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2. 23:16ㆍ살다보니 이런일이/시(詩)를 위하여
2000년 시극 대본
평범한 것에 대한 저항
등장인물 : 정하연, 이용완(제자), 부서장, 선생님, 어머니, 어린시절의 정하연, 모범생, 불량학생, 경찰관, 그 외 및 죄수자들...
연출자 :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일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이라는 전장에서
비겁하지만 치열한 투쟁자가 되었다가 돌아서 비웃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익숙한 것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그저 그렇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여기 평범한 것에 대해서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강렬하게 저항의 몸부림을 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1
(스포트 라이트, 정하연 비추며, 하연은 시를 낭독한다.)
<하연의 시>
지팡이 짚고 오늘도 뒷걸음친다.
누구의 가슴마냥 너덜너덜한 소매자락
그간 소스라친 기다림을 말해주고,
내 남은 수명만치 묵은 헌 구두짝
이 몸 바쳐 싸워온 세월의 나락인데,
걸음걸이 흉내내는 지팡이는
자기보다 앞서가지 말라 이르네.
그 날이 오기엔 너무 늦었노라고-
(불이 밝아지며, 교도소 내의 전경이 펼쳐진다. 죄수자들이 담배를 피며 잡담을 하고 있고, 용완 등장하며 하연의 노트를 발견하고 읽어본다. 옆에서 하연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용완 : 뭐? 자본주의적 목숨을 위한 순찰? 쳇! 이건 뭐야? (계속 뒤져보며) 어럅쇼? 벌건 핏물에 녹슨 칼자루를 쥔 망나니의 미친듯한 웃음? 뭐여 이거? 그러니까 사시미를 들어서 뱃대기를 갈라서 핏물이 튀었단 말이감? 뭐여, 하하하 이게- 참나... (표지의 이름을 본다.) 정하연? 저기, 잠깐만, 정하연이 누구요? (정하연이 쳐다보고 있는걸 보고) 이거 당신거유?
(하연은 고개 끄덕이고, 용완은 노트를 건네준다. 흘려보고 가려다 다시 뒤돌아서 하연에게)
용완 : 근데......여기에 쓴 게 뭐요..? 당신 일기요? 일기치고는 내용이 이해가 안되던데...
하연 : 시라는 겁니다..
용완 : 아하..시....나도 시 알지..알고 말고...어렸을 때 배운 기억이 있는데.....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는......어..이거 생각이 않나네... 애라~ 입다물고 얼른 꺼져브러....맞나? 허허.허허.....아따 그럼 당신이 시인이요? 이야~ 고상하구만....그 어려운 것도 다 하고...
하연 : 시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용완 : 어려운 게 아니라고? 그러믄 나같은 중학교 중퇴한 놈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연 : 물론이죠...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만 있다면...
용완 : 진짜로? 하하하 ... 참....나...한번 해볼까요.? ...음...음...아그들아 들어봐라..내가 시 한번 읊어볼랑께......음....여기서 뛰어노는 큰집안의 아새끼들....갑자기 날아든 짭새땜시 이곳왔네....기다리고 기다리면 못나갈 것 없건만은......밖에 가고 싶은 소망 가실 줄이 있으랴..(뒤에 있는 아그들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성....웃으면서 하나씩 퇴장 .)
용완 : 나도 이제 시인이 되어브렀네....하하하 (나가려고 뒤돌아서 걸어간다...)
하연 : 좋은 표현입니다..(용완 멈추었다가 천천히 뒤돌아선다.)..숨김없는 그대로의 표현..(용완에게 자신의 노트를 건네주며)..여기에 써보시겠습니까? 당신의 생각을....솔직하게....그게 바로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용완 : (잠시 머뭇거리다) 진심이요? 그럼 나도 시를 배울 수 있다?
하연 : (고개를 끄덕이며)..예....자 받으세요.....
(용완, 어리둥절한 태도로 노트를 받아들며....................................조명 아웃)
#2
(장소는 그대로 교도소....무대의 한편에서는 용완이 앉아서 시를 쓰고 있다......잠시 후 일어서서....자신이 쓴 시를 낭독한다.)
<용완의 시>
난 사람인가?
누가 사람이 아니더냐?
