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은유가 어떻게 시의 서정성을 만들어 가는지

2008. 4. 23. 14:09살다보니 이런일이/시(詩)를 위하여

題目:가는지를구체적인 작품들을 통하여 논술하시오

1.序論-은유와 직유, 시의 修辭와 관련하여....................1
2.本論-시의 서정성을 만들어가는 은유의 구체적인 예.....2
3.結論-생활속의 은유와 시의 은유...................................4
4.參考文獻 .......................................................................6

1.序論-은유와 직유, 시의 修辭와 관련하여
'수사'란 '辭-말/문장'을 '修-꾸미다'란 뜻이다. 꾸민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장식'한다는 뜻이다. 장식이란 기존하는 무엇에다가 새로운 무엇을 '덧붙여' 그것을 더 아름답게 하거나 실용적이게 하거나 하는 것이다. 비유(은유/직유 등등)에서는 이 때, 원래 있는 무엇을 '원관념', 덧붙인 것을 '보조 관념'이라 한다.
말은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이든 막론하고 '관념'이다. 심지어 관념과는 정 반대의 것처럼 생각되는 '느낌'조차도 그것이 언어화되면 '관념'임을 벗어날 수 없다. 다만, 관념에는 그 종류가 여럿이어서 그것이 통과하는 '필터'가 무엇이냐에 따라 이성/오성/감성 등등의 것으로 출력된다.
비유는 흔히 '마음 속에 어떤 모습(상)을 떠오르게 하기' 위해서 채택된다. 마음 속의 모습을 심상-이미지라 한다. 다시 말해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적절히 발효되면 원관념 '그것'뿐만 아니라 더하여 '무엇'을 지칭하게 되는 이미지의 구조물이 비유이다. 이미지란 결코 '적확한 무엇'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적확한 무엇'이 주는 지시의 효과를 '드러낸다.' 이 중, 직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각각 살아 어떤 '효과'를 연출하지만 은유는 아예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새로운 제3의 관념(말의 효과)으로 환치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적확'의 화살로는 잡을 수 없는 두 마리 혹은, 서너마리의 토끼를 단 하나의 화살로 관통하는 꼴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화살의 이름은 '명징'이다. 그러므로, 비유란 관념과 관념이 '헤쳐 모여'한 꼴이다. 낱낱이 해부하고 낱낱이 발겨 놓은 '적확'의 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생성'의 속성이 있다.
직유를 유도하는 문법은 ~처럼, ~듯, ~(인)양 등등..., 은유를 유도하는 문법은 ~의 무엇, ~는 무엇, 혹은 (문맥과)무엇 등등이다. 직유가 좋은가 은유가 좋은가는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이들은 모두 '명징'의 수사학이며 '신비'에 닿아 있고 '신'의 질서를 흉내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 속성을 추적하는 말의 화살이다.
은유는 좁은 의미로서는 은유자체를 뜻하기도 하지만 모든 비유방법을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만큼 은유의 시적 가치가 주목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간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암유(暗喩)'라고도 한다. 전혀 다른 두 가지의 내용을 같은 성질로써 연결시키는 방법으로서,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두 관념의 밀도는 직유보다 강하다. "A like B"의 형태가 직유라면, "A is B"의 형태가 은유이다. 은유에는 연결어가 없는 만큼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상태가 직접적이며 그 사이에 강한 탄력이 생긴다. 메타포(Metaphor)는 은유적인 표현법을 지칭하는 말이다. 어떤 대상을 연상하게 만드는 상징들을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시에서의 은유법, 비유법을 떠올리면 된다. 은유도 분석중인 어떤 상황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얻기 위해 응용될 수 있다. 은유는 다른 무관한 단어나 어구에 응용하여 비전통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단어나 어구이다. 예를 들면, "세상은 다 무대이다."
은유는 다양한 상황을 시험해보는데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직의 환경이 분석의 주제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조직의 직원들이 정글의 동물들과 어떻게 닮을까? 서로 다른 동물들은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을 해나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 방법을 해석해서 우리 조직에서 사용되는 서로 다른 리더십 스타일로 바꿀 수 있겠는가(바꿀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답함으로써 새로운 통찰력을 그 상황에 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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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은유중에는 사은유도 있는데 언중(言衆)들에 의하여 이해가 될 만큼 일상화되어 버린 은유를 사은유(deadmetaphor)라고 한다. 예를 들면
'언제 이 밤이 가고 새벽이 오려나'에서 '밤'은 '암담한 상황', '새벽'은 '희망의 상황'으로 통용되는 그런 것들을 사은유라고 한다. 하지만 시에서는 이런 사은유가 많이 이용되지는 않는다.

