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려 삼별초의 항쟁

2007. 9. 16. 07:38고향 그리움/진도문화

 



고려 삼별초의 항쟁 □ 삼별초 항쟁의 역사적 의의 삼별초의 항쟁이 진압된 뒤 원나라는 다루가치 총관부를 설치하여 고려와 몽고의 군사를 주둔케 하였는데 이때부터 제주도는 한 세기에 걸쳐 원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고 제주도민들은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과 항쟁을 벌인 세해 동안에 큰 전환기를 맞아 농사법 누에치기 베짜기 토목 기술 같은 뭍의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삼별초 봉기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13세기 후반 고려 민중들의 가장 큰 반침략투쟁으로서 몽고침략자들과 또 그들과 야합한 봉건통치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고려의 강점을 용이하지 않게 하였다는 점이며 또한 침략자들에게 나라를 예속화하려는 정부의 태도에 대하여 민족적 예속을 반대하고 자주성을 확고히 보여주는 민중의 의사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삼별초는 장기간의 항쟁경험을 축적한 민중의 역량을 적극적으로 조직화할 생각을 갖지 않아 내륙산간에 근거를 잡지 못하고 섬에서 섬으로 옮기며 항쟁하다가 곧 진압당하는 한계점을 지니게 되었다. 1. 처음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염려하여, 용사를 모아 매일 밤 순찰을 돌며 막게 하였다. 그 까닭으로 이들을 야별초라 불렀다. 도적이 여러 도에서 일어났으므로 야별초를 나 누어 파견하여 잡게 하니 군대의 수가 많아져 드디어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 몽고에 갔다가 도망해 온 고려인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 신의군이라 불렀으니 이것이 삼별초이다. 권 신(權臣)들이 정권을 잡으면 삼별초를 자신의 앞잡이로 만들기 위하여 녹봉을 후하게 주고 또 사사로운 혜택을 베풀었으며 또한 죄인의 재산을 몰수하여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김준이 최 의를, 임연이 김준을, 송송례가 임유무를 제거하는데 모두 삼별초의 힘을 빌렸다. [ 고려사 81권 병지`1 오군(五軍) 원종 11년 5월 ] 2. 야별초가 지평현(경기도 양평) 사람과 함께 밤에 몽고 군사를 습격하여 죽이고 포로로 삼은 것이 매우 많았고 말과 노새를 빼앗아 바쳤다.[ 고려사절요 16권 고종 22년 10월 ] 3. 병술일,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가서 그 곳을 거점으로 삼고 여러 고을을 침범·약탈하였다. 황제의 명령이라고 거짓으로 꾸며서 전라도 안찰사를 시켜 인민들이 가을 수확을 빨리 끝내고 바다에 있는 섬으로 옮겨 가서 살게 하였다.[ 고려사 37권 세가 원종 11년 8월 ] 4. 배중손은 원종 때 벼슬을 쌓아 장군이 되었다. 원종 11년(1270년)에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어 방을 써붙여 날짜를 정하고 재촉하여 모두 돌아가게 하였다. 삼별초는 다른 마음이 있어 따르 지 않았다. 왕이 장군 김지저를 보내어 강화에 들어가 삼별초를 해산시키고 그 명부를 가지고 돌아오게 하니, 삼별초는 명부를 몽고에 알릴까 두려워하여 더욱 반심을 품었다. 배중손이 야 별초 지유, 노영희 등과 더불어 난을 일으켜 사람들로 하여금 나라 안에 부르짖기를 “몽고병 이 크게 침입하여 인민을 마구 죽이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자는 다 모이라.”고 하니 잠 깐 사이에 사람들이 크게 모였다. 혹 달아나 사방으로 흩어지며 배를 다투어 건너다가 익사하 는 자도 많았다. 삼별초가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강을 순시하면서 크게 부르짖기를, “무릇 양반으로 배에 타고 내리지 않는 자는 다 목을 베어 죽인다.”고 하니 이를 들은 자가 다 두려워하여 내렸다. 간혹 배를 내어 개경으로 향하려고 하는 자는 적이 작은 배를 타고 쫓아와 쏘니 모두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성 중의 사람들이 놀라 흩어져 수풀에 숨었으며, 어린이 와 부녀자의 울음소리가 길에 가득하였다. … 적이 이미 탐라에 들어가 안팎에 성을 쌓고, 때로 나와 노략하며 주군을 횡행하고, 고을의 수령을 죽이니 해안 지방이 떠들썩하였다. 왕 이 김통정의 조카인 김찬과 오인절 등 여섯 사람을 보내어 그를 회유하니, 김통정이 김찬은 머무르게 하고 나머지는 다 죽였다. 원종 14년(1273년)에 또 김방경에게 명하여 이를 치게 하니, 김방경이 흔도 등과 함께 나아가 공격하였다. 