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시조문학 작가에게 묻은 나의 체험적 질문

2012. 5. 14. 10:37아름다운 세상(펌)/고운글(펌)

이 글은 필자가 30 년 동안 우직스럽게 시조만 써 오면서 느낀 의문에 대한 질문서입니다. 시조 전문지에 발표하고 싶었지만 아는 곳도 별로 없거니와 내용을 수정 하거나 원고를 줄여 달라는 등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미루어 왔습니다. 오래전부터 인터넷을 통하여 작품 활동을 해 오던 차에  마침 협회에 카페가 개설되었기에 이 곳에 올려 봅니다.

 

 

시조문학 작가에게 묻는 나의 체험적 질문

김문억

 

 

시작하는 말

 

이 글은 시조문학 개론에 관한 이론이나 참고서가 아니다.

많은 기간은 못 되지만 지난 30 년 동안 오직 시조만 우직스럽게 써 온 현역 작가가 그 동안 체험 중에서 얻은 의문을 갖고 묻는 질문이다.

시조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글이기 때문에 본론으로 들어간다.

 

작가 중에 3 장 6 구의 시조 틀을 부정한다거나 폄하 시키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말 누군가의 핀잔처럼 그런 맞춤옷이 답답하면 자유시를 쓰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조쓰기에 매달리면서 논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분명 있다. 시조문학의 원형을 지키면서 한국문학으로서의 위상을 지키고 싶은 자존심과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평생 화두는 오직 ‘어떻게 쓰면 인기 없는 시조를 독자들이 다시 읽을까’ 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

그러다 보니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는 시조문학이 어찌하여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미나, 문학 제, 백일장 같은 행사를 해마다 반복해서 갖고 있지만 민족시를 푸대접해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이나 역사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 외면당하고 있는 시조문학의 현실을 솔직하게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실 진단에 따른 새로운 길을 제시하지 못 하고 있다.

 

 

시조문학 논의의 핵심은 한국문학으로서의 현대시조 위치 확보에 두어야 한다.

 

 

시조문학 논의의 핵심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성을 근간으로 하여 시문학으로서의 예술성을 객관적으로 확보하면서 한국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위치 확보에 두어야 한다.

조상의 유산은 훼손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고 전통이란 본래 모양대로 애지중지 아끼면서 길이 보전해야 한다면서 명절에나 한 번쯤 꺼내 입는 한복 쯤 이라면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 어쩌면 역사성과 전통성만 강조한다면 본래의 시조창이나 보존하는 시조사랑 동호인쯤이면 족할 것이다. 하지만 시조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과 한국의 현대문학으로 건강하게 자리 잡는 문제는 냉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시조가 그런 위치에 오를 때에 우리는 자랑스럽게 전통성을 강조할 수 있고 독특한 문학 장르를 자랑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그 반대에 있는 것이 엄연한 일이면서도 오직 시조예찬만 하는 것 같다. 이제는 시조를 연구하고 강의하는 교단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평생을 시조쓰기에 몸담고 있는 현역 작가 입장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냉철하게 되돌아보고 한 발작 뒤로 물러나서 우리의 얼굴을 솔직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많이 늦었다.

 

시조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구친 것도 아니라면 시조문학이 태동하던 그 시절에는 사회적 인습적으로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고시조는 창이라고 하는 소리로 시작된 것이고 선비나 기득권층의 독점물로 풍류를 즐기던 詩歌였다.

도포자락에 시조 한 수 적어 넣고 갔으리라. 기방에 들어 펼쳐 놓으면 기생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소리에 담았으리라.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뜯거나 대금산조가 배경으로 탄주 되었으리라. 그리고 한 잔 하고 흥이 더욱 도도해지면 지필묵을 들라하여 한 수 더 지었으리라. 다시 시조 한 수를 창으로 발표했으리라. 45 자 내외 시조창 한 수만 풀어도 밤은 깊어갔으리라.

길고 긴 소리의 다양한 음절이 끊어질듯 이어지는 시조창 가락의 품위만 봐도 서민적이기 보다는 고고한 선비풍이다. 이러한 태동기로부터 이어받은 시조의 D.N.A 는 오랜 역사를 끌고 그대로 내려왔다.

서둘러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고시조는 고시조로서 우리에게 소중한 유산을 넘겨주었지만 지금은 현대의 문학사조에 맞는 현대문학으로서의 시조를 발전 시켜야 한다.

이미 조선 초기에 훈민정음이 창제 되면서 인쇄문화가 발달하고부터 소리문화의 歌에서 詩문학으로 서서히 탈바꿈 되었던 것이다. 이는 오랜 세월동안 한문문화군에 속되어 있던 조선의 문화가 독립을 한 것이다. 대단한 자랑거리의 문화혁명이었다.  

 이는 새삼스런 논의가 아니다. 기본적인 얘기다. 그 동안 수 없이 제기 되어오던 시조문학개론 정도에 불과한 해묵은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군말을 더 보태야 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지금은 21 세기 디지털 시대다. 컴퓨터가 생기고 정보화 시대가 도래 한 것은 금세기 인류문명의 최대 혁명이라고 하겠다. 지식은 감성으로 바뀌고 그에 맞춰서 문화 역시 혁명적으로 다양한 패러다임을 추구하고 있다. 시문학의 다양성은 말할 것도 없고 장르를 뛰어 넘는 표현의 자유 등 어느 면에서는 독자들의 예술적 욕구를 작가가 따르지 못하는 추세다.

