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2. 22:59ㆍ살다보니 이런일이/시(詩)를 위하여
<베니스의 상인>에게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말로우(Marlowe)의 <몰타섬의 유태인>의 주인공 버래버스만 보더라도 또 엘리자베스 여왕을 독살하려고 스페인이 음모하는 데 끼었다는 죄목으로 교수형대에 올라 증오심에 불타는 군중의 고함 속에 처형된 여왕의 사의 이었던 유태인 로페스 사건만 보더라도 또 그후에 무수한 유태인 연극이 런던에서 상연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아니 <베니스의 상인>을 읽어만 보더라도 셰익스피어가 샤일럭에 동정했다는 해석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극을 만드는 것이 시대와 관중이기 때문에 후세에 샤일럭에게 동정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우리가 세익스피어를 연구할 �, 그냥 일소에 부칠 수 없는 사실이다.
<로마법의 정신>이란 대저로 유명한 법리학자 루돌프 폰 예링은 <권리를 위한 전쟁>이라는 저서에서 셰익스피어를 맹렬히 공격하고 샤일럭을 다음과 같이 변호했다.
나는 샤일럭의 증서를 유효하다고 인정해야 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일단 그것을 유효하다고 인정한 이상 그 증서를 내종에 선고를 내릴 때에 이르러 비열한 속임수로 재쳐 무효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 .., 대체 피 없는 살이 있는가? 안토니오의 몸에서 한 파운드의 살을 베는 권리를 샤일억에게 시인한 재판관은 그와 동시에 그것 없이는 살릴 수가 없는 피도 또한 벨 것을 그에게 시인한 것이다. 그리고 한 파운드를 베는 권리를 가진 자는 그가 하고저 하면 더 적게 요구할 수는 있다. ... .., 그리하여 비열한 기지로 말이암아 그의 권리를 수포로 돌아가게 한 판결에 억눌려서 그 자신이 무너졌을 �, 그가 쓰디쓴 조소를 받으며 맥없이 까불어져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을 때에 그와 더불어 베니스의 법률이 왜곡된 것이다. 거기서 쥐죽어 달아난 것은 유태인 샤일럭이 아니라 중세기에 있어서의 유태인의 전형적인 자태 즉 권리를 찾아 헛되이 소리를 지르던 저 사회의 천민 이었다는 감정을 뉘 감히 금할 수 있으랴.
시인 하이네도 --- 그도 유태인이었다 --- 자기 옆에 앉았던 어떤 영국인 관객이 <베니스의 상인>의 제 4집을 보고나자 흐느껴 울면서 몇번이고 `저 불쌍한 사람이 억울하다'고 소리쳤다는 말을 하고 `그 울음이야말로 18세기 동안 천대받던 민족이 당한 수난을 안고 있는 가슴에서만 울어나올 수 있는 울음이었다'고 설명�다.
아니 샤일럭에 동정한 사람들을 예로 들 것 없이 우리들 자신이 포시어의 저 유명하 <자애의 시>보다 샤일럭의 말에 솔깃할 염려가 있다.
도버 윌슨이 말하듯이 18세기 무대에서 샤일럭은 반희극적 늙은 악한으로 연출되어 돈과 딸에 대하여 같은 고리대금업자 류발과 수작하는 장면이 박장대소를 환기했는데 같은 샤일럭이 현대에 와서는 심지어 눈물까지 자아낸다는 사실 즉 `18세기 동안 천대받던 민족이 당한 수난을 안고 있는 가슴에서만 울어 나올 수 있는 울음"을 자아낸다는 사실은 그냥 간단히 `작품을 옳게 지적하지 못했다'고 치워버릴 수는 없는 문제이다.
샤일럭을 악한으로 보느냐. 그와 정반대로 억울한 일을 당한 늙은이로 보느냐는 분기점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돈의 이자를 받는 것이 버젓한 윤리가 되어 있는 자본가적 사회의 통념으로 볼진대 안토니오는 아무 죄 없는 샤일럭에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한 것이다.
안토니오씨 당신이 날보고 돈 놀이 하며 취리 한다고 욕한 것이 골백번은 되겠습니다, ... .., 내 수염에다 침을 뱉고 나무집 개새끼를 문밖으로 차 내쫓듯이 나에게 발길질을 햇�다요.
(1막 3장)
그러나 이렇게 인권 유린을 당하고도 샤일럭은 `어깨를 으쓱하고 꿀꺽 참았다'고 세익스피어는 썼다. 사람을 종으로 팔고 사고 그 사온 종을 `많이 집에다 두곤 나귀나 개나 노새처럼 천한 일에 마구 부려먹던'안토니오가 돈놀이 한다고 샤일럭에게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해도 오히려 잘 했다고 칭찬을 받고 샤일럭은 그래 싸다 하는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봉건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엘리자베스조의 무대에서는 당연�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는 어떠한가? 샤일럭보다 굉장히 더 큰 자금업자인 월가의 금융자본가에게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한다면 ---감히 그럴 사람도 없겠지만 ---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의 데모크라시란 트루만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기업의 자유"가 근본정신인데 훌륭한, 아니 가장 현대적인 기업인 금융업을 강압하려는 안토니오는 분명히 소위 데모크라시의 적인 것이다. 그래서 퀼러 쿠치경은 <세익스피어의 기교>에서 안토니오의 무리들에 대한 적의를 표명했다. 그는 소년 때 처음 <베니스의 상인>을 본 때 부터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까닭을 분석해 본 결과 안토니오를 싸고 도는 무리들이 기생충적 존재에 지나지 않고 생산은 없는데 소비만 많이 하는 무리들이며 인정이 눈꼽만치도 없는 놈들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자기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견강부회했다.
그러면 왜 이러한 베니스인들이 그렇게도 몰인정하냐? 내 생각엔 --독자 여러분도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일부러 베니스를 르네상스의 몰인정하고 천박한 면을 나타낸 것으로 만들었다.
--- ([세익스피어의 기교]p.103)
세익스피어가 안토니오와 밧사니오의 무리들을 인간성을 결여한 기생충적 존재로 표현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본가 사회의식을 봉건사회 의식에 대치해 놓고서 세익스피어극을 해석한 데서 오는 오류이다. 퀼러 쿠치경이 <베니스의 상인>을 보고 안토니오의 무리들에 대하여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진 것을 진실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세익스피어 시대의 관객도 꼭 같은 감정을 가졌었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라는 것이다. 즉 긍정적이던것이 부정적이 된 가치의 전도를 이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익스피어 시대에 있어서 증오의 대상이던 샤일럭이 현대에 와서는 동정을 사게 되는 것도 똑같은은 이치가 아닌가. 결국 세익스피어 시대에는 부정적이던 것이 긍정적인 것이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월가의 금융 자본가들이야 말로 샤일럭의 후예인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있어서 현대에 와서 가치가 전도된 것의 가장 뚜렷한 예가 폴스타프이기 때문에 폴스타프를 논하여 세익스피어 시대에 부정적이던 것 아니 세익스피어 작품에서 부정적인 것이 어떻게 현대에 와서 긍정적인것이 되었나 하는 것을 밝힘으로 말미암아 세익스피어는 불편부당한 작가라느니 세익스피어는 주관이 없는 작가라느니 세익스피어는 영원한 비밀이니 하는 영미의 부르주아 학자들의 신화를 비판하려는 것이 이 소론의 목적이다.