2.本論-시의 서정성을 만들어가는 은유의 구체적인 예
서론에서 우리는 은유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이제 은유가 시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잇으며 시의 서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가를 구체적인 작품을 통하여 시를 은유의 맥락에서 검토해 보기로 한다.
먼저 김동명(金東鳴.1901~68) '내 마음은' 에 나타난 은유에 대해 살펴보자.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촉(燭) 불이오
그대 저 문을 닫아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라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주오
나는 달 아래에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오
잠깐 그대의 품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리다
<김동명 '내마음>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 . 이것이면 다 끝나버리는 시다. 이 두 행으로 크게 이름을 떨쳐 중년여인의 입안에서 흘러나오는 시이기도 하고 공연히 슬퍼지며 노래가 되어 마을 밖에서 들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단순한 마음이 '호수, 촛불, 나그네, 낙엽'으로 비유되면서 시는 달라진다. '내 마음은 호수요'에서 추상적인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은유는 '호수'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시각적, 청각적으로 표현한다고 가정해 보자. 자연을 표현할 수 있는 상징에는 어떠한 것이 있겠는가? 푸른 하늘, 초록색 나뭇잎, 파도소리, 새소리, 비 내리는 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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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풍경, 꽃밭, 과일 등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사물을 끄집어 낼 수 있다.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김동명 '파초'>
여기에서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이라는 은유법이 사용되었고 단순한 화초에 지나지 않았던 파초가 은유를 빌어 정열의 여인이라는 강한 이미지로 부각된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깃발'>

유치환 시인의 깃발은 시인의 잠재의식에서 튀어나온 자의적 은유이다. 시인은 깃발의 흔들림을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이라는 은유법의 적절한 사용으로 하여 시의 품격을 한층 더 높였으며 이러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하여 시는 한층 더 진지해지고 살아나는 생동감을 갖게 된다
. 이 시 전체에서 '깃발'이란 단어는 제목을 제외하고는 전혀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우성, 손수건, 순정, 이념의 푯대, 백로, 마음' 등의 보조관념으로 치환되어 있다. 또한 유추될뿐만 아니라 이미 깃발의 의미는 변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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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 '동천'>
'우리임의 고운 눈썹'과 '즈믄밤의 꿈'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은유의 절창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날 밤이여든 구비구비 펴리라
<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을'>
은유는 현대시에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 우리의 고전시가에서도 은유는 사용되었었고 황진이의 이 시조는 은유로 표현된 고전시가 중에서도 절창인 작품이다.
일년 중 가장 길다는 동짓달 밤이지만 임께 드릴 그 수많은 사랑의 밀담을 나누기엔 너무 짧아 거두절미하고 가운데 부분만이라도 뚝 잘라 달콤하고 향기로운 봄바람 이는 이불 속에 줄줄이 가득 챙겨 두었다가 어른님(스승인 서화담)오는 날 밤 만리장성같이 긴 정담을 나누며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쳐 회포를 풀어 보리라는 화자의 마음을 은유법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시라 하겠다.
이외에도 전봉건의 시 '피아노' 도 은유로 표현된 아름다운 시의 구체적인 작품이다.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전봉건 '피아노'>