신문학이 도입된 이후 한국문학 역시 다양하게 변천해 가고 있는 문예사조 속에서 시조문학의 발걸음을 살펴 볼 때 지나치게 한 쪽으로 편향된 느린 걸음이었다.

등록된 시조작가가 어찌어찌하여 천 명을 넘게 되었는지 속사정을 피차 빤하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시조문학이 크게 저변확대 된 것처럼 오도 시키고 있다.

 

1) 책방에 가 보면 시조 책이 없다. 옛날이나 출판문화가 발전하고 있는 지금이나 똑 같다. 안 팔리는 책장사를 누가 하겠는가.

 

2) 다양해지고 있는 검인정 교과서에서 차츰 시조가 사라지고 있다. 그래도 과거에 쓰던 국 정 교과에서는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았다.

 

3) 신춘문예에서 시조부문이 사라지고 있다. 응모자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과거에는 이렇지는 않았다. 모든 신문사에서 시조부문도 포함되고 있었다.

 

위에서 열거한 3 가지는 시조문학 저변확대의 지름길 이지만 오히려 그 길이 가파르게 지워지고 있다. 시조 예찬을 엉뚱한 쪽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은 냉엄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볼 생각은 안 하고 땡감을 홍시라고 욱이면서 잔치를 벌이고 있다.

현대시조 길을 묻는다는 세미나를 비롯한 여타 시조문학 행사에 참가를 해 봐도 토론의 주제는 민족문학으로서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 아니면 형식구조의 비교 같은 해묵은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국문학을 가르치는 敎師들의 노트라면 모르지만 시조를 업으로 하는 작가들이 할 일이 아니다

현대시조니까 현대적 감각 속에서 현대적인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가 있을 뿐, 구체적인 자기 분석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훌륭한 민족시를 푸대접 하고 있다고 제도권이나 독자들을 야단칠 뿐 까닭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도 곳곳에서는 3 장 6 구의 형식구조나 역사성 같은 것을 갖고 반복 필사를 하고 있을 뿐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거울 한 번 들여다보자

 

 

시조는 단 수 짓기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시조의 정수定數는 단수에 있고 단수가 갖는 뜻의 정수精髓도 촌철살인 하는 단수의 맛에 있다.

시조는 봉건적이고 고루한 문학이어서 발전적이지 못하다고 카프 계열에서 시비를 걸어올 때 시조를 혁신 시키자면서 내용적인 것과 동시에 형식마저 연작 쓰기를 권장했다. 혁명이었다. 지금 말로 치면 파격 이상이다. 당시로서는 시조문학을 지키기 위한 치열하고 안타까운 몸부림이었다. 결과적으로 뒤집어서 생각 해 보면 카프 계열의 주장 일부가 이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셈이 된다.

아, 불사! 이때에 사설시조를 활성화 시켰더라면......

고시조는 그렇게 현대시조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연작이란 새로운 모양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모색이라는 이유가 충분했기 때문에 합의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시조문학은 문단 자체에서도 변방으로 밀리는 수모를 격어 왔다. 교과서에서는 고시조 위주로 교육 되었고 종합문예지에서는 마치 부록처럼 젤 뒤에 수록 되는 서자 취급을 받아왔다. 책방에서는 시조집 판매를 외면 해 왔고 일반 독자들은 고시조와 시조창의 분위기에서 진정한 현대시조의 진수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연작쓰기도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평시조 연작 쓰기는 독자들의 눈을 끌지 못하면서도 민족시라고 하는 자긍심을 갖고 지금까지 그냥 답습을 거듭해 오고 있다.

 

시조는 고루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시비를 걸어온 근본 이유는 시조의 형식구조가 아닌 작품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신문학이 도입되고 극심하게 사상적으로 맞서면서 외침으로 나라가 위태로운 시절에도 고전적이면서 낭만으로 유유자적 하는 시조가 못 마땅했던 것이다. 연작을 쓰기 보다는 그 시대를 쓸 수 있는 내용의 혁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時代를 외면하고 時節만 노래했던 것이다.

때는 이제 예측불허의 다변화 시대에 들어와 있다. 자유시 역시 시대의 변천만큼이나 다양한 표현으로 치닫고 있다. 시가 해체 되는 反詩 운동으로 시의 난해성까지 문제되고 있다. 다양한 문화적 패러다임으로 치닫는 현상은 오히려 정신적 혼란이나 공황 같은 역현상까지 가져올 수도 있다. 전반적인 시문학의 현실이 이러한 때에 오히려 촌철살인 하는 감동의 단수 시조라면 외면하고 있는 독자의 눈길을 끌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朔風(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明月(명월)은 눈 속에 찬데

萬里邊城에 一長劍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김종서-

 

 

내 오늘

서울에 와

萬坪 寂漠을 산(買)다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흩고 막 뿌릴까부다

바닥난

호주머니엔

주고 간 벗의 名啣

-서벌의 서울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니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이우걸의 팽이

 

 

연작이 안고 있는 3 장 6 구의 반복 리듬은 시조 읽기를 지루하게 만들고 있다.

 

 

연작 쓰기를 하면 한정된 틀 속에서 같은 길이의 리듬이 반복되기 때문에 읽기에 단조롭고 지루함을 느낀다. 우리 가락 우리 말 맛도 단수였을 때 말이지 접하는 시조마다 3 수 4 수 5 수 이상으로 되어있는 반복 리듬은 시 독자들이 시조를 외면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라고 나는 감히 진단한다.

내용이 좋은 작품도 연작으로 써 놓으면 읽기에 지루하기 때문이다.

