 변화를 은밀히 아우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우리의 주목에 값한다.

 이 시집『아라의 목걸이』의 서문은 단 세 문장인데 그 두 문장은 ‘수록 시가 모두 하이퍼라고는 할 수 없지만 관련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연발생적인 부분도 있으나 시는 “가치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이다. ‘가치 있는 기록’이란 무엇인가. 이런 점을 말년의 김춘수가 ‘나의 무의미 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또 의미의 세계로 발을 되돌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그런 진술과 같은 의미로 본다면 비약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문덕수가 하이퍼적 시 쓰기만 하지 않기에, 나 같은 뒤처진 독자도 자신의 팔로워follower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시는 일차적으로 향수享受되어야 한다. 극 하이브리드 시가 독자와 거리를 둔다면 그건 언어의 박제와 유관한 현상일 것이다.

 이 솔의 하이퍼 시는 하이브리드로 인한 이런 우려는 없어 보인다.


  부드러운 막에 싸인 까만 눈으로 날 보고있다

  도우넛 모양의 알다발 속에서 까만 눈을 굴리며

  소주에 취해 이선생 몸보신으로 넘어간다

  이선생은 촉촉한 그 까만 눈을 보지 못한다


  인도 델리역 깡마른 짐꾼은 짐을 이고 뛰듯 간다

  붉은 상의 터번 아래 검고 깊은 눈동자

  맨발의 어린 소녀는 “기브 미 원달러”를

  인도의 검은 눈동자는 모두 축축하게 번져 있다


  검은색이 흙빛을 만나면 살아난다

  알다발 속에서 까만 눈으로 마주하는

  터질 듯 미끈거리는

  인도의 그 생명으로

  검은 껍질을 트고 꽃이 된 너 그리고 나

                              「도롱뇽 알 까만 눈이 나를 보고 있다」에서


이 시를 이루는 중심 이미지인 눈은 3개다. 첫째는 소주와 함께 이선생 몸보신으로 넘어가는 눈이고, 둘째는 인도인의 검은 눈이고, 셋째는 검은 껍질을 트고 꽃이 된 눈이다. 첫째 눈은 죽음의 눈이고, 둘째 눈은 비애에 젖은 눈이고, 셋째의 눈은 소통하는 상생의 눈, 생명의 눈이다.

 하이퍼 시의 특성을 ‘일상적으로 세계를 넘어선, 또는 초월의 등의 의미’, ‘틈이 있는 두 세계(일상적 의식에서는 결합될 수 없는 두 세계)가 연속 연결되는 형식’이라고 할 때15) 이 시는 이런 하이퍼성이 다소 약화된 상태다. 하이퍼 시의 극순수성, 언어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는 탈관념, 증류수와 같은 절대무의미성의 상황이 아니다. 세 개의 눈은 결국 생명의 눈, 죽음의 검은 빛을 트고 나와 꽃이 되었다. 단 한 순간일 뿐인 순수의 상태 자체에 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고귀함을 누리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극 탈관념에 이르지 않고, 가치 있는 기록, 곧 이 시는 생명의 고귀함을 테마로 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숨을 돌려 하이퍼 시 일변도의 논리를 뒤 돌아 보자. 신규호는 「하이퍼 시에 관한 나의 생각」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문제는 하이퍼 시도 시인만큼 시다워야 한다는 명제에 관한 나의 견해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하이퍼 시’가 표현해야 하는 IT시대의 시적 진실이 무엇이냐 하는 점을 먼저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다음에 이전 시대와 달라진 영상시대의 정서적 특질을 찾아서 그것을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16)


위의 인용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하이퍼 시도 시인만큼 시다워야 한다’는 말이다.  ‘··· 시도 시인만큼 시다워야 ··’는 말이 순한 논리의 모순에 빠져 있긴 하지만, ‘시다워야 한다’는 말의 밑바닥에 깔린 시의 의미가 하이퍼 시가 지향하는 탈관념시, 무의미시를 지칭하지는 않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 두 문장의 핵심어가 ‘표현’, ‘정서’이고, 시의 창작 ‘방법’이고, 이글의 결론이 ‘어디까지나 실험은 실험에 불과하다는 것과, 그러면서도 문화적 격변기에 구태를 벗고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시를 창작하고자 실험한다는 것은 시사적으로 뜻있는 일’이라며 시대와의 호응하려는 시도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하이퍼 시를 어디까지나 실험적 시 쓰기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솔의 작품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는 무의미 세계의 탈출, 가치 있는 기록을 선언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문덕수처럼 지속과 변화를 아우르는 상한象限에 그의 시가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다.

 이상 논의한 작품들 외에도 논의할 대상이 많다. 특히 하이퍼 시가 주로 산문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점인데 이 문제는 하이퍼 시가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소설적인 서사를 활용하고, 현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시의 영역을 확대하려는 시도는 아주 문제적이다.


