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22. 14:32ㆍ살다보니 이런일이/시(詩)를 위하여
저자 : 이승하 / 홈페이지 : http://www.poet.or.kr/lsh
다섯 시인을 중심으로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성'(1)ㅡ1930-70년대
1. 문학은 예로부터 '성'에 관심이 많았다.
성욕은 식욕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며 자연적인 본성에 속한다. 남녀의 성적 결합은 생체 리듬의 촉진제 구실을 하고 자손을 번식시켜 가족공동체를, 나아가 사회집단을 이루게 한다. ‘性’이란 한자어의 뜻은 여러 가지이다. 철학에서는 사람이 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본질을(稟性), 불교에서는 만유의 본체를 가리키는 말로 쓴다(本性). 사람의 타고난 성질을 가리키기도 하고(性情), 자연 그대로의 본바탕을 가리키기도 한다(野性). 그 가운데 하나가 ‘성별 성’으로 새길 때의 ‘성’으로, 남녀를 구별할 때 쓰고, 성욕과 성애를 직접 가리킬 때 쓰기도 한다. 오늘날 ‘성’은 이 마지막 뜻으로 가장 많이 쓰고 있는 듯하다. 성교육, 성희롱, 성폭력, 성차별, 성생활, 성전환, 성관계, 성행위, 성 역할, 성 윤리, 성 본능, 성(적) 담론, 성적 충동, 성적 매력, 성(적) 도착, 성적 호기심…….
현대인은 ‘성’이 들어가는 수많은 낱말을 일상적 삶 가운데 폭넓게 쓰고 있는데, 이것은 그만큼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고 또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성’을 영어로 번역해서 쓴다면 뜻이 제각기 다른 nature, sex, sexuality, gender(‘nature’는 본성이나 천성을 가리킬 때, ‘gender’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구분할 때 주로 쓴다. ‘sex’는 성교와 성욕을, ‘sexuality’는 성별과 유성(有性) 및 성적 문제를 지칭할 때 주로 쓴다. 따라서 본고에서 쓰는 ‘性’은 ‘sex’라고 보면 된다.) 가운데 하나를 골라 써야 할 터인데, 일상어에서의 빈도는 nature와 gender보다 sex와 sexuality가 좀더 높을 것이다.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을 읽을 때도 성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약화되지 않는다. 다소 과장해서 말한다면 모든 문학 작품은 사물로부터 온 자극에 대한 저자의 반응이며, 독자에게 자극을 주기 위한 저자의 지적 행위이다. 동서고금의 문학 작품 가운데 심리적 측면에서 성을 다루거나 성행위의 장면을 직접 묘사하거나 간에 성을 다룬 것은 엄청나게 많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14세기)과 작자 미상의 『금병매』(중국 명대)의 경우가 그렇듯 대단히 외설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고전의 반열에 들어 수세기에 걸쳐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것도 적지 않다. 우리 문학에서도 대중문학이건 본격문학이건, 역사소설이건 농촌소설이건, 도시시건 해체시건 성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문학 작품 속에서 집요하게 이루어져왔다.
성에 대한 담론이 현대인의 전유물이 아니듯이 문학적 묘사가 현대문학의 전유물은 아니다. 우리 고전문학을 봐도 ‘성’은 표현 방법이 오늘날과 다소 달랐을지언정 유구한 역사적 흐름을 유지해왔다. 아내가 부정을 저지르는 현장을 본 용의 아들 처용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역신을 감복케 한 내용이 담긴 신라 때의 향가 <처용가>를 비롯하여 고려 때의 속요 <서경별곡> <쌍화점> <이상곡> <만전춘> 등은 모두 고려인의 자유연애사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특히 <쌍화점>은 불륜의 세계를 꽤나 음란하고 퇴폐적으로 그려 조선조 초기의 양반들로부터 ‘남녀상열지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조선 전기의 패관문학과 한문소설, 조선 후기의 사설시조, 평민가사, 잡가, 한글소설, 한문소설, 판소리 사설, 민속극 등에도 농도 짙은 성 묘사 장면이 드물지 않게 나온다. 영/정조 때의 소설 <춘향전> 및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의 첫날밤 장면이나 판소리 <변강쇠가>의 정사 장면은 성행위 묘사가 대단히 구체적이어서 외설 시비를 불러일으킨 현대문학 작품들(한국 현대문학 작품 중 외설 시비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으로 박승훈의 『서울의 밤』, 염재만의 『반노』, 조성기의 『욕망의 오감도』, 조동수의 『꿈꾸는 열쇠』,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등의 장편소설을 꼽을 수 있다. 시집으로는 김영승의 『반성』이 있다.) 에 못지 않다. 표기 문자와 장르, 시대별 계층별 표현 방법에서 차이를 지닌 대로 ‘성’은 우리 문학사의 다양한 토양 속에서 다종의 씨가 뿌려졌고, 보기 좋은 결실도 상당수 맺어왔다.
