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명 / 김혜순

2014. 8. 8. 09:04아름다운 세상(펌)/고운시

구멍

                                                                  김 혜 순

                                                                                                                 

 

화장을 지우고 나서 구멍이 걸어 들어왔다

나는 소파에 앉아 팬티스타킹을 벗으며

그 구멍을 바라보았다

일 미터 육십 센티 정도 되는 구멍이었다.

구멍은 밥도 잘 짓는다 하고

구멍에서 아기가 튀어나온 날도 있다 했다.

그러나 구멍은 속에다 침을 치익 갈겨도 잘 모른다 하고

몇십 년째 검은 구름 한 마리가 넓적다리에 걸터 앉아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했다.

멍청한 것 같으니라구, 걸어다니는 연옥같으니라구

나는 구멍 속에다 먹다 남은 미역국을 훽 쏟아 부었다

정말 구멍은 아묵서도 아니다 바보다 그러나 깊다

사랑니를 뽑고 나니 그 자리에 일 미터 육십 센티자리 구멍이 파였다

그러나 문제는 조금만 틈이 보이면 구멍이 구멍 속으로

한없이 빠진다는 데 있다

구멍의 끝은 어디인가요?

세상의 모든 연못물을 다 들어부어도 여전히 구멍인 구멍

사람들은 알가, 구멍도 화장을 한다는 거

번개가 감전되면 울기도 한다는 거

구멍의 입속엔 구멍을 못 견디는 빨간 혀가 숨어서

오오오 소리 반죽을 만들 줄도 안다는 거

침대에 오래 누워 있으면 구멍은 더 악화된다

다시 말하면 한없이 한없이 구멍이 깊어진다

아침이 일어나면 구멍이 흘린 눈물인지

배게 위에 얼룩이 조금 번져 있다

 

김혜순 시인의 작품은 AHool은 소개돼 있다. 원체는 ‘구멍’ 이다 성적인 이미지가 연상되는 이 작품 역시 전통적인 사랑시라기보다 패미니즘 시에 가깝다. 김 시인에게 물었더니 ‘영국사람들 이 사랑에 대한 개념이 우리와 다르거나 폭넓게 사랑을 보는 것 같다’ 며 재미있어 했다.

 

김혜순 시인 : 경북 울진에서 1950년 출생. 강원대 국어국문학과와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가 입상하여 비평 활동을 시작했고,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가을호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외 4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7년 제16회 「김수영문학상」,

                    2000년 제1회 「현대시작품상」, 제15회 「소월시문학상」,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2008년 제16회 「대산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