  4. 마무리


 지금까지 신시문학파가 중심이 되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고, 그들이 간행한 문제적 합동시집『하이퍼 시』를 중심으로 그 문학적 위상을 내 나름대로 고찰해 보았다. ‘내 나름’이란 말이 문제일 수도 있지만 논의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하이퍼 시의 전위성·실험성, 새로운 기법의 모색은 30년대 시문학파가 순수문학을 옹호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일이 문학이 일차적 과제로 삼아야한다는 그 전위적 성격과 동일함이 발견되었다. 이런 점은 한국 시에 변화refraction을 주면서 한국시의 세계성, 곧 보편성을 추구하는 도저한 창작행위라는 점에서 시사적 의미가 크다.

 둘째, 하이퍼 시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현상에 호응하는 시의 반응이라는 점, 그리고 하이퍼텍스트 문학이 폐기처분한 글쓰기 기법을 종이 하이퍼 텍스트 문학으로 변용 수용함으로써 한국의 시문학의 외연을 확장하고, 그것을 의식의 흐름과 링크하여 인간의 심층감정을 소설적 서사를 활용하여 묘사하는 점은 다른 시가 시도하기 어려운 시적 기법이다. 이런 점에서 그 전위성을 평가할만하다.

 셋째, 하이퍼 시적 기법을 활용하면서 극순수·극탈관념과 다소의 거리를 두는 시 쓰기가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효과가 있음이 드러났다. 이런 점은 극하이브리드적 시가 언어의 박제가 될 수 있는 한계를 극복한 하이퍼 시의 다른 변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조심스러우나 꼭 지적해야할 문제는 문학의 큰 패러다임을 지속과 변화의 틀로 이해할 때, 하이퍼 시는 변화의 축이 너무 비대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전통성이 약화된 작품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이것은 30년대의 시문학파가 당시의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도  한국적 감성과 정서를 더 강하게 지속시켰다. 우리는 정지용의 시에서 시적 성취를 이룬 그 모범적 사례를 본다. 신시문학파의 경우도 시문학파와 같은 경우의 시인과 작품이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한계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 더 많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신시문학파의 사화집 『하이퍼 시』에는 이상에서 논의한 시인 외에 강영은, 고종목, 김금아, 김규화, 김기덕, 김영찬, 김은자, 박이정, 손해일, 신규호, 신진, 이선, 정연덕, 조명제, 최진연의 문제적 시가 있다. 그러나 이들 시인들의 작품에 대한 논의는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다. 함께 다룬다면 너무 큰 작업이 되기 때문이다.




 























분류별로 본 형이상시의 컨시트 시학


                                                  

                                                         최규철 (시인, 문학평론가)




   일반적으로 형이상시의 컨시트를 분류할 때 확대된 컨시트(the expanded conceit)와 응축된 컨시트(the condensed conceit)로  나눈다. 이는 조지 윌리엄슨(George Williamson)이 언급한 것으로서 여기서 윌리엄슨은『하나는 소위 우리가 말하는 확대된 컨시트인데,그것은 확장된 비유에 대한 설명이다. 또 하나는 응축된 컨시트인데, 망원경 속에 끼어 넣어 집약시킨 이미지로서 신속한 결합이나 갑작스런 대조에 의해 사상을 발전시킨다.』(George Williamson, The Donne Tradition, New york : Noonday Press, 1958, p.30)라 했다.


  다시 말하자면 확대된 기상은 맨 처음에 제시한 이미지를 점차로 확장하고 발전해나가면서 교묘하고도 기발하게 결합해가는 과정을 설명해 가는 기법을 말한다. 이런 확대된 컨시트는 존 던의 『고별사: 비탄을 금하며』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만약에 우리의 영혼이 둘이라 한다면,

곧은 컴퍼스의 다리가 둘인 것처럼 둘입니다. ;

그대의 영혼은 고정된 다리처럼 움직일 기미도 안 보이지만,

다른 한쪽이 움직인다면 움직이지요.


그리고 비록 그 다리는 가운데에 앉아있지만,

다른 쪽 다리가 멀리 배회한다면,

그 다리는 그쪽으로 기대고 귀 기울이면서,

나머지 한쪽 다리가 집으로 돌아올 때 똑바로 서지요.


