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735년 만에 삼별초 고려왕께 잔을 바쳤다고 합니다(펌)

2007. 8. 23. 10:40고향 그리움/진도문화

제 목  735년만에 삼별초 고려왕에게 잔을 바치다
글쓴이   namin    E-mail   namin4002@hanmail.net
작성일   2006/7/4 16:04:24 조회수   0

(진도군 진도문화원 게시판에서 퍼온 자료입니다)

 

(원문)


삼별초 고려왕 제사를 모시다

“좌집사는 잔대를 들어 초헌관에게 주시오” “우집사는 술을 따르시오”
5월 15일 오전 11시. 진도 의신면 진설리 속칭 ‘왕무덤재’ 산언덕에서 삼별초 고려 온왕에 대한 제사가 모셔졌다.
지난 해부터 진도문화원(원장 김정호) 주관으로 삼별초 고려 온왕에 대한 제사가 모셔지고 있는 것이다.
734년 전 오월 그날 강화도에서 일천척의 배를 이끌고 진도 용장산성에 항전의 기틀을 마련한 삼별초 진도정부는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활발한 외교전략까지 구사하며 10개월을 몽골제국에 결사적으로 싸워 버티다 이곳에서 수많은 병사와 함께 온왕이 죽음을 당했다.
당시 강화도에서는 6촌 동생인 왕온을 죽이지 않도록 두 아들을 딸려 보냈으나 몽골장수 홍다구는 기어코 칼을 내리쳤다. 이에 대해 왕의 목을 놓고 의논했다하여 논수동이란 마을 지명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홍다구와 싸웠던 골짜기를 ‘다근투골’이라 하며 삼별초 병사가 진을 친 마을이 진설리가 되었다.( 이 마을은 나중에 육이오동란 당시 평안도 황해도 피난민들이 들어와 본격적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의신면은 당시 궁녀들이 몸을 던진 급창둠벙이며 대분통이란 떼무덤 등 삼별초 관련 지명과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제사에 앞서 진도사람들답게 박순단보살이 진도씻김굿을 통해 수많은 넋을 위로했다. “하적이야 하적이야” 흰 당목천을 펼치고 부르는 씻김소리에 모두 숙연하여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무심한 세월은 흘러 비와 이슬이 벌써 내렸습니다. 우러러 묘소를 둘러보고 깨끗이 다듬으며 추모하는 마음 이기지 못하와 삼가 맑은 술과 갖은 음식으로 경건히 드리오니 두루 흠향하옵소서.
우리민족의 기개와 염원을 안고 옥주고을 땅을 찾았던 온왕께서 한을 품고 묻힌지 벌써 734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이미 민족의 자주성을 잃어버린 채 몽골에 투항한 정권에 단호히 반대하고 배달민족의 자주성을 일으켜세우기 위해 강화에서 진도까지 뱃길을 달려온 사람들.

당신을 찾아가는 길은 너무 오랫동안 지워져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항상 시대의 모순을 비켜간 사람들이 화려하게 각광받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서글픔으로 풀섶에 맺힌 이슬방울이 우리가 다시 씻어야할 맑은 눈물방울만 같습니다.

천년이란 세월을 담기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그러나 진도는 누구에게나 천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절로 동화시키는 곳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던 고도의 유적과 명승이 어우러진 곳도 아니요 문명의 시발을 찾는 열쇠가 숨겨진 곳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진도에 가면 누구나 한 역사의 풍향을 감지하게 됩니다.

아무런 굴욕도, 은밀한 내약도 휘황한 능력도 앞세우지 않고 굵은 동아줄 가슴에 감아 한 판 상씨름을 겨누고도 더운 김을 흘리지 않는 그런 시대와 다시 만나야 하는지요.
위인은 난세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장엄한 비극을 예감한 시대에 스스로 창조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들 누가 시비를 걸진 않겠지요.
의신면 진설리 고개. 오늘도 사람은 가고 오지만 저 무심한 역사의 숨결을 느끼는 자 누구인가? 성황당 바위에 돌을 던지고 침을 뱉으며 모욕을 참아온 세월.
그 세월은 우리의 정신이 황폐한 시대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신과 당신을 따르던 군사와 백성들을 ‘위왕’과 반역으로 규정한 동안 이 나라도 역시 사대주의에 물든 패전국과 식민지국가의 사관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온왕과 그 민중들을 다시 역사의 격랑을 헤쳐 끌어 올린 이들은 바로 불우한 시대를 죽창처럼 찔러 일어난 옥주고을 주민들입니다.