톨스토이는 세익스피어를 통털어 그 가치를 부정해버렸다.
50년동안 나는 자신을 시험하기 위하여 때로는 러시아말로 때로는 영어로 �로는 독일어로 또 때로는 사람들이 권하는 대로 쉴게겔의 번역으로 가능한 한 다방면으로 세익스피어르 몇번이고 읽어 보았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비극,희극,사극을 읽었다. 그러나 의연히 동일한 기분 --반감과 압증과 의혹 --을 맛볼 뿐이었다. 지금 이 논문을 쓰기 전에 일흔다섯이나 된 노령의 내가 다시 한번 자신을 시험해 보려고 새로이 헨리의 사극으로부터 <트로일러스의 크레시다><구풍><심벌린>에 이르기까지 세익스피어의 전저작을 통독하고 더 강열하게 꼭 같은 기분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제와서는 그것은 벌써 의혹이 아니다... .., 세익스피어의 여하한 극을 읽은 경우에도 처음부터 곧 나는 십이분 명확하게 다음과 같이 단언할 수 있다. 세익스피어 에게는 성격묘사의 유일한 수단 --적어도 그 중요한 수단 --인 `말'이 결여되어 있다. 즉 각개의 인물이 각자의 이성에 꼭 맞는 말을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 .., 세익스피어의 인물은 모두 자기 자신의 말을 쓰지 않고 무슨 경우에든지 항상 동일한 세익스피어 일류의 수식투성이인 부자연한 말을 쓴다. 참말이지 그 말은 거기 등장하여 행동하는 인물이 말할수 없을 뿐 아니라 어느 때 어떠한 장소에서도 맥이 통해 있는 인간 처 놓고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말인 것이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에 대하여])
세계문학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가져 온 러시아의 소설가 톨스토이의 이러한 주장을 일소에 부칠 수는 없지 않은가.
같은 시대에 나서 또 같은 소설가로 어깨를 나란히 한 투르게네프가 세익스피어에 심취한 것은 누구나 아는 바이지만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가 세익스피어에 대해서 늘 의견충돌을 한 것도 유명한 사실이다. 투르게네프가 세익스피어를 읽다가 여간해서 무릎을 치고 좋다는 대목을 톨스토이가 읽고는 무엇이 좋으냐고 아무 감흥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또 이들과 같은 시대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의 형제>에서 냉혈의 악한 스메르디아코프로 하여금
그것이 시인 한 근본적으로 무용지장물입니다. 그래 시로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시로 말한다면 설사 정부의 명령으로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벼로 말을 못할 것이 아네요. 시는 유해무익한 것입니다.
--([마리아 콘드라리예브나] 제 5막 제 2장)
라고 말하게 하여 시를 모르는 자는 인간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예술적으로 풍자한 것이 직접 세익스피어의 시를 부정한 톨스토이를 두고 욕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투르게네프와 더불어 도스토에프스키는 시를 지양하지 못한 소설가라는 것은 누구나 시인하는 바다. 그리고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과는 정반대로 현재 소련에서는 톨스토이가 이 두사람보다는 훨씬 더 높게 평가된다는 사실도 결코 우연히 아니다. 리얼리즘에서 볼 때 투르게네프와 도스토옙스키는 톨스토이에 멀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톨스토이가 폴스타프를 평하여
폴스타프는 참 철두철미 자연스럽고 특이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 대신 세익스피어가 그려낸 거의 유일한 자연스럽고 독자적인 인물이다. 그렇다..이 인물은 자연스럽고 독자적이다. 왜냐하면 세익스피어의 여러 인물중에서 폴스타프만이 자기의 성격이 본래 가지고 있는 말로서 말을 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폴스타프가 순전히 산문으로 말하는 인물인 것을 생각할 때 스메르디아코프의 말마따나 `정부의 명령으로 하더라도' 블랭크 버스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 할 때 톨스토이의 입장에서 폴스타프가 가장 잘 표현된 인물이 라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전쟁과 평화>에서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쳐 들어 갈 때 역사에 나타나는 바로 그 언덕위에 서서 불란서 말로 말하게 한 톨스토이가 볼 때 세익스피어가 로미오나 햄릿이나 오델로나 맥베스나 리어왕으로 하여금 시로 말하게 한 것을 `그 말은 거기 등장하여 행동하는 인물이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느 � 어떠한 장소에서도 맥이 통해 있는 인간 쳐 놓고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말' 이라 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하지만 폴스타프의 말을 `가장 세익스피어적인 말'이라 한 톨스토이는 자기 모순에 빠졌다 할 것이다. 더군다나 세익스피어가 그 극에 있어서 하고 많은 인물중에 폴스타프만은 성공한 이유로 세익스피어가 폴스타프 같이 타락한 비겁하고 음탕하고 도둑질이나 사기를 일삼는 놈이었기 때문에 자기와 꼭 같은 성격을 조사한 까닭이라 한 것은 지나친 판단이다. 가장 세익스피어적인 말은 시지 산문이 아니오 세익스피어 역시 톨스토이와 같이 폴스타프를 윤리적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세익스피어가 어떠한 의도에서 폴스타프를 그렸느냐 하는 것은 본론의 중심점이기 때문에 잠시 그 판단을 보류하기로 하자. 다만 폴스타프론을 전개하기 전에 톨스토이를 끌어낸 것은 산문정신에서 볼 때 세익스피어의 가치가 전도된다는 것, 또 이렇게 세익스피어가 송두리째 부정될 때도 폴스타프만은 긍정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대 톨스토이가 50년동안이나 세익스피어를 연구한 결론이 전연 무의미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맥이 통해 있는 인간'의 말 즉 산문을 가지고 소설을 쓴 톨스토이와 154편의 14행 시 <비너스와 아도니스>등의 장시를 빼놓고도 37편의 희곡에서 105,866행 중의 74%를 시 (주로 블랭크 버스)로 쓴 세익스피어가 질적으로 다른 작가라는 것은 뻔한 노릇이오, 톨스토이가 세익스피어를 이질적인 것으로 느끼고 그것을 솔직히 고백한 것이 그의 세익스피어론 인것이다.
폴스타프는 세익스피어의 유일한 산문극 <윈저의 유쾌한 아낙들>의 주인공이오 <헨리4세>2부작에서도 산문으로만 말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톨스토이의 가치 기준에 합격한 것이다. 세익스피어를 철두철미 시인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애쓴 콜르리지가 그의 유명한 <세익스피어 강의>에서 폴스타프를 한마디로 재미없는 인물이라 한 것은 흥미있는 사실이다.
