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1. 14:59ㆍ아름다운 세상(펌)/고운시
사랑의 이야기
/ 신 동 춘
소녀는 사랑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할머니를 졸랐다.
할머니는 소녀의 단발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은 참는 데 있다고 했다.
소녀는 빛나는 눈으로 할머니를 치어다보며 무얼 참느냐고 되물었다.
「사랑하는 이의 눈길과 손길과 뜨거운 입김과 그밖에 사랑이 주는 온갖
기쁨을 될 수 있는대로 피해얀다.」고 조용히 타일렀다.
소녀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할머니의 생각은 틀렸거나 낡은것을 여겨졌다.
봄이가고 가을이 오는가 했더니 다시 봄이 되었다.
소녀는 길게 느린 머리끝을 밖으로나 안으로나 살짝 구부리고 싶어졌다.
사랑을 알 나이가 된 것이다.
상대는 누구라도 좋았다.
왜냐면 그녀는 누구를 사랑한다기보다 사랑을 사랑했다함이 옳으니까.
나무가지에 물이 오르고 잔디가 파스름히 따스한 어느날, 소녀는 애인을
따라 뒷산에 올라갔다.
해가지고 노을이 아름다운데 소녀는 애인곁에서 자꾸만 슬퍼졌다.
작년 이맘때 사랑의 이야기를 해주신 할머니가 그 해를 못 넘기고 돌아가
신 일이 생각났는지, 안 그러면 봄날의 저녁 하늘은 그 빛이 가슴 아프도
록 아름다워서인지 모를 일이었다.
청년은 소녀의 귀에다 숱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으나 소녀는 외롭기만
했다.
그리고 청년의 뜨거운 입김이 뺨을 스칠 때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자리
를 일어났다.
할머니의 말이 비로소 떠 올랐다.
그러나 청년은 소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소녀는 취한 듯 아찔한 듯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러나 뒤미처 일종의 감미로움이 소녀의 넋을 사로잡았다.
소녀는 물결치는 환희에 젖었다.
그 환희가 지속하는 동안 소녀는 할머니가 일러주던 말과 할머니의 슬픈
죽음까지도 깡그리 잊었다.
이윽고 수많은 감꽃이 떨어지고 몇개만이 가지에 머물어 열매를 맺는 계
절에 소녀의 애인은 미련도 없이 떠나갔다.
마치 열매를 맺지 않은 감꽃처럼 그와같이 소녀의 사랑은 땅에 떨어져 시
들어버린 것이다.
하루 아침 시들은 꽃을 주어모아 눈물짓는 소녀의 뇌리에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소녀는 비로소 그 뜻을 깨달았다.
이제 어른이 된 소녀는 이듬해 봄에 다시 사랑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의 말을 깊이 가슴에 새기고 애인을 따라나섰다.
이번에는 바닷가였다.
할머니의 말은 다시 모래 위에 씐 글마냥 쉽게 지워졌다.
이렇게 소녀는 환희와 뉘우침에 엇갈려 쫓기우며 머리가 휘도록 살았다.
그리고 소녀들에게 「사랑은 한사코 한번만 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차마 자기가 어렸을 때 들은 사랑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길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 진실을 닮아가기엔 인간이란 너무
나 미약함을 알기 때문이다.
* 미당 서정주교수의 초회 추천작품(19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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