적이 크게 무너지고 김통정은 70여명을 거느리고 산 속으로 도망가 매어 죽으니, 탐라는 마침내 평정되었다. [ 고려사 130권 열전 배중손전 ] 5. 김통정 부인의 시 북쪽 하늘(몽고병) 검은 진운(陣雲) 남쪽 향해(고려) 내려 왔네 나라 기운은 쇠약한데 바람 앞의 등불이라 구국의 횃불 삼별초군 의거가 강도(江都)에서 중과부적, 강도를 이별하고 항몽의 큰 파도가 진도로 옮겨 갔네 몽고와 괴뢰 도당 진도 성도를 불 사르고 인민을 죽였네 하느님이 탐라로 인도하시니 항성의 달빛이 밝구나 슬프다 원하옵건대 송도를 기필코 해방시켜 주옵소서 [ 문선희 삼별초의 넋 ] 치안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야별초가 확대되어 만들어진 삼별초는 민란 등 반무신 정권의 움직임을 저지하면서 무신 정권의 비호 세력 역할을 담당한다. 강화 천도 후 유격 전술 등으 로 몽고와의 항쟁에 나서기도 하나 강화도의 무신 정권 유지에 보다 애쓰는 속에서 대몽 항쟁 에는 다소 소극적이었다. 그러다가 무신 정권 붕괴를 의미하는 왕정 복고와 개경 환도가 결정 되면서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여,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몽고와의 항쟁에 나선다. 직접적 동기는 명부가 몽고군에 알려져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지만, 오랫동 안 몽고군과 싸우면서 다져진 민족 의식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새로운 왕을 추대하고 관부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항몽 정권을 수립한 삼별초는 진도 로 남하하여, 몽고군에게 당한 피해 및 지배 세력의 부패와 수탈에 대한 반발이 심했던 민중 의 지지와 협조 속에 많은 지역을 차지하기고 한다. 내륙 깊숙히 전주·나주까지 진공하고 전 라·경상도의 연해 지방과 바다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4년간 해상 왕국을 건설하여 몽고와 고 려의 통치 세력에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민중의 힘을 조직화하는데 소홀해 결국은 섬에서 섬 으로 떠돌다가 제주도에서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김통정 등이 자결함으로써 삼별초의 항 쟁은 막을 내린다 □ 삼별초의 뜻 고려 최씨 집권 시대의 특수 군대인 삼별초는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란 뜻으로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야별초에 인원이 많아지자 이를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그리고 몽고와 싸우던 때에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병사들로 신의군을 조직하였는데, 좌별초, 우별초와 더불어 신의군을 합쳐 삼별초라 하였다. 삼별초는 경찰과 군대 등의 성격을 띤 조직이었으나, 국가에서 정규군으로 창설한 것이 아니라 최씨가 설치한 것으로 일종의 사병이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하고 고려가 몽고와 강화를 맺자, 몽고 세력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 삼별초의 항쟁과정 최씨 무신 정권의 핵심 병력으로, 몽고와의 항전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운 삼별초는, 정부의 개경 환도를 몽고에 대한 굴욕적인 항복이라 하여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배중손의 지휘 아래 강화도에서 반기를 들었다(1270년). 그들은 먼저 강화도와 육지와의 교통을 끊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받들어 새로관청을설치하는한편, 관리도 임명하여 개경의 정부와 대립하는 반몽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개경이 가까운 강화도에서 오래 버티기 어려움을 느낀 삼별초군은 더 튼튼하고 안전한 근거지를 개경으로부터 먼 곳에 마련할 필요에서 전라 남도 진도로 옮겼다. 배중손이 지휘하는 삼별초군이 진도에서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을 무찌르는 모습 진도에 진을 친 삼별초군은 궁성을 크게 이룩하여 도읍으로서의 시설을 갖추는 한편, 격문을 발표하여 국민들의 항몽 의식을 북돋우었다. 이에 따라 많은 국민이 모여들면서 부근의 여러 섬과 해안 일대를 지배하여 하나의 해상 왕국을 이룩하였다. 