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의 정체

2012. 1. 27. 11:24살다보니 이런일이/시(詩)를 위하여

현대시조시인과 학자는 읽지 말라(2)
작성자 : 검정삿갓 등록일 : 2007-11-04 17:32:41


무릇, 문화와 전통은 점령자가 왜곡하고 말살한다.
그러나, 시조는 동족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되었다.
현대시조시인과 학자는 점령자인가?

청자도 백자도 청기와도 우리에 의해 사라졌다.
우리가 사라지게 한 것들은,
두 번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시조도 사라지는가?
아니, 시조도 사라졌는가!
시조가 사라지면 또 무엇이 사라질 것인가!
사라질 것이 아직 남아 있는가!
정녕, 우리민족은 우리 것을 지키지 못하는가!

이르건대,
현대시조시인과 학자는 읽지 말라.
허깨비는 허영과 괴변의 늪에서 온천욕이나 즐기고,
허수아비는 참새와 놀아라.





현대시조의 정체


최종 수정일 : 2007.02.08. 02:25   


" 시조에 담지 못할 것은 이 세상에는 없다 "


시조는 정형시가 아니다.

'자수(字數)' '구수(句數)' '음의 성질에 따른 위치' 등이 일정하게 정해진 시'가 정형시라고 국어사전은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지면 시조는 정형시가 아니다. ‘일정한 수의 음보(音步)와 악센트’ ‘소음절(小音節)로 이루어지는 시행(詩行)과 연구(聯句)’ 그리고 ‘그 연을 반복하는 형식’ 따위가 18K라면, 자수(字數)로 따지는 하이쿠(俳句)와 한시(漢詩)가 바로 24K인 것이다. 자수(字數)가 들쭉날쭉한 시조를 정형시라는 것은 억지다. 자수를 배척하고, 구수(句數)와 음보(音步)를 내세워 "시조는 정형시다"고 주창하는 무식한 식자(識者)의 트릭에 우리는 사기당한 것이다.


비록 역사는 바르게 가르치지 못할망정, 시조만큼은 바르게 가르쳐서야 옳았다.

소위 시조의 지킴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이나, 시조의 녹을 먹고 있는 시조시인이라면 마땅히 미완성인 시조를 완성시켜 정형시 반열에 반듯하게 올려놓아야 했다. 시조의 틀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 하여 정체성을 능멸하면서까지 시조를 파괴하였으니 급기야 사이비 시조가 시조행세하고 있다. 심히 안타까운 것은 각 계파가 사심을 털고 한자리에 모여 시조의 정의를 확립하리라는 것은 남북통일보다 참으로 어려워 보인다.

"부득이한 경우 자수율을 무시해도 된다"는 억지와 "비정형이 정형이다"는 코미디로, 소를 웃게 하는 재주로는 시조를 웃게 할 수 없다. 무릇 예외는 항상 기준을 붕괴시켰다. 시조도 작당들이 휘두른 예외라는 곡괭이에 그렇게 허무하게 붕괴되었다. 시조가 하이쿠보다 역사가 깊다하나 아직 미완성인체 표류하고 있다. 학자나 시조계가 일본의 하이쿠처럼 시조를 완성시켜 놓았다면 난분분한 학설과 구질구질한 궤변이 활개치고 다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현대시조의 탄생배경과 시조계의 만행.

해방 후, 일제가 말살한 민족문화가 하나하나 부활될 때 시조도 부활되었다. 그러나 시조의 '시짜'도 모르는 작자들이 그들의 수준에 억지로 맞추어 보았으나 고시조에 비해 문학성이 현격하게 뒤떨어진다는 것을 인지하고 시조를 거역하고자 3.8선 가르듯 고시조와 현대시조로 갈라놓았다. "고시조 어투는 아무리 작품성이 좋아도 현대시조단에서 외면당하기 십상이다"고 떠벌리는 이들이 시조랍시고 내놓은 잡동사니에서 시조를 찾기란 그야말로 솔밭에서 바늘 찾는 것 보다 어려운 실황이라, 시조를 다만 시대적 분류로 고시조와 현대시조로 나누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에이브라함 마즐로는 "가진 것이 망치밖에 없으면 모든 것이 못대가리로 보인다" 하였다. 가진 것이라곤 자유시 망치밖에 없는 그들이 시조를 두드리더니, 마침내 선무당이 사람 잡는 꼴을 연출하고야 말았다. 목적이 무엇인지 심히 의심스러운 언행불일치한 행동거지와 시조는커녕 詩도 되지 못한 허드레를 도처에 흘리고 다녔으니 시조를 말살한 흔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잡지 못한 여파가 시조에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해방 후 한 건 주위에 편승한 최남선. 이병기. 이은상 등, 문외한들이 무임승차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일제 36년 간, 민족문화말살정책에서 좋은 표적이 되었던 시조가 해방과 더불어 해방되었다. 민족문화인 시조가 부활된 것은 미친년이라도 붙잡고 더덩실 춤추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현대시조 창시자와 그 추종자들은 시조다운 시조가 등장하여 자신들 작품이 하품으로 취급당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일제가 물러가자 반민족행위자가 던져 버린 "한국어말상정책 하수인"이란 완장을 꿰차고, 고시조 어투와(우노라, 하누나, 없노라, 하노라, 찾노라, 오누나) 문어(文語)는(주었관데, 보냈관데, 지노나니, 가렸관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며 확성기로 떠벌리고 있다