20세기에 들어와 성애에 대한 표현은 훨씬 더 노골적이 되었고 다수의 작가에 의해 폭넓게 진행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이 시작되고 6. 25전쟁 이후에는 미군이 상주하면서 성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자유로운 미국의 대중문화가 유입되어 그 영향이 적지 않았고, 성개방이니 성해방이니 하는 외세의 바람까지 계속 불어닥쳐 성에 대한 우리의 금기는 대부분 깨어져갔다. 소설에서의 외설적 표현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가능케 한다. 그러므로 다분히 상업적 전략에 입각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과거 신문연재소설 가운데 정사 장면을 여러 날에 걸쳐 묘사한 작품이 많았던 것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시 분야에서는 성이 어떤 양상으로, 어떤 방법론에 입각하여 묘사되어온 것일까. 성애 장면을 그린 시 작품 분석을 통해 성적 이미지가 어떻게 변모되어왔으며 시인 각자의 방법적 전략은 또 어떻게 달랐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는 성행위ㅡ서정주
현대 시문학은 1930년대에 첫 황금기를 맞이한다. 그 시기에 생산된 수많은 시 가운데 성행위 장면을 직간접적으로 그린 작품은 서정주의 『花蛇集』(1941)에 실린 몇 편의 시가 대표적인 작품이 아닐까 한다.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콩밭 속으로만 작구 다라나고
울타리는 막우 자빠트려 노코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
사랑 사랑의 石榴꽃 낭기 낭기
하누바람 이랑 별이 모다 웃습네요
풋풋한 山노루떼 언덕마다 한마릿식
개고리는 개고리와 머구리는 머구리와
구비 江물은 西天으로 흘러 나려……
땅에 긴 긴 입마춤은 오오 몸소리친
쑥니풀 지근지근 니빨이 히허여케
즘생스런 우슴은 달드라 달드라 우름가치
달드라.
ㅡ<입마춤> 전문
이 시의 첫 연은 소녀가 소년을 유혹하면서 달아나는 장면이다. 오라고 손짓을 하면서 콩밭 속으로, 울타리를 자빠뜨리며 달아나던 소녀가 어느 시점에 달리던 것을 멈추었을 것이고, 그때부터 벌어진 일이 제2연에 펼쳐져야 할 것이다. 서정주는 그러나 다음 연에서 ‘자연 속의 인간’을 그리고 있다. 사랑의 석류꽃과 별은 두 사람이 누워서 쳐다보는 것으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고 있다. 하늬바람은 정사 후 두 사람의 육체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암시하고 있으며, “山노루떼 언덕마다 한마릿식”은 암내를 풍기는 발정기의 노루를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은 제2연의 마지막 행이다. 머구리는 개구리의 옛말이다. 개구리와 개구리가 붙어 교미를 하듯 자연 가운데 한 몸을 이룬 남녀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땅(이랑)과 하늘(별)이 일렁여 우습게 느껴질 정도도 격렬한 정사 장면이건만 자연 속의 범사로 처리한 시인의 기법이 놀랍다. 마지막 연은 정사 장면 자체를 암시하고 있다. 두 사람 중 누군가가 몸서리칠 정도로 땅에 긴긴 입맞춤을 할 리도 없고 이빨이 허옇게 되도록 쑥을 씹고 있을 리도 없다. 혼신의 힘을 쏟아서 행한 정사 신을 이런 식으로 땅과 쑥이라는 자연물로 대치하여 묘사한 것이다. 시의 마지막에 가서 소녀는 짐승스레 웃고 있고 나는 그 웃음을 울음같이 달게 느낀다. 울음과 웃음의 동일시도 정사와 연관시키지 않을 수 없다.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새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 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다라나며 나를 부르고……
强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끌른 대낮에
우리 둘이는 웬몸이 달어……
ㅡ<대낮> 전문
<대낮>도 정경 묘사를 비슷하게 하고 있다. 대낮에 님은 꽃밭 사이로 난 길을 달리고, 나는 코피를 흘리며 뒤쫓는다. 결국 이들이 웬 몸이 달아서 하는 일은 성행위일 수밖에 없다. 이 시에도 행위 자체에 대한 묘사는 암시되어 있을 뿐이고, 두 사람이 달려가는 길에 대한 묘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 사이에 난 길이 있다느니, 핫슈(아편)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렁이 같은 길이 있다느니 하면서 길을 그리고 있는 듯하지만, 길의 끝에서 두 사람은 성행위를 한다. <正午의 언덕에서> <麥夏> <花蛇>에도 성행위를 암시하는 구절이 들어 있고, 그 행위는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보지 마라 너 눈물어린 눈으로는……
소란한 哄笑의 正午 天心에
다붙은 내 입설의 피묻은 입마춤과
無限 慾望의 그윽한 이 戰慄을……
ㅡ<正午의 언덕에서> 부분
땅에 누워서 배암같은 게집은
땀흘려 땀흘려
어지러운 나―ㄹ 업드리었다.
ㅡ<麥夏> 부분
크레오파투라의 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슴여라! 베암
우리 순네는 스믈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슬……슴여라! 베암.
ㅡ<花蛇> 부분
서정주가 『花蛇集』에서 성적 이미지를 이토록 많이 구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연과 혼연일체를 이룬 가운데 진행되는 남녀 성행위의 자연스러움과 야성적 본능의 건강한 생명력이 이들 시를 아우를 수 있는 큰 주제가 아닐까. 즉, 이 시들은 생명의 원초적 본능에 대한 찬가이다. 서정주가 1930년대에 쓴 이런 시를 두고 반제국주의나 반모더니즘의 결과물로 볼 수도 있겠지만("서정주의 <花蛇> <대낮> 등의 시에 나타난 악마적, 야성적, 원시적 생명 추구로서 성의 표현은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민족을 억누른 힘에 대한 저항의 우회적 표현인 것이다."―김경복, <현대시의 성적 표현과 이데올로기>, 『풍경의 시학』(도서출판 전망, 1996), 95쪽. "서정주는 1930년대 모더니즘의 도시성과 문명성에 대항하여 생명의식을 고양시킨 시인이다. 이는 1930년대 당대의 문학적 관습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해된다."―고현철, <현대시의 성 표현과 주제의식>, 『구체성의 비평』, 도서출판 전망, 1997, 28쪽) 인간의 본성을 성행위 장면의 은유적 표현을 통해 추구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온당한 시각일 것이다. 서정주가 정작 반대하고 싶었던 것은 유교의 성 윤리이다. 유교는 남녀의 유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한편 여성의 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서정주는 출산과 양육에만 여성의 의미를 둔 유교의 윤리의식에 반감을 품고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여성의 참된 모습을 자연 속에서의 성행위 묘사를 통해 해본 것이다. 서정주의 이런 시에서 여성은 성의 수혜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리더이다. 시적 화자(남성)를 유혹하여 어지러워하는 화자를 땅(여성)에 엎드리게 한다. 씨를 뿌려야지 생명이 움트게 되는 법, 인간이 성행위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연과 일체를 이룰 수 없다고 본 것이 서정주의 생명의식이다.