 

우리말에서 자생된 우리말이 갖는 독특한 가락 맞다. 그러나 현대인의 감성은 반복되는 정형시의 가락을 선호하지 않는다. 작품성이 아무리 좋아도 같은 길이의 문장이 거듭되는 반복 리듬은 경음악을 듣는 것 같아 읽기가 지루하고 재미가 떨어진다.

시조는 3.4. 3.4 글자 수 맞추기가 아니며 7 자의 기본 율에서 몇 자를 가감할 수 있는 융통성이 있는 매우 넉넉한 가락을 갖고 있다고 강조 해 왔다. 때문에 음수율 보다는 음보를 더 강조하면서 무엇이고 담을 수 있는 넉넉한 그릇이라고 자찬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융통성도 어쩔 수 없이 정해진 3 장 6 구의 틀 안에서 가능한 특성을 갖는다. 그것이 시조요 시조의 맛과 멋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수의 묘미를 넘어 연작으로 거듭해서 넘어가다가 보면 내용까지 느슨하면서 단조롭고 지루하다. 종장이 갖는 율격의 특장이나 구비치는 반전의 가락도 단수였을 때 말맛이지 그것이 연속적으로 반복될 때는 경음악이나 자장가 같은 리듬을 지우기 어렵다.

 

 

한 손에 책(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새로 난 난초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淨)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이병기의 난초-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 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어울려 옛날 같이 살고지라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다름질하고

물들면 뱃장에 누어 별헤다 잠들었지 >

세상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보고 저기나 알아 보나

내 몫엣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되 안기자 되안겨

 

처자들 어미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워라 아까워

 

일하여 시름없고 단잠들어 죄없은 몸에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 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을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이은상의 가고파-

 

 

시조문학이 어렵던 시절 현대시조의 새로운 길을 열었던 두 시인의 대표적 작품으로 선비정신이 흠뻑 배어있는 고고한 작품이다. 이 무렵부터 연작쓰기가 오늘 날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작품도 반복 리듬의 지루함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러면서 시조라는 이유만으로 독자들이 외면하므로 시조작가는 자유시 작가에 비해서 언제나 손해가 너무 많다. 구태여 상대적 비유를 해 본다면 자유시에서도 얼마든지 음악적 리듬은 있는 것이며 그것은 시 창작의 기본 율이다. 그러면서도 그네 역시 西 쪽에서 온 장르라고 해서 영어나 불어로 쓰지 않았으며 모더니즘을 비롯한 새로운 문학패턴 도입을 주저하지 않았지만 음악적 요소는 안팎으로 충분하다.

같은 무렵의 자유시를 예로 보자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雜草)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皮膚)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구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悲哀)를 지니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김광균의 <와사등(瓦斯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

두 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던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

-심훈의 그날이 오면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의 문둥이

 

 

뿐만 아니다. 지용 목월 미당 같은 분들의 시 역시 우리 말 맛의 자유로운 가락이 듬뿍 배어있다. 상대적 비교를 한 번 해 보자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그러고 보면 시조문학의 정수는 단수에 있다는 것을 다시 인식해야 할 것이며 우리 말 맛에서 유발하는 음율 같은 음악적 요소는 한국문학의 어느 장르에서나 자연스럽게 찾아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조선의 가사문학이 대개가 다 그렇다. 시조문학만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러한 말맛의 이유로 시조에서 강조하고 있는 가락이란 것은 시조쓰기를 거듭 하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體得할 수 있는 것이다. 시조의 기본 율을 마음에 두고 소리 내서 읽어 보면 내가 쓴 시조가 기본 율에 충실하고 있는지 아닌지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시조는 3장 6구의 정형시일 뿐이다. 시대적 욕구와 사명감으로 내용을 혁신시키기 위한 시창작의 기본 정신을 교육시키기 보다는 지나치게 전통을 앞세워서 음악적 요소만 강조하는 교육이 지속되고 있다.

 

 

단시조 연작은 통일감과 연속성 결여로 산만함을 느끼게 된다.

 

 

연작은 단수 짓기의 연속이다.

연작시조의 특성상 각 首마다 3 장이 갖는 기승전결의 의미구조가 종결된 후에 다시 둘째 수 셋째 수로 넘어가게 되어있다.

다시 말하면 연작 역시 갖고 있는 수마다 시조로서의 짜임새가 튼튼해야 한다. 그렇게 기술된 3 수 4 수가 전체적으로 엮어진 한 편의 작품 속에서 통일된 주제가 성립 되어야 한다. 이것이 평시조 연작의 기본 형식구조이면서 의미 구조다. 자유시에서 말하고 있는 행이나 연의 구분하고는 또 다른 큰 의미다. 그러다 보니 일반 독자들은 매 수 마다에서 이야기의 편안한 연속성 보다는 어떤 단절을 느끼면서 감상을 어렵게 하고 있다.

자유시에 비해서 확연하게 다른 부분이며 연작을 쓰므로 해서 시조 특유의 긴장미 응축미도 아무래도 느슨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 것을 보존하고 사랑해야 한다면서 이러한 연작쓰기를 너무 오래도록 반복 해 오면서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전수되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참이다. 연작쓰기의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한 번도 공론화 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그렇게 단시조 연작만을 길게 쓰는 사람이 시조문단에 전진배치 되면서 각종 행사를 주관하고 후학을 양성하고 그런 작품이 우수 작품이고 갖가지 양념으로 포장하여 수상을 하면서 시조문학의 터 닦기를 하고 있다. 매우 견고하게 깊은 뿌리로 내려 일반화 되어있다.