담배 머금고, 긴 쉼 내쉬며
거리를 떠돌면
내 직함 이름보다 먼저 나를 부르고
이마에 찍힌 일련번호, 9A3976
이름보다 먼저 대답한다.
이름 석자 서로 녹아 떠돌아 헛도는 이곳,
난 사람인가?
(무대 뒤에서 용완의 시가 흘러나올 때 정하연이 조용히 등장...뒤에서 용완을 지켜본다....낭독이 모두 끝나는 순간....하연이 조용히 박수를 친다.....)
용완 : (겸언쩍어하며) 부끄럽네요.....그런데...정하연 선생님.....저 마지막에 ‘이름 석자 서로 녹아 떠돌아 헛도는 이곳’이란 부분이 마음에 걸립니다. 자신의 존재가 없어진 오늘의 일상과 부픔으로 전락한 인간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건 어떨까요? ‘투벅투벅 거니는 한 장년의 축 처진 어깨에서 / 쳇바퀴 구르는 생의 한 켠 물든 / 하염없는 쓸쓸함만 맴도는구나.’
하연 : 글쎄요....난 처음의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시가 갑자기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지는 것 같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처음 것이 더 좋네요.. 시는 지나친 과장만을 의미하지는 않아요...가장 적절한 상징의 기준은 당신 가슴에 느껴지는 감동인 것이죠....
용완 : 아하......그렇군요....사실 저도 처음것이 좋았는데....다른 시집을 보니까 더 멋진 표현들이 있어서..
하연 : 시를 공감하는 것은 좋지만 보고 베끼는 듯한 표현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죠....
문득 용완씨의 시를 들어보니까...저도 왠지 시상이 떠오르는데요..... 용완씨에 대한 답시를 하나 지어볼까요? (용완은 하연 뒤에서 조용히 시를 듣고 있다....)
<하연의 시>
구멍 숭숭 뚫린 판자벽과
밤이면 달빛 쏟아지는 슬레이트 지붕의
천막촌 언덕,
몇 푼 생길때마다 높았다, 낮아지는
우리 순이 집 공상의 시멘트 블록.
순이 엄마 시멘트 블록 하나 더, 하나 더,
간절히 외치며 부여잡지만
이 싸구려 임금으로 세워진 건물로
배가 더욱 더 불러질 누군가에 손을 멈추는데
판지집일 망정 순이 위해
내 집을 얻어야 한다는 절박함에
싸구려 노예가 되었구나-
#3
(무대 중앙,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는 편지를 정리하며 한 장씩 읽어본다. 그 뒤편 구석쪽에는 어린 시절의 하연이 책을 보고 있다...편지를 읽다간 갑자기 술병을 가져와 마신다.)
어머니 : 아빠는 아주 가신 게 아냐...곧 오실 거야...아가 조금만 기다리자... 얼마 안있으면 아빠가 우리 애기 선물 가지고 오실테니까....(술을 한잔 마신다..) 아빠 얘기 해줄까....아빠는 정말로 멋진 분이시란다..키도 크시고 웃는 모습이 정말로 잘생기셨지....아빠는 글을 굉장히 잘쓰셨지.. 엄마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렴..인사말도 사연들도 언제나 하나의 시처럼 노래처럼 얘길하시지... 그래.... 너에게 쓴 편지도 있어... 가만 어디 있더라..응 여기 있군...
너에 관한 부분만 읽어줄게...“아직은 눈을 뜨지 않았을 내 아들, 하연에게, 한없이 편안한 모태에서 세상에 나오는 순간까지 아빠가 함께 있어 줘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아빠는 우리 하연이가 살아갈 세상을 좀더 예쁘고 진실된 곳으로 만들고 싶었단다... 나를 닮았을 너의 눈망울엔 아빠가 흘린 눈물을 다시 맺혀지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빠가 있는 곳은 하연이가 있는 곳보단 불편하고 적적할지 모르겠지만 내겐 엄마와 하연이가 있기 때문에 하나도 힘들지 않아..... 하연아, 네가 얼마나 보고 싶은지 몰라...너의 꾸물거리는 손가락을 너의 두 발을 얼마나 만져주고 싶은지 몰라...”