당신 또한 그렇게 나에게 있어줄 것입니다,

나는 다른 쪽 다리처럼, 기울어져 달려야 하니,

당신의 굳은 신념이 나의 원을 정확하게 만들고,

그래서 내가 처음 시작한 곳에서 끝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고별사: 비탄을 금하며』의 일부


  이 시는 존 던이 1611년 자기의 부인 앤을 홀로 두고 프랑스로 떠날 때 던이 앤을 위해 쓴 시라고 알려져 있다. 사랑하는 부부의 관계와 역할을 컴퍼스의 물리적 작용과 상황으로 비유하여 아내를 고정된 다리로, 남편을 움직이는 다리로 교묘하게 연관시켜가는 과정을 빗대어 말한 컨시트 기법이다. 던은 이러한 컴퍼스의 기능을 부부의 관계로 결부함으로써 사랑의 다양한 성격을 점차로 확장해가며 설명하고  있다.


   아내의 고정된 다리는 움직이는 다리를 따라 함께 기울어졌다가 그 다리가 제자리로 돌아오면 다시 똑바로 선다. 즉 아내가 중심만 잘 잡고 있으면 남편은 아내의 중심 반경을 이탈하지 못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아내의 사랑과 믿음과 정조는 남편이 결코 아내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는 당위성을 컴퍼스의 기능을 통해서 시 전편으로 펼쳐가면서 확대된 컨시트의 전법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응축된 컨시트는 어떤 이미지나 관념을 정교한 유추과정을 통해서 엉뚱한 대조와 순발력 있는 결합으로 간결하게 표현하는 기법을 말한다.윌리엄슨은 이러한 응축된 컨시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존 던의『황홀』(The Ecstasy)과『성골』 (The Relique)을 예시로 들었다. 여기서 그 중『성골』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내 무덤이 다시 파헤쳐지고
어떤 두 번째 손님을 맞아들이려
(무덤도 한 사람 아닌 여러 사람에게 침대가 되는
그런 여자의 기질을 배웠기 때문에),
그 무덤을 파는 사람이
유골에 감긴 빛나는 머리카락 팔찌를 살필 때,
그가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고,
최후의 심판의 날에 두 사람의 영혼이

이 무덤에서 만나 잠시라도 머물 수 있는 방도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쌍의 연인들이

여기 누워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존 던의『성골』의 일부


  『성골』은 무덤 속의 유골에 감긴 머리카락 팔찌를 통해서 사후에 보이는 남녀 간의 고결하고 거룩한 사랑을 후세 사람들에게 남기고자 하는 뜻을 지닌 작품이다. 이 시는 3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연에서는 무덤 속에서 ‘유골에 감긴 빛나는 머리카락 팔찌’를 발견하고 최후의 심판 날 그 두 연인이 부활한 몸으로  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소망한다. 이것은 그들이 생전에 성결한 영적 사랑을 나눔으로써 이 일이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서다. 여자가 사랑하는 연인의 유골에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팔찌를 감아주었다는 것은 사랑의 영원성을 암시하는 일이며 장차 마지막 심판의 날에 함께 부활하여 재회의 기쁨을 나누자는 약속의 비의가 들어있다.‘유골에 감긴 빛나는 머리카락 팔찌’와 종말론적 영원한 소망과 사랑의 지속성이 이런 기발한 결합을 통해서 잘 표출되고 있다. 더욱이 2연에서는 이러한 고귀한 사랑이 예수에 대한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성스러운 사랑으로 발전하여 결국 성골로 인정받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

   존 던의『성골』은『고별사: 비탄을 금하며』에서처럼 부부 간의 사랑을 컴퍼스의 작동기능과 결합하여 한없이 외부로 펼쳐가는 확대된 컨시트와는 사ant 다르다,『성골』에서는‘유골에 감긴 빛나는 머리카락 팔찌’라고 하는 이미지가 거룩한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하는 엉뚱한 관념과 단번의 비유적 결합으로 그것이 성골이 되게 하는 과정을 내부로 집약시켜 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의 경우에서는 컴퍼스의 여러 가지 다양한 작동방법을 따라 부부 사랑의 다의적인 개념이 외부로 펼쳐지는 비유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면, 후자의 경우에서는 부활과 영생의 종말론 사상과 영원한 부부애가‘유골에 감긴 머리카락 팔찌’의 고정된 이미지와 순간적으로 결합됨으로써 내부를 향해 한 곳으로 집약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윌리엄슨의 이런 분류는 형이상시 컨시트의  전반에 걸쳐서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컨시트의 규모가『고별사: 비탄을 금하며』나『성골』처럼 시의 전체구조로 펼쳐있는 경우는 타당하지만, 엘리엇의『프루프 록 연가』에서 나오는‘나는 내 일생을 커피 스푼으로 되질해 왔다’라든가‘그러면 우리 갑시다, 그대와 나 / 지금 저녁은 마치 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와 같이 시의 지극히 한 부분에서 형성된 컨시트는 윌리엄슨의 분류법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에서 또 다른 측면에서 컨시트의 성격을 분류해 본. 즉 컨시트의 결합과정에서 경험한 인생의 정황과 그에 상응하는 심상 사이의 대조적 역학관계 등에서 본 분류법이다. 첫 번째는 두 개의 사물이나 개념 사이에서 겉으로 보기에 전혀 무관한 것들을 기상천외의 해학적인 발상으로 결합시키는 컨시트 기법이요. 두 번째는 서로 상반되고 양극화 된 것들이 당돌하게 결합된 컨시트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아주 동떨어지고  이질적인 것들을 상호 결합시킨 사례이다. 대체로 컨시트는 이상의 세 가지 분류의 범주 안에 든다. 이런 분류법은 필자가 다년간 형이상 시작 과정에서 실제로 경험하고 터득한 노하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완벽한 컨시트 기법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요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첫 번째는 컨시트가 ‘관념의 사물화’나 ‘사물의 관념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컨시트는 감정이나 사상을 시인의 통합적 감수성에 의해서 즉물화 하여 보다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과정에서‘관념의 사물화’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사물의 관념화’가 될 수도 있다. 이 말은 형이상시의 컨시트가 관념은 숨고 사물만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즉물화 된 컨시트로 발전하지 못한다면 그 컨시트는 실패작이다.