3.結論-생활속의 은유와 시의 은유
언젠가 '일포스티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일상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은유를 나는 그곳에서 보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였지만 시골사람 마리오 루폴로가 우연히 네루다를 만나면서 이 영화는 시작되는데 마리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외부의 세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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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서 막연한 환상만을 가진 그가 자신과 주변을 스스로의 말로 표현해 나갈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마리오는 네루다를 만나면서 네루다에게서 '은유'에 대해서 배운다. '은유'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그러나 이 순박한 청년에게 '은유'란 것은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는 것과 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는 글을 깨우치고 있었음에도 스스로에 대해서 말로 제대로 표현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었지만 '은유'의 '혁명적 힘'과 접속하면서 '제대로 된 말'을 하게 된다.
베아트리체에게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그렇고, 답답하게만 여기던 자신의 섬마을에 대해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녹음기에 담아내는 것이 그렇고, 늘 수동적 위치에서 체념하며 살던 그가 노동자들의 집회에 참여해 시를 낭송하려는 것이 그렇다. 이처럼 마리오에게 다가간 '은유'라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학적인 것이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혁명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괴테의 시 가운데 <앉은뱅이꽃의 노래>라는 시가 있다.
어느 날, 들에 핀 한 떨기의 조그만 앉은뱅이꽃이 양의 젖을 짜는 순진무구한 시골 처녀의 발에 짓밟혀서 시들어 버리고 있다. 그러나 앉은뱅이꽃은 조금도 그것을 서러워하지 않는다. 추잡하고 못된 사내 녀석의 손에 무참히 꺾이지 않고 맑고 깨끗한 쳐녀에게 밟혔기 때문에 꽃으로 태어났던 보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시의 상징을 좋아한다. 들에 핀 조그만 꽃 한 송이에도 꽃으로서의 보람, 생명으로 태어났던 보람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람있는 생(生)을 원한다. 누구나 보람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다. 보람있는 일생을 마치고 싶어한다. 우리 인생의 희열과 행복을 주는 것은 진실로 보람이다.
화가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려고 캔버스 앞에 설 때, 작곡가가 좋은 노래를 지으려고 전심 몰두할 때, 어머니가 자식의 성공과 장래를 위해서 밤낮으로 수고할 때,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큰 일 작은 일에 정성된 노력을 기울일 때, 우리는 삶의 보람을 느낀다. 생의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고생이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고 기쁨으로 변한다. 인간의 생에 빛과 기쁨을 주는 것은 곧 보람이다. 보람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기쁨도 크다.
우리는 아름다운 생활을 위해 시를 쓰고 시를 읽는다. 시에 드러나는 상징과 비유법은 너무도 다양하고 많지만 이처럼 작품에 드러난 은유의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는 시가 은유라는 비유법으로 표현될 때 더한층 아름다워지고 고결해짐을 보았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시를 읽고 그리고 시를 쓰며 자연과 삶에 대해 너그러워지고 풍요로와 진다.
시를 창작하는 데 있어서 정해진 비유의 방법은 없다. 하지만 시인의 상상력의 힘을 빌려 적당하게 표현된 시어들은 우리들의 삶을 보다 가치 있고 새로운 것으로 전환시켜주는 활력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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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目:靑鹿派 詩人들의 詩世界가 지니고 있는 共通的 特性과 各各의 差異點에 관해서 論하시오
1.序論-靑鹿派의 胎動과 成立 背景 ................1
2.本論-靑鹿派의 共通的 特性과 差異點.............1
1)朴木月............................................2
2)趙芝薰............................................3
3)朴斗鎭............................................4
3.結論-靑鹿派의 文學世界............................5
4.參考文獻 .............................................6

題目:靑鹿派 詩人들의 詩世界가 지니고 있는 共通的 特性과
各各의 差異點에 관해서 論하시오.