무릇 문학이란 모국어로 써야 한다.

한국 사람이라면 시조계서 금기시하는 고어와 문어에 딱히 국어사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현대어의 모체인 옛말을 부정하면 현대어도 부정되어야 한다. 하이쿠를 세계의 시로 승화시킨 일본은 외래어를 금지하고 옛말이나 문어를 장려하며 하이쿠를 통해 모국어를 갈고 닦고 있다. 허나 시조는 외래어를 허용하면서도 '옛말'과 '문어'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한다. 더욱 한심스러운 작태는 시조를 아예 말살하려고 작당들 하였는지, 자연의 향이 듬뿍 배여 있는 '음풍농월'도 사용 금지시켜 놓았다. 자연을 배제하면 심성은 우러나지 않는다는 것조차 모르는 작자들이 문전옥답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설치고 다니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현대시조시인은 수중의 물결을 수면으로 끄집어내지 못한다.

시조는 자유시보다 뒤울림이 커야한다. 그것이 바로 비유다. 자유시가 수면(水面)이라면 시조는 수중(水中)이다. 수면의 물결은 누구나 느끼고 표현할 수 있으나 수중의 물결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표현은 더구나 어렵다. 수중의 물결이 수면을 박차고 나와 용트림하는 것이 바로 시조이다. 그 우렁찬 용트림을 만인 앞에 보여 주어야 할 책무가 시조시인이란 감투를 쓴 자에게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시조계 어르신네입네, 시조계 지도자입네 우쭐대는 자들이 파벌을 만들어 놓고 앞 다투어 시조를 팔아 자질 없는 자들을 대량 양산하였으니 시조는 격과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조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고 시조의 근간이 하나 둘 비명횡사하니, 급기야 시조는 존립 자체를 위협받고 있다. 얼치기 지도자와 들치기 시조시인이 계승이랍시고 잡동사니에 시조라는 이름표를 붙였으나 독자는커녕 자유시단서도 천시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시조는 시조이어야 한다. 시조의 틀을 파괴하면서까지 한사코 자유시를 쫓아가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는 없다. 시조는 자수율뿐만 아니라 내적 요건과 형식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43자 시조에 담지 못할 것은 이 세상에는 없다.

이병기가 "현대인은 복잡다단하기에 43자 내외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시조의 틀을 파괴하면서까지 현대시작법을 도입한 이래, 고유기능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나하나 파괴되었다. 시조의 ‘시짜‘도 모르는 망나니들은 뒤질세라 자유시 칼날로 시조를 참수하고 국적불명의 옴니버스시조와 같은 해괴한 시조를 탄생시켜 놓았다. 인생사 희로애락이 고대와 현대가 다를 리 없다. 설령 시조가 백자나 청자처럼 사라진다 해도, 인간의 희로애락은 불변의 것이기에 억만년이 흘러도 변질되지는 않을 것이다. 시조는 심적 산물이다. 심적인 것이 시조를 견인한다 해도 실언은 아니다.

시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심적인 것 중, 누구나 반듯이 거쳐 가야 하는 사랑을 추출하여 보자. 수많은 나날 남몰래 지새우며 속 태우던 전대(前代)의 사랑과 현대인의 인스턴트 사랑을 계량하면 어느 것이 깊고 무겁겠는가? "현대인은 복잡다단하기에 43자 내외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발상 자체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시조의 그릇에 담을 수 없다면 詩를 쓸 일이지, 구차하게 되니 안 되니 탓하며 시조주위를 멤 돌 필요는 없다고 본다. 과연 전대(前代)의 감정은 현대인보다 복잡다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시조계는 배타성이 심하다.