민족시로의 긍지를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겠지만 종종 민족과 전통을 내세우면서 어느 경우는 거의 신앙적이었다.

 

 

이야기 식으로 이어서 쓰는 연작은 시조라고 하기 어렵다.

 

 

지금 발표되고 있는 연작쓰기를 살펴보면 시조 특유의 기본을 무시하고 겉모양만 시조일 뿐 첫 수에서부터 시작된 글을 계속해서 이야기 식으로 이어서 쓰고 있는 작품이 허다하다. 시조를 몰라서 그렇게 쓰는 것이 절대 아니다. 매우 역량 있다고 소문난 작가도 의식적으로 그렇게 쓰고 있다. 딴에는 새로운 시도로 거침없이 편안하게 쓰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자유시에 속할 뿐 시조라고 할 수 없다. 이 역시 짚고 넘어가야 할 매우 중요한 문제다. 왜 그랬을까. 이 경우야말로 무엇을 반증하는가.

 

작품을 쓰다가 보면 말을 아끼고 절제하여 지엄하고도 단단한 단수로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오히려 풀어서 이야기 식으로 쓰면 작품성이 더 극대화 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생긴다. 시문학의 다양성이다. 서술체 대화체 등 표현의 다양화다. 그렇지만 억지로 시조의 기본 율까지 훼손시키면서 겉모양만 유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새로운 형태의 시조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자유시 쪽에서 시비 거리가 되면서 일반 독자들까지 헷갈리게 한다. 이런 경우야 말로 과감하게 사설시조 형식을 간택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극단적으로 사설시조를 부정하면서까지 이렇게 이야기 식으로 연작을 쓴다는 것은 이율배반이요 시조를 모독하는 처사라고 하겠다.

 

 

관념에 갇혀 있는 은유의 남용

 

 

시조를 안 읽는 가장 큰 이유 중의 또 하나가 바로 은유법의 남용이라고 감히 지적하고 싶다

시 쓰기에 있어서는 비유만 잘 해도 절반은 성공이라고 한다. 시 자체가 비유면서 모방이랄 수 있다. 표현의 자유를 누가 뭐라 하겠냐만 그러나 그 비유 역시 보편성 객관성을 갖추어야한다. 아무리 좋은 개성도 그런 범주 안에서 허용되어야 한다.

직접 비유는 자칫 진부한 것이고 암시적인 간접비유로 작품을 전개 해야만 품위가 있고 좋은 시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언필칭 직접 비유는 설명으로 흐르기 쉽다는 우를 범하지 않겠다는 심산인듯하다. 실은 은유도 못 되는 관념의 묶음이다

그것이 어떤 상징성을 갖고 에둘러서 이야기 하는 은유라 하더라도 하나의 낱말이거나 짧은 문장의 단위에서 구사되는 것은 모르지만 작품 전체가 그렇고 보면 시 감상을 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도덕 율이나 經學을 가르치는 것 같아 골치 아프게 만들고 있다.

맺었으면 줄어주면서 앞뒤의 문장이 서로 조응되어야 하는데 모양만 내다가 메시지 전달을 놓치고 있다. 시조는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생각마저 고정관념화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작품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이 시대에 골치를 썩여가면서 읽겠는가.

이는 어떤 한 주제를 말하기 위해 다른 소제를 차용하여 그 유사성을 적절히 암시하면서 주제를 나타내는 수사법, 즉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로 관철되는 알레고리와는 사뭇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시적 대상을 인식했을 경우 해체하여 파고들지 못하고 보니 구체적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허구적이어서 감동이 떨어지고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어떠한 상징이나 암시도 구체적이지 못하면 관념을 떨치지 못해 읽는 재미가 없다.

이야기가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것 역시 시조를 읽기 어렵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연작의 3 줄 표기법은 시각적으로 거부감을 갖는다.

 

 

작품이 단수일 경우는 3 줄로 표기를 해도 거부감이 작지만 그것이 연작으로 해서 3수 4수가 9줄 아니면 12줄로 똑 같은 간격을 두고 똑 같은 길이로 표기되고 있다.

이 경우 독자는 읽기도 전에 우선 시각적으로 모나고 규칙적이면서 획일화 된 모양에서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이 평시조 연작이다. 시조는 3 장이라고 해서 무심하게 천편일율 적으로 그렇게 표기하고 있다.

이 또한 시조문학 발전의 저해 요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 되므로 연작 표기가 갖는 불리한 조건이 된다.

 

잡아챈 하늘 끝에 꽃수레를 굴렸다

헛짚은 생각 밖을 살얼음 딛고 가다가

놓쳐서 바스러진 꿈이 沙金으로 흩어졌다

 

문틈으로 비집고 본 바깥세상은

魚族들이 지쳐 있는 또 하나의 큰 캡슐

물거품 넘어뜨리며 水路를 찾고 있다

 

허공에 사무쳐 있던 亂視를 밝힌 등대

채인 돌이 날아가서 빛으로 깨친 새벽

풀리는 실오라기가 문지방을 넘어 간다.

-김문억의 정신 炳棟

 

 

차라리 그 보다는 문장의 의미에 따라 맺고 풀어주는 형식이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가령, 시조 단수에 있어서 7 줄 8 줄로 표기 되었더라도 그 안에 시조로서의 장의 구분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닌가. 이런 경우는 표기가 다양할 뿐 파격이라고 할 수 없다. 줄 바꾸기는 또한 작품의 의중을 표현하는 뜻도 같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낮선 여자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가상을 현실과 혼돈한다

창밖은

막힌 하수구를 뚫는

공사 중 팻말

몽롱히 낮술에 취해

한 폭

춘화 그린다.