3. 성을 사고 파는 뒷골목의 풍속도ㅡ전영경
암흑기 일제 말기와 광복 후 해방 공간의 어지러운 이데올로기 대립, 남북한 단독 정부 수립과 6. 25전쟁 및 휴전협정 조인으로 이어지는 10여 년 동안의 우리 시에서는 ‘성’ 이미지에 대한 탐구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광복 후 우후죽순처럼 발간된 시집은 대부분 일제 말기의 가혹한 조선어말살정책으로 인해 발간을 미루어오던 시집이었던 만큼 이른바 ‘순수시’들이었고, 그 뒤에는 양대 이데올로기를 대변한 시→전쟁 수행기의 전선문학→전후 모더니즘 시들이 계속적으로 씌어졌다. 반공정신 강조와 전쟁의 참상 홍보와 전후의 황폐함을 노래한 시 가운데 ‘성’이 들어설 의지는 거의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송욱의 『誘惑』(1954)과 전영경의 『金山月女史』(1958)가 나옴으로써 1950년대에도 시인의 성적 이미지 탐구 작업이 계속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薔薇밭이다.
붉은 꽃잎 바로 옆에
푸른 빛이 우거져
가시도 햇살 받고
벌거숭이 그대로
춤을 추리라.
눈물에 씻기운
발을 뻗고서
붉은 해가 지도록
춤을 추리라.
薔薇밭이다.
핏방울 지면
꽃잎이 먹고
푸른 잎을 두르고
기진하며는
가시마다 살이 묻은
꽃이 피리라.
ㅡ<薔薇> 전문
시인의 등단작인 <薔薇>는 『文藝』8호(1950. 3)에 실려 있다. 이 시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언급한 바 있고("이 시는 선명한 색채감각과 성적 이미지가 주는 강렬한 인상 때문에 자주 논의되었고, 그의 시세계의 한 부분이 이 시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 장미의 붉은 꽃잎과 푸른 잎사귀, 서슬 푸른 가시와 햇살, 핏방울과 푸른 잎, 꽃잎과 피부 색깔은 대개 보색의 관계로, 그 이미지가 강렬하다. 이렇듯 대조적인 원색이 주는 강렬함은 독자의 눈길을 쉽게 끌어들이는 힘을 발휘한다.”―이승하, <풍자, 자기 비하의 아이러니>, 『한국의 현대시와 풍자의 미학』,문예출판사, 1997, 13~14쪽), 『誘惑』의 전체 시세계에 대해서도 평가를 한 바 있어( “‘붉은 입술’ ‘불길’ ‘선지피’ ‘바다’ 등 강한 색조를 띠고 있는 시어들은 동적인 이미지가 강해 생명체의 활발한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청유형과 명령형, 감탄사와 느낌표의 잦은 등장도 시의 분위기를 화려하고 활기차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하지만 화자는 모두 죽음의 이미지를 지닌 인물이며,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맞서고자 발버둥치는 인물이기도 하다. 즉 죽음/삶, 송장/피, 넋/몸, 물결/불길 등 대조적인 시어를 동원함으로써 죽음의 허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생명력의 활동력을 예시하고 있다.”―이승하, 앞의 글, 16~17쪽) 생략토록 한다. 이 글에서 내가 다루고 싶은 것은 전영경의 시이다. 『金山月女史』는 자유당정부의 부패가 극에 다다라 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집임을 상기하면서 읽어야 한다.
무엄한 달빛은 창 틈으로 기어들고 모든 세상 진미 때문에
잠자리 맛 때문에
손길은 애정의 표시, 사시 장춘 애정의 요구도 될 수 있는
근로와 숱한 거래에서
뻔뻔스럽기 한량없던 넓적다리 때문에
그의 가슴에서 저도 모르게 절구통같이 팍 퍼진 어깨팍 죽지를
그의 어깨팍 죽지에 얹으며
그의 안가슴에서
정복을 당했다는 쾌감과 함께
마주 닿은 입술과 입술은 한평생을 맹세하는 가무잡잡한 입술이기에
속되고 다급한 것인가.
열 여덟 열 아홉, 그리고 유두분면의 명월관 시절이나, 보따리
장수를 하던 어제나 지금이나, 악착같이 살 생각도 없었지마는
구태여 죽을 맛도 없어서
조심스럽게 조촐하게
다모토리 한잔과.
기웃기웃 흘러 다니다 보니 고집과.
주워섬긴 교양과.
애교와, 그리고 그리고 젖통을 드러내놓고.
소위 돈께나 있다는 것들과.