   두 번째는 기발한 기지(wit)와 지적 놀라움이다. 무엇인가 엉뚱한 착상에 의한 기지가 발휘되어야 하며 또한 그것이 지적인 놀라움을 주는 컨시트라야 한다는 것이다. 조안 베넷( Joan Bennett)이 컨시트를‘지적 등가물에 의한 정서적인 경험’(Joan Bennett, Five metaphysical Poet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4, p. 31.) 이라고 언급한 대로 형이상시는 학문적인 지식과 언어가 정서의 지적 등가물에 의해서 사물화 되어야 한다.

  

   세 번째는 컨시트의 부조화의 조화이다. 이 말은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이 형이상시를 비꼬는 말로 사용한 것인데‘한 종류의 부조화의 조화는 전혀 상이한 이미지의 결합이나, 외견상 같지 않은 사물 안에서의 불가사의한 유사성의 발견’(Samuel Johnson, The Life of English Poets Everyman Library, 1954 , p. 11)이라 했다. 이렇게 컨시트가 유사성이 없는 것들의 결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부조화의 상태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런 부조화가 시작과정(詩作過程)에서 순간적으로 조화로 탈바꿈하는 변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나마 무리수가 따르는 부적절한 부조화의 흔적이 남아있다면 아무리 기상천외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그것은 ‘부조화의 부조화’로 끝나게 되고 만다. 컨시트는 결합과정에서 강제로 갖다 붙이는 작업이므로 고도의 통합적 감수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딘가 어색한 부조화로 끝나고 만다.


   네 번째로 패러독스와 아이러니가 가미되면 될수록 좋다.  컨시트는 상반되고 양극화 된 것들의 결합이기 때문에 이런 결합물의 양끝이 멀다. 컨시트에서는 이런 양극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팽팽한 긴장이 있고 그 공간이 크면 클수록 밀도 있고 함축성이 있다, 따라서 그 결합과정에서 오는 빠른 시적 전환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양끝이 가장 먼 것이 패러독스와 아이러니이다. 그러므로 형이상시 컨시트의 패러독스와 아이러니는 시의 순발력과 밀도감을 더해주고 빛을 내게 하는 보석과 같은 수사법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필자가 분류한 컨시트를 유형별로 예시를 들어 풀어보려고 한다.


   1. 해학적인 기상천외의 발상에서 오는 컨시트


   이것은 기상천외의 발상에서 출발한 컨시트로서 때로는 다분히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콘텐츠가 들어있고 강한 통징이 가미됨으로 통쾌감을 준다. 얼토당토않은 소재로 시작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탄성이 나오고 동감을 유발하게 되는, 다시 말하자면 부조화의 조화를 가져오게 하는 경이로운 기법이다. 그래서 컨시트 중에서 가장 기지에 찬 놀라움과 펀(pun)을 가져다주는 비유법이다. 존 던의 『벼룩』등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가 있다. 이 시에서 존 던은 사랑을 거절하는 연인에게 아주 익살스런 풍자로 사랑을 설득한다. 벼룩이 우리 두 사람의 피를 빨았으니 우리는 이 벼룩 안에서 피가 섞였으므로 이미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벼룩은 우리의 침대(marriage bed)요 결혼식장(marriage temple)이라는 것이다. 이런 발상은 컨시트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우리 한국시에서도 종종 이련 유형의 컨시트를 찾아볼 수 있다.