1.序論-靑鹿派의 胎動과 成立 背景
청록파란 유파명칭을 성립토록 만든 것은 '靑鹿集'이다.
이 시집은 해방시단에 아주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청년문학가협회측은 이 시집이 나오자 곧 그것을 축하하는 기념회를 가졌다. 또한 당시 우파 민족진영의 최대 논객 가운데 한 사람인 金東里는 이 시집에 대해서 이례적인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靑鹿集'은 한국 현대시단에서 처음 이루어진 자연의 발견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은 그 이전까지 우리 시단을 대표한 정지용, 김영랑 등 시문학파와 그 다음을 이은 서정주, 오장환, 유치환 등의 장점과 한계를 능동적으로 타개해 내었다고 평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집에 대해서는 좌파 문학가 동맹계에서도 전면적인 비판,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이 시집의 질적 수준이 좌파 문학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시인된 결과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이 시집에는 세 시인들의 작품이 39편이 실려 있는데 물론 이 작품 가운데는 시기적으로 보아 8.15 이전에 씌어진 것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유로 '靑鹿集'은 8.15 이후에 간행된 시적 성과로 보아야 한다. 우선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일제치하에 씌어진 것들은 아주 부분적이다. 말을 바꾸어보면 실질적인 의미에서 '靑鹿集'은 8.15 이후에 그 테두리가 결정되고 모습이 갖추어진 사화집에 해당되는 것이다.
'靑鹿集'에 담긴 여러 작품들의 특색은 4가지로 집약되어 나타난다.
우선 이 시집에 담긴 여러 작품들은 외래적이기보다는 토속적이며, 도시형이라기보다는 전원형이며, 人工보다는 자연취향을 더 강하게 드러낸다.
다음 이들 시의 또다른 특성으로 손꼽아야 할 것이 사회, 역사, 현상에 대해서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점이다. 세 번째 우리가 '靑鹿集'의 특색으로 들어야 할 것이 언어감각, 또는 기법에 대한 그 나름의 인식을 곁들인 점이다.
이렇게 '靑鹿集' 한 권에서 검출되는 특징적 단면은 민족진영 쪽 詩에 큰 보탬이 되었다. 나아가 우리 시단 전체로 보아도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이런 몇 가지 점에서 이들의 공동 사화집인 '靑鹿集'은 해방시단의 듬직한 성과임에 틀림없다.