(마저 다 읽지 못하고 술을 마신다. 흐느끼며)
하연 : 계속 읽어주세요....끝까지 읽어주세요.....아버지 얘기 더 듣고 싶어요....
어머니 : 아가, 아빠는 용기있는 분이시란다...너도 아빠의 그것을 닮아야 해...그분의 진실과 용기를 .........하지만......하지만.....아빠와 똑같이 되진 마라....절대로 ...........너무...힘들잖아.(운다)
<어머니의 시>
열 살배기 아들에게 말을 건네봅니다.
“아들아, 너의 꿈이 뭐니?”
저녁노을 긴 그림자만 드리우는 일상에서도
수면위 기어오르는 그 노을의 새벽모습 새겨두고,
이글거림을 따라 외치는 자유의 비상으로
지는 꽃의 아름다움에 취하길 기원합니다.
죽음의 과녁 향해 날아가는 시간의 화살을 이고
익숙한 것들에 대해 모두가 무디어질 때쯤,
내 작은 불꽃 도화선되어
의식하면 죄어오는 삶의 무게 향해
거침없이 타오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천지가 진동하고 나는 멍해진다.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도,
멋진 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얘야, 인생이란,
인생이란건-
#4
(어느 고등학교의 한 교실.....학생 세 명이 앉아 있고 선생님이 서있다....자작시 발표회를 갖는 시간.....)
<문제아의 시>
모두에게 있지만 항상
여자의 것만 중요하여
수치스러운 과일을 달아놓은 듯,
사춘기 시절부터 레이스 헝겁 속에
꼭꼭 싸매어 숨겨놓은 너의 포근한 가슴,
어머니가 이를 통해 내게 사랑을 주셨듯
이제는 돌아서 내가 사랑을 주련다.
(어설픈 웃음소리와 어설픈 박수소리.....)
선생 : 음....상상력이 참 특이하군.... 너의 모든 초점이 그곳에 있는 것 같다. 아무튼 평상시보다는 난 것 같아요.....좋았어요. 계속 노력하면 아주 좋을꺼야.
(문제아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에 들어간다.....)
선생 : 자 다음 자작시 발표는 우리반 반장인 ___의 차례에요.....자 경청하도록....
<모범학생의 시>
정원 속 춤추는 나비가
내게 말을 걸었네.
길을 걷다 쉬어가려는 태양도
부끄러운 듯 구름 속에 몸을 반쯤 가린 채
오후 한껏 아름다움 뽐내는
갓 태어난 꽃들과
내게 말을 걸었네.
모든 건 이와 같다고.
이제 곧 사라지게 될 거라고.
삶은 춤추는 나비며,
당신이 이 오후의 따뜻한 햇살이라고.
지금의 아름다운 순간, 가장 완벽한 구도라고.
그리고 그것은 곧 사라지게 될거라고.
나비가 계속해서 말을 걸었네.
당신은 지금 여기 있노라고-
(박수소리........)
선생 : 이번 우리반 반장의 시는 우리학교에서 장원을 했어요. 그리고 전국문예대회에 나갈 예정입니다. 모두 격려의 박수 (또 박수) 자.....반장(차렷, 경례 안녕히 계세요...)아참! 그리고 정하연.... 잠시 선생님 좀 보고 갈래?
하연 : 예.
(다 나가고) 정하연.... 네가 지은 시를 한번 읽어봐 주겠니?
<하연의 시>
천국을 거니는 자들이여,
모두들 비명 지르는 이곳에
왜 아직도 따뜻한 햇살을 내리시옵니까?
제가 거니는 꽃밭엔
나비가 허락없이 꽃에 앉아
강간을 저지르고,
우리가 거니는 거리엔
힘없는 우리네 여인들 이유없이
잔인한 폭력앞에 무릎 꿇는데
꽃밭 가장 가운데 자리엔 선 대통령이
술에 취해 자고 있었다.
모든게 삶이었노라고
잘라 말하는 당신네들이 보내는 희망이
이곳을 구르는 햇살이옵니까?
아님, 우릴 비참하게 만들려는
당신네들 수작이옵니까?
부디 말해주시옵소서-
선생 : 그래, 잘 썼다. 근데 내가 왜 하연을 불렀는지 알고 있니?