폴스타프가 둘째 왕자 랭카스터를 미워하는 이유도 후자가 그의 싱거운 기지에 대하여 아무 반응이 없는 때문이라고 콜르리지는 단정�다. 영문학에 있어서 최대의 희극적 인물인 폴스타프가 시인 코르리지에게 아무 감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세익스피어를 통털어 욕하고도 폴스타프만은 걸작이라고 한 산문가 톨스토이의 주장과 대비해 볼 때 가볍게 볼 수 없는 사실이다. 즉 폴스타프란 현대와 산문정신이 클로즈 업 시킨 인물이며, 세익스피어를 하느님처럼 모시던 괴테와 실러를 비롯해서 낭만주의자들은 폴스타프를 문제시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샤일럭이 동정을 받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폴스타프는 사랑을 받고 있다.
아니 그를 위대한 인간상으로 모시어 앉히는 것은 퀼러 쿠치나 브래들리등의 세익스피어 학자만도 아닌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이상으로 하는 인간이 폴스타프에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브래들리를 빌어 이들의 우상인 폴스타프를 그려보면 ---
유머속에서 자유의 축복을 획득한 것이 폴스타프의 본질이다. 그의 유머는 오로지 또는 주로 명백히 불합리한 것에 대해서만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안일을 방해하는 것, 따라서 진지한 것,더욱이 체면 차리고 도덕적인 것은 무엇이든 적대시 한다 , 왜냐면 이러한 것들은 한계와 의무를 부과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법률이라는 우스꽝스런 늙은이라든지 지상명령이라든지 우리의 지위와 그에 따르는 책임이라든지 양심이라든지 평판이라든지 타인의 의견이라든지 모든 종류의 유해한 것에 종속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 말은 그래서 폴스타프는 이런 것들의 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나의 말은 옳지 못하다. 폴스타프가 이런 것들의 적이라는 것은 폴스타프가 이런 것들을 대단한 것으로 여겨서 그 힘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실상인즉 폴스타프는 이런 것들은 전연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폴스타프가 볼 때 못난 것이며 어떠한 사물을 못난 것으로 돌리는 것은 그것을 무로 돌려버리고 자유롭고 유쾌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소위 대단한 것들에 대하여 폴스타프가 때로는 말로만 때로는 행동으로 까지 취하는 태도이다.
--- (폴스타프의 부정)
이리하여 폴스타프는 진리도 명예도 법률도 애국심도 용기도 전쟁도 종교도 죽음의 공포도 못난 것으로 돌려버리고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다는 것이다. 폴스타프는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 절로 수 절로절로
산수간에 절로절로 자란 몸이니
늙기도 절로절로 하리라.
는 시조가 말하듯 자유의 경지에서 사는 노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폴스타프를 칭찬하고 우리들은 폴스타프를 찬미한다. 왜냐면 폴스타프가 비위를 거슬리는 것은 도덕지사 뿐이오, 폴스타프는 생활이 진실하다든지 생활이 진격하다든지 하는 것을 부정하며 우리들을 이러한 가위눌림에서 구원하여 완전한 자유 분위기 속으로 우화등선 시키기 때문이다.
---(동 논문)
일언이폐지 하면 폴스타프는 `부르주아의 인간상'인 것이다.
현실의 속박을 받지 않는 자유 -그런 자유란 자본가 사회엔 있을 수 없는 자유인데 --를 구현한 것이 폴스타프이며 따라서 인간의 이상적 타잎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부르주아지가 세익스피어의 거울 속에서 자기의 얼굴을 발견한 것이라 하겠다.
샤일럭이 18세기 까지 `반희극적 늙은 악한'으로 관중의 웃음을 터트렸듯이 폴스타프도 비겁한 놈으로서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최초로 폴스타프를 옹호한 모리스 모건 자신이 인정하는 바다.
모건은 1774년 에 써서 1777년에 발표한 유명한 논문 <폴스타프의 희곡적 성격에 관한 논문>의 서문에서 세익스피어는 폴스타프를 비겁한 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일반의 압도적인 여론이지만 자기는 정반대라고 생각한다고 전제하고 교묘한 폴스타프론을 전개 하였다. 후세의 폴스타프론이 거개가 이 논문의 영향을 받았음으로 폴스타프의 가치를 전도 시키는대 선구가 된 모오건의 이론을 좀 자세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모건은 인간의 인식능력을 지성과 감성의 둘로 나누어 우리가 사람을 판단할 때 지성은 행동을 가지고 동기와 성격을 추리하며 감성은 정반대로 `성격의 제 1원리'에서 행동을 규정한다고 �다. 그리고 지성으로 인식하는 것은 명확하게 언어로 표현할 수가 있지만 감성으로 파악하는 것은 속변미망언이다. 언어로 표현하기란 곤란 하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의 형언하기 어려운 음성이라든지 표정이 우리에게 어떤 형언하기 어려운 정렬을 일으키게 할 때 그 인상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지성이 어떤 행동을 가지고 좋다 그르다 하는 것은 언어로 용이히 표현되는 바다.
그러므로 소설이나 희곡은 현시 그대로의 인물을 표현하지 못하고행동에서 성격을 이해시킴으로 인간생활의 그릇된 표현이며 행위의 옳은 안내자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세익스피어만은 예외로 그의 희곡에서 나오는 인물은 실재의 인물과 꼭같다는 것이다. 즉 세익스피어는 실재 그대로의 인물을 표현하는 놀라운 재조를 가지고 있음으로 그 인물을 무대에 올렸을 때 관중은 자기네들의 지성이 파악하는 것과는 모순되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폴스타프를 예로 들면 그가 가는 곳마다 비겁한 행동을 하니까 지성이 볼 때 폴스타프를 비겁한 놈으로 판단하기가 첩경 이지만 그 사람이 비겁하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을 낳는 동기와 성격에 있는 것이니까 또 동기와 성격은 감성만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니까 우리가 폴스타프 경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는 것은 세익스피어가 폴스타프를 비겁한 놈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라는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설이 적용되는 것은 폴스타프의 용기만이 아니다. 이 성격의 어떠한 부분이고 우리들 마음에 십분히 결정된 것은 없다 적어도 폴스타프에 관해서 우리들 마음에 십분히 결정된 것은 없다. 적어도 폴스타프에 관해서 우리들의 말과 감정에는 이상한 모순이 있다. 우리들은 누구나 폴스타프군을 사랑한다, 허나 어떤 이상한 얄궂은 인연으로 우리들은 누구나 그를 천대하고 그에게 눈꼽만한 좋은 점도 체면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는 무슨 비상한곡절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부도덕한 대상에 대하여 우리들의 사랑과 선의를 자아낼 수 있는 것은 세익스피어의 이상한 예술이라 할 것이다. 폴스타프는 기지와 가장 독특한 매력있는 반죽좋음과 유머를 가지고 있다손 치자. 부도덕의 유머와 반죽좋음이 그렇게도 대단히 매력적인 것일까? 비속과 가진 좋지못한 성질에 특유한 기지가 사람의 마음을 이끌어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그와 반대로 이러한 유머의 두드러짐과 이러한 기지의 번쩍임이 성격의 결함을 더 강하게 폭로하므로 말미암아 이 인물에 대하여 우리들의 증오와 경악을 그만큼 더 효과적으로 도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폴스타프의 성격에 대한 우리들의 감정은 그렇지 않다.