삼별초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정부는 몽고와 연합, 고려·몽고 연합군을 조직하여 진도를 공격해 왔다. 1271년 고려·몽고 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면서, 삼별초군은 중심 인물을 대부분 잃었다. 나머지 세력은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옮겨 가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미 중심 세력을 잃은 삼별초군은 오래 지탱할 힘이 없어 1273년 고려·몽고 연합군에 의해 제주도가 함락됨으로써 전후 4년간에 걸친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끝났다. 삼별초의 항쟁은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고려 무인들의 몽고에 대한 항쟁 의식을 잘 나타내 주었다. □ 삼별초의 기원 1219년(고종 6년) 최충헌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는 집권기에 도적을 잡기 위해 용맹한 자를 뽑아 매일 밤에 순찰 단속하게 하여 그 이름을 '야별초'라 하였다. 여기서 별초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그 뒤 도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이를 잡는 군사의 수도 증가하여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고, 또 몽골의 고려 침입때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해 온 군사와 장정들을 모아 부대를 창설하여 '신의군'이라 불렀다. 삼별초의 정확한 설치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의 야별초에 대한 기록은 1232년 (고종 19)에 처음으로 보인다. 따라서 최우가 집권한 1219년 이후부터 1231∼32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와 달리 신의군에 대한 기사가 1257년에 처음 나오고 좌ㆍ우별초에 관한 기록은 그 다음해 기사에 처음 나오므로 그 전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 삼별초의 기능 삼별초는 날쌔고 용감한 군대로 알려져 전투와 경찰, 형옥의 임무를 맡았다. 먼저 경찰의 기능에 있어서는 당초 삼별초의 출발이 야별초에 있었고 야별초의 출발이 도둑을 잡는 데 있었기 때문에 삼별초가 도둑을 잡고 풍기를 단속하는 치안유지 활동은 원래의 사명인 것이다. 다음으로 형옥의 기능에 있어서는 죄인을 잡아서 가두기도 하고 죄를 심문하기도 했는데 비단 도둑뿐만이 아니라 반역죄인까지도 관할하였다. 한편 전투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삼별초는 수도경비대, 특공대, 경찰대, 전위대 등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1253년에 왕이 몽고의 사신을 만나기 위해 강화에서 승천부로 갈 때 야별초 80명이 평복 속에 갑옷을 입고 뒤를 따랐으며, 1260년에는 원종이 몽골에 갔다가 돌아오자 태손(후의 충렬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제포에 나가 왕을 맞아 호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254년 몽고의 차라대가 침입하자 경상도와 전라도의 야별초 각각 80명씩을 가려 도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정부 정규군의 활동이 자못 활발했고 야별초의 활동도 있었으나, 1253년 무렵부터 정부 정규군(2군 6위)의 활동은 거의 없어지고, 그 대신 야별초 내지 삼별초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것은 병제가 문란해져 정부의 정규군이 무력해진 반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삼별초를 강화한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1232년 고려 정부가 강화로 천도한 뒤 삼별초는 대몽항쟁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력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 삼별초의 성격 삼별초에 대해서는 사병으로 이해하는 견해와 공병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사병으로 보는 견해는 그 것을 설치한 사람이 최우였다는 것과 {고려사}(병지에 나오는 "권신이 집권하자 이들 (삼별초)을 부하로 삼고 녹봉을 후하게 주며 간혹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기도 하고. . . . . 권신은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고 이들은 앞을 다투어 힘을 다했다.") 