쥐가 꼬리로 계란을 끌고 갑니다 쥐가 꼬리로 병 속에 든 들기름을 빨아 먹습니다 쥐가 꼬리로 유격 훈련처럼 전깃줄에 매달려 허공을 횡단합니다 쥐가 꼬리의 탄력으로 점프하여 선반에 뛰어오릅니다 쥐가 꼬리로 해안가 조개에 물려 아픔을 끌고 산에 올라가 조갯살을 먹습니다 쥐가 물동이에 빠져 수영할 힘이 떨어지면 꼬리로 바닥을 짚고 견딥니다 30분 60분 90분 - 쥐독합니다 그래서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살아가는 삶은 눈동자가 산초열매처럼 까맣고 슬프게 빛납니다.

      ―함민복의『샐러리맨 예찬』전문


   이 시는 언젠가 필자가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서도 가장 적합한 예시라 여겨지기에 다시 언급한다. 흔히‘박봉’이라는 말을‘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빗댄 데서 오는 월급생활의 이모저모를 자조적이며 해학적인 풍자로 이어진, 일종의 펀(pun)이다. 여기에는‘박봉’으로 살아가야 하는 샐러리맨의 애환과 쥐꼬리의 재주부림‘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정황을 교묘하게 결합한 컨시트가 드러나 있다. 박봉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런대로 그것으로 재주를 부려가며 잘도 꾸려가는 소시민적인 일상생활이 쥐꼬리라고 하는 파격적인 비유로 기발한 결합을 이루고 있다. 쥐꼬리는 샐러리맨들의 슬픈 생활정서를 예술적으로 객관화하여 구상화시킨 하나의 정서의 지적 등가물이요 또한 이런 엉뚱한 결합이 지극히 자연스런 유사점으로 접근하면서 부조화의 조화를 조성해내고 있다.

  쥐꼬리로 병속의 들기름을 빨고, 계란을 끌고 가고, 전깃줄에 매달려 허공을 횡단하기도 하고. 꼬리의 탄력으로 점프하여 선반에 뛰어오르는 등, 온갖 재주를 부리며 살아남기 위한 고투가 일종의 언어유희를 통해서 기상천외의 발상과 기지로 그림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 시를 굳이 윌리엄슨의 분류법으로 미루어 본다면 확대된 컨시트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쥐꼬리의 다양한 기능을 따라 샐러리맨들의 생활의 이모저모를 점차로 펼쳐 나가면서 재치있게 박봉생활과 쥐꼬리의 재주를 익살스럽게 확장해가고 있다.


   다음은 박진환의 풍시조『입으로 모기 잡나』에서 이런 유형의 컨시트를 찾아볼 수 있다.


피를 빨아먹는 모기 잡는데 의견이 분분하다

정치가 어떻고 법이 어떻고 대통령이 어떻고

입으로 모기 잡나?  F킬라를 뿌려야지


   이런 짧은 3행시 속에서 형이상시의‘사물의 관념화’나 ‘관념의 사물화‘를 기대하기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런 종류의 전형적인 컨시트 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이 시는 그 전개과정에서 전반적으로 일종의 메타포로 이어지고 있는데. 피는 착취물, 모기는 권세자들. 입은 탁상공론, F킬라는 근본적인 개선책을 말한다. 여기 F킬라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개선책은 올바로 시행되는 정치나 법이나 권력일 수 있고 더 나가서는 국민의 도덕과 윤리의 기본정신일 수도 있다. 아무튼 후자와 같은 개념들이 전자와 같은 피, 모기, 입, F킬라 등의 이미지들과 순발력있는 결합을 통해서 컨시트의 절묘한 경지를 엿보게 한다. 이런 연결고리는 1연의 사물화에서 2연의 관념화로, 다시 2연의 관념화에서 3연의 사물화로 교묘하게 맞물려 교합시켜 가면서 형이상시 컨시트의 통재질서를 유지해 가는 묘미가 있다. 3연의 ’입으로 모기 잡나?  F킬라를 뿌려야지‘는 이 시에서 압권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부정과 비리를 발본색원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떠드는 정치인들과 법조인, 언론인들의 목소리를 비판하면서 ‘F킬라를 뿌려야지‘라 한다. 여기에서 관심 있게 보아야할 부분은 옛날에는 F킬라를 대롱을 물고 입으로 뿌리던 일을 상기하면서, 공론(말)을 벌리는 일과 F킬라를 뿌리는 일들이 입에서 이루어진다는 동질성과 입에서 나오는 공론(말)과 F킬라가 다르다는 이질성을 미묘하게 대비시킴으로써 격조 높은 형이상시의 컨시트를 선보이고 있다.