당신을 앞세운 배중손이 늑대의 성깔로 수많은 왕족, 귀족들을 단칼에 베어버린 잔인한 뱃놈 출신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과 함께 민족의 정신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비굴한 항복으로 일신의 안위와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김통정과 마지막 70전사의 결사항전에 앞서 당신과 배중손은 이곳에서 왜곡되지 않을 역사를 새겨놓았습니다.
나를 구원할 절대적 타자를 갈구하는 시대가 악을 낳고 전쟁을 낳았습니다. 히틀러나 히로히토와 모든 정복전쟁의 주인공들은 인류역사를 잠시 불행한 페이지로 장식하는데 앞장섰습니다.
하나의 진리를 품은 표상을 그리워할 때 독재와 이단이 한 세계를 지배하게 됩니다. 함께 했던 수만명의 백성 진도민중들은 수십년을 허허로운 중국 벌판에서 전쟁포로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저 한 시대의 불우한 외침에 머무는 백성이 아니라 가장 슬픔의 밑바닥에 제 어미와 어버이를 기꺼이 누이고서 제 모습과 제 길을 똑바로 찾아낸 이들이 이곳 진도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변방의 노래만을 불러왔는지도 모릅니다.

한 때는 역사의 바깥으로 튕겨나갈 정도로 제 이름과 운명에 가혹했던 이의 진정한 꿈은 무엇이었을까?
‘망할 자는 육지로 나간자요 살아남을 자는 삼별초를 따라 바다로 나가는 자’라고 호언하던 그 사람들.
오늘 스치는 바닷바람 어디에도 그의 끊어 담은 숨결을 찾을 길은 없습니다. 지금도 바다는 기회의 푸른 밭으로 넘실대지만 진도는 닻줄이 풀린 채 빙글거리고 있다.
평화를 사랑했지만, 평등을 갈구했지만 변방의 방패막이로 생을 마쳐야 했던 옛 젊은이들의 한이 흰 당목천으로 풀려나는 오월의 하늘 구름과 만나고 있습니다.

싸움이 곧 삶이고 사랑이며 내일의 아침을 여는 고단한 행군임을 누구보다 더 절실히 깨달아 사는 이들, 진도의 주민들은 오늘 너무도 공허한 외침 앞에 서 있습니다. 애국의 길이 가로 막히고 생존의 길도 마구 허물어져 가는 이 시대를 앞장서 구원할 깃발과 해답은 어디에 있습니까?

농촌에 사는 일이 죄가 된지도 오래입니다.
그래서 오늘 나는 가장 변방의 땅 진도에서 배달겨레의 혼을 찾았던삼별초 고려왕국을 떠 올립니다.

삼별초가 진정으로 고려 역사의 중심이었음이 확인되는 날 진도와 우리겨레 또한 역사의 중심으로 설 것을 분명하니 믿기 때문입니다.
상향“

“배중손이란 장군만을 치켜세워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으나 정작 왕이었던 온왕을 기리는 그 어떤 행사도 제사도 없다는 것은 결국 삼별초가 쿠데타세력에 불과하다고 격하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제살르 모시기로 했다는 김정호문화원장의 통찰은 예리하다.

이날 초헌관에는 우여곡절 끝에 김경부 진도군수가 맡았다. 작년 첫 제사때는 아직 다하지 못한 슬픔을 내세우려는 듯 비가 내렸는데 이날은 푸르고 환한 하늘빛이 묘역을 감싸 안는다.

왕의 제사라고는 하지만 정확한 고증을 못 잡아내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아 진도문화원 회원들과 의신면 주민 등등 100여명이 참석해 제사를 마치고 푸짐한 음식을 들었다.
내가 작성한 “너무 길고 격정적인 축문” 때문에 군수일정에 차질이 왔다는 말도 가볍게 흘러넘기며 맑은 술 한 잔을 들었다.
오후에는 또 쌍계사에 들려 절밥이나 축내야 한다.

출처 : 여미리를 아시나요
글쓴이 : 쏙대네식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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