하연 : 네.... 알 것 같습니다.
선생 : 너의 시에 관해서 야단이나 처벌 따위를 하려는 건 아냐. 그저 너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지. 먼저... 이건 네가 직접 쓴거니? 아니면...
하연 : 그건 제가 직접 쓴 시입니다.
선생 : 그래? 좋아.... 음...... 표현방법이 약간 선정적이라서 그렇지 얘길 풀어가는 과정이나 사물의 의인적 처리 기술이라든가, 사물을 새롭게 보는 눈은 상당히 훌륭한 것 같아. 음.... 꽃에 앉은 나비를 보고 그것을 강간이라 표현했군. 나비를 싫어하나?
하연 : 꽃 위에 앉은 나비를 보고 그런 생각이 들뿐이지 나비를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선생 : 꽃에 대한 나비의 그런 행위가 자연계의 순수한 번식이라고는 생각 안 해봤니?
하연 : 강간으로도 번식은 가능합니다.
선생 : 그럼. 여기서의 나비는 야만적인 남성을 의미하나?
하연 : 세상은 이제 남자가 여자를 강간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강간하고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강간하며 있는 자의 아이가 없는 자의 부모를 교사가 학생을 시인이 창녀를 국가가 국가를...
선생 : 정하연! 됐어.... 그래, 그만하면 충분해... (잠시 쉬었다가) 이 과목을 맡고 너의 글들을 볼 때, 언제나 느끼는 거였지. ... 하연아, 세상은 말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나쁘게만은 되어 가지 않아. 너의 주위에도 아름답고 진실된 풍경들이 많단다. 그리고 너와 나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어 가도록 노력해야 되는 거지..
하연 : 저도 그러고 싶어요....
선생 : 그래 , 그럼 됐어....음..그리고 또 맘에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응....3연부분 말야. ‘꽃밭 가장 가운데 자리에 선 대통령이 술에 취해 자고 있었다.’ 이런 쪽에도 관심이 있니?
하연 : .......
선생 : 좋아 하연아, 선생님이 숙제를 하나 내지. 어때 괜찮겠지? 음...........이것과 똑같은 제목으로 그러니까 ‘꽃밭에선 볼 수 있지’란 제목으로 다른 글을 한 번 지어보렴...이번엔 이런 부분들 말고 꽃밭의 다른 풍결들을 생각해서 말야..알겠니?
하연 : 네 고마워요....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노력해보죠..
#5
(동상처럼 굳어있는 하연......어머니가 들어오며 하연의 손에 든 편지를 본다...멈추면서 .....어머니와 하연은 서로를 쳐다본다.....)
어머니 : ...다 보았니.......?
하연 : 네...모두.....다....
어머니: ......타자로...찍혀온.........그 편지까지..........
하연 : (손에 쥔 한 장의 편지를 치켜 들며) 편지가 아니더군요....아버지의 처형을 교수형으로 처리했다는 통보서더군요......
어머니 : 오..........하느님........
(조명 아웃, 스포트는 하연에게......)
<하연의 시>
모두들 옹알옹알,
언제나 한다는 말은 옹알옹알,
인간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날 이루는 형질은 무엇이며,
나와 같은 형성체는 있는 것입니까.
세상은 실존하는 것입니까...
숨막히던 공간
그 어둡고, 길었던 순간을 끝내고
아버지께서는 유유히 떠나셨군요.
결국엔 들통나고, 논리가 실종되고
진실이 상실될 이곳에서
주춤거리는 세상 반대편에서
꾸준히 걸으셨던 아버지-
확신에 찬 아버지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잠재의식 속에 숨쉬는 아버지의 숨결과 행동철학이
머리를 누르면서도 이곳에 머무르는 전
하늘보며 아버지께 용서를 구합니다.
#6
부서장 : 않으시오...고생을 많이 한 것 같군요...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어떤 일을 당했죠/
하연 : 때리더군요..
부서장 : 때려요? 여기선 그런 식의 야만적 행위는 하지 않습니다. 여기선 얘기를 하죠..
하연 : 얘기?
부서장 : 네, 물론 대부분이 내가 질문을 하면 당신은 대답만 하는 식이 될 거요.
하연 : 네, 아니오로 말이요?