2.本論-靑鹿派의 共通的 特性과 差異點
1)朴木月
朴木月은1939년 '문장'지 추천으로 시단에 등단하여 40년 동안 시작활동을 계속하다 1978년에 이승을 떠났다. 그 동안 그가 쓴 시는 7권의 시집으로 묶여져 있는데, 그것을 발행순으로 적어보면 <청록집>, <山桃花>, <蘭,其他>, <청운>,<경상도의 가랑잎>, <無順>, <크고 부드러운 손> 이다. 그리고 이 7권의 시집 중에서 '靑鹿集'은 박두진, 조지훈과 함께 낸 시집이요, '크고 부드러운 손'은 그가 작고한 뒤에 유족들이 신앙시만을 따로 모아 낸 유고집이다.
朴木月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청록파를 대표한 시인이다. 우선 '靑鹿集을 보면 그의 작품이 제일 먼저 놓여있다. 물론 이런일 자체가 애초부터의 계산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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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靑鹿集'에 담긴 朴木月의 시가 갖는 속성 자체다. 세 청록파 시인 가운데 그의 시는 가장 강하게 단형 서정시의 풍모를 지닌다. 가령 '靑鹿集'에 실린 <청노루>, <3월>,<윤사월>, <갑사댕기> 등 여러 작품은 그 전편이 두행으로 한 연을 이루고 그 연수가 4연 또는 5연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이들 작품에서는 거의 모두가 공적인 감각과는 반대되는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 노래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의 정서의 물결을 타서 이루어진 것이 이상의 작품들이다. 朴木月 시가 갖는 이런 면은 다른 청록파 의 경우에 대비시켜 보면 더욱 그 특성이 뚜렷이 떠오른다. 이런 경우 우리에게 좋은 보기가 되는 작품이 <나그네>다.
이 작품은 朴木月 자신이 '靑鹿集'에 수록한 작품 가운데 가장 아낀 것으로 보이는 시다. 그와 동시에 (墨畵에서 점 하나를 소중히 하듯 말 하나)까지를 아껴 쓴 작품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이 작품의 제작동기 같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작품은 조지훈의 <玩花衫>에 대한 화답시로 씌어진 것이다.
'靑鹿集'과 '산도화'에 수록되어 있는 목월의 초기 시는 그가 20대의 청년시절, 그러니까 주로 해방 전에 쓴 작품들이다. 초기의 목월이 관심의 초점을 모았던 가장 중요한 시적 대상은 다름 아닌 자연이었다. 그의 시 '자하산'은 그 자연을 선명하게 구체화시킨 대표적인 심상의 하나이다. 또하나 그의 시적 대상은 가정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생활의 시화를 추구하는 목월의 중기 시에 있어서는 가정이 가장 비중이 큰 시적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목월의 후기 시는 향토 회귀적인 특성을 갖는다.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현상의 하나는 경상도 사투리가 시에 대량으로 도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향토회귀보다 더욱 중시되지 않으면 안 될 또 하나의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죽음에 대한 의식과 또 거기서 우러나는 허무감을 곁들인 달관이다. 인간은 자연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 고향은 또 그가 초기에 꿈꾸었던 자연으로 통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목월을 한마디로 <고향회귀의 시인>이러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목월은 종래의 자연과는 다른 새로운 자연을 발견한 것도 아니며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섬세하고 고적한 소멸의 미학이 가장 쉽게 동화될 수 있었던 세계가 자연이었을 따름이다. 물론 자연은 삶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겠으나 목월이 시적 대상으로 삼은 자연은 그에 의해 조정되고 선택된 일면적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삶의 문제를 포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은 되지 못한다. 그럴 경우 자연과 인간의 등질적 관계는 깨어지고 시인의 시정신은 파탄에 직변하여 그를 지탱해 오던 긴장감과 균형감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소위 허무가 그의 심정을 압도하려 하는 것이다.
본래 서정시의 요체는 긴축된 말씨의 사용을 통해 우리 정서를 자극해내는 데 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靑鹿集'에 실린 朴木月 시의 성공도가 좀더 구체적으로 부각되는 셈이다.
'靑鹿集'의 朴木月 편에는 또 하나 8.15 이전 작품과는 다른 변화 양상이 있다. 8.15 이전 그의 시는 어느 편인가 하면 적실하게 심상을 제시한 쪽이기보다는 다분히 말의 감칠맛 같은 것을 이용한 경우다.
이와 같은 朴木月 시의 변모 양상은 적어도 그가 서정시 제작의 한 요체를 터득한 듯 생각될 수 있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朴木月은 8.15 이후 바로 이와 같은 서정시 제작의 원리를 터득한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朴木月은 해방 시단이 낳은 가장 주목할 만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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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趙芝薰
시인 趙芝薰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훌륭한 시인의 한 사람이다. 세칭 청록파 시인으로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일제 식민통치 말기에 민족의 얼과 정서를 지키기 위해 숨어서 시를 쓴 민족적 전통시인이다. 결국 그를 志節의 시인이요, 학자이며 고고한 선비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러한 그의 생애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시인 趙芝薰은 1920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조선조 대대로 문벌이 융성한 전통적 유교가문이었다. 특히 가문의 기반이 되어온 月麓書堂은 유년시절부터 소년시절까지 그의 교육을 담당한 곳이다. 현재도 문화재로 지정된 이 월록서당은 그의 문학적 재능과 학자적 탐구정신과 지절의 선비적 정신을 개발하게 한 발원지가 되었다.
그리고 시인 趙芝薰의 시세계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이고 획기적인 계기가 된 것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혜화전문학교를 다닌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경향파 문학을 거쳐 시문학파의 영향을 받았고 탐미주의, 상징주의, 아방가르드 문학,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등에 경도 되었다.
8.15 이후 조지훈이 쓴 시는 큰 테두리에서 그 이전의 것과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물론 <文章> 추천시대에 그가 보인 작품은 우리 고전의 세계에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종의 향수가 서려 있지만 그 배경, 무대는 <승무>나 <鳳凰愁>를 통해서 짐작되는 바와 같이 폐쇄된 공간을 뜻했다. 그것이 <완화삼>, <山房>, <낙화>, <律客> 등에서는 산야로 이동되어 있고, 그 공간 역시 자연으로 바뀐다. 그러나 이런 변동 양상은 어디까지나 평면상의 것이다. 따지고 본다면 후자도 전통관습이나 관습적인 감정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8.15 이후 趙芝薰의 작품세계는 그 이전 것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것이다.