----<모건, 윗글>
폴스타프의 실재적 성격과 현상적 성격의 모순 --- 전자는 우리의 감성으로 파악하는 폴스타프요, 후자는 우리의 지성으로 인식하는 폴스타프타. --- 이 우리가 폴스타프를 사랑하는 동시에 비난하게 하는 모순을 설명하는 것이며, 이 모순이야말로 폴스타프로 하여금 웃음과 기쁨을 낳는 유머러스한 성격으로 만드는 것이라야 한다.
다시 말하며 폴스타프는 본질적으로는 용기의 소유자인데 현상적으로는 비겁한 놈처럼 세익스피어는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감한 사람이 일견 비겁한 짓을 하는 것이 희극적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모건은 다음과 같이 폴스타프의 성격을 그린다.
폴스타프는 천품이 고도의 유머에다 풍부한 자연의 생명력과 정신의 경쾌함을 타고 나온 사람으로 그의 성격은 이러한 것이 근본이 되어 구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인지라 폴스타프는 소시때부터 사교계에서 대환영을 받았으며 그 이상 다른 덕을 쌓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천성이 악의나 무슨 악한 원리를 모르는 마음의 소유자인 것 같다.
그렇다고 선을 바라고 노력한 일은 전연 없다. 그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아니 결점 때문에 사람들이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그는 발견하였다 , 게다가 그는 군인이었다. 타고나기를 용감과 모험의 정신을 가진 데다가 시대가 전국시대라 폴스타프는 <종소욕이불유리> 하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교계에서 아니 주막에서 계속하여 방탕과 음주와 간음과 폭식의 안일 속에 탐악했으며 때로 거짓말을 하여 가며 차차 건전한 생활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그의 기지를 영원한 밑천으로 삼아 돈을 꾸고 요리조리 둘러치고 편취하고 때론 강도질까지 하지만 불명예스럽지 않다. 즉 폴스타프의 무절제는 웃음과 칭찬을 동반할 따름이다. 그의 행동이 무슨 확실한 나쁜 주의나 좋지 못한 의도가 지배하지 않는 것이 명백하니까 모든것을 장난과 해학으로 돌리게 된다.
그러나 점점 방종으로 말미암아 나쁜 버릇을 얻게 되고 해학가가 되고 굉장히 비대해지고 노년의 결함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잠시도 젊은이의 부박이나 죄과를 하나도 버리지 않으며 그로 하여금 인생행로를 안이하게 걷게 하였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 정신의 뇌락함을 조금도 잃지 않은다.
이리하여 구경에는 젊음과 늙음을, 모험과 비만을, 재기와 무모를, 빈곤과 낭비를, 체면과 골계를, 순진한 의도와 간악한 실천을 뒤범벅한다. 나쁜 주의로 말미암은 증오라든지 비겁으로 말미암은 경멸을 자초하는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증오와 경멸을 받은 사건에 휘말려 들어간다.
우리가 세익스피어극에서 발견하는 폴스타프는 폴스타프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이러한 시기에 다다른 때다. 즉 폴스타프의 천성이 제2의 천성으로 말이암아 가리워져서 우리의 지성만으로는 알아 볼 수 업게 되었을 � 비로소 무대에 나타나는 것이다. 폴스타프는 `체질적 용기'의 소유자이다. 즉 본질적으로 용감한 성격인데 무대에서 비겁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즉 현상적인 비겁때문에 본질까지 비겁한 자로 오해를 받는 것이다.
모건은 이러한 폴스타프의 성격론을 더욱 합리화 하기 위하여 주를 달아서 세익스피어 작극술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주 세익스피어는 대담스럽게도 자기의 작품에서 추단할 수는 있으나 명백하게 표현하지 않은 언행을 그의 인물에게 시킨다. 이것이 놀라운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시인을 넘어서 실재에 접근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하여 달리는 불가능한 성실과 진실을 사실과 인물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세익스피어의 기교이며 이 기교를 우리가 의식하지 않게 되므로 이것을 실재라고 강조하며 부르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에서 감득되는 타당과 진실이 시적인 작품의 절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작가들의 인물이 거의 다 보잘것 없는 모방에 지나지 않는데 세익스피어의 인물들은 이렇게 완전하고 말하자면 독창적이라면 이 인물들을 희극적 인물로 보는 것보다도 오히려 역사적 인물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즉 배우에 따라서는 그들의 행위를 성격 전반에서 일반원리에서 잠재적 동기에서 표명하지 않은 의도에서 연역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모건. 윗글>
이리하여 모건은 폴스타프의 그를 따라다니는 어중이 떠중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편언쌍구를 긁어 모아가지고 그야말로 독창적인 폴스타프의 성격을 구성하여 폴스타프를 `체질적 용기'의 소유자라고 단정하고 <헨리4세> 2부작에 나타나는 그의 비소한 행동을 모두 현상적인 것일이라 하여 이른바 그의 현상적인 행동을 이렇게 형이상학적으로 창조한 폴스타프의 `성격의 전반에서 일반원리에서 잠재적 동기에서 표명해지 않는 의도에서 연역'한다.
그러므로 세익스피어극의 장면을 따라 거기서 하는 폴스타프의 언동이 그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형이상학적으로 구성된 전체적인 폴스타프를 가정하지 않고는 폴스타프의 언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한가지 예만 들더라도 모건의 논법을 짐작하기에는 족하다.
이 극 처음에 나오고 또 우리에게 폴스타프를 소개하는 강도질 하는 장면과 그에 따르는 꼴사나움은 --나는 이 장면이 부당한 편견을 낳았다고 보기 때문에 --- 우리가 폴스타프의 성격 전체를 더 충분히 알게 될 �까지 보류해 두자고 제언한다.'
아니 모건의 의견을 �는다면 그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폴스타프의 성격에 관한 교묘한 철학을 체득하기 까지는 폴스타프에 대한 판단을 끝까지 보류해야 도리 것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극을 논할 때
극에 있어서는 인물들이 이야기를 행동한다 ----- ([시론] 제 3장 p1448)
하였다.