-최중태의 개꿈-버스 안에서

 

 

하나 둘

징검돌을

폴짝폴짝

건너가듯

잘 있거라

손 흔들며

떠나가던

너의 모습

내 그냥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다

놓쳤다.

-이기라의 물수제비-

 

 

개꿈은 그렇게 여러 갈래의 표기를 해 줌으로써 의미상 분절이 되면서도 산만한 개꿈? 같은 상상을 유발시키고 있으며 물수제비 역시 낱말로 분절시키므로 해서 조약돌 하나가 징검징검 물을 차고 사라지고 있는 회화성까지 얻고 있다.

하지만 이런 표기법도 단수 일 경우지 연작으로 넘고 보면 반복리듬의 지루함은 마찬가지다.

 

 

개성과 소설이 있어야 한다

 

 

세상만사가 다 시적 대상인데 주제나 소재가 한 쪽으로 편향되어 있다. 추억 더듬기나 도덕 강의식 애잔한 영탄조의 감정 노출이 아니면 인생을 크게 깨달은 듯 훈시 적이고 계몽적이다.

그런가 하면 시조문학에서만 만날 수 있는 유행어가 있다.

한동안은 <청동>과 <개개비>가 유행을 하더니 지금은 <직립>이 판을 치면서 유사한 패러디가 순수성을 잃고 있다.

시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종장 첫 구에서 만나는 <이제 막>도 이제는 만날 수 없다면 좋겠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누구의 전유물로 특정한 낱말을 묶어 둘 이유는 없다.

자유로운 언어의 해방과 선택은 시인이 갖는 특권일 수 있다. 그렇다고 쳐도 유별스럽게 시조문학에서만 자주 만날 수 있는 낯익은 낱말이라면 창작을 하는 작가 입장에서 자존심 문제 아니냐.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뜯어 읽는 독자가 있다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표절은 공부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의 도둑질이고 차용이나 인용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부지런한 사람의 이삭줍기다

엄밀히 얘기해서 문제 될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이삭줍기란 내가 손수 농사지어서 얻은 알곡만은 못하다.

 

표현의 기법이란 것이 그렇다. 낱말 하나하나가 연결되어서 한 행이 되고 한 단락이 되면서 한 편의 작품을 낳는 것인데 시어 하나마다 문장의 기초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출 나고 돌출 되는 시어만 가지고 작품을 살리려고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심한 경우 우리말 퀴즈에서나 만날 수 있는 전연 생경한 단어를 골라내는 작품도 있다. 작품 한 편을 읽으면서 사전을 한두 차례 펼쳐야 한다. 작가의 취향이다.

작품 전체가 갖고 있는 비유의 카테고리나 주제의 전개를 표출하는데 힘쓰기보다는 말의 성찬에 신경을 쓰다가 보면 언어의 인용이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예사말이라도 꼭 필요한 위치에 놓는 작업이 시 쓰기라고 한다면 작가가 의도한 표현이 충분할 때 화려한 수사가 아니더라도 독자는 얼마든지 감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 하면 이태백이요 윤사월 하면 목월 이다

시를 쓰다가 보면 꼭 그 부분에서 필요한 시어가 있다 그것이 누구의 전유물이 못 되는 바에야 인용해서 쓰고 싶다. 하지만 창작을 목숨으로 알고 사는 작가 정신이라면 당장의 목마름을 참고 넘길 수 있는 자존심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인용은 발굴 보다는 못한 것이고 집짓기는 물론 재료도 좋아야 하겠지만 도편수의 설계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집을 지을 수 있지 않은가.

21 세기로 들어서는 디지털 시대의 시조문학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라면 단연코 말하거니와 시조 작가는 늘어날지 모르지만 시조를 읽는 독자는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인작품을 한 번 살펴보자.

아래 작품은 매우 이름 있는 시 전문 월간지 최근에 오른 신인작품상 시조다.

시조가락에 충실하고 기초가 튼튼하여 당선작으로 뽑아 올렸다는 심사평과 함께 오른 몇 편 중 하나다.

 

 

너를 버려 나를 얻는, 기막힌 적막감이

때로는 화두처럼 어둠을 몰고 온다

그 오랜 경계를 풀고 바람이 와 눕듯이

 

수평으로 어우러진 저 여린 어깻죽지

농게들 귀가하는 갈대숲이 젖어들 때

저 멀리 누가 부르나 등 밝히는 먼 마을

- 무진교를 건너며 전문 -

 

당선작으로 올린 고만고만한 작품 4 편 중 젤 앞에 있는 시조다. 시 부문 당선작 4 편도 같이 있다. 찾아서 읽어 보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나는 위의 시조를 수십 번은 읽었다. 시조만 열심히 30 년 동안 써 온 나도 특별히 작가의 시작메모 같은 것이 따라준다면 모를까 이해가 매우 어렵다.

 

첫 수를 읽어 보면 미처 내가 눈치 채지 못한 심오한 철학 같은 것이 숨어 있는가 보다. 라고 짐작을 하고 싶으면서도 다시 둘 째 수로 넘어가 보면 그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면서 작품 전체가 제시 하는 주제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데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초장 첫 구부터 모호하다. 너를 버려 나를 얻는 기막힌 적막감 이라고 했다면 어떤 이별인가 사랑의 이별인가 아니면 삶의 질곡에서 대두되는 상대적 너 인가. 또 다른 나를 지칭하고 있는 것인가. 다음 문장으로 연결되어 조응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조를 잘 썼다 못 썼다가 문제가 아니다.