시인 趙芝薰의 문학수업은 평행 하는 두 줄기의 문학세계, 곧 서구 지향적인 시세계와 한국적 전통 지향적인 시세계를 형성하게 한 근원이 되었다. 그러면 시인 趙芝薰의 시세계의 본령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와 자연의 동질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 지향적인 시세계가 처음부터 선험적으로 형성되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이러한 시세계의 변모는 한마디로 습작기의 서구 지향성에서 <문장>의 추천 이후의 전통지향성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외형적인 시세계의 변모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에는 어떤 일관성이 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아에 대한 탐구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시단에서 趙芝薰이 보여준 작품들은 세 가지 정도의 특징적인 단면을 드러낸다. 그 하나가 상당한 언어, 형태에 대한 감각을 곁들이고 있는 점이며, 다른 특징적 단면으로 그 몇몇 갈피들에 漢詩, 특히 唐詩의 영향이 검출된다. 또한 그의 작품 바닥에는 다른 청록파나 당대의 여느 시인들과는 다른 정신성향, 사상의 줄기 같은 것이 검출되는 바도 있다.
이제 우리는 趙芝薰이 한시의 강한 영향을 받았고 그 나름대로 정신세계의 깊이나 폭을 지닌 경우임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대체 趙芝薰에게 있어서 시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던가. 어떤 입장을 취하였기에 그의 시는 정신세계의 폭과 깊이를 지나면서 상당한 형태, 기법을 확보한 것일 수 있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趙芝薰이 남긴<시의 원리> 한 부분에서 구할 수 있다. 이 글은 우리 현재비평사에서는 보기가 드문 詩原論에 해당되는 업적이다. 그 허두인 <시의 우주>에서 조지훈은 자신의 생각하는 시가 두 개의 특징적 단면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 하나가 시의 소재에 해당되는 우주며 삼라만상이다. 그 다른 하나는 그것을 형상화 해내는 솜씨 또는 기법이다.
그밖에 그가 생각하는 대로 아주 예술적이며 개성적인 정신세계의 경지가 확보된다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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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가. 그때 趙芝薰의 시는 그런 경지를 기능적으로 표출, 형상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시정신과 형상화 기법 터득자라는 趙芝薰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그의 8.15 이후 시를 지배한다.
이 무렵 趙芝薰은 <빛을 찾아가는 길>을 쓴다. 이 작품 다음에 趙芝薰은 6.25를 맞고 또한 4.19를 겪는다. 그는 전선시를 쓰고 상황이 바뀌고 志士風의 비판태도가 가중될 때마다 조지훈의 시는 더욱 고조된 목소리를 담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시세계를 창조한 지훈은 청록파 시인이라는 유파적 명칭을 얻은 시인으로, 순수문학을 옹호하고 민족문학의 건립을 주창한 순수서정시의 시인이다. 즉 그는 청록파 가운데도 가장 고전적인 입장으로 시를 쓴 시인이다. 그런 선상에서 '靑鹿集' 시대와 그 이후의 시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3)朴斗鎭.
朴斗鎭 시인은 거의 반세기 동안 시작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兮山 시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첫째는 소재적 영역이 형이상학적 관념의 세계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내용적 특성으로 기독교 정신을 기축으로 하고 있는 점이며, 셋째는 내용이나 형식상의 체체면에서 통일성과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점이다.
8.15를 맞았을 때 朴斗鎭은 다른 청록파 시인인 박목월이나 조지훈처럼 하나의 가능태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그는 <문장>지의 추천을 갓 마친 시인이었고 그 이후 발표된 작품은 두어 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8.15를 맞고 난 다음부터 아주 의욕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한다. 특히 이 가운데서 <해>나 <청산도>는 해방시단의 압권이라는 평을 들은 작품들이다. 구체적으로 조연현은 이 작품에 대해서 <어쩌면 朴斗鎭은 자기가 부르고 싶은 모든 것을 다 노래해 버리고만 감이 없지 않을 만큼 절정에까지 도달해 버리고 말았다>라고 적었다.
<해>와 같은 무렵에 씌어진 시에서 朴斗鎭은 즐겨 해나, 산, 바다, 하는 등을 그 제재로 택했다.
바꿔말하면 즐겨 자연에서 소재를 택했다는 이야기가 가능한 셈이다. 그런데 이들 자연을 다룬 솜씨가 다른 청록파의 경우, 곧 박목월이나 조지훈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박목월의 시에서 자연은 아주 사적인 정감을 촉발하는 매개체 내지 그 무대배경이었다. 조지훈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것은 이들 시인의 자연이 동양적이며 재래적인 경우임을 뜻한다.
그런데 朴斗鎭의 경우에는 그와 다른 단면이 나타난다. 물론 그의 작품에도 궁극적으로 융화, 합일의 세계가 노래된다. 그러나 이 화해와 융합은 처음부터 <나>와 자연을 구분하지 않은 조지훈이나 박목월의 시세계와는 크게 다르다. 우선 자연몰입, 관조의 세계에서는 산이나 강, 해와 하늘이 <나>에 독립된 제 3의 실체가 아니다. 그런데 朴斗鎭은 분명히 <띠끌 부는 세상에도 버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 지운 나의 사랑>을 기다린다. 그가 만약 조지훈처럼 자연 속에 침잠, 몰입하는 경지가 되었다면 이런 의식상의 조바심 같은 것이 생겨날 리 없다.
세 번째 박두진의 초기시의 특징이 되고 있는 것이 그 소재라든가 세계가 큰 틀을 가지고 있는 점이다. <해>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는 짐승과 인간이 함께 모여 일대 향연을 벌이는 공간을 설정한다. 박목월이나 조지훈의 무대 공간은 대개 꽃이 지는 산방이거나 나그네가 등장한 강나루다. 그에 반해서 박두진이 택한 세계는 온 지구 또는 우주의 축소판에 해당되는 설악이 아니면 청산이며 바다거나 들판이다. 그것을 박두진은 매우 굵고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한다. 그러면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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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들이 예술적인 격조까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시가 지닌 또 하나의 특성이 스케일이 큰 세계라고 할 구 있을 것이다.
이밖에 지속적인 일관성의 예를 하나 더 들 수 있다. 그것은 정신적 극복의 힘이 쇠잔되어간다든가, 진로의 방향을 찾지못하고 방황할 때 위안과 고무의 동반자로 인격적 서정체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스케일이 큰 시, 건강한 시, 걸걸한 목소리의 시를 쓰면서 그 나름의 맛과 멋, 가락을 지니게 하고 싶었던 것이 토기 박두진의 시적인 야망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박두진의 이런 시도로 <해>로 집약되는 바와 같이 상당한 성과를 얻어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박목월, 조지훈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청록파의 일원이 되었고 해방시단의 한 이정표를 이룬 것이다.