극을 논함에 있어서 행동을 현상적이라 하여 치지도외하고 작가가 `명백하게 표현하지 않은 ... ... 성격 전반에서 일반원리에서 잠재적 동기에서 표명하지 않은 의도에서'역으로 연역하여 극에 나오는 인물의 행동을 설명한다는 것은 극이론으로서도 본말을 전도한 것일 뿐더러 세익스피어를 거꾸로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감추어 두는 것이 세익스피어의 기교라고 모건은 거듭 강조하지만 정반대로 삼척동자라도 얼른 알아차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세익스피어의 수법인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그 표현에 있어서 언제나 공식화한 엘리자베스조의 방법을 답습하고 있다. 즉 의미있는 점은 무엇이든 대낮처럼 명백하게 하고 작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도 �놓지 않는다 . 극중인물들끼리는 서로 아무리 감추더라도 관중이 어리둥절하게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에드가는 베들레헴 거지로 변장하고 등장한다. 우리는 첫 눈으로 그를 알아채릴수 있다. 왜냐면 이미 그는 이렇게 차리고 나올 자기의 의도를 성명한바 있었고 `이 나라에 경험과 전례가 있는' 베들레햄 거지가 어떠한 외관과 행동거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세히 기술한 바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뇌가 모자라는 저급한 관중이 행여 혼란을 일으킬까 보아 이 변장한 사람은 무대에 나오자마자 자기가 그렇게 행세하기로 선언한 그 이름을 되뇌인다.
이것이 세익스피어 수법의 정석이다. 변장에 대한 기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물의 동기라든지 그들 성격의 주요한 특징이라든지 관객을 놀라게 하거나 혼란을 일으키게 할 염려가 있는 한 그들의 행위에 있어서의 돌변에 대하여서도 꼭 마찬가지다.
--(G.L.키추리쥐 [세익스피어]강연)
이러한 세익스피어가 폴스타프만은 그 정체를 끝까지 숨기었을리가 만무하다. `주막에서 계속하여 방탕과 음주와 간음과 폭식과 안일 속에 탐닉�으며 ... ..,편취하고 때로는 강도질까지 하는 "폴스타프를 진정한 자유와 용기를 구현한 인간상으로 만들려는 것이 세익스피어의 의도이었더라면 그것을 감추기 커녕 처음부터 관중에게 그것을 명백히 했을 것이다.
`세익스피어의 산문'에서 폴스타프에 대한 세익스피어의 의도를 명백히 했으니까 여기서 또다시 길게 논할 것은 없지만 폴스타프는 철두철미 산문으로 말한다는 이 한가지 사실만 들더라도 폴스타프가 체질적 용기를 가졌다는 주장은 넌센스에 불과하다. 세익스피어에 있어서 용기가 산문으로 표현된 일은 절대로 없다.
<리어왕>에서 자기의 상전 콘월공이 그로스터백작의 눈을 빼는 것을 보다 보다 못해 용기를 내어 나머지 한쪽눈을 마저 빼려는 것을 제지할 � 시로 말하게 한 (제 3막 제 7장) 세익스피어, 언제나 산문으로 말하는 것이 원칙인 하인도 의분을 느끼고 용기를 낼 때 시로 말하게 한 세익스피어가 폴스타프는 철저히 산문만을 말하게 한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한세기 동안 관중이나 독자가 폴스타프를 비겁한 놈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은 모건 자신이 인정하는 바인데 세익스피어의 기교는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마다 오해하게스리 신비한 것일까?
존슨박사에게 ---그는 모건의 초대를 받아 하루인가 이틀 같이 지낸 일이 있다. --- 모건의 폴스타프론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모건이 폴스타프가 비겁한 놈이 아니라고 증명했으니까 다음엔 이아고가 대단히 착한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할는지 모른다. ----(보스웰 [존슨 박사전]1783년조의 주)
고 대답하였다.
이아고가 악한 이라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듯이 폴스타프가 비겁한 놈이라는 것도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건은 폴스타프가 비겁한 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존 폴스타프 경의 희곡적 성격에 관한 논문"을 썼다. 이 논문 자체는 교묘한 궤변에 지나지 않지만 후세에 영미 부르주아 시대에 와서 모건의 폴스타프관이 승리하였다는 사실과 아울러 생각할 때 이 논문을 그냥 궤변이라고 가벼이 일축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퀼러 쿠치나 브래들리등의 폴스타프관의 토대를 닦은 것이 모건이라고 볼 수 있다.
관중이 극을 볼 때 파악하는 능력을 지성과 감성으로 나누어 지성은 주로 행동을 그리고 감성은 동기와 성격을 인식한다고 한 것이라던지. 세익스피어는 다른 작가와 다라서 감성에 호소하는 숨은 기교를 가지고 있어서 그가 표현하는 인물은 책에서 읽는 그런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실재하는 인간과 꼭 같이 복잡하다는 것이라든지 따라서 폴스타프는 본질적으로는 용감한 사람인데 겉으로는 비겁하게 보이게 하여 관중의 지성과 감성이 폴스타프의 현상과 본질을 동시에 체험하게 됨으로 모순을 느끼게 되는것이 희극적 효과를 나타낸다고 한 것이라든지가 이론으로는 폴스타프를 세익스피어의 의도와는 전연 다르게 연출할 수 있는 구실은 충분히 주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후세에 폴스타프의가치를 전도시킬� 아무도 이상히 여기지 않을 이론적 근거를 주었다 할 것이다.
세익스피어가 샤일럭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 엉터리 아전인수 이듯이 폴스타프를 긍정적인 인물로 표현�다는 것은 엉터리 없는 수작이지만 모건의 교묘한 이론이 계기가 되고 또 마땅히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할 폴스타프의 가치고 보매 드디어 폴스타프는 세익스피어가 의도한 바와는 정반대의 인물이 되고 만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익스피어극에서 산문 밖에 말하지 못하여 부정적인 요소이던 부르주아가 승리하여 사회의 주인공이 되자 세익스피어극에서 가장 많은 산문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인 폴스타프를 자기네들의 이상적 인간 타잎으로 모시게 까지 된것이다.
폴스타프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윈저의 유쾌한 아낙들>에 나오는 폴스타프는 옹호하지 않는다.
정말 폴스타프는 <헨리4세> 2부작에서 활약하고 <헨리 5세>에서 죽는 폴스타프지 <윈저의 유쾌한 아낙들>의 주인공인 폴스타프는 가짜 폴스타프라는 것이다. 그것은 <윈저의 유쾌한 아낙들>에서 폴스타프는 옹호할 여지가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세익스피어가 두가지 종류의 폴스타프를 창조했을까?
브래들리는 세익스피어 자신이 폴스타프를 타락 시킨 것이 <윈저의 유쾌한 아낙들>의 폴스타프라고 주장하고 이 극은 세익스피어극으로선 예외적인 것으로 산문적인 `영국의 부르주아 생활'에다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자연 그 환경에 휩쓸려서 폴스타프가 타고나온 고만한 시정신을 상실한 것처럼 말했는데 폴스타프는 그 때나 이 때나 똑같은 산문을 말하며 폴스타프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상 <윈저의 유쾌한 아낙들>같은 산문극이 될 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오, <헨리 4세>를 <춘향전>에다 비하면 <헨리5세>도 방자 없이 이도령만 가지고 만든 극이오, <윈저의 유쾌한 아낙들>의 폴스타프가 전연 다른 인상을 주는 것은 동명이인이기 때문이 아니오, 시극과 산문극이 주는 인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이것은 시와 산문의 대립을 염두에 두고 <헨리4세> 2부작을 읽어 보면 여기에 나오는 폴스타프와 <윈저의 유쾌한 아낙들>에 나오는 폴스타프가 조금도 다른 데가 없는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익스피어의 산문'과 중복되지만 <헨리 4세>를 한번 다시 읽어 보기로 하자.