라는 기사에 크게 의거한다. 이에 반해 삼별초는 국가 재정으로 양성되고 국고에서 녹봉을 지불했다는 사실과 삼별초는 당시 무인집권자의 사병이었던 도방이나 마별초 등과 엄격히 구분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삼별초를 공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사실 삼별초가 정부군으로서 독립하지 못하고 권신의 수족이 되어 정치권력과 깊이 유착되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집권자가 국가의 공병을 사병처럼 이용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삼별초가 명목상으로는 공병이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사병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도방이나 마별초 등의 사병보다 움직이기가 용이하였고, 따라서 김준·임연·송승례 등이 정변을 일으킬 때마다 중요한 무력기반이 되었다. 후에 고려 정부가 몽골에 항복하자 삼별초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여러 차례 정변의 주역을 차지했던 경험과 그에 걸맞는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삼별초의 난 ○ 삼별초 난의 원인 : 1259년 고려의 태자 전(원종)이 부왕을 대신하여 몽고에 입조함으로써 거의 30년간 계속된 고려와 몽고와의 전쟁은 실질적으로 종식되고 화평이 수복되었다. 이때 최씨정권은 타도되었으나 고려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여전히 무인들이었다. 실권을 잡은 무인들은 몽고가 요구하는 출륙환도를 거부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결전을 사양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왕실은 적국인 몽고에 접근하여 무인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출륙환도를 단행함으로써 명실공히 왕정복구를 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1270년의 정변으로 마지막 무인 세력인 임유무는 살해되고 무인 정권은 완전히 타도되었다 이 무렵 원종은 몽골을 방문하고 개경에 돌아와 있었는데, 몽고의 지시에 따라 출륙환도를단행하였다. 삼별초가 이에 반항하자 왕은 선무에 나섰으나 효과가 없자 강압적으로 해산을 명령하여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하였다. 이에 삼별초는 장군 배중손, 야별초 노영희를 지휘관으로 삼은 다음,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1270년 6월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당시 권력구조 안에서 단순한 군대가 아니라 역대의 권신(무신정권)과 깊이 유착되어 무인정권을 보위, 옹호하는 구실도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화도 내부에서는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대몽고 타협파와 무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강경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오랜 세력 근거지이며 항전의 군사기지인 강화도를 철수하여 구도 개경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앉아서 멸망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또한 당시 개경은 몽고의 병력에 호위된 국왕이 장악하고 있었고 몽고의 대군도 주둔해 있었으므로 환도는 바로 삼별초의 해체를 의미하고 있었다. 특히 국왕이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한 것이 반란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명부가 몽고군에 넘어가면 해체 후에도 보복을 당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별초는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도 강화도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또한 오랫동안 몽고병과 싸워 적개심에 차 있는 그들은 출륙환도로 인해 고려가 몽고에 종속화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일반 민중들도 친몽고적인 왕실의 패배주의적인 태도에는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민중의 지지를 업은 삼별초는 그들의 반란을 반몽고· 반정부의 자주독립 수호운동으로 제고하였다. ○ 삼별초의 항쟁 과정 : 삼별초의 지휘관인 배중손은 군졸을 통솔하는 한편 도내의 인민에게 몽고병이 내침하여 인민을 살륙한다고 선동하여 개경과의 교통을 끊었다. 