부서장 : 그래도 좋고 서술이 가능한 부분은 좀더 길게 애길해도 상관은 없소..아. 미리 말해두지만 이곳 외에 더 이상의 취조는 없을거요....그리고 여기선 대화를 하는 거죠.
하연 : 고맙군요
부서장 : 자, 우선 내가 맡은 일이 이런 것이라 당신의 뒷조사를 했습니다. 기분이 나쁘시더라도 이해해주시오...무엇보다도 당신의 글들에 매우 관심이 가더군요....매력이라나 할까요? 나 문학에 관해선 무지하지만 당신 글은 나같은 소인들에게도 충분히 어필이 되더군요...어디 볼까. 아, 대학교 2학년 때 발표한 시죠? ‘창세기가 찢겨져 나간 성경’..제목이 멋있군요..신이 만든 세상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이 나라와 이 도시, 당신들의 안방에서 침대에서 그대들의 양복 주머니에서 일어난다구요.. 문구들이 선동적이고 충동적이기도 하면서 설득력이 대단하군요..
하연 : 그렇게 보셨소?
부서장 :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하연 :........네
부서장 : 신을 믿는 사람에게서 찢겨진 창세기라니...약간 아이러니하군요.
하연 : 끝부분에 해결 방법을 써놓았소.
부서장 : 네, 저도 그 부분이 맘에 들어요. 특히 맨 마지막에 ‘언젠가 둥지로 보내져올 찢겨져 나간 창세기를 기다리며..’ 희망을 제시하고 있거든. 중간중간에 정치적 색깔만 지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더군요. 그밖에 자보나 인쇄물에 실린 당신의 글들도 모두 상당하다는 걸 느껴요..어떠한 무기보다도 강합니다. 특히 이번에 배포된 석장짜리 통합 유인물은 나라도 동참하게 만들 대단한 호소력이요. 진정으로 부럽소....당신의 그 재주가..........(사이).......그래서 하는 얘긴데...그 모든 걸......그러니까 당신의 그 재주가 아깝지 않소?
하연 : 무슨 뜻이오?
부서장 : 당신을 살리고 싶다는 거요..
하연 : 나를 살린다고...
부서장 : 법이란 게 사실은 간단하고 우스운 거지...쥐고 있는 쪽에선 어떻게 써먹냐는 것에 따라 쉽게 변할 수 있거든.
하연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부서장 : 자, 진술서요..여기에 싸인만 하면 됩니다.
하연 : 날 조롱하지 마시오.
부서장 : 정하연씨 당신이나 우리나 이게 최상의 방법이요..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우린 큰 일이 터지고 큰 인물들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게 해결되건 안되건 말이요...당신 말대로 어디에든 해결방법은 있는 거요. 진실은 변하는 거고 언젠가는 둥지로 보내져올 창세기가 있는 거요.....
하연 : 당신의 제안은 내가 겪은 고문 중에서 가장 지독한 것이군. 당신이 내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다면 내게 혀를 깨물 수 있는 힘을 주시오....
부서장 : 시간이 많지 않소... 정하연씨 여긴 좁은 공간에 당신의 필적만을 남기면 되는 거요. 자.........어서....
(하연 펜을 받아 그곳에 뭔가를 그린다...부서장 그것을 받아보곤 웃기 시작한다......실행자도 웃는다...그러다가 부서장 그 종이를 찢어버린다......둘은 계속 웃는다.....)
<부서장의 시>
그들을 너무 욕하지는 마시오.
타는 듯한 지친 하루,
시인할 수 없는 어둠의 몰골 전해지고,
가지 끝도 사그라드는 엄동 오한 저미는 일상속에서
흔들리는 뿌리 간절함에 가슴 동여매는 그들,
나름대로 불쌍한 존재인 것,
그들을 너무 욕하지는 마시오.
이 바보들아, 생각 좀 해보렴.
궁금증 좀 가져보라구, 우리는 무엇이지?
세상 꼬라지 이렇게 되어 가는거 보며
당연히 생각하기 보다
물음표 하나 가슴에 그려야 했어...
하지만 나란 존재, 어딜 가도 있는 나같은 존재.
그저 이렇게 보고만 있는 관망자-
그들 나름대로 불쌍한 것.