현대시조론은 진화가 아닌 창조이기에 맹목적인 종교집단이 되었다. 그들은 목적에 반하는 수단을 달성하고자 시조를 개 끌듯 끌고 다니고 있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여는 자는 흥 한다"고 칭기즈칸은 경고하였다. 평시조 하나 제대로 짓지 못하는 소인배들이 성을 쌓고 있다. 황진이에게 한 수 가르침 받고자 천계에 가려고 벽을 쌓는다면 나도 돌조각 들고 발 벗고 나설 일이다. 망루에는 열린마당이란 깃발이 휘날리고 있지만 성주로 군림하는데 지장이 있다하여, 바른 소리 게시물이나 심지어 작품과 꼬리 글마저 삭제로 일관하는 성주의 작태는 분노에 앞서 연민의 정을 느낀다.

현대시조시인들이 시조랍시고 내놓은 잡동사니를 자유시 잣대로 재어보고 허탈한 심정을 느낀 이가 비단 나뿐이랴. 시조는 자유시단서 낙오된 자를 구제하는 곳도, 정년퇴직한 자를 위한 경로당도 아니다. 시(詩)중에 꽃이요 왕이 되어야 할 시조가 자유시단서도 한낱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독자에게 문전걸식한들 밥 한 숟가락 얻어먹을 수 있겠는가?


시조가 그리 만만한 것이더냐?

제대로 된 평시조 하나 짓지 못하는 주제에, 지도자입네, 원로입네 거들먹거리며 시조를 학살하는 짓거리는 아무리 고쳐 생각해 봐도 매국노나 할 짓이라 도저히 보아 줄 수 없다. "수신제가 후 치국평천하"라, 시조의 발상지인 국내부터 반듯하게 다져놓고 세계화를 외치는 것이 마땅하거늘 국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가당찮게도 세계화를 부르짖고 있다. 어느 계파는 시조의 세계화를 떠벌리면서, 한 해에 ‘세계어린이시조시인’이랍시고 260명이나 배출하였으니 새삼 일러 무엇 하리, 전 국민이 더 나아가 전 세계인이 시조시인이 된다면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박수쳐야 할 일이다. 허나 현 추세라면 날아가는 까마귀도 시조시인 인증서를 입에 물고 거들먹거리며 오락가락 할까 그것이 두렵다. 시조가 그리 만만한 것이더냐?


언제까지 천대받을 것인가?

자질 없는 자가 시조계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고, 햇수만 채우면 원로로 대접받는 자들이 시조계를 장악하고 있으니, 도서 올림픽이라 할 수 있는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주빈국으로 선정되어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를 맞았으나, 번역 소개할 "한국의 책 100권"에 고우영의 만화 ‘일지매’는 있는데 시조집이나 시조 관련 책자는 단 한 권도 없고, 한국문학을 소개할 62명의 문인 중에, 현대시조시인은 단 한 명도 끼지 못할 정도로 알뜰하게 천대받았다. 소위 시조계 지도자라는 자에게 묻나니, 그야말로 초라한 성적표를 언제까지 감출 것이며 입이 백 개가 아니라 만 개라해도 어떤 입으로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시조의 문제점은 백두산보다 높고 태평양보다 깊다.

시조는 17자인 하이쿠보다 무려 26자가 많다. 허나 현대인은 복잡다단하기에 담을 수 없다는 가당찮은 이유를 들이대며 시조의 그릇을 깨트려버렸다. 43자 내외도 적다하는 무리에게 단 17자인 하이쿠를 맡겼다면, 세계의 시는 고사하고라도 지금 쯤 과연 어떤 몰골을 하고 있을까? 찾고자 하기 훨씬 이전에 사라져 뼈 조각도 찾지 못할 것이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시조를 파괴한 시조계 어르신네와 시조계 지도자에게 묻노라. "시조가 무엇인지나 아는가? 당신들 행위가 시조라는 아름드리 솔 나무를 깔아 먹는 송충이가 아닌지 대답해 보라"


시조는 달리지 못하고 있다.

가당찮은 것은 시조는 비유라고 곧잘 말들 하지만, 비유를 사용하면 "어렵게 쓰지 말라" 한다. 현대시조는 시조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풍자시조는 눈 닦고 찾아 봐도 없다. 더욱 한심스러운 작태는 뱁새가 황새에게 자신들 걸음 폭에 맞추라 한다. 심히 안타까운 것은 시조의 정체성에 화답하지 못한 이들이 선로 폭을 제 멋대로 조작해 놓았으니 정작 달려야 할 시조는 달리지 못하고 있다.


소시 적 늑대소년이란 글을 읽었다.

