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의 옛 풍속을 살펴보다
허소치(小癡)의 변속팔조
이것은 진도가 낳은 화성이요 남종문인화의 종가를 이룬 운림산방의 주인 소치 허련이 65세 되던 해(서기 1873년 계유 11월)에 향중(군사회)에다가 진언건의한 내용을 진도군지에서 간추려본다.
오늘에 와서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예전과는 풍속이 많이 변했다. 각종 메스컴이나 인터넷의 보급으로 새로운 문화 문물을 받아들여 경향간의 생활풍습이나 인식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허소치선생 당시의 진도풍습을 되살펴봄으로서 우리 선조들의 삶과 의식을 엿보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진도군지가 만들어진 68년도 해설에도 당시 “현실에 적합하고 절실한 내용”이라며 근본정신만은 이해하여야 한다고 옮겼다.
(1) 소부독행 (젊은 여자가 독행하지 마라)
젊은 여작 고운 옷을 입고 홀로 종일 걸어다니면 강폭한 무례한들에게 변을 당할까 두렵다. 요즘 민속을 보면 극히 수치스럽고 슬픈 실정이니 젊은 여인은 반드시 늙은 할머니를 대동하고 다닐 것이며 그도 안되면 소아들 하고라도 같이 다니면서 헌 치마를 옆구리에 껴서 갖고다니다가 사람을 만나거던 머리를 덮어써서 보잘것 없는 여자처럼 꾸미고 지나도록 하여 정숙한 체면을 유지하여 봉변을 피하도록 한다.
(2)교불수렴(신부의 가마는 주렴을 쳐라)
신행 가마의 문을 가리지 않고 다니기에 행인이 누구든지 안에 있는 신부의 얼굴을 엿볼 수 있는데 이러고보면 무엇 때문에 가마를 타는지 알수가 없을 정도이다. 좋은 주렴을 꼭 치라는게 아니라 아무 배라도 되며 정히 없으면 찢어진 치마폭이라도 두어폭 가지면 가릴 수 있지 않느냐.
(3)거전타고(상여 앞에서는 북을 치지마라)
거전 앞에서 쇠북을 치고 아주 근사하게 운구를 하는데 이는 비록 상두군으로 하여금 힘을 내서 운구하기 위함인지 모르는바는 아니나 슬피우는 상자가 따르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일가친척들이 호상하는데 악기를 친다는 것은 만부당하니 쓰려거든 「핑경」을 써서 성세를 돋우면 될 것이며 요령이 없거들랑 부서진 그릇 가지고도 대용품을 만들 수 있으니 어쨌든 쇠북을 치고 장례모신다는 것은 우리 밖에 없느니라.
(4)남녀잡경(남녀가 뒤섞여 일하지 말라)
농사짓고 사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요 남녀가 같이 일한다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남녀가 일자로 늘어서서 머리를 부딪친다 어째나 손이 마주친다 심지어는 궁둥이가 맞닿는다 이런 것은 보기도 싫고 풍기상 못쓰겠으니 남자는 남자대로 일편에서 여자도 반대편에서 이와 같이 하면 일도 잘 되고 풍기도 정연하고 오직 좋겟느냐?
(5)부정야희(남녀가 들에서 지나친 작란을 말라)
남녀 일꾼들이 점심을 먹고 식곤이 올 무렵에 흙을 집어 던진다는 등 무례하게 작란들을 하는데 이것은 비록 피롤르 달래기 위해서라지만 이런 짓은 자칫 지나치면 년소한 주부들의 체면이나 상처를 입히기도 할 위험한 일이니 하지 말지어다.
(6)봉두가상(산발로 가두를 헤매지 마라)
머리를 쑥대밭과 같이 해서 거니는 것은 농사일꾼들이나 하는 것이지 굴자께나 배웠다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며 특히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갓 망건도 하지 않고 횡행함은 이 모두 관리들의 취재대상이 되는 데 항차 도포의 허리띠를 끄르고 행건은 벗어 부치고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님은 실로 창피막심할 뿐 아니라 통곡할 일이니 즉각 시정해야 할 지어다.
(7)遐客內室(하객내실)(안방으로 손님을 들이지 말라)
가난한 촌민들이 어찌 사랑방을 다 구비하고 살수야 있으랴 손님이 있을 때에 그렇다고 마당구석에 앉으라고 못하고 그렇다고 내실로 안내를 하면 또 어찌 인사가 되리오. 그렇기에 각동촌마다 부락적으로 동청을 만들어서 거기서 손님을 응대하면 되지 않겠는가? 타군읍은 모두 이와같이 하여 체통을 세워가고 있으니 본군에서도 모옥수간집도 좋으니 조속히 마련토록 할 지어다.
(8)婦女入寺(부녀입사)
승려란 자들이 중이랍시고 중머리에 장삼을 걸쳤으니 다 그 마음씨도 좋을 것 같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일반인과는 다른 데가 있으며 그 말은 곱고 공손하기 짝이 없으며 수명과 복리를 태워준다는 바람에 넘어가서 멍청하게끔 여러 가지 불미한 일들이 있으니 부녀자들은 사찰을 즐겨 가지 말라. 성안에 잡파들이라면 또 모르되 고군면이나 의신면 부인들은 길이 사찰을 지나게 되어 있다해서 함부로 출입하며 춘추명절에는 절문에가 잇대어 늘어서니 이는 시급히 시정되어야 할지어다. 혹자는 이를 현 시의에 불합하는 쾌쾌묵은 소리라 할지 모르나 이것을 현대화해서 해석해도 일항목도 뺄 수 없는 경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이 모두 본군 전래의 페풍 악습임에 틀림없으니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이다.
이상을 살펴보면 당시 허소치선생은 특히 장례풍습에서 쇠북을 치고나가는 풍습을 못마땅히 여긴 것으로 보인다. 요즘은 북에다 장고에 앞서 쇠가 반드시 필요하며 여성들의 호상풍습까지 더해졌으니 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문화로 이미 진도만가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노래와 함께 악기가 등장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으며 오히려 다른 지방에 비해 독특한 풍습으로 주목받고 있다.
또 여덟 번째 부녀입사조를 보면 이미 허소치는 당대의 고승인 초의선사로부터 부름을 받아 그림과 글을 기초를 배웠던바 절간의 고적한 절도를 잘 알고있음에도 일부 자격이 떨어지는 땡중들의 모된 습성을 익히 알았던 듯하다. 운림산방 바로 옆에는 쌍계사가 있으며 또 고군면은 혹여 용장사를 이르는 말인 듯한데 군지에 글을 쓴 이가 더 깊이 경계를 하는 듯하다. 일제치하 이래 이승만정부에 이르면서 주요 사찰들이 대처승에 넘어가거나 승적이 불분명한 이들이 절간에 들어가 폐풍을 일으키는 경향이 많았던 듯하다. 예향진도신문 박남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