그들을 너무 욕하지는 마시오.
#7
(다시 교도소........무대 중앙에는 하연이 걸어가고 있고.....무대 한쪽에서 용완이 뛰어나온다..)
용완 : 선생님......정하연선생님.......선생님에 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선생님이 사형이라뇨....왜요.....선생님께서 반역이라뇨.....전 선생님을 압니다......선생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설사 그러셨다고 해도......선생님은.......선생님은 죄가 없어요.....나쁜 놈들이 모함을 한 거라구요......
하연 : 괜찮아....하고 싶은 말, 해야 될 말을 하는 것 뿐이야.. 그리고 그게 세상에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엔 작은 용기만 주면 되는 거고......
용완 : 그걸 왜 선생님이 해주어야 하는 겁니까?
하연 :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야...
용완 : 그게 왜 선생님이냐구요?
하연 :......(빙긋이 웃으며)................자네를 위해서네... 우릴 위해서고 자네와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지....... 마지막으로 자네에게 들려줄 시가 있는데......들어주겠나?
용완:(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연의 마지막 시>
내가 건너온 물을 맑았다.
그러나 그 물을 건너간 세월은 흐렸다.
모든 걸 삶이라고 무례하게 요약하는 이들 앞에서
명명할 수 없는 번민이
강가 갈대처럼 내 발을 덮으면
영혼은 급한 경사에 놓인 바퀴처럼 미끄러져 갔다.
두꺼운 시간을 고배처럼 마시며
세월속에서 꽃은 피었다, 시들었건만
내 머물던 자리 해독되지 않았다.
나는 사랑지상주의자 였건만
세상을 알고 난 뒤 아무것도 사랑해 본 적 없다.
강물은 일렁거리고, 세월은 침묵하지만
가벼운 그들만의 리듬으로
쉼 없이 흐르는 수면 속 흐름을 알고서야
이제 자신을 포기하고 자연의 일부가 되련다.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세상을 위해서...
용완 : (흐느끼며) 감사합니다...선생님
하연 : 자네..날 위해서가 아닌,,,...세상을 위해서 기도해주겠나..?
용완 : 예...선생님.....
하연 : (무대 중앙에서 관객을 향하며.....)아버지도 이런 기분을 느끼셨을까.......?.......왠지 이상하게 편안하구만..자꾸 웃음도 나오고...아버지도 웃으시며 이 모든 걸 맞으셨을까?
용완 : 선생님....전 선생님이 자랑스럽습니다.....존경스럽습니다......용기를 버리지 말고 진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연 : (무대 한쪽으로 걸어가면서) 왜 그런지 자꾸 웃음이 나와....참을려고 해도 못참도록 웃음이 나와.....하하하.(웃음, 슬픔이 가득한.....웃음....)........
#8
(무대 중앙 스포트.....용완이 서있다.....)
<용완의 시>
푸른 빛 나무의 일생을
생각해 본 적 있소?
나무야, 너는 땅속으로 가서
푸른 식물로 다시 태어나거라.
나도 땅속으로 돌아가
일상의 전장에서 뒹구는 사람이 될지,
바람따라 함께 출렁이며
낙원 찾아 헤매는 바람으로 태어날지
한동안 생각해 보련다...
용완 독백 : 당신이 걸었던 것처럼 모든 걸 마쳤어요. 이제 인쇄되어진 나의 글은 이 나라 곳곳에 샅샅이 배포되어졌어요. 난 내가 얘기하고자 하던 걸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리고 이제야 그 때 정하연 선생님께서 느낀 기분에 대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진실을... (그 때 경찰이 들어온다) 기다리고 있었소. 잠깐만 시간을 주시겠소? 커피가 남았으니. 그리고 조용히 진행했으면 하오. 난 언제나 이 시간이 오길 기다렸던 것 같소. 이 순간의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거든. 그런데 막상 다쳐보니 별 거 아니군요. (잔을 놓고 옷을 여민다) 영장은 보여주실 필요없소. 당신들은 언제나 합법적이고 난 그걸 믿고 싶으니까... 자 이젠 됐소. 갑시다...
(모두 퇴장 하며, 불은 꺼진다)
(끝)
모두 열씨미 합시다. 시극은 계속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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