또한 삼별초군은 문무관인과 백성들을 섬에서 나가지 못하게 엄금하고, 금강고의 무기를 꺼내어 군졸의 무장을 강화하고 도내의 방비를 굳게 하였다 그러나 도내의 양반관리들과 군사들이 강화도를 빠져나와 육지로 도망함으로써 사태가 불리해지자, 반란 3일 뒤에는 선박을 모아 재물과 백성·노비 등을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도를 근거지로 삼았다. 진도로 근거지를 옮긴 것은 몽고군이 반격해 올 경우 섬에 강력한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해전에 약한 몽고군에 대하여 전략상 우세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진도에 이동한 삼별초는 이 곳에 궁전을 짓고 용장성을 쌓아서 도성을 꾸미니 그 세력이 전라도 지방의 도서와 해안은 물론 ,경상도의 남해 거제·합포(마산)·동래·김주(김해)등에까지 확장되었고, 심지어 전주·나주와 같은 내륙의 큰 도시도 포위되어 공격을 받았다 1270년 9월 조정에서는 추밀부사 김방경을 전라도 추토사로 임명하여 토벌을 명하였는데 이때 몽고의 원수 아해도 동행하였다 그러나 완강히 저항하는 삼별초의 기세를 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해는 겁을 먹고 후퇴했다. 이에 몽골은 아해를 소환하고 흔도로 대체시키는 한편 군대를 증강했다. 고려에서도 양반·백정·잡색·승도를 징발하고 다시 지방군까지 동원하여 병력을 증강했다. 1271년 5월에 새로 홍다구가 몽고군 지휘관에 임명되었고 김방경·흔도·홍다구의 지휘 아래 고려·몽고 연합군이 진도에 총공격을 가하여 겨우 성공하였다. 이 때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은 전사하였다. 삼별초는 파멸적인 큰 타격을 받았으나 완전히 굴복하지는 않았다. 살아남은 여당들은 김통정을 수령으로 받들고 본거지를 멀리 제주도로 옮겨 항전을 계속하였다. 제주도로 이동한 그해에는 방어진지의 구축에 바빠 크게 활약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272년부터는 맹렬히 활동을 전개하여 자주 본토를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전라도와 경상도의 요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해 11월에는 삼별초가 안남도호부(경기도 부천)를 공격하여 부사와 그 처를 납치하고, 합포(마산)에 나타나서 전함 20척을 불태웠다. 이로 인해 남도의 세공이 해상에서 약탈되어 조운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와 같이 삼별초는 최후까지 선전분투 하였으나 기울어진 대세는 어찌할 수 없었다. 원나라의 세조는 장차 일본에 대한 정벌의 기지로서 탐라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272년 8월에는 사신을 고려에 보내어 탐라공략에 대한 적극책을 촉구하였다. 마침내 1273년 2월 김방경·흔도·홍다구가 지휘하는 연합군은 다시 탐라를 공격하여 삼별초를 평정하였다. 4월에 수령 김통정은 산중으로 피신하였다가 죽고 여당 1천 3백 여명은 포로가 되었다. 이리하여 삼별초의 난은 약 3년만에 진압되었다. ○ 삼별초의 의의 삼별초가 고려·몽고 연합군의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3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삼별초 그 자체가 매우 강력한 전투병력이기도 하지만, 그 배후에서 남도 각처의 농민들이 삼별초의 항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경상도 밀성군·청도군의 농민들이 관헌을 습격하여 폭동을 일으켰다가 1271년 1월에 진압된 사건이나, 또 같은 시기에 개경의 관노들이 삼별초에 동조하여 몽고의 다루가치와 정부의 관료를 죽이고 진도로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가 탄로되어 처형된 사건 등은 당시의 반정부·반몽고적인 민중의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의 국왕을 앞잡이로 삼아 고려를 예속화하려던 몽고의 정책과 고려의 예속화와 종속적 위치를 감수하면서도 자기네들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려고 했던 국왕 및 그 일파의 행동에 반발, 항거한 군사들의 의거이며,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당시의 민중들의 동조와 지지를 얻어 연합군의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상대로 3년간이나 싸우고 버틸 수 있었다는 점에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삼별초 항쟁의 전 시기동안 고려정부는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자력으로 난을 수습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항상 몽골의 군사적 원조를 받았으며, 육지의 농민들에게 가혹한 탄압을 하였다. 