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진도군 고군면 석현리 이야기

2009. 3. 11. 06:47고향 그리움/진도문화

“솟대가 오는 이들 반겨 살피던 마을”

예불 올리는 진돗개 화제 되기도

고군면 석현리 입구에는 새모양의 나무가 동쪽을 향해 솟대가 세워져있다. 매년 정월 보름에 지내던 당제터도 이곳 부근이다. 지금도 큰 당나무가 남아있지만 당샘은 별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마을 주민 김관우(83)씨가 3년 전 까지만 해도 솟대와 장승을 만들어 해마다 세워 놓았지만 이제는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곳 한 작은 사찰에 예불을 올리는 진돗개가 있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석현리 불장사에 있는 1년생 진돗개 '하마'가 그 주인공이었다. 이 개는 스님과 함께 법당에서 예불을 드려 불자들의 총애를 받았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것인지 조주스님에게 다시 물어야 할 판.

주지 스님은 "30마리의 진돗개를 키우고 있는데 특히 영리한 하마에게 간단한 훈련을 했더니 예불을 올릴 수 있게 됐다"면서 "전생에 부처님하고 인연이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

불공드리는 개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민은 물론 외지인들도 이 희한한 광경을 보러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스님이 합장한 뒤 예불을 드리면 곁에 있던 하마도 똑같이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면서 "예불 드리는 견공의 자세가 정말 진지해 보인다"고 말했다.

오누고랑의 설화는 마을역사의 깊이를 보여주고

석현리와 관련된 전설이 하나 있다. 고려말엽 삼별초항쟁 시절로 올라간다. 석현리는 「돌깨」라고 불리면서 주민간에 평화로운 향(鄕)을 이루고 살았다. 그런데 삼별초군이 용장성에 머물다 꼭 열 달 만에 몽고와 관군의 토벌에 패퇴하고 말았다.

이때 홍다구란 고려출신 몽골장수가 진도 군민을 모조리 포로삼아 몽고로 납치해가는 바람에 진도가 무인지경이 될 적에 용하게도 석현동 사는 성명을 알 수 없는 남매가 뒷산으로 피난을 해서 다행히 잡혀가는 것을 면했다.

그러나 죽는 것은 피했으나 부모는 물론이요 온 섬이 텅 비었으니 상대하고 살 사람이 없어졌다. 그러나 나이 어린 오누이가 단 둘이서 그럭저럭 생을 영위하여 살아오는 동안에 형제는 서로 성장하여 음양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남녀가 부부의 짝을 이루는 연령에 이르렀건만 짝을 구할 상대가 없었다. 그러다 하루는 남매 중 누구의 제안인지는 불명하나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솥뚜겅을 두개 내려 굴려서 두개가 합쳐지면 눈 딱 감고 부부가 되는 것이고 만일 서로 갈라져 따로따로 굴러가면 천명이니 그만두기로 하자”고 했다.

이에 오빠도 동조하여 두 사람은 각기 한 개씩의 솥뚜겅을 가지고 나란히 서서 같이 굴렸다. 데굴데굴 잘도 굴러가던 솥뚜껑은 이상하게도 끝에 가서 둘이 서로 합쳐져 가지고 멈췄다. 이것이 하늘의 뜻인지 사람의 뜻인지 몰라도 이에 순종하여 부부가 된 오누이는 생남생녀하여 잘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 고랑을 석현사람들은 「오누이고랑」이라 부르고 있다. 오누이설화는 세계적으로 여러 곳에서 채록 발견되며 인류번성을 상징한다고 본다.

삼십재가 있는 마을 위 석현저수지는 1945년에 조성해 수해면적이 11ha이고 높이가 16m 길이가 94m이다.

또 다른 판본 다시래기 '김양은' 전승본

김양은 구술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진도에서 다시래기 전승본이 확인된 경우는 없었다. 1983년 당시 91세이던 다시래기 연희자 출신인 고군면 석현리의 김양은(金良殷, 남, 1892-1985)으로부터 진도 향토사학자 허옥인씨가 채록하였다. 이 자료는 목포대 이경엽(민속학전공) 교수에 의해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고서에 수록되었다.