   박진환의 풍시조에서는 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비롯해서 부조리와 구조악, 윤리와 도덕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부정부패를 꼬집고 타이르고 개선을 회유하는 통징의 목소리를 극대화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감안해 볼 때 풍시조에 의한 기발한 컨시트와 통징기능이 다시 한 번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고 문제해결을 위해서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2. 양극화에서 발생하는 컨시트


  서로 상반되고 양극화 된 진기한 상념이나 의미, 그리고 이미지 등이 대담한 결합을 통해서 뜻밖의 유사성 내지는 하나의 새로운 동질성을 창출해내는 수법으로서 이질성에서 동질성으로, 무관성에서 유관성으로, 비유사성에서 유사성으로 잘 어우러져서 새로운 하나가 되게 하는 컨시트 기법을 말한다. 이런 유의 컨시트는 거리가 먼 양극 간의 대담한 결합에서 이루어지므로 다분히 압축적이다.


  현시대가 사회적으로는 노사분규, 빈부격차, 지역갈등, 여야대립, 남북대치 등, 해결해야 할 양극화 문제가 산적해 있고, 개인적으로는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이데아와 현상, 신과 인간, 소아와 대아,  현실과 소망, 눈물과 웃음, 선과 악 등, 양극화 문제가 위험수위에 달해 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선구자적 사명을 띤 시인들은 양극화에 따르는 상위개념과 하위개념의 차등적 가치관을 넘어서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해가야 할 시대적 당위성을 깨닫고 그를 위한 통합적 감수성을 길러야만 살아남는다. T. S. 엘리엇은 그의 평론 에세이‘형이상시인(1921)’에서 ’사상을 장미의 향기처럼 직접으로 느끼는‘ 통합적 감수성을 언급했다. 시인의 숙성된 통합적 감수성은 양극으로 분열된 어떠한 경험도 하나로 융합하고 각각의 단편적인 경험들을 총체적인 새로운 경험으로 재창조해내는 형이상시의 컨시트야 말로 오늘 이 시대에 사는 시인들에게 필요불가결의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양극화에서 발생한 컨시트의 사례를 다음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김수영의 『사랑』전문     


   이 시에서는 ‘나와 너’의 상반된 양자구도의 사랑을 하나로 결합시킨 컨시트의 기지를 보여주고 있다. 1연에서 언급한 영원불변의 사랑이 2-3연에서는 잠시 켜졌다가 사라지는 번갯불에 금이 간 얼굴 같은 가변적 사랑으로 서로 대치(對置)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나의 불변적인 사랑과, 순간적으로 꺼졌다 살아났다 하는 너의 가변적인 사랑에 대한 모순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라고 하는 것은 ‘너와 내’가 똑같은 입장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입장에서도 나의 사랑은 변치 않고 있지만, 너의 사랑은 입장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너를 통해서 배운 나의 사랑은 불변의 사랑인데, 불변의 사랑을 가르쳐준 너의 사랑은 가변적인 사랑이라고 하는 아이러니이다. 오늘날의 현실사회는‘나와 너’와 같은 얼굴과 몸통의 이중구조로 구성된 스핑크스와도 같은 괴물이다. 이렇게 사랑의 속성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즉 사랑의 영원성과 찰나성. 사랑의 안정성과 불안정성. 사랑의 기쁨과 슬픔, 사랑의 밝음과 어둠이 바로 그것이다. 이 지상에서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아가페의 사랑과 불완전하고 찰나적인 세속적 사랑이 한 데 어울리기도 하고 서로 충돌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조화를 이어간다. 이러한 사랑의 상반된 양극화에서 형성되는 폭력적인 결합이 형이상시의 컨시트이다.

 

이 드레스 숍에서는

마네킹의 손가락이 유연하다.


잘 지어진 의상은

죽은 사람이 걸쳐 입어도

천에서 혈액이 흐르고 체온이 감돈다.


사람의 살갗으로 살아나서

바람 속에서 살랑거리다가

점점 투명해져서

졸졸졸 시냇물이 되어 흐르고

마지막은 속살로 흡수되어 없어진다.


비록 마네킹이라 해도

햇빛으로 지어입은 옷은

피부와 한 살이 되고

날개가 되어 훨훨 하늘을 나른다.