시조로서의 모양으로 탓할 것도 없다. 시조를 왜 안 읽는가 라는 숙제를 갖고 고민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 시대의 문학사조에서 찾은 시조문학의 신인 작품이 이런 유형이라는 데에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작가는 왜 시조를 이렇게 쓰기 시작 했을까. 이 작가의 타고난 시풍이 이런 것인가 아니면 누가 시조는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가르친 것일까. 아니면 혹여 시조이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가 이런 풍으로 써야 한다고 의식적인 표현을 한 것인가 하는 여러 갈래로 고민을 해 보았다. 더구나 심사평대로 시조를 오래도록 써 온 솜씨가 확연하기 때문에 이런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물론 신인 작가를 선정 하는 기준에는 얼마든지 앞으로의 가능성 같은 것을 고려할 수 있으며 이 작가 역시 얼마든지 현대시조를 멋스럽게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하게 갖고 있다. 다만 이 시대의 신인작품이 어찌하여 이렇게 나올 수 있었느냐는 시조 역사에 관한 질문인 것이다.

비록 표현이 조금 성글더라도 이 시대의 독자들 눈을 끌 수 있는 분명하고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는 새로운 느낌의 시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兩章時調는 시조가 아니다

 

 

시조가 그 당시 왜 탄생될 수 있었고 시조는 왜 3 장의 얼굴을 갖고 나오게 되었는지 시조 창작 입문을 하는 사람은 민족 문화의 뿌리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보다 더 근본적으로 시조가 생성하게 된 세포 조직을 들여다보면 우리민족의 말 놀림과 함께 생활 관습부터 홀수문화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의 모든 명절이나 절기 관혼상제의 택일 같은 생활 관습은 모두 홀수로 되어있다. 이미 뿌리 깊이 박혀있는 1.3.5.7.9 의 홀수 중에서도 3 이라는 수는 생활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우리 생활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필자의 산문. 홀수문화 참조 바람)

 

우리 민족의 오래된 관습에서 오는 홀수 문화는 시조문학을 잉태 할 만큼 세포조직으로 응결 되었던 것이다. 매우 지당한 귀결이다. 기승전결의 근본에는 그런 까닭이 도사리고 있다.

3 章 구조의 시조가 탄생하는 연유가 예사롭지 않았다. 詩想을 펼친 후엔 받아서 전개를 하고 말미를 종결하는 3 단계의 의미가 그렇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조선이 개국되기까지의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세이레(21 일)동안 의 끈기를 이겨내고 사람으로 태어난다. 天 地 人의 홍익인간을 바탕으로 하여 고조선을 개국하는 뜻도 여기에 둔다.

우리말에서 자생된 민족 시 라고 하는 연유도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주어와 서술어를 한 묶음 씩 엮어 가면 한 句가 되고 그렇게 반복되는 4:4 음보의 발걸음이 3 章이라는 가락을 확보하면서 정형화된 큰 틀로 엮어 매어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3줄이 보기 좋고 편하거나 간단해서 정착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이유가 군말을 불허하고 분명 하면서도 간결한 양반문학으로 정착된 것이었다. 종장의 첫 구가 3 이어야 한다는 불변 역시 초 중장과 조응할 수 있는 축의 디딤돌로서 단단하게 옹이 박은 확고한 형식이었다. 초 중장을 이끌고 내려온 리듬을 마무리하면서 종장의 가락으로 반전 시키고자 하는 구름판으로서의 축에 대못을 친 것이다. 조선으로 내려오면서 성리학이 틀을 잡은 꼬장꼬장한 조선의 선비정신이었다.

이런 사유를 무슨 근거로 간편하고 읽기 쉽게 양장으로 변형시킨단 말인가.

이는 당시 20 세기 초반에 벌어졌던 문학사상으로 카프 계열과 시비가 붙자 시조를 혁신 시키자는 뜻에서 혼란스럽던 시절에 잠시 시험적으로 시도 되었을 뿐이다.

그 일면에는 그 분들이 일본 유학 파 라고 하는 신분으로 봐서 일본의 하이꾸를 맘속에 두고 시험 해 볼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구태여 축소지향의 왜 문화를 흉내 낼 필요가 있는가. 하지만 명분이나 실재에 있어 양장시조는 명맥을 유지 할 수 없었다. 그러함에도 일부 敎師들이 시조의 구분에 있어 마치 양장시조라는 형식이 있는 것처럼 기술 해 왔던 것이다.

더구나 요즈음 새삼스럽게 양장시조 라고 하는 글이 시조전문지에 올라오고 있는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렵거니와 자유시에서 발표되고 있는 짧은 시와는 또 다른 이야기다.

그런 식이라면 종장 한 줄만 써 놓고 단장시조라고 할지도 모른다.

시조의 3 장 구조라는 위대성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그냥 짧은 시를 쓰고 싶으면 쓸 일이지 구태여 시조라는 명칭을 차용 할 필요가 있겠는가. 3 장 6 구가 안 되면 시조라고 할 수 없다.

시조가 탄생할 수 있었던 민족문화의 D.N.A를 살펴보면 양장시조 같은 시비는 진작 없어야 한다.

어쩌면 시조는 3 장 이어야 한다기보다는 시조이기 때문에 3 장일 수밖에 없는 숙명적 체질을 갖고 태어났다.