이는 이미 고려왕조가 완전히 민심에서 이탈하여 몽고의 종속 정권으로 전락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강화도에 남겨진 발자취 ○ 강화산성-고려 정부의 피신지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축 산성. 사적 제 132호. 면적 307.1km. 고려말 몽고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유린되자 1232년 6월 대몽항쟁의 기치를 들고 강화천도를 위하여 최우가 궁궐을 짓고 도성을 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왕궁과 도성시설이 완비된 것이 아니라 2년 후인 1234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영하기 시작하였다. 성은 내성·중성·외성이 있었는데,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1250년에 축조한 주위 약 9km에 걸쳐 있는 토성으로서 선원면의 토성지로 비정되고 있다. 중성에는 8개의 성문이 있는데 모두 송도의 이름을 본딴 것이다. 즉 동에 선인문, 서에 선기문, 남에 태안문, 북에 북창문, 동남에 장패문, 서남에 광덕문, 서북에 선의문, 동북에 창희문이 그것이다. 외성은 중성을 수비하기 위해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1235년 12월에 각 주현의 일품군을 징발하여 강화의 동쪽 해협을 따라 3만 7070척에 이르는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실시하였다. 이 외성도 토성으로 되었으며,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천도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보급물자를 지원받았던곳이기도하다. 그러나 몽고와 강화의 조건으로 1270년 개경으로 천도한 후 몽고의 요청으로 헐어버렸다. 조선 초기에 규모를 축소하여 고려의 내성이던 강화성을 축성하였으나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고, 1677년 강화유수 허질이 대폭 개축하여 고려시대의 내성규모로 석축하였다. 1709년 강화유수 박권이 중수하였고 조선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보수되었다. 성문의 문루에는 남쪽에 안파루, 서쪽에 첨화루, 북쪽에 진송루, 동쪽에 망한루가 있었다. 이 성은 1966년 서문이 해체, 복원되었고 1974년 남문 문루가 복원되었으며 이듬해에 성곽이 보수되었고 1977년 북문이 복원되었다. 현재 성은 강화읍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으로는 잘 보존되어 있다. 이 곳은 조선 말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일본에 의한 강화도 조약체결 등 수많은 외세 침략의 현장이다. ○ 정족산성(鼎足山城)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사적 제130호이며, 둘레 약 1㎞, 축성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으며, 다만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로 인해 삼랑성이라고 한다. 성곽의 축조는 거친 할석(割石)으로 되어 있으며 성내도 할석으로 채워 안팎을 겹축하여,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이나 경주 명활산성(明活山城)과 같이 삼국시대의 석성구조를 보이고 있다. 고려 고종 46년(1259) 5월에 고려 고종은 중랑장(中郞將) 백승현(白勝賢)의 풍수설에 따라 이 성내에다 가궐(假闕)을 지었다. 선조 39년(1606)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해오다가 현종 1년(1660) 삼랑성내의 정족산 사고로 옮겼다. 이때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譜閣)이 같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모두 없어지고 전등사(傳燈寺)만 남아 있다. 