      ―최규철『살아있는 옷』전문


  마땅한 예시를 찾아낼 수 없어 부득불 졸시를 언급하게 된 점 이해해 주기 바란다. 불후의 예술성이 있는 의상은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있다. 그 옷을 걸쳐 입은 사람은 생명이 없는 마네킹과 같은 인간이 입어도 그 의상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다. 그러한 발전단계를‘천에서 혈액이 흐르고 체온이 감돈다’에서‘사람의 살갗으로 살아나서’로 또 거기에서‘마지막은 속살로 흡수되어 없어진다’로 전개해 간다. 처음에는 천에서 혈액과 체온이 생겨나고, 다음에는 그것들이 죽은 사람의 피부에서 살아나서, 마지막으로는 피부에서 속살로 흡수되기까지, 그 의상과 사람이 한 몸으로 결합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고 이어 옷이 날개가 외어 천국으로 훨훨 날아가는 데 이른다. 여기서 최고가는 의상의 예술적 경지는 햇빛으로 지어 입은 옷을 말한다. 즉 이러한 빛의 옷을 입으면 마네킹과 같은 죽은 생명도 부활하여 천국인의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 즉 빛의 옷과 마네킹과의 이런 기상천외의 결합으로 영생하는 몸이 될 수 있다는 데서 컨시트 기법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유의해서 볼 것은 죽은 마네킹과 살아있는 옷과의 양극화된 구조적 결합에서 컨시트로서의 특색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빛의 옷’에 대하여 몇 구절 인용해 본다면 시편에서는‘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시104 : 2) 라 했고, 또 예수가 변화산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변형된 상태를 성경은‘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영혼의 태양이며 그 옷은 빛이라고 하는 표상적인 뜻을 지녔다. 이러한 빛의 옷을 입으면 영적으로 죽은 자가 중생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진리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연에 ‘비록 마네킹이라 해도 / 햇빛으로 지어입은 옷은 / 피부와 한 살이 되고 / 날개가 되어 훨훨 하늘을 나른다.’라 했다.


   3. 동떨어진 결합의 컨시트


   이것은 겉보기에는 전혀 비슷한 점이 없고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나 사념에서 뜻밖의 비슷한 점과 조화를 찾아내고 무관성에서 연관성으로 연결시켜 주는 기지에 찬 컨시트 비유법이다. 이런 컨시트는 두 개의 서로 비슷한 자연스런 관계에서 접근점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비슷하지 않은 부자연스런 관계에서 접근점을 찾아내는 순발력 때문에 여기서 오는 시적 감동은 자못 충격적이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호기심과 감탄을 유발하는 데 효과적인 시법이 된다.‘모든 심장은 벽시계가 되어 / 가슴 속에 걸려 있다. / 동맥으로 흐르는 낮 시간이 / 말초혈관 구석구석까지 번졌다가 / 밤 시간이 되면 다시 정맥을 타고 / 심장으로 돌아온다’(졸시 『아내의 벽시계가 멎던 날』의 일부)에서 얼핏 보기에는 벽시계와 심장, 이 두 개의 사물들 사이에는 서로 무관한 관계인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처럼 벽시계도 똑딱거린다는 유사점이 있고, 또 심장이 우리의 몸 구석구석까지 .동맥을 통해서 산 피를 흘러 보냈다가 정맥을 통해서 죽은 피를 되돌아오게 하는 것처럼 시계도 낮에는 살아있는 시간으로 흘러갔다가 밤에는 죽은 시간으로 되돌아온다는, 즉 아내의 살아있을 때의 밝은 시간과 무덤속의 캄캄한 시간을 서로 대비해서 본 것이다. 물론 산 피와 죽은 피, 산 시간과 죽은 시간이라고 하는 양극성이 보이긴 하지만 이것은 이미 유형 2에서 언급한 바 있고, 특별히 유형 3에서 언급하려고 하는 것은 심장과 벽시계, 피와 시간이라고 하는 사물과 개념 사이의 관계이다. 이들 사이에는 하등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없지만, 유사성이 없는 데서 유사성을 찾아 결합시킨 컨시트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서로 관련성이 없는 것들의 결합으로 된 컨시트이다.


  이와 같은 사례를 다음 두어 편의 예시를 통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내 가슴 냄새 먹고 크는

지어미의 눈감은 눈이

내 냄새 다하면 초승달로 눈뜰까


눈감은 속으로

내 천길 가슴 속은

얼마나 더 많은 냄새로 남아 있을까


지어미 다 먹고 내 맑게 바래선

한 하늘 트인 가슴이 되면

지어미는 보름달로 푸르게 떠오를까


           ―박재릉의『지어미』전문


  여기서 ‘내 가슴 냄새’란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대충 이것은 남편의 사랑. 신뢰, 쌓인 정 등의 발산으로 집약해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관념적인 개념이‘가슴의 냄새’라고 하는 후각 이미지로써 부부간의 은밀한 애정의 감촉과 심도를 나타내주는 일종의 메타포로 변용된다. 눈을 뜨고 눈을 감는 단순한 아내의 감정유로에서도 남편의 사랑에 상응하는 아내의 깊은 신뢰도가 가시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부부간의 사랑과 반응의 역학적인 상관관계가 서로 맞물리면서 점차로 고조되어 가는 점층법적 메커니즘의 구조적인 틀이 눈에 띈다. 1연에서는 ‘내 가슴의 냄새’가 가슴 표면에서 일어나는 데 반해 2연에서는‘내 천길 가슴 속’ 깊은 곳까지 가득 채우는 냄새로 전개되고, 더 나가 3연에서는‘한 하늘 트인 가슴’의 높은 하늘까지 가득 차오르는 냄새로 발전시켜 나갔다. 또 한편 아내의 반응도 1연에서는 초승달로 눈을 떴다가 점점 불어나서 3연에서는 보름달로 눈을 뜨게 된다. 이러한 시 수사법 상의 점층적 강조법은 나이가 들수록 더해지는 부부애의 신비를 보여주는 데 이 이상의 좋은 레토릭은 없다