소위 벼슬아치나 얻어 한다는 것들과 소위 잘났다고 우겨대는
것들과 소위 낫살이나 처먹었다는 것들과 소위 오입께나 한다는
것들의 환상을 더듬으며 가슴을 쓱쓱 쓸기도 하다가
사내란 동물은 함부로 부르기 쉬운 이름이 아니라고.
ㅡ<金山月女史> 부분
이 시는 서른일곱 살의 술집 마담 김산월 여사의 인생유전기(人生流轉記)이면서 그녀 주변을 얼쩡거리며 놀았던 남자들의 면면을 그린 시이다. 정치가나 경제인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그들 권력자의 횡포를 비판하고 고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쓴 시들이므로 전형적인 풍자시에 속한다. 이 시 외에도 사창가의 여자나 술집 작부가 남자 손님들과 벌이는 음란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시집 곳곳에 펼쳐놓음으로써 전후 우리 사회의 뒷골목 풍속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고우시던 이마 위에 깍정이 손길을 가져가 보다가도 거울을 가까이 하다가도 다급한 허벅다리나 허 리를 안아주던, 젖가슴을 쓱쓱 쓸어주던 허비던, 그 사나이들의 추억이나 닭의 다리 같은 것을,
ㅡ<續 金山月女史> 부분
하루 세 끼의 주식과 몸치장 때문에 원대한 목적 때문에/입술을 허락하고 젖가슴을 허락하고./사마구를 달았다고 으시대는 꼴이 차마 보기 싫어서 치마 저고리들과 속치마를 훨훨 벗어 던지고 몸까지 허락하는 결의에 살아온 꽃들.
ㅡ<尊敬하는 賣淫婦> 부분
당신은 나의 천사, 나의 생명은 대체로 지저분하고, 당신은 나의 사람, 나의 태양, 나의 전부는 어처구니없이 신파조 같은/나의 무엇들은 꺾어 서서/가운데 다리가 어떻고, 올라탈 수밖에 없는 배가 어떻고, 뾰족할 수 없는 모가 없는 현재가 어떻다는 쟁갭이 소리에
ㅡ<페페 르 목고> 부분
사내를 사지를 물어뜯던 젖가슴 사이로 주울줄 땀방울이 밑으로 하수도로 흐르면
히히 마이 따아링과 함께
ㅡ<다스 게마이네> 부분
당시 우리 사회의 뒷골목 풍속도를 적나라하게 그려놓기는 했으나 “허벅다리나 허리를 안아주던/젖가슴을 쓱쓱 쓸어주던”이나 “사마구를 달았다고 으시대는 꼴”, “올라탈 수밖에 없는 배”, “물어뜯던 젖가슴 사이로 주울줄 땀방울이” 같은 표현은 지나치게 외설적이고 음란하다.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의 횡포와 전후 한국 사회의 윤리의식 마비에 대한 비판의 뜻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표현이 너무 거칠고 문장도 전혀 정제되어 있지 않아 ‘풍자’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다. 전영경의 이런 작품은 전후 인간조건의 위기의식을 주로 술집과 사창가의 너저분한 풍경 묘사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사회고발시’의 수준에 머문 것이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일반 국민을 가혹하게 탄압한 자유당의 부조리와 비리를 우회적으로 고발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변호는 해줄 수 있다.
그런데 『金山月女史』의 한 가지 특장은 남성과 여성의 지위를 역전시켜 묘사했다는 것이다. 시집에 등장하는 여성은 아무리 요정에서 술을 따르고 사창가에서 몸을 팔며 살더라도 떳떳하게 돈을 버는 생활인이다. 반면 남성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위선자가 아니면 여자들 앞에서 돈으로 위세를 보이는 졸장부에 지나지 않는다. “주책없이 너털웃음에 호기를 띠는 밀수업자와, 코밑에 수염을 자랑삼는 정치가와 국회의원”(<私本金山月女史>)도 등장하고, “대 일본제국 조선총독부의 벼슬아치”(<李間九閣下>) 출신의 친일파 재벌, “콜롬비아 대학 피이 에잇치 디 코스를 부득불한 사정으로 중퇴”(<吳道成牧師>)한 위선적인 목사도 나온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에서는 존경을 받지만 술집에서는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그것을 여성 관찰자들로 하여금 조롱케 한 데서 이 시집의 또 하나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4. 성과 여성을 대하는 시각의 완고함ㅡ김수영
1960년 4월 19일의 혁명은 이 땅에 한 명의 시인을 탄생시킨다. 모더니스트였던 김수영이 ‘참여시론’을 주창하는 맹장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데는 4. 19혁명이 지대한 역할을 한다. 200명에 달하는 시민과 학생이 거리에서 피를 흘리며 죽음으로써 이룩한 혁명은 나약한 모더니스트 시인으로 하여금 이 세계를 보는 시각을 바꾸게 한다. 하지만 여성을 바라보는 김수영의 보수적인 시각을 혁명이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은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숍女史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進步主義者와
社會主義者는 네에미 씹이다 統一도 中立도 개좆이다
隱密도 深奧도 學究도 體面도 因習도 治安局으로 가라 東洋拓植會社, 日本領事館, 大韓民國官吏,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ㅡ<거대한 뿌리> 부분
김수영은 네에미 씹이니 개좆이니 좆대강이니 하는 원색적인 욕설을 동원해 비판의 화살을 쏘아보내고 있는 대상은 크게 보아 ‘서구’이다. 인용한 부분의 ‘因習’ ‘日本領事館’ ‘大韓民國官吏’ ‘아이스크림’ 등을 부정하는 대신 전통다운 것들(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등)을 잘 돌보아 길이 보존해야 한다고 거칠게 주장한다. 거대한 뿌리를 이루고 있는 전통을 우리가 무시하고 살면 안 된다는 주제의식이 이런 과격한 표현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가 나열한 전통의 항목 속에 들어 있지는 않지만 ‘남존여비’니 ‘여필종부’니 ‘일부종사’니 하는 유교문화의 폐습도 그는 전통으로 간주한 것이 아닐까.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는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憐憫의 순간이다 恍惚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ㅡ<性> 전문
김수영의 <性>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상당한 편차를 보이고 있는데, 특히 고현철과 정효구의 평가는 꽤나 대조적이다.(“왜곡된 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김수영의 <性>은 냉정하고 지적인 어조로 성행위의 과정을 성찰하고 분석한다. (…) 결국 이 작품에 표현되어 있는 성행위는 행위의 주체들이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소외 현상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고현철, 앞의 글, 30쪽. “김수영은 성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우월적인 시혜자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분명 그가 아내와 성행위를 한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한 것일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내에 대하여, 아내를 위하여, 높은 자리에서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행동한 사람처럼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정효구, <자유와 사랑의 어두운 뒤편>, 『현대시사상』,1996. 가을, 185쪽) <性>에 대한 평론가의 진단이 어떠하든 간에 나는 김수영이 이 시에서 ‘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 다섯 가지는 피력했다고 본다.