3.結論-靑鹿派의 文學世界
청록파는 민족진영의 시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해방시단에서 새 차원을 타개한 유파다. 이들은 1946년 공동사화집 <청록집>을 펴냈다. 청록파의 이름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 시인에게는 몇 가지 점에서 강한 정신적 유대감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었다. 우선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은 그 문단 등장과정부터가 비슷했다. 이들 세사람은 모두 <문장>지의 추천제를 통해서 시단에 진출했다. 당시 이 잡지의 시 부분 추천자는 그 시를 보는 안목에서 자타의 공인을 받은 정지용이었다. 이것은 단 한 회의 추천으로 끝나는 신문사의 신춘문예제도나 그 심사기준이 상당히 허술한 여느 잡지의 추천을 받은 경우와는 다른 문단진출 사례를 뜻했다. 세사람의 마음 바닥에는 우선 이에 대한 자긍심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다음 이들 세 시인들은 다같이 양질의 작품제작에만 전념하고 나섰다. 이들에게도 물론 이념적 입장이나 정치적인 노선이 없지 않았지만 이런 행동이념이나 정치노선상의 생각이 이들의 작품에 직접적으로 토로된 예는 극히 드물다. 또한 더러 그건 작품들이 있다고 해도 사화집을 낼 때 이들은 그것을 제외시켜 버렸다. 이것은 이들이 8.15 이후 혼란한 상황 가운데도 외곬으로 차원 높은 순수시 제작을 지향, 추구했음을 뜻한다.
해방시단에서 청록파 시인들은 단순하게 민족진영의 유능한 시인인데 그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은 이들의 작품이 <상아탑>에 실린 사실만으로도 넉넉히 짐작된다.
구체적으로 이 잡지 창간호에는 박두진의 <장미꽃 꽂으시고>를 비롯한 지훈의 <비가 내린다>, 박목월의<나그네>등이 차례로 실렸다. <상아탑>을 주재한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 뒤에 문학가동맹의 대표적 비평가가 된 金東錫이다.
그런데 위의 작품들은 그가 호평, 추거의 조건으로 삼은 경향이나 당파성과는 무관한 상태의 순수 서정시들이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이들 작품의 질적인 수준이 짐작되고 남는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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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目:시조의 발생에 대한 학설을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시오.
Ⅰ.序論--時調의 정의..................................1