<헨리4세> 제1부의 제1막 제 1장은 시로 된 씬인데 왕이 왕태자의 산문적인 생활을 한탄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바로 이어서 제2장은 왕이 한탄하듯이 왕태자가 폴스타프의 무리들과 산문적인 생활을 하는 산문씬이다. 그리고 왕태자는 일부러 `포인즈"에게도 비겁한척 보인다. 그러나 무대에 혼자 남게 되자 돌연 시로 변하여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나는 너희들을 잘안다. 그리고도 얼마동안은
너희들의 분방한 방탕벽을 북돋아 주리라.
그러나 나는 태양을 본받으련다---
지저분한 구름이 그 아름다움을 덮어도
그냥 모른척 내버려두다가도
또다시 본연의 자태를 나타내고자만 하면
그를 압살할것 같던 더럽고 취한
구름 안개를 뚫고 빛나리니
없다가 나타나면 더욱 찬연하리라
... ..,
위로는 왕을 비롯해 아래는 폴스타프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왕태자를 산문적 성격으로 오해하고있지만 관중까지 오해햐면 안되니까 --- 극중 인물들이 서돌 모르는 것을 관객이 알게 만드는 것이 희극적 효과를 나타내는 중요한 모멘트가 인 것이다 ---산문으로만 말하던 왕태자로 하여금 시로 말하게 하여 이렇게 왕태자의 의도아니 작가의 의도를 분명히 하는 것이 먼저도 말했거니와 세익스피어의 정석이다.
이것은 비단 세익스피어극이나 엘리자베스조의 극에서만 쓰는 수법이 아니라 고금동서의 극에 공통되는 것이오 우리는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암행어사로 나오는 장면만 상기하면 <헨리4세>에서 왕태자가 폴스타프의 무리들과 화광동진하는 장면은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이 독백은 폴스타프를 옹호하는 논객들에게는 눈에 가시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세익스피어의 의도는 애당초부터 폴스타프를 부정하려는데 있다는 것이 명백하니까.
그래서 퀼러 쿠치는 이 독백을 세익스피어의 기교중에서 가장 졸렬한 것이라 하고 ---그는 damnable 이라는 심한 형용사를 �다 --세익스피어가 처음에는 넣지 않았다가 동료 베비지나 누구의 충고로 어리석은 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후에 집어 넣은 것이리라 했다.
그러나 요컨대 모든 문제는 폴스타프와 막연 같이 보이던 왕태자가 왕위에 올라 헨리 5세가 되자 폴스타프를 부정해 버리는 데 있는 것이다.
노인 , 짐은 그대를 모르노라. 하늘에 빌라.
백발이 어릿광대 노릇을 함은 좋이 못하느니라.
그대처럼 뚱뚱하고 늙고 치분치분한 그런 종류의 인간을
지믄 오래 꿈꾸어 왔다.
허나 깨고보니 짐은 짐의 꿈이 남 부끄럽도다.
---([헨리4세] 제2부 제 5막 제 5장)
폴스타프의 도당에게는 이것은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다.
<베니스의 상인 > 제4막 재판 신에서 샤일럭이 부정되었을 때 `저 불쌍한 사람이 억울하다"고 소리치며 통곡한 관객이 있었고, 패소한 샤일럭이 "비틀비틀 걸음을 옮겻을 때에 ... .., 거기서 쥐죽어 달아난 것은유태인 샤일럭이 아니라 중세기에 있어서의 유태인의 전형적인 자태, 즉 권리를 찾아 헛되이 소리를 지르던 저 사회의 천민이었다는 감정을 뉘 감히 금할 수 있으랴"고 비분강개한 법리학자가 있듯이 <헨리4세>의 대단원에서 폴스타프가 부정되었을 � 의분을 참지 못한 영문학자들이 많다. 모리스 모건은
우리는 왕이 되어 새로운 덕을 차고 나온 왕태자의 배은망덕을 용서하기 어렵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늘고 온후하고 유쾌한 친구를 구금하여 불명예스러운 감옥신세가 되게 한 저 시적판결의 가혹함을 저주하는 바다.
라고 하였고 퀼러 쿠치 경은
시에 있어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억울한 것을 �을 때는 이 사실만으로도 억울한 짓을 당한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다. 헨리가 (무슨 대의명분을 내세운는) 폴스타프에게 억울한 짓을 하여 절망케 했지 폴스타프는 헨리의 맘을 상하게 하려는 것을 염두에 두어본 적도 없는 ... .., 해즐릿도 말했지만 폴스타프가 헨리보다 훌륭한 사람이다.
라고 하고 세익스피어가 <헨리4세>의 에필로그에서 폴스타프를 <헨리5세>에 등장시켜 활약시킬 것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등장시키지 않고 죽었다는 소문만 간접으로 전하게 한 것은 폴스타프가 헨리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헨리를 민족적 영웅으로 나타내려는 극에 등장 시켰다가는 헨리가 압도 당할까봐 그렇게 아니할 수없었다고 단정했다.
A.C 브래들리는 `폴스타프의 부정'에 대하여 옥스포드대학에서 강의 까지 하였다. 그는
그러면 왜 세익스피어는 그의 희곡을 이렇게도 불쾌한 인상을 주는 장면을 가지고 끝막았을까?
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폴스타프 옹호론자들에게는 새로 등극한 폴스타프를 부정하는 장면은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 이른바 보편 타당,필연적인 사실인 것처럼 가정한다. 그것은 마치 샤일럭이 포시어의 판결에 넘어갈 때 의분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브래들리의 이론을 더 들어보기 위하여 그렇다고 해두자.
폴스타프를 옹호하려면 세익스피어를 그렇게 하기에 편리한 작가로 만들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래서 브래들리는
세익스피어의 불편부당성이 사람들에게는 못마땅하다. 즉 태양처럼 모든 것을 환하게 비치면서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세익스피어를 차마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세익스피어의 역사극에 있어서 아마 특히 그러한데 사람들은 늘 그를 당파심이 강한 작가로 만들려 한다.
고 하고 세익스피어의 가치관념을 흐리게 하여 폴스타프의 가치를 전도시키기에 편하도록 만든 다음 왕태자의 족보까지 들추적 거려 가지고 볼리브루크가가 대대로 '다른 사람들을 자기 목적의 수단으로 쓰는데 능하다"는 것이 <헨리4세> 처음에 있는 왕태자의 시 독백에 명시되었으며, 왕태자의 이러한 몰인정함과 정책적인 것을 보이려는 것이 세익스피어의 의도인데 이 의도가 당파적으로 강하게 표시되지 않고 세익스피어 독특한 은근한 수법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르고는 대단원에서 헨리가 몰인정하게도 정책적으로 폴스타프를 부정하는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헨리가 마지막 가서 폴스타프에 대하여 몰인정한 짓을 하는 것은 그의 성격을 그렇게 세익스피어가 만들었으니 놀랄 것은 없다는 것이다.