삼랑성은 고려시대 때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 중수를 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 하였고, 1764년에 다시 성을 중수하였고, 조선 말기에도 계속적인 보수가 있었다. 이로 보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알수있다. 이 산성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하려던 160명의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첩지로 유명하다. 현재 성내에는 당시 프랑스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순무천총(巡撫千摠) 양헌수(梁憲洙)의 승전비가 있고, 1976년 남문을 다시 복원하고 현판을 달았다. 특히 삼랑성은 마니산과 더불어 단국신화와 관련되는 흥미있는 성이다. 고려왕조는 안으로는 묘청의 난 정중부 일파의 무신의 난과 밖으로는 유목생활을 하던 몽고족이 대두하여 큰 제국을 건설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하면서 동아세계를 위압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압력을 맞이하게 되어 어지러운 형세를 보이게 된다. 이로 인하여 고려 왕조는 하나의 큰 전환기를 겪게 된다. 그 한 과정으로 삼별초의 항쟁은 특히 반몽고 반정부의 구호를 내걸고 몽고에 대한 고려의 종속화를 막으려던 민족적인 저항과 자주성을 확고히 보여준 항쟁으로 주목된다. 그러나 이러한 삼별초의 연구경향은 삼별초의 봉기의 동기가 무인정권이 몰락하고 왕권회복에 따른 그들의 반란에 서 혹은 종전의 대몽항쟁에 따른 몽고의 보복을 예상하고 두려워서 그들이 먼저 일어났을 것이라는 데서 그 원인을 구하고 있다. □ 무신정권하의 삼별초 무신정권은 고려 귀족사회의 제 모순이 축적된 결과 이자겸과 묘청의 난 등 중앙귀족사회의 동요와 몰락의 과정을 거쳐 심각한 모순의 갈등이 폭발되어 성립하였다. 무신정권하 삼별초는 강화도 천도이후 대몽항쟁의 주력부대였으며 무신들의 무력수단으로써 이용되어 왔다. 고려의 병제가 문란하여짐에 따라 정부군의 무능으로 치안유지도 담당할 수 없게 되어 천도이후 최우에 의해 야별초가 조직되어 도성안의 도둑을 단속하고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좌와 우로 나누고,또 몽고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신의군이라는 별초부대가 조직되었는데 이들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합해 삼별초라 부르게 됐다. 삼별초는 도방 및 마별초에 비해 공병적 성격이 짙다. 국가관제에 의해 지휘자가 배치되었으며 그러한 공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김준 임연 송예 등이 정변을 일으키는데 그들의 배후세력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삼별초는 공병적인 성격이 농후한 사병으로 일단 성격을 추정할 수 있겠다. □ 몽고의 침략과 배경 고려는 몽고와 더불어 강동성의 거란족을 평정한 것이 계기가 되어 무력을 앞세운 그들의 외교관계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 후 몽고는 자주 사신을 보내 막대한 공물을 강요했다. 그러던중 몽고의 사신 저고여의 암살사건으로 말미암아 고려는 몽고의 침략을 모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암살사건은 출병의 구실이었고 실제로 고려에 대한 몽고의 출병은 몽고가 아시아 제압의 일환으로 미리 계획해둔 군사행동의 실천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몽고의 군사적 활동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던 아시아의 정국이 고려에 강요한 하나의 운명적 비극이었다. □ 삼별초의 항몽전개 과정 항전의 결의하고 강화도에 입거한 고려정부는 전쟁이 장기화하여 본토의 피해가 격심해지자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전쟁의 장기화는 몽고군에게도 불안의 요소가 되었다. 이에 정부는 철군을 요청하고 몽고는 철군의 조건으로 왕이 친히 입조할 것을 요구해 왔다. 그 당시 고려정부내의 사정은 매우 미묘하였다. 국왕 측근의 문신들은 몽고와의 친선유대를 강화유지하여 왕권을 확고히 하는 동시에 무인들의 전제적 집권을 방지하려 했고 이에 대해 무인들은 강경히 반발하는 기세였다. 굴욕적인 강화이후 양국의 친선 유대는 주로 국왕 원종을 매개로하여 맺어져 국왕의 존재는 뚜렸이 상승하였다. 이것은 조만간 왕권의 확립이라는 형식으로 무인들이 실각할 운명이었으므로 이에 불안을 느낀 무인들은 자연 반대적 태도를 취하였다. 삼별초는 국왕과 무인들의 대립관계에 있어 서로 반목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미 정변으로 인해 무인정권이 실각한 지금에 있어 국왕이 개경으로 환도하면 삼별초의 권력은 제거될 가능성과 몽고군의 보복적 처단이 감행될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생각할수있는일이다. 