 

 

사설시조를 적극 수용하자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시조문학의 새로운 길 찾기로 단수 짓기와 함께 사설시조 짓기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

작품을 쓰다가 보면 단 수로 압축해서 써야 맛 나는 경우가 있고 그 이상 더 긴 문장으로 끌고 가야 신명나는 까닭이 생긴다. 해서 시조연작이 나오게 되고 엇시조라는 것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모두 광대다. 시는 흥으로 쓰는 것인데 치솟아 오르는 광기를 어찌 마다 할 것인가. 이런 경우 연작을 쓰게 되었는데 이제는 사설시조를 더 이상 푸대접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정작 지금까지의 문학 발전사를 살펴보면 판소리 사설 같은 장르는 엄연한 서사적 사설시조라고 할 수 있으며 정선 아라리 같은 민요 역시 사설시조의 말 놀림과 가락을 함께 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 시가문학이 다 그렇다.

 

이미 사설시조는 평시조가 태동하던 무렵부터 아니면 그 이전부터 민중들로부터 전해지고 있는 것(김영수의 조선시가연구=새문社)을 빤히 알면서도 단지 서민들이 먹던 그릇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득권층의 선비들이 외면 해 왔던 것으로 본다.

歌 詩 調 謠 같은 좋은 이름을 두고도 청구영언에서 蔓橫淸類 라고 지칭했던 것만 봐도 사설시조는 어지럽고 삐딱하게 옆으로 가는 시조라고 이단시 하여 무리 중에 끼어 주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시대에 엮은 첫 시조집에 같이 엮어진 사설시조라면 그 역사는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그 무렵의 김장수 시인은 호방한 성격대로 활기 있는 사설시조를 내 놓았지만 당시의 시조 작풍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었고 근자에 와서는 ‘구룡폭포’ 라는 매우 빼어난 사설시조가 발표 되었어도 오래도록 평시조 연작에만 습관화 된 시조문학에서 활성화 시키지 못했다. 다만 현대시조에 와서 서벌 시인을 비롯한 몇 사람에 의해서 겨우 명맥을 유지 해 온 것뿐이다.

 

 

구룡폭포(九龍瀑布)/조 운

 

사람이 몇 생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劫이나 전화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玉流 수렴水廉 진주담眞株潭과 만폭동萬瀑洞

다 고만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 連株八潭 함께 흘러

 

구룡연九龍淵 천척절애千尺絶崖에 한번 굴러 보느냐

 

 

낙엽 1/서벌

 

 

볼 일 더는 없는, 다 이룬 끝이 진다.

 

올 데 없었다면 오잖았을 구조들이

어울려 겯고 틀다가 제 각각 따로 간다

소중히 싸안았던 인식론도 분위기도

엊그제 자리를 뜬 그대로 잎이었다.

 

외진 산 모롱이 도는 내 어찌 예오이리.

 

 

이미 사설시조는 조선시대부터 신명나는 가락으로 서민층에 파고들었으며 내용적으로는 오늘날의 민중시 노동 시 참여시였고 음악적으로는 조선의 발라드요 랩 음악 이었다 소리꾼들의 무대처럼 종합적이다. 오페라요 뮤지컬이다. 이미 西 쪽에서 자유시가 오기 전에 우리 말 토양에서 자생된 이야기가 생생하게 파닥이면서 어기찬 가락으로 넌출거리는 민중시가 있었다. 조선의 앙가주망 사설시조다.

소설과 무대 재담과 서정이 구체적으로 어우러진 장르였다. 민요나 무당 굿거리가 그렇고 사당패 놀이 상두꾼 소리 등 한민족의 언어 관습이 모두 사설이었다. 우리의 생활문화 온 사방에 산재 해 있는 이런 소리문화까지 사설시조로 흡수해야 한다.

사설 고시조가 난삽한 性에 관한 이야기로 알려진 것 또한 그 시대의 폐쇄적인 유교사회에서 비롯된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던 것이며 비록 그것이 성애를 비롯한 난삽한 내용을 담았던 그릇이라고 쳐도 班常이라고 하는 엄격한 계급 속에서 민중들이 선택한 우리 문학 장르다.

우리말이 갖는 속뜻은 단순하지 않고 매우 다양한 해학과 비유를 갖고 있다. 사설시조가 탄생할 수 있는 근거도 이런 말맛의 토양에 있는 것이다.

 

카프 계열에서 봉건적이라고 시비를 걸 때 시조를 부흥 시키겠다면서 연작 쓰기를 할 것이 아니라 그냥 놔두었다면 사설시조가 위기를 극복 했을 것이다(조동일의 한국문학 통사=지식산업사)

조선 말기 갑오개혁으로 이루어진 계몽사상이나 개화기 이후 신문학이 도입되면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크게 소용돌이치는 변화 속에 있었다. 이때에 시조문학은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외고집으로 수구적 자세만 유지 했을 뿐 시대적으로 너무 잘 어울릴 수 있는 특장을 갖고 있는 사설시조를 외면했던 것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자유당 독재를 살고 군사문화의 억압을 격어 오면서도 당대를 빗대어 이야기 할 수 있는 사설시조가 매번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작가가 처한 당대를 時調 작가가 안 쓰면 누가 쓰겠는가. 돌이켜 보면 바람벌(이호우) 이후 너무 부끄럽다. 어쩜 사설시조가 계속 활성화 되었다면 시대를 성찰하는 좋은 작품이 자유시 보다 더 많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언론이 탄압받고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하던 군사문화 시절에도 당당하게 저항하는 時調를 쓰기 보다는 자연을 관조하고 인생을 논하는 낭만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줄 세우고 편 가르는 자리싸움으로 그나마 응집력이 분산 되면서 시조 독자들을 모두 놓치게 되었다.