폴스타프를 옹호하기 위하여는 세익스피어를 가치관념이 명확하지 않은 이른바 순수문학파로 만들고 주인공인 왕태자까지 나쁜놈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흥미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결국 폴스타프는 세익스피어의 붓이 비뚜로 나가서 작가의 의도한 것 보다는 지나친 인물이 되어버렸기 �문에 대단원에 가서 그를 부정하려다 부정을 못하는 결과를 내었다고 결론했다.
이리하여 우리가 느끼는 아픔과 분노는 작가의 의도에 호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부당하다. 그러나 그것이 더 캐들어가 볼 때도 부당하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작가가 겨냥한 것을 맞추지 못했으니까 그것이 타당할 수도 있다. 작가가 세익스피어지만두 그렇다고 나는 제안한다. 폴스타프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세익스피어가 과녁을 지나쳐 버렸따. 세익스피어는 그렇게도 비상한 인물을 참조하여 그렇게도 확고히 지성의 옥좌에다 올려 앉혔기 때문에 그를 폐위시키려 할 때 실패한 것이다. 우리가 폴스타프를 진격한 관점에서 바라보게되어 이 희극적 영웅이 낭패한 책사로 나타나는 순간이 온다. 그러나 우리는 태도에 있어서나 공감에 있어서나 요구되는 변경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헨리가 영광에 빛나는 치세를 가지기를 그리고 그가 거느리고 있는 위선적 정치가들의 행복을 빈다. 그러나 우리의 진심은 폴스타프와 더불어 감옥으로 간다. 아니 필요하다면 무덤 속으로라도어디고 그가 있는 데로 간다.
----< 브래들리, 윗글>
이렇게 세익스피어가 부정하려던 인물이 긍정되어 `영혼의 자유'(브래들리)를 구상화한 인물로 떠받듬을 받게 된 원인은 결코 세익스피어의 붓이 빗나갔기 �문이 아니다. 폴스타프가 배보다 큰 배꼽모양 부당하게 커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익스피어는 그의 가치 판단을 아무도 그르치지 않게 명백히 하기 위하여 폴스타프는 처음부터 끝까지 산문으로만 말하게 만들었다. 도저히 인간 구실을 할 것 같지 않던 괴물 칼리반도 음악을 듣고 감흥을 일으킬 때와 끝에 가서 진실에 눈뜨게 될때 시로 말하게 한 세익스피어가 끝끝내 시를 주지않고 산문으로만 말하게 한 것이 어찌 우연이랴.
모건은 폴스타프를 부정한 것을 `시적 판단'이라 하였지만 시를 가지고 산문을 부정하는 것은 세익스피어극에서는 형식논리학의 모순율 같은 공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끝에 가서 비로소 억울하게 폴스타프가 `시의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하게 시와의 대조에서 폴스타프의 산문이 극적인 효과를 높이는 것이다.
<윈저의 유쾌한 아낙들>에서 폴스타프가 딴 인물이라는 것이 정평이게스리 생기를 잃은 까닭도 그와 대조되는 시가 없기 때문이다. 왕태자의 시와 폴스타프의 산문은 마주 보는 두 얼굴로 보이기도 하고 컵으로도 보이는 심리학 실험에 쓰는 그림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
검정 바탕에다 주의의 중점을 두면 얼굴로 보이고 흰바탕에도 주의의 중점을 옮기면 컵으로 보이듯 폴스타프의 산문에다 가치의 중점을 두고 세익스피어극을 보아나가는 것과 왕태자의 시에다 중점을 두고 보는 것과는 정반대의 효과를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시에 가치의 중점이 있는 것이 세익스피어극의 원칙인데 이 원칙을 뒤집어 산문에다 가치의 중점을 두고 세익스피어를 본것이 모리스 모건에서 비롯하는 폴스타프관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세익스피어의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이며 세익스피어에 있어서 부정적인 것이 긍정되는시대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톨스토이처럼 대담 솔직하게 세익스피어를 폴스타프적인 산문을 빼놓고 그 시를 통털어 부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폴스타프만 `부르주아의 인간상'으로 모셔 앉히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세익스피어 까지도 소위 불편부당한 `부르주아의 인간상'으로 모셔 앉히려는 음모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폴스타프를 --- 그는 틀림없는 `부르주아의 인간상'이다 --- 그들의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인류의 공통한 문화재인 세익스피어 (역사적으로는봉건시대의 산물이다)를 독점하려는 샤일러크 적 음모를 분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세익스피어가 살던 영국은 로마 법왕이 불란서와 스페인을 시키어 이 ` 이단의 왕국'을 정복하려는 시도가 집요하던 시대다. 특히 스페인은 저 유명한 `무적함대'를 보내어 일격에 영국을 주찌르려고 하였다. 이러한 위기에 처하여 영국 조야는 애국열로 불탔고 `카톨릭까지도 그 가슴속에는 종교적 광신보다 애국심이 더 강열하였다' (J.R.그린 [영국민 소사 ]p418)
<헨리 5세>의 유명한 `애진 코트의 시'가 얼마나 영국민의 사기들 북돋았을까는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청교도들이 극장을 "부랑자, 주인 잃은 하인 , 도둑놈,말도적, 뚜쟁이, 사기사, 역적, 기타 허송세월하는 위험한 인물들의 집합장소"라 해서 그리고 거기서 상연되는 연극이 "청년들을 타락시키는 특별한 원인"이 된다 해서 (J.D 윌슨 편 [세익스피어의 영국의 생활]p180) 강압하려 했을 때 이에 대하여 극장을 변호한 토마스 내쉬는 불란서에 승리를 얻는 헨리 5세가 무대 위에서 영원성을 획득한다는 것을 예로 들어 다시 말하면 이 민족적 영웅을 무대에 내세움으로 말미암아 국민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주는가를 강조하여 극장을 강압해서는 안되는 이유의 하나로 내세웠다. (세익스피어의 영국의 생활 p182)
그러므로 왕태자로 있을 때나 왕이 되었을 때나 헨리가 "다른 사람들을 자기 목적의 수단으로 쓰는데 능히 몰인정하고 모략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만들려는 것이 세익스피어의 숨은 의도"라는 브래들리의 주장은 아전인수가 지나친 망단이라 하겠다.세익스피어 시대에 있어서 관객들이 <헨리4세>의 왕태자요 <헨리5세>의 주인공인 헨리를 무조건 하고 좋아했을 것은 마치 조선사람이 <춘향전>의 이도령을 무조건 좋아 하는 것과 마찬가지요, 세익스피어가 노린 효과도 여기에 있었다. (폴스타프를 용감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사람들도 왕태자를 비겁한 놈이라고 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왕태자의 용기는 그의 적에게 까지 명백한 사실이다)
또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민병을 모집할 � 싸울만한 체력을 가진 장정들은 뇌물을 강요하야 면제해 주고 어디서 거지같은 것들만 모아가지고 칼 대신 술병을 차고 싸움터에 나가서 적을 보면 나가 자빠져 죽은 척하며 피하는 비겁한 폴스타프가 무대에서 동정을 살 수 있었을까.