밀림지대에 추락한 비행기에서 생존한 사람은 젖먹이 한 명뿐이었다. 젖먹이는 늑대 젖을 먹고 늑대와 같이 생활했다. 늑대소년을 포획하니 형상은 인간이나 네 발로 뛰고 늑대처럼 짖었다. 현대시조도 늑대소년과 같다. 두 발로 걷지 못하고 사람 말을 하지 못하는 늑대소년처럼 현대시조도 그러 하다. 인간은 인간에 말을 하여야 하고 시조는 시조에 말을 하여야 한다. 비록 쌀가마니라 하더라도 쌀보다 돌이 많으면 돌가마니라 한다. 이제 돌가마니에서 돌을 축출하여 쌀가마니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시조시인이라 찍힌 명함을 동네방네 뿌리고 다니는 자들의 사명인 것이다.


당대인은 선조께서 물려주신 유산을 잘 갈무리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책무가 있다.

밤하늘에 별만큼 계파는 많고 많으나 그것도 적다며 걸핏하면 쪼개 버리고 또 다는 계파를 만드니 책무는커녕 의무를 책망하기도 민망스럽다. 일단 독자는 접어두고라도 자유시단서도 시조계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보라. 현대시조시인이 시조랍시고 발표한 것은 한낱 잡동사니에 불과하고, 으리으리한(?) 각종 시조문학상에 선정된 작품은 차라리 시조의 사망통지서이다. 도저히 시조의 잣대로 잴 수 없어 자유시 잣대로 재어 봐도 수준 이하의 것을 한사코 시조라고 우기니, 독자라고 해 봐야 서로서로 추켜 주는 몇 몇 사람들뿐이다. "불행히도 이순신은 조선에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전하지 못하고 있다" 고, 일본 해군대좌 ‘사토오 데츠다로’는 통탄하였다. 시조도 이와 같다. 시조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감히 시조시인이라 말하지 말라.

현대시조시인이란 이들에게 이르나니, 만약 시조가 무엇인지 안다면 감히 시조시인이라 껍죽대지 말라. 일본은 단 17자인 하이쿠를 국민의 시로 다져 놓더니 지금은 약 50여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각의 모국어나 영어로 하이쿠를 읊고 즐기는 세계의 시로 승화시켜 놓았다. 하이쿠 국제화 역사는 100년이 넘었다. 일본에는 1,000개 가까운 하이쿠 결사가 있으며 19세기에 하이쿠가 알려진 이래 지금은 약 50여 나라에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국어나 영어로 하이쿠를 즐기고 있다. 미국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었고 뉴욕 타임지는 날마다 공모하였다. 유럽에는 아예 스스로 하이쿠 시인을 자처하는 이들도 있고, 영문 하이쿠 시집이 계속 출간되고 있고, 하이쿠 영향을 받은 예술가가 오늘날 적지 않다하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하이쿠 따위가 감히 넘볼 수 없는, 독특한 문예를 보유하고 있는 시조를 생매장한 작자는 누구이며, 부관참시 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하이쿠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아니 상석에 앉아야 할 시조를 오늘날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한 소위 .시조계 지도자입네, ‘원로입네‘ .시조시인입네’ 껍죽대는 이들에게 감히 묻는다. "당신들은 시조를 위해 무슨 짓을 했으며, 무슨 짓을 하고 있으며, 또 무슨 짓을 하려 하는가?"


현대시조시인에게 이르나니 명심하라.

시조는 외적으로는 흐름이 강물같이 자연스러워야 하고, 내적으로는 기승전결이 이루어져야한다. 구와 장을 파괴하면서까지 자유시 옷을 걸쳤더니 그렇게 돋보이더냐? 글자 수만 맞추면 시조가 되는 줄 아는 이들에게 감히 이르나니, 잔머리 굴려 낱말퍼즐게임 하지 마라. 시조시인이라 일컬어지려면 어찌하여 시조가 천덕꾸러기가 되었는가를 한번쯤은 살펴보라. 인품을 돋보이고자, 혹은 품격 높은(?) 사교장을 만들고자 시조를 다만 도구로 사용하는 무리의 일원은 아닌가 살펴보라. 행여 자신의 능력에 맞추기 위해 끼리끼리 괴변을 끌어 모아 시조를 파괴하며 시조를 능멸하고 있지는 않는지도 아울러 살펴보라.

짓거리가 미덥지 않아 다시 한 번 이르건대,
시조는 자유시단서 낙오된 자를 구제하는 곳도, 정년퇴직한 자를 위한 경로당도 아니다는 것을 알라. 날개가 달릴 굼벵이는 나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날수 있지만, 날개가 달리지 않을 굼벵이는 제 아무리 나는 법을 가르쳐 주어도 날지 못한다는 것도 알라. 자신의 작품이 시조는커녕 시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시조바닥에서 떠나는 것이 늘 상 입버릇처럼 부르짖는 시조의 발전과 육성을 위한 참다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