①남편은 외도를 해도 별 부끄러울 것이 없다.
②매춘부를 ‘그것’으로, 아내를 ‘여편네’ 혹은 ‘저’, ‘이것’으로 지칭할 만큼 여성을 비하하여 보았다.
③부부의 성관계를 남편이 아내에게 ‘해주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④오르가즘의 순간을 ‘쏟았다’로 표현하면서 성행위를 포함한 부부관계를 속고 속이는 행위로 간주하였다.
⑤인간의 성행위를 객관화한다는 맹목으로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연민’의 순간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아내를 향한 자신의 시선이 ‘연민’으로 차 있었다. 즉,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이었다.
성에 대한 시인의 솔직한 견해와 함께 행위 주체들의 소외 현상이 드러나 있다 할지라도 <性>은 성(혹은 여성)에 대한 김수영의 보수적인 생각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즉 김수영의 여성관은 구태여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보지 않더라도 비판의 여지가 보통 많은 것이 아니다. 김수영은 ‘성관계’를 남자가 여자에게 행사하는 것, 주는 것, 베푸는 것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김수영이 그토록 목청을 높여 외쳐 부른 ‘자유’라는 것도 남녀 평등의 문제에 부딪치면 어색한 목소리를 낸다. 그는 시에서 ‘아내’를 종종 ‘여편네’라고 낮추어 부른다.
여편네의 방에 와서 起居를 같이해도
나는 이렇듯 少年처럼 되었다
興奮해도 少年
計算해도 少年
愛撫해도 少年
어린놈 너야
네가 성을 내지 않게 해주마
네가 무어라 보채더라도
나는 너와 함께 성을 내지 않는 少年
ㅡ<여편네의 방에 와서> 부분
이 시를 보면 ‘소년’은 청순함, 이재에 밝지 못한 순수함 등 좋은 뜻으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起居를 같이해도”라는 제1행에는 아내의 방에 와 기거를 같이하면 소년다움을 자동적으로 잃게 된다는 암시가 들어 있다. 아내로 말미암아 내가 작은 일에 흥분 잘하고, 계산에 밝아지고, 애무(섹스)까지 하게 된다는 자의식이 이 시에는 깔려 있는 것이다. 시인은 아들과 더불어 자신의 아내를 향해, 아내가 무어라 해도 “나는 너와 함께 성을 내지 않는 少年”이 될 것임을 다짐하고 있다. 아들은 남자이기 때문에 나와 동류항에 넣고 아내는 여자이기 때문에 타자로 취급한다. 여기에는, 나로 하여금 수시로 성을 내게 만드는 아내이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화하고 자애로운 지아비 노릇을 계속하겠다는 뜻이 들어 있다. 유교문화라는 오랜 ‘전통’이 초래한 남존여비의 의식을 버리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는 시는 이것만이 아니다.
聖人은 妻를 敵으로 삼았다
이 韓國에서도 눈이 뒤집힌 사람들
틈에 끼어 사는 妻와 妻들을 본다
오 결별의 신호여
ㅡ<敵(二)> 부분
여자의 本性은 에고이스트
뱀과 같은 에고이스트
그러니까 뱀은 先天的인 捕虜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贖罪에 祝福을 드렸다
ㅡ<여자> 부분
우리 집 食母가 여편네 외출만 하면
나한테 자꾸 웃고만 있는 理由,
모르지?
ㅡ<모르지?> 부분
시의 일부이므로 김수영이 지향한 어떤 커다란 의도(주제)가 이런 대목에 들어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비하의 감정을 그가 갖고 있었음을 증명하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김수영은 ‘성행위’를 남녀가 합심하여 행하는 공동작업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남녀의 성차는 결국 우열을 가리게 되고, 항상 남성은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 아닐까. 남성은 성의 자유를 능동적으로 누릴 자격이 부여되어 있는 존재이며 여성은 부자유를 감내해야 하는 존재로 간주하였다. 사실 김수영은 자신의 ‘오입’을 자랑삼아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런 때를 나는 지일(至日)로 정하고 있다. 지일에는 겨울이면 죽을 쑤어 먹듯이 나는 술을 마시고 창녀를 산다. 아니면 어머니가 계신 농장으로 나간다. 창녀와 자는 날은 그 이튿날 새벽에 사람 없는 고요한 거리를 걸어 나오는 맛이 희한하고, 계집보다도 새벽의 산책이 몇백 배나 더 좋다. (…)이것은 탕아(蕩兒)만이 아는 기분이다. 한 계집을 정복한 마음은 만 계집을 굴복시킨 마음이다. 자본주의의 사회에서는 거리에서 여자를 빼놓으면 아무것도 볼 게 없다.”―<反詩論>, 『詩여 침을 뱉어라』, 민음사, 1975, 66쪽) 남편의 ‘오입’을 아내가 묵인하는 가정이 과연 제대로 된 가정일까. 김수영에게 있어 성은 오로지 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것이었다.
