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 12. 20:50ㆍ아름다운 세상(펌)/고운글(펌)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조선 임금을 괴롭힌 치통 사신 明파견 놓고 논쟁도
'외국이 알면 안돼' 주장에 노한 성종
치료법 아는 노비 면천시켜 女醫로
"기술 가르쳐주지 않으면 국문하겠노라"
조선의 세조(世祖) 성종(成宗) 연산군(燕山君) 중종(中宗) 광해군(光海君) 현종(顯宗)은 모두 치통(齒痛)으로 고생했던 임금들이다. 치통은 주로 충치나 잇몸 염증 때문이었다. 세조는 1456년(세조2년) 1월 제주도에까지 사람을 보내 '치통을 치료할 수 있는 여의(女醫)'를 물색했고 성종은 1480년(성종11년) 7월 한양을 찾은 명나라 사신(使臣)에게 부탁해 치통약을 구해올 것을 명했다가 신하들과 작은 논쟁을 벌여야 했다.
오늘날의 비서실장격인 도승지 김계창이 "전하의 치통은 다른 나라에서 알게 해서는 안된다"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국왕의 건강은 예나 지금이나 극비사항이다. 성종은 짜증을 내며 "옛 기록을 보면 적국에 가서도 의원을 구해오는데 하물며 중국인데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라고 은근히 사신들에게 물어볼 것을 재촉했다.
당시에는 충치 하나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이 발달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이라도 그 고통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치통을 심하게 앓았던 임금은 중종이었다. 1544년(중종39년) 6월29일 중종은 승정원에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린다.
"나에게 이앓이 증세가 있는데 아픈 이는 빠졌으나 또 다른 이가 아프고 흔들린다. 이 이가 빠지면 음식을 먹기 어려울 텐데. 잇몸도 붓고 진물이 나오는데 약으로 고칠 수 있는가?"
지금 우리는 이빨 빠진 임금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당시에 새 이를 해 넣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사실 묘약(妙藥)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상이 명을 내렸는데 의술을 담당하던 내의원에서 그냥 있을 수도 없었다. 내의원을 책임지고 있던 강현은 다음과 같은 처방을 내린다.
"먼저 옥지산(玉池散)으로 양치질을 한 다음에 청위산(淸胃散)을 복용하고 뇌아산(牢牙散)을 아픈 이 겉에 바르고 또 피마자 줄기를 아픈 이에 눌러주어야 합니다. 다만 뇌아산에는 양의 정강이 뼈를 넣어야 하므로 쉽게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후 치통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면 치료의 성공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통증은 잡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몇 달 후 중종은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옥지산은 전통의학에서 치통 치료제였고 청위산은 일종의 해열제였으며 뇌아산은 아마도 고름 제거 약이었을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의학상식으로 보면 충치의 경우 내복약이 아니라 긁어내는 것이 상책이다. 성종 때 제주의 의녀(醫女) 장덕(長德)은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였다. 성종도 집권 초부터 충치로 인한 치통을 심하게 앓았는데 장덕을 통해 큰 효과를 보았다. 1488년(성종19년) 9월28일 성종은 제주목사 허희에게 글을 내려 장덕이 죽었으니 그를 이어 '이의 벌레를 잘 제거하는 사람이면 남녀를 막론하고 찾아내서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찾아낸 인물이 제주도에 살던 노비 귀금(貴今)이었다. 귀금은 장덕으로부터 직접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귀금을 한양으로 불러 올려 면천(免賤)시킨 다음 여의(女醫)로 임명했다. 그리고 다른 여의 두 명으로 하여금 귀금에게 기술을 익히도록 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고급노하우를 쉽게 공개하거나 전수할 바보는 없다. 결국 이게 문제가 되어 귀금은 성종의 면전에 불려오게 된다. 승정원을 통하지 않고 국왕이 직접 노비 출신의 여의를 어전(御前)에 불렀다는 것만 봐도 그 기술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성종은 귀금에게 호통을 친다.
"여의 두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다니게 했는데 네가 숨기고 전해주지 않으니 네가 그 이익을 독차지하고자 함이 아니냐? 만약 끝까지 숨기고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고문을 가하면서 국문을 하겠노라."
명나라에서 약을 구하려 했을 만큼 치통이라면 이가 갈리는 성종이었으니 분노도 그만큼 컸다. 그러나 귀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제가 일곱 살 때부터 이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여섯살이 되어서야 완성하였는데, 지금 제가 마음을 다해 가르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익히지 못할 뿐입니다."
두 여의가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것이지 자기 잘못은 아니라는 항변이었다. 귀금이 임금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정말로 두 여의의 능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는 귀금만이 알 뿐이다.
일단 성종은 귀금의 말을 그대로 믿고서 풀어주었다. 그 바람에 그 기술은 제대로 전수되지 못했고 이후에도 많은 임금들은 치통으로 고생해야 했다. 허준도 광해군의 치통은 치료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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