이 교수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다시래기와 김양은 구술본을 비교분석한 논문을 학계에 내기도 했다. 김양은 옹은 17살부터 23살까지 직접 다시래기를 했으며, 거사나 사당 역할을 잘해 연희자로 이름을 얻어 상두계로부터 초청을 받아 공연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 교수의 연구자료에 의하면, 사당패소리는 전국에 남아 있으며, 장례놀이에서도 다양하게 불려지고 있었고 한다. 이는 사당패의 특성상 조선후기 각지에 전파되어 다양한 형태로 토착화되어 전승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허옥인씨는 이러한 사당패소리의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 김양은씨를 만나고 다시래기 전승본을 남기게 된 것이었다. 김씨의 아들로 김주임, 김주철시가 살고 있다고 한다.

현재 마을 굿 기능을 보존하고 있는 김관우씨의 동생 김철우씨는 진도읍 성동리에 태권도도장을 열고 뛰어난 실력으로 각급 학교에 시범을 펼쳐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김해김씨 집성촌

이 마을엔 김해김씨가 300년 이상 정착해 살고 있다. 1440년대 들어온 金碩崑이 입촌조이며 이에 앞서 청주 한씨가 1400년대 韓 潔부터 정착해 살았다.

사우 및 제각을 살펴보자. 먼저 충록사는 김해김씨 사우로 1700년에 세워졌다. 주벽은 김 琻 또는 전. 신위가 359위이며 양력 6월 6일 제사를 모신다. 충절사는 1915년에 세워졌다. 주벽은 金聲振이며 309위를 모시고 양력 3월 1일 제사를 모신다. 이 외에도 충현사(한방신), 응곡사(주벽 곽재도), 별형사 (주벽 김사험.1885년), 오현사 91885년 (김수. 3월 3일), 사정사 (김효감 주벽) 등이 있다.

석현 김씨는 김석곤을 입촌조로 하는 집안이다. 그의 묏자리를 화룡고조혈이라 하며 그 후손 중에서 군수 등 많은 인재를 냈다. 효손의 아들로 호는 귤원이고 진사시험에 합격한 뒤 호군(정4품)이라는 관직까지 이르렀다. 조복명, 박연과 함께 설군에 공이 있어 오현사에 배향되었다.

동학관련 인물도 한사람 있다. 1894년 12월 농민군지도자 김수종이 석현 집에서 수련도중 체포되어 처형당하기도 했다.

의병활동을 한 김상규(相奎.1920~1950)씨도 석현리 출신으로 진도군청년단장으로 6.25때 학살되었다.

마을은 아직도 6개의 반이 있으며 농가 74호 기타 11호로 85호가 산다. 남자 81명, 여자 86명으로 총 17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농지는 밭이 28.7ha, 논이 52.4ha이다. 임야는 143ha이다.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쌀과 봄동배추, 고추, 파 등이다.

마을조직으론 애사시 상부상조하는 상두계가 있다. 문화유적으로 석현유물산포지, 장승이 있으며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있다. 시인이며 정치에 입문을 시도한 김영승(50)씨도 이곳 출신이다.

돌개라는 지명이 석현이 되다

석현리의 속명은 돌깨이다. 본래 진도 고일면의 지역이다. 돌고개 밑이 되므로 돌개, 돌고개, 석현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페합에 따라 모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석현리라 하여 고군면에 편입되었다.

고려 제18대 의종 24년(1170)에 정중부가 군사혁명을 일으켜 왕을 내�고 태자 기를 이곳에 안치해서 이곳에서 죽었다.

역사유적으로 마을로 통하는 농로를 따라 150미터 정도 가다보면 우측에 2기의 고인돌이 김정수 소유 밭둑에 비스듬히 놓여있다. 2기중 1기는 밀려났으나 2개의 지석이 있으며 다른 1기는 완전히 밀려나 지석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다. 비각으로 김씨기효비각이 있다. 공자기원 2400년 5월로 적혀있다.

현재 이장은 박재근씨이며 노인회장은 한창록(78)씨가 맡고 있다. 동네에서 가장 솔선수범하는 분이 누구냐고 묻자 마을회관에 모인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 아 김옥겸(71)씨가 잴 잘해라” 한다. 이런 연유로 진도군수 표창도 받았다고 한다.

전형적인 동족마을로 발달

석현리는 본래 진도군 고일면의 지역으로서 돌고개 밑이 되므로 돌게, 돌고개 또는 석현이라고 하였다.