5. 정치인의 성적 타락상 묘사ㅡ이정기
1970년 3월 17일, 마포 한강변 도로에 버려진 코로나 승용차 안에서 여자 피살체가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인 이른바 ‘정인숙 피살사건’은 오늘날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수사 과정에서 전속 기사였던 오빠가 누이동생이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문란한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총으로 쏘아 죽였다고 결론이 나 정인숙의 오빠는 실형을 선고받고 오랜 세월 옥살이를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취재 기자나 주변 인물 가운데 수사기관의 이 결론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도준호와 한국일보 최동완 기자는 이 사건을 회고하며 글을 썼다. 다음은 그 글의 일부. “미모의 26세 여인, 권총, 한밤중의 강변도로, 코로나 승용차, 사생아, 피살자의 오빠인 운전사, 철 늦은 함박눈까지 이 사건에 등장한다. (…) 거기다 이 사건 언저리엔 권력의 지저분한 냄새와 불결함, 심지어 음모의 냄새까지 곁들여 있어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 짓궂은 한국일보 선배가 뒷문을 열자 그 여자가 옆으로 고꾸라졌다. 鄭仁淑이었다. 권총을 맞고 살해됐는데도 죽은 사람 같지 않았다. 초록색 원피스에 스카프까지 두르고 있었다. 경찰이 산 사람같이 위장해 앉은 자세로 세워놓았던 것이다.”―<정인숙 여인 피살사건>, 『韓國現代史 119大事件』, 조선일보사 월간조선, 1993, 184~185쪽.
“22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다. 살인사건 현장에 당연히 보존해야 할 자동차를 두 시간 만에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고 왜 형사사건을 서울지검 공안부가 맡아야 했는지, 그리고 왜 정인숙 살인사건 기사가 10일부터 일제히 사라져야 했는지 그야말로 이상한 살인사건이었다.”―<정인숙 사건>, 『이 한 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56쪽.)
이정기는 바로 이 사건을 다룬 장시 <CJS孃의 사랑>을 써 1971년 6월 15일에 현대문학사를 통해 출간한다. 본격적인 유신시대로 접어들지는 않았지만 박정희 정권이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뽑은 칼의 날이 한창 서슬 푸르러지고 있을 때였다. 시집 출간 바로 전 해에는 ‘五賊필화사건’이 있었다. 장준하가 발행하던 종합지 『사상계』와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발표한 김지하의 장시(자칭 ‘譚詩’) <五賊>에 반공법 위반이라는 죄목을 덮어씌워 시인만 구속한 것이 아니라 『사상계』의 발행인과 편집인, 『민주전선』의 편집인까지 구속한 필화사건이다. 이 사건이 국회로 비화되고 외국에서도 크게 문제삼자 여야 총재가 타협하여 구속 한 달 만에 판사 직권으로 관련 인사를 석방하지만 『사상계』는 판매가 금지되고(곧이어 등록 취소를 당함), 『민주전선』은 압수 처분된다. 반정부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하여 ‘북괴의 선전 활동에 동조한’, ‘반공법을 위반한’ 작품이라는 딱지를 붙일 만큼 정치권력이 무지막지한 힘을 발휘할 때였다. 그런 시절에 나온 시집 『CJS孃의 사랑』에서 ‘성’은 이런 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흥흥, 저를 사랑하시나이까, 閣下
거울 속으로
소파 밑 각하의 御手가 보이나이다
아이 간지러워, 숲이 부어올랐죠?!
뭐 民主主義니까
대낮에도 무방한 줄 아뢰나이다,
손가락으로 폭폭 우물을 파주사와요
깊이, 네, 더 깊이!
‘숲’은 여성의 음모를, ‘우물’은 여성의 성기를 가리키므로 보통 외설스러운 시가 아니다. 포르노 영화를 방불케 하는 이런 장면은 시집 곳곳에 산재해 있다. 당시 ‘각하’라고 불린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 한 사람뿐이었으므로 이정기는 “그랬던가 리승만 박사!/제 수양 아번님이세요/‘밤을 뺀 낮에 한해서만……’/國父는 영원히 신성한 局部이니까” 하면서 이 시 속의 각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지칭한 것이라는 암시를 해놓는다. 하지만 이승만의 여성 관계를 문제삼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시인은 이렇게 연막을 친 뒤 곧바로 정인숙사건을 신문지상에 보도된 내용과 무성한 소문을 바탕으로 하여 그려놓음으로써 대통령(‘각하’ ‘나랏님’ ‘마마’ 등으로 표현)을 포함한 고위 정치인(‘대감’으로 표현)의 성적 타락상을 그린 시임을 솔직하게 밝힌다. 오적필화사건 직후에 나온 시집이라는 점에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늬 숲은 고약한 고름 물밭이다
편작을 찾아가라.”
이렁구러 대감을 따르자니 오빠가 울고
오빠를 따르자니 나귀가 울어
대하증 홍수를 쏟으며
간다 간다
떠나간다 안개 속의 그 항구로
강변 제3로를 밤에 타고
두 방 오빠의 총알을 머리에 안고
동방 예의지국은
어둡고 먼 여행을 떠나 가안다.