브래들리는 폴스타프를 진리도 명예도 법률도 애국심도 용기도 전쟁도 무시하는 자유의 인간상이라고 찬미 �지만 이러한 인간이 세익스피어의 영국에서 인간 구실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시대, 그사회에 있어서 적극적인 가치를 가진 것을 일체 부정하는 인물을 관객의 동정을 받는 인물로 등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세익스피어가 폴스타프를 엘리자베스 시대를 떠 엎고 부르주아 데모크라시의 시대를 만들려는 혁명가로 만들지 않은 것이 분명한 이상 어찌하여 부정적인 이 인물에도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누차 말했지만 부르주아가 자기의 자본을 폴스타프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래들리 등은 폴스타프를 보편 타당한 영원의 인간성이라고 우긴다. 그들이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폴스타프를 보고 세익스피어의 관객도 웃고 좋아했고 자본가 사회의 관객도 웃고 좋아하고 아마 사회주의 사회의 관객도 웃고 좋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폴스타프에게 적극적인 가치를 지닌 인간상을 설정하는 것이라 하면 암행어사가 출도하야 변학도가 망신하는 장면을 보고 웃고 좋아하는것이 변학도를 긍정하는 것이라는 논법과 같다. 우리가 폴스타프를 보고 웃는 것도 그가 변학도와 같은 타입의 인물은 아니더라도 부정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망신하는 꼴을 보고웃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망신 중에도 가장 재미있는 망신 ---그의 망신이 동시에 관중이 사랑하는 헨리가 산문의 누명을 벗어나는장면이니까 ---새로 왕이 된 헨리에게 부정당하는 장면을 보고 불쾌감을 느낀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이 장면에서 불쾌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순전히 부르주아의 계급 의식에서 나오는 불쾌함이다.
그러나 폴스타프는 부르주아 데모크라시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부족하다. 즉 다른 것은 다 부르주아와 같은데 돈이 없는 것이다. 폴스타프를 진리도 명예도 법률도 애국심도 용기도 전쟁도 무시할 수 있는 자유의 우상으로 모시어 앉힌 브래들리도
폴스타프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상 그의 하느님 같은 자유를 가지고도 ... ..,영원히 돈 없이 먹고 마실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나쁜 짓을 하게 된다.
하였다. 물론 이것은 브래들리가 하고 싶어서 한 말은아니다.
그러나 새로 등장한 헨리에게 부정을 당하자 진리도 명예도 법률도 애국심도 용기도 전쟁도 우스꽝스럽게도 여기던 폴스타프가 일시에 까무러치는 까닭이 `방탕과 음주와 간음과 폭식과 안일'의 밑천인 돈 나올 구멍이 막혀 버렸기 때문이다.(헨리 4세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자 폴스타프가 `영국의 법률은 내 맘대로 된다'고 좋아하는 것도 그 산문적 생활의 밑천인 돈을 무슨 짓을 해서 든지 구해도 왕의 보호로 아무 일 없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생각이 깊은 헨리는 폴스타프를 부정해 놓고도
돈이 없으면 할 수 없이 나쁜짓을 할테니
짐이 그대의 생활비는 대어주리라.
고 약속한다. 그러나 `생활비'로 만족할 폴스타프가 아니다.
세익스피어극에 나오는 폴스타프는 <헨리5세> 제2막 제 3장에서 하느님과 아울러 술을 달라고 부르짖고는 죽었다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역사적 폴스타프는 결국 헨리가 대표하던 봉건사회를 뒤집어 부르주아 데모크라시의 사회를 만들고 돈을 모아 인제는 샤일럭을 뺨치는 독점 금융 자본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금력으로써 진리도 명에또 법률도 애국심도 용기도 전쟁도 경멸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명실상부한 자유의 인간이 되었다. 아니 현대의 폴스타프는 그가 향락하고 있는자유를 더욱 더욱 확대시키려는 팽창주의로 나가고 있다.
그러면 이 폴스타프가 영원한 인간상으로 존속할 것인가? 역사는 부정의 부정으로 발전한다.
세익스피어에 있어서 부정적 이던 폴스타프가 그 부정을 부정하여 긍정적인 `부르주아의 인간상'이 된 것이 역사의 발전이듯이 오늘날 영미의 부르주아 학자들이 자유의 우상으로 모시어 앉히는 폴스타프지만 그는 자본주의와 연령을 같이 하지 아니 할 수 없는 인간이다.
봉건주의가 역사의 발전을 저해하는 질곡이 되었을때 자본주의는 --그것은 자유주의라는 간판을 내세웠다 --- 진리와 명예와 법률과 애국심과 용기와 전쟁을 한 몸에 지닌 인간의 가치일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가 봉건주의보다도 인류에게 더 많은 자유를 가져왔고 따라서 그만틈 역사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자본즈의가 갈 데까지 다 가서 인류의 질곡으로 변한 지는 이미 오래다. 두번이나 일어난 세계대전이 무엇보다 좋은 증거이다. 그러니 현대에 있어서 자본주의가 인류에게 자랑할 것은 돈 밖에 아무 진리도 이상도 없다.
그래서 폴스타프를 `부르주아의인간상'으로 모시어 앉히는 작가나 학자들도 감히 이 인간상에게 무슨 적극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고 다만 모든 가치에서 초월해 있다는 ---그들은 이것을 `영혼의 자유'라고 부르지만 ---소극적인 인격만을 인정했다. 그러면 그 돈은 무엇에 쓰는 것이냐? 방탕과 음주와 간음과 안일에 낭비될 따름이오 인민의 `살과 피'의 결정이 이렇게 부정을 위하여 소비된다. 다시 말하면 인제는 부르주아의 인간상은 인류의 부정면을 대표하는 것으로 전화하였다.
문학적으로 폴스타프에 대하여 결론을 짓는다면 세익스피어에 있어서 부정적이던 산문이 긍정된 것이 부르주아 문학인데 이 산문을 다시 부정하여 --- 세익스피어의 시와 산문을 아울러 지양해서 --- 새로운 가치를 표현하는 리얼리즘이 장래할 문학이다. 폴스타프의 산문이 "진리도 명예도 법률도 애국심도 용기도" 부정하는 이른바 자유주의 산문이라면 진리와 명예와 법률과 애국심과 용기를 지닌 산문이 아마 다음에 올 인민적 리얼리즘 또는 인민적 휴매니즘의 문학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세익스피어를 연구한데서 귀납되는 결론이다.
([조선영문학회회보논문] 1948.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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