고군면 석현마을은 김해김씨 京派의 동족마을인데 1930년대의 조사에 따르면, 400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당시에 김씨가 53호 307명, 타성씨가 62호 291명이 거주하였다. 1970년대의 조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청주한씨와 김해김씨가 함께 거주하였으나, 김해김씨의 동족마을로 발달하였다. 이 때에 김해김씨가 78호, 청주한씨가 12호, 이씨가 5호, 박씨가 18호, 기타 성씨가 3호 거주하였다.

1400년대 한결(韓潔)이 고군면 석현리 일대에, 1500년대 한응변(韓應弁)이 고군면 지막리 일대에, 1700년대에는 지산면 일대에 한희민(韓希敏)이 들어와 정착하였다.

청주한씨 절재공파조 증손의 8세손인 한석상(韓錫相, 1664~1723)이 진도에 들어와 임회면 연동 일대에 터를 잡았다. 그 이후 손자 한경재(1701~1764)가 보전(寶田)으로 옮겨 큰 문중을 이뤘다.

주로 지산면 보전리와 고군면 석현리, 오산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청주한씨는 2000년 말 기준으로 진도에 393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며 이는 진도의 성씨 중 6위에 달하는 규모이다.

재 넘어 운장골표고농장에는 박홍준(58)씨가 표고버섯을 재배하고 있다. 그 골짜기 안에는 또 진도의 기인으로 불리는 떡보(이도항. 79 추정)가 살고 있다. 인지리 사는 원능스님은 “분명하니 깨달음을 얻은 도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30명이 모여야 넘던 삼십재는 풀숲에 잠기고

군내천의 한 지류인 고군면의 석현천은 첨찰산의 북서산줄기인 돌갯재[석현]와 칠산(七山, 179m) 위로 오일시와 경계산릉을 분수계로 하여 북향하여 흐르다가 사동의 물줄기와 고성리에서 물줄기가 합쳐져 서쪽의 군내천으로 합류되어 바다로 흘러든다.

마을 뒤로 진도 제일봉 첨찰산 산줄기와 서쪽으로 칠산이 함께하고 앞쪽으로는 북서풍을 막아주는 100m 이내의 배봉과 모정산 산자락이 가로막고 그 앞에 평야가 자리한 분지형이다.

마을 동남으로 해발고도 약50m 정도의 돌고개를 넘으면 군내면 월가리이고 정그럼재를 넘으면 진도읍이다. 도보교통이 발달했을 때에는 석현리에서 의신면 사천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인 삼십재는 높고 후미져서 30명이 모여야 겨우 넘어갔다고 한다.

현황을 살펴보면 2005년 총 86세대에 178명(남 86명, 여 92명)의 주민이 살다 작년 85호 177명이 되었다. 농경지는 논 43.2㏊, 밭 39.6㏊, 임야 143㏊가 있다. 석현저수지가 마을 남쪽에 자리하고 마을은 이 저수지 아래 산자락에 자리하면서 앞쪽으로는 넓은 들이 전개된 분지로서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전통적인 배산임수형의 농촌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마을 한 가운데로 길이 나 있어 교통사고의 위험이 잔존하고 윗마을 아랫마을의 내왕이 쉽지 않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과 봄배추, 고추, 파 등이 생산된다. 주요 성씨로는 밀양박씨, 김해김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1963년에 고성리에 세워졌던 고군우체국이 1987년에 석현리(오일시 방향)로 이전하였다. 유물유적으로는 충록사, 충절사, 충현사, 응곡사, 별향사, 오현사, 사정사 등의 사우가 있다.

삼국시대 유물산포지, 청동기시대 고인돌 유적

학정 일삼던 진도군수 �아낸 석현 주민들

삼국시대 유물산포지이며 적갈색연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유물산포지는 석현리에서 북서쪽으로 300m 정도 떨어져 있는 ‘당산골’로 불리는 계곡부의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이곳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유물산포지 내에 지석묘군이 있었으나 3년 전 마을길을 포장하면서 훼손되었다고 한다.

진도문화원장 김정호씨에 의하면 유정로는 1861년(철종 12)부터 1863년(철종 13)까지 제273대 진도군수를 역임하였다. 1861년(철종 12)에 진도군수로 부임한 이래 각종 부과를 무리하게 실시하여 군민들의 원성을 받았다. 이에 진도군 고군면 석현리 주민들이 주동이 되어 민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조정에서는 진도군수를 조존욱(趙存昱)으로 교체하였다.

석현 마을 사람들의 강한 정의감과 민중성이 돋보이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재훈이와 재엽이
글쓴이 : 돈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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