 

 

시조문학은 창작판소리사설까지 확대 되어야한다.

 

 

이에 근거하고 보면 시조의 3 장 형식은 45 가 아닌 105 자 내지는 1005 까지도 확대 될 수 있는 큰 그릇이다. 단순히 숫자로 묶은 정형 보다는 의미로 확대 되는 3 장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평시조 짓기의 본령인 단수 짓기와 함께 확대된 시조형식으로 보다 더 큰 3 장 형식을 만날 수 있다. 사설시조다.

사설시조가 더욱 더 확대되어 사설시조 연작 내지는 창작 판소리사설까지 시조문학에서 수용되어야 한다. 전수되고 있는 판소리 사설은 어느 곳을 펼쳐 읽어 봐도 시조가락이다.

 

그 이튿날 본관 사또생신 잔치 차리는데 기구 매우 대단하여 광한루 주란화각 구름 속에 솟았는데 처마에 백포미장 하늘에 닿게 치고 사면에 두른 것은 물색 고운 청사취장 -춘향가 중에서

 

뺑덕어미 생각한즉 여필종부 한단말을 제 입으로 아까 하고 마단 말도 할 수 없고, 하물며 내 행실을 근방사람 다 알아서 도를 놈도 없었으니 -심청가 중에서

 

이 때에 만군 중에 무론 장졸 다 취하여 그런 야단이 없구나. 노래 부르는 놈, 춤추는 놈 이야기 하는 놈, 싸움 하는 놈 과음식 많이 하고 더럭더럭 개우는 놈-적벽가 중에서

 

시조작가가 현대판 판소리 사설을 창작한다면 소리꾼들이 무대에 올릴 수 있다. 판소리 사설 역시 전수되고 있는 고전만 있을 뿐 현대적인 창작물이 턱 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조문학이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하겠다. 이미 판소리 사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는 입장이란 것을 생각 해 본다면 풍부한 입지 조건을 보면서도 작가 입장에서 지나치게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아 심히 안타까울 뿐이다.

 

필자는 이미 1986년 첫 시조집부터 사설시조를 올리고 있으며 2005년에는 창작판소리사설 <파업일지.시조세계>을 시험적으로 발표 한 적이 있다. 비록 내용이 담고 있는 서사성은 어눌하고 부족하지만 시조문학의 확대 내지는 사설시조의 영역을 꾀하고자 시험적으로 내 놓은 작품이다.

그렇지만 작품이 젬병이었는지 지금껏 된다 안 된다 아무 반응이 없다.

아무리 뜻이 깊고 간결하기로 3 줄 45자 시를 갖고는 이 시대의 시 독자들을 끌어들이면서 한국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자리 확보를 하기란 너무 버겁다.

다행히 늦었지만 단수 쓰기와 함께 사설시조를 쓰는 작가가 늘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좋은 시조라면 단수나 사설시조 역시 상을 내리고 소문을 내야 한다.

 

 

나가면서

 

 

새롭다는 명제 앞에서 파격을 하니 안 하니 시끄럽지만 따지고 보면 형식 파격을 할 필요 가 없다. 기존의 형식만 갖고도 얼마던지 자유시에 버금가는 독자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파격 시비를 하는 작품도 따지고 보면 기본음수 보다 줄어든 작품은 별로 없으며 말 숫자가 더 늘어난 작품을 두고 시비를 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반증하는 것인가. 역시 45 자 갖고는 솟구쳐 오는 흥을 모두 다스릴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2010년과 2012 년 한국시조시인협회 발간 연간집에 올라있는 작품을 나누어 보면 이런 분포가 나온다.

 

 

2012 년 수록 작품 총 312 편 중에서

 

단수는 75 편.

두 수 이상 235 편

사설시조 2 편 으로 되어 있다

 

2010 년 연간집은 총 280 편 중에서

 

단수 61 편

두 수 이상 219 편

사설시조 없음

 

 

연간 집을 통해서 제시되는 숫자가 올바른 가늠이 되지 못하더라도 작품 흐름은 대충 짐작이 간다.

그러고 보면 단수는 과거에 비해서 꾸준하게 늘고 있지만 사설시조는 크게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단수가 원형이었던 시조문학이 연작으로 모양 바꾸기를 해야 할 까닭이 있어 변신 하면서 지금까지 기여 해 왔다면 지금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활성화 되지 못한 사설시조를 통하여 시조문학을 더욱 부흥시킬 수 있는 까닭이 생기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단수 짓기 백일장 또는 사설시조 짓기 백일장 같은 대회를 별개로 개최 하는 것도 바람직하고 각종 응모를 통한 등용문에서도 이런 작품을 뽑아 지상에 발표 하므로 잘못 인식된 시조문학의 위상을 다시 잡아 나가야 한다.

프로 작가들이 단수를 더 많이 써서 발표를 해야 시조문학의 확대 보급이 활성화 되면서 국민시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또한 단시조 연작 보다는 사설시조가 갖고 있는 특장을 잘 살려서 보급을 해야 시조문학의 새로운 면모를 과시할 수 있다. 사설시조는 자유시와는 확연하게 다른 말맛을 갖고 있는 독특한 장르이기 때문에 시 독자들을 시조 쪽으로 끌어 들일 수 있는 매우 뛰어난 장르라고 하겠다.

시조문학이 이런 변신이 있을 때에 21 세기 정보화 시대에서 한국문학으로서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생토록 시조만 써온 필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매우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런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출처 : 김문억의 시조학교
글쓴이 : 김문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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