그러나 봉기의 궁극적 목적은 몽고에 대한 고려의 종속화를 막자는데 있었다. 원종 11년(1270) 6월에 배중손 등은 출륙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삼별초를 무장시키는 한편 홍화중 온을 받들어 왕으로 모시고 정부 및 몽고군에 대한 항전을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강화도를 떠나 진도로 향하였다. 진도에 입거한 후 삼별초는 용장성을 쌓고 궁전을 건립하여 도성으로서의 시설을 갖추었다. 또한 진도를 거점으로 먼저 전라도를 제압한 후 해안지대는 물론 경상도 일대까지 강력한 영향권을 행사함으로서 약 9개월 간의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삼별초의 활약과 함께 민중의 호응도 대단하였다. 전라도 일대가 순식간에 제압되다시피하고 경상도 일대가 그 강력한 영향하에 놓이게 된 것은 이곳에 사는 농민들이 삼별초를 적극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삼별초의 맹렬한 군사적활동 중 특히 주목할 것은 11월에 삼별초가 멀리 탐라를 공략하였다는사실이다. 탐라는 남해방상의 요충으로서 송 및 일본과의 교통의 요로에 있었다. 고려 몽고군 측에서도 제주도가 삼별초의 다음 거점이 될 것을 예상하고 먼저 군사를 동워해 제주를 점거하여 삼별초가 상륙하는 것을 막도록 하였으나 삼별초는 수비군을 완전히 전멸시키고 이곳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 난에 대해 적극적인 토벌감행을 시도한 몽고측은 고려와 연합하여 원종 12년(1271)에 진도 총공격을 실시하였다. 수전에 강한 삼별초였으나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증강으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배중손도 전사하여 주력부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진도로 회선하지 못한채 김통정이 중심이 되어 남은 전함을 이끌고 제주도로 향하였다. □ 제주도에서의 항몽과정 제주에 입거한 김통정은 지금의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의 항파두리에 안팎의 이중으로 된 성을 쌓아 본성으로 삼았는데 내성은 돌로 쌓고 외성은 흙으로 쌓았다. 이밖에 애월에는 목성을 쌓고 바다쪽에는 방축을 쌓는 등 방어시설에 힘을 기울인후 이듬해 부터 자주 내륙지방을 기습공격하여 남해안 일대는 물론이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요지에 번번히 피해를 입혔으며 경기도까지 북상하여 그들의 군사적 활동범위를 넓혔다. 이에 고려는 몽고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사세를 관망하고 있던 몽고는 숙원인 東征(일본 정벌)때문에 정벌의 기지로써 제주를 중요시하여 공략할 결의를 굳혔다. 처음에는 사신을 보내어 회유책으로서 항복을 권유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나타나지 않자 여몽연합군은 원종 14년(1273) 무력으로서 제주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좌익군을 비양도에 상륙시켜 주력이 명월포로 상류하는 것처럼 꾸민 뒤에 중군을 함덕포에 상류시켰다. 그러나 삼별초군도 미리 짐작하고 병력을 배치해 두었으므로 함덕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워낙 공격이 끈질겨 오래 버티지는 못하였다. 함덕에 상륙한 중군이 저지선을 뚫고 서쪽으로 전진하자 비양도에 상륙했던 좌의군도 방향을 바꾸어 군항포로 상륙하여 기습하였다. 동쪽과 서쪽에서 협공을 받은 삼별초는 항파두리 북쪽 파군봉에서 가장 치열한 접전을 하게되어 양쪽의 많은 군사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막강한 화력 병력을 갖고 있는 여몽연합군에 비해 삼별초는 소수 정예부대로 이 전투가 고비가 되었다. 그래서 패한 삼별초는 항파두리성으로 철수하여 적의 추격을 막았지만 전세의 열세로 성이 함락되고 김통정은 재기를 노리고 부하를 이끌고 성을 탈출하여 항파두리 남쪽에 있는 흙불은 오름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은 기회를 주지 않고 추격하여 최후의 일전이 벌어졌으나 모두 전사하고 김통정은 탈출하여 산중에 들어가 자결하고 나머지 수령들은 처형을 당함으로써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일어나지 4년만에 평정되었다.
출처 : 보배섬 진도
글쓴이 : 하랑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