이렇게 끝나는 Ⅰ부에 이어 Ⅱ부에서는 대감의 침실 분위기를 신화와 설화와 전설, 고대사 등 동서양의 옛 이야기로부터 끌어온 온갖 사물과 인물을 동원하여 꾸미면서, 거기서 벌어지는 음란한 성의 유희를 적나라하게 그려 보인다.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묘사가 풍부한 묘사력에 힘입어 세밀하게 그려진다. 일례를 들면 “마개가 벗겨진 가슴의 두 언덕,/그리고 아랫도리 살찐 수림 아래/지열로 갈라져 벌어진 연못/보드라운 입구에서는/이 세상 가장 신비로운/그녀의 온몸을 우리어내는 향기가/그윽히 퍼져올라/인간 오감을 황홀히 만들며/너울너울 침실 기류를 타고/일렁대는 촛불의 頭部를 쓰다듬으며/鏡板天井을 향해 나른다” 같은 것이다. 시인은 CJS양을, 아니 정인숙을 때로는 금전에 눈이 먼 직업 창녀로, 때로는 욕정에 몸이 달아오른 여성으로 그린다. 시인이 묘사하고 있는 여성은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기보다는 발정기에 돌입한 동물 같다. 여기서도 김수영과 마찬가지로 여성에 대한 비하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무리 현실비판정신에 입각하여 시를 썼다고 하더라도 여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가 있는 것일까. 강간행위도 아닌 남녀의 성행위를 여성에 대해서만 다음과 같이 치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타락한 八等美의 매춘부……퇴, 퇴!
'아아아 16세 복숭아 시절……
하긴 내 잘못이었다,
나는 기차를 타고
너는 골반을 꼬아대던 그날 밤
마악 잠이 들려는 이불 밑에서
나의 수렵하는 최초의 아직 껍질 덮인 총대를
명주같이 보드런 열 손가락으로,
할딱이는 숨소리와 함께
문질면서 비비면서
스며드는 달빛 지새는 새벽까지
어쩔 줄 모르고 좋아했지!?'
그래, 그래 잊을 수 없는 코로나 자가용……
…(중략)…
네가 각시라고 드러누워
치마폭을 걷어올린 바로 그 터전,
‘얌나’, ‘스르브노’구덩이의
두 支石의 입술 찢어진 사이로
버섯은 돌입하는 게다, 이 화냥년아!
앞부분에서 이정기는 매춘부와 다를 바 없는 ‘너’에게 ‘내’가 동정을 잃던 날 밤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코로나 자가용 운운한 것은 정인숙이 피살체로 발견된 곳이 코로나 승용차 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용한 부분에 나오는 ‘껍질 덮인 총대’나 ‘버섯’은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므로 더 이상의 해설을 덧붙이기가 역겨울 정도이다. 시의 내용 전개가 이러하므로 잘못된 정치 상황에 대한 예리한 풍자라는 애초의 의도는 간 곳이 없고 농도 짙은 시정 음담패설의 수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풍자시란 “이 화냥년아” 하면서 분노를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유머 감각을 동원하여 독자한테서 쓴웃음을 유도해낼 수 있어야 성공하는 법이다. 아이러니나 위트, 풍자와 해학의 정신을 살리기에는 시인의 표현 기법이 너무나 거칠고 난폭하다. 제5장으로 이루어진 장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더라도 시인의 거친 어조에 깃들 풍자정신은 없다.
찬란할 法統을 보필할 이 땅에
행복의 沙卑 숲이 다시 우거지려면
하룻밤에 여섯 번씩 침대를 바꾸는
갈보 누예, 너는 죽어 썩어야 한다!
“불 끓는 煉獄에서 재회하자.”
“병신 육갑하네.”
탕! 탕! (오빠!)
정인숙이란 여인이 언론에 일부 보도가 되고 소문이 파다하게 난 그대로 그 시대 정계의 거물들과 놀아난 고급 창녀인지 그렇지 않은지 그것의 사실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설사 그 당시의 모든 소문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성’을 다루면서 이렇게도 강하게 여성 비하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시인의 귀에 들려온 정인숙이 설사 부정을 범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매춘부’, ‘화냥년’, ‘갈보’라고 표현한 것은 과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혹 시인은 정인숙이 ‘성’을 무기로 삼아 뭇 남성을 유혹했기에 참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여기서도 ‘성’은 남성의 전유물이지 여성이 우위에서 행사하면 안 된다는 유교적 고정관념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집의 서문은 조연현이, 발문은 문덕수가 썼다. 시인 자신은 후기를 대신하여 46쪽에 달하는 긴 논문 <현대 장시의 내용과 성격>을 발표하고 있다. 그 글의 말미 부분(“마지막으로 필자는 위대한 시인이란 본래 역사를 창조하며 詩作 속에서 독자로 하여금 역역사의 정신과 양상을 나타내는 문화의 의미를 찾고, 해당 시대의 반역사를 투철한 시적 지각작용을 통하여여 비판하며, 나아가서는 그러한 것을 위한 시의 형태와 기능에 의하여 여하히 모든 것이 설명, 역설되어지지는가를 스스로 지식으로써 깨달으면서 자기 책임의 정도를 측정하는 능력자라야만 한다고 감히 선언하고 싶다.")이 너무나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오독 탓일까.