   이것이 바로 상호 비교할 수 없는 엉뚱한 이미지들, 곧 남편의 가슴 냄새와 그에 상응하여 점점 눈을 크게 뜨는 아내의 반응을, 나이가 더할수록 더욱 돈독해지는 부부간의 정을, 실효성 있게 서로 융합시켜 컨시트로 발전시킨 예라 하겠다, 이렇게 컨시트는 피차 어우러질 수 없는 모든 것을 시인의 통합적 감수성으로 한 데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부조화의 조화를 경험적으로 창출해 낸다. 이러한 컨시트 미학을 통해서 새로운 시세계가 점차로 확대해 가게 된다.

   특히 이 시에서는 내 가슴의 냄새와 아내의 눈을 감고 눈을 뜨는 이 두 이미지가, 나이가 들면서 심화 되어가는 부부애의 개념과 순발력 있는 결합으로 집약되어가면서 응축된 컨시트의 전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시의 점층법적 기법이 더욱 시의 주제를 집약적으로 구축해가는 기능을 통해서 구조적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시 한 편을 더 예시로 들고 마치려 한다.


세상은 詩人의 손끝에서

나비가 된다

날개접어 쉬어갈 곳 없는 거리에는

죽은 言語들이

落葉처럼 널브러져 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人間의 江

江을 건너다 추락한

나비의 悲鳴이

발자국 따라 蘇生하고 있다

奇蹟의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목진숙의『꽃』전문


   시인들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시인데 그 시로써 거대한 세상이 한갓 미물에 불과한 나비로 변하게 된다. 1-2행에서‘세상은 詩人의 손끝에서 / 나비가 된다’가 바로 그것이다. 세상을 나비가 되게 한다는, 그런 당치도 않는 두 개의 사물 간의 결합이 시인의 손끝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세상을 한낱 유약한 나비로 둔갑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시인의 통합적 감수성으로만 가능하다. 이런 결합이 곧 형이상시 컨시트의 묘미이다.

   이 시에서 세상은 쉬어갈 곳 없는 나비가 되어 낙엽처럼 나비의 시어들이 우수수 떨어져 지리멸렬되고 있다는 허무함을 나타내 보인다. 뿐만 아니라 도도히 흐르는 인간의 강물 속에 추락하여 비명을 지르는 절박감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실망으로 끝나지 않고, 그 무엇인가의 발자국 따라 다시 소생(蘇生)하게 되리라는 예언자적인 소망도 가진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은 비록 기댈 곳 없는 지구촌이 나비의 시어(詩語)들처럼 소멸되어 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인류가 역사의 강물에 빠져 사멸될 직전에 목숨을 걸고 절규하는 시인들의 비명으로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는 것이다. 이 비명이 바로 시인들의 손끝에서 나오는 나비의 비명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이 시대가 세계를 안고 고민하는 시인들의 외침소리를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시의 힘이 발휘되는 날, 시로써 이 세상을 소생케 할 기회가 오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나비와 세상의 결합을 통해서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인류 최후의 날을 체감하게 하는 형이상시의 기발한 컨시트가 성립된다. 특히 이런 컨시트가 이 시의 서두로부터 부조화로 시작했다가 전편에 흐르는 시의 논리적 전개를 통해서 전체적인 짜임새와 심벌과 메타포 등의 적절한 배합이 시적 장치가 되어 전반적인 시의 조화를 이루게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조지 윌리엄슨이 분류한 두 가지 유형의 컨시트와 필자가 분류한 세 가지 유형의 컨시트 시학을 살펴보았다. 윌리엄슨은 형이상시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둔 분류법이었다면 필자는 다년간 형이상시를 써오면서 경험상으로 터득한 분류법이다.


  그러기 때문에 형이상시 작법과정에서 도움이 되는 분류법이라 할 수 있다. 시작과정에서 분류별 소재나 대상을 낱낱이 구분하여 시작을 도모한다면 올바른 형이상시에 대한 이해가 되고 따라서 시작과정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특히 컨시트는 그 구조상 다의적이고 압축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있으므로 이런 분류상의 노하우를 터득해 놓으면 컨시트 작성과 활용에 매우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한국현대시인협회 홈페이지
글쓴이 : 사무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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