6. 건강한 성에 대한 예찬ㅡ강우식
강우식의 『꽃을 꺾기 시작하면서』(1979)는 4행시들만을 모은 이색적인 시집이다. 이 시집의 시는 거의 전부 꽃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꽃말이나 꽃과 관련된 설화를 연상하기 쉽지만 그의 꽃은 여성, 특히 성행위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시적 등가물로 하고 있는 내용상의 특징이 있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가 성행위로부터 출발한다는 인식에 그의 시정신은 집중된다. 그래서 남녀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건강한 성에 대해서 그는 열렬히 예찬한다. 건강한 것, 신선한 것, 보기 좋은 모든 것이 성을 연상시키며, 성욕, 성에 대한 관심, 성행위 모두 그에게는 시정신으로 연결된다.
잎새는 겹살로 뭉친 계집의 궁둥이다.
밑동엔 남근처럼 처박힌 뿌리.
어디선가 이런 접촉 본 듯하여
속배기 들추던 손이 부끄러워진다.
ㅡ<배추> 전문
내 어깨를 와삭 물던 세 살배기의 흰 앞니,
꼭 고만큼씩한 꽃잎들이 모여 핀 꽃이
안개를 이루며 죽은 딸을 회상케 한다.
정관수술의 매듭을 풀고 애를 갖고 싶다.
ㅡ<안개꽃> 전문
강우식에게 있어 성이란 곧 생식(生殖)이다. 생명이 탄생하게끔 하는 행위이므로 모든 존재의 자기 증명의 수단이다. 배추 속을 들추다가도 겹살로 된 잎새를 보고 성을 연상하고, 안개꽃을 봐도 아이를 낳고 싶어한다. 건강한 성에 대한 기본인식이 이렇듯 긍정적이므로 강제적 성에 대한 비판의식이 당연히 수반된다.
빨치산에 겁탈당한 열아홉 내 누이다.
알몸 되어 소름 돋친 살갗을 떨다
모랫벌에 혀를 박은 내 누이다.
원통하게 핏빛으로 까 헤쳐진 밑구멍이다.
ㅡ<해당화> 전문
그런데 <해당화>를 읽어보면 ‘빨치산’의 역사적 의미는 제거되고 없고, ‘겁탈’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의 문맥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시도 6. 25의 와중에서 양공주가 되어 불행한 삶을 살게 된 누님의 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 이제는 늙어 ‘허리의 율동’을 제대로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안타깝다는 식으로 시가 끝나 젊은 생명체의 건강한 성에 대한 시인의 강한 집착을 드러낸다.
바람에 꺾이어진 줄기가 騎馬位를 취하고 있다.
눈물 때문인지 궁둥이를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양키놈 흘레붙이나 되어 살아가던 육이오 내 누님
다시 펴지지 않는 허리의 율동을 본다.
―<코스모스> 전문
프로이트가 꿈이란 꿈을 모두 성적 이미지로 파악하듯이 강우식은 이처럼 모든 생명체를 성적 상징으로 해석하려 든다. 그렇다 하더라도 “騎馬位를 취하고 있다”와 “양키놈 흘레붙이”를 갖고 “육이오 내 누님”을 수식함은 정도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닐까. 아무튼 강우식에 의해 성에 관련된 많은 금기들이 깨어지지만 “출근길에 한 지애비가 연약한 몸으로/ 마누라의 몸 위로 기어올라가고 있다.”(<나팔꽃>), “딴 계집과 하룻밤 살 섞었다. 어쩔래.”(<제비붓과>), “계집을 두고도 어떤 밤에는 수음을 한다.”(<사철나무>)는 등 낯뜨거운 표현이 지나칠 정도로 많이 나온다. 남성 성욕의 행사가 ‘건강한 성’이라는 이유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강우식의 시에서도 여성은 회임하고 출산하는 모성적 존재로서만 의미가 있다. 남성의 성은 가정을 초월한 공적인 영역에서도 발휘가 가능한 것이고, 여성의 성은 가정 속이라는 사적인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7. 잠정적인 결론
1930년대 서정주의 시에서 1970년대 강우식의 시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시 작품 가운데 성 이미지가 확실한 것들을 추려서 살펴보았다. 근 50년에 걸쳐서 나온 다섯 권의 시집을 읽으면서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첫째, 우리 시인들은 이 땅의 보통 남성들이 생각해온 남녀관계, 즉 유교적인 가부장 중심의 성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시인의 시각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범인의 사고방식과는 달라야 할 터인데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둘째, 성은 상호 존중의 정신에서 행해지는 것이어야 하며 건강한 조화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연스러운 성이 문학 속으로 들어와야 함에도 그런 것은 많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셋째, 몇몇 시인에게 있어 성이란 생명성의 고양이라기보다는 호기심의 대상으로, 직설적이고도 자극적으로 묘사하면 되는 것으로, 금기로 남아 있던 것을 깨뜨리는 양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넷째, 70년대까지 성에 대한 탐구는 남성 시인들에 의해 이루어져온 셈이었다. 건강한 에로티시즘이 자리잡지 못한 데는 이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시대가 상당한 차이가 질지라도 남성의 성에 대한 인식 및 對 여성에 대한 인식에는 대차가 없었다. 또한 성의 자유는 남성의 전유물로만 인식되었다.
이 글은 70년대까지의 시집만 살펴보았으므로 80~90년대에 나온 훨씬 많은 시집의 성 표현을 다루지 못한 미완의 글이다. 기회가 되면 80~90년대 시인을 망라하여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성’>을 완성시키고 싶다.
* 『한국 현대시 비판』(월인)에 발표되었던 이 글의 후편은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성애'>란 제목으로『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10대 명제』(새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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