1.時調의 名稱과 起源......................................1
2.時調의 形式...............................................1
3.時調의 主題...............................................2

Ⅱ.本論-時調發生의 學說..............................2
Ⅲ.結論-時調發生의 學說에 관한 나의 見解 ........4
Ⅳ.參考文獻 .............................................6

題目:시조의 발생에 대한 학설을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시오.

Ⅰ.序論-時調의 정의

1.時調의 名稱과 起源
시조란 말이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 조선조 영조때로 보인다. 申光洙의 『石北集』에서 처음 시조란 명칭이 나왔으며 그 후로는 시조란 명칭이 자주 문헌에 보인다.
시조란 명칭이 나오기 전에 주로 불려졌던 명칭으로는 短歌, 新調, 詩餘 등이 있었다.
시조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 몇 가지만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조의 연원을 한시의 번역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安自山도 「시조의 體格과 風格」이라는 글에서 시조의 발생을 명나라에서 수입한 佛歌에서 구했다.
둘째는 시조의 기원을 우리문학 중 시가 발전과정을 통하여 찾아보려고 하는 노력이다. 이것은 향가의 시형이 의미단락으로 볼 때 3단으로 구성되며, 이 점은 고려 균여의 「보현십원가」에서는 더욱 명료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가진다. 三句六名의 시형이 곧 시조의 연원을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병기는 「국문학전사」에서 시조의 연원을 민요에서 발생하여 향가에서 병존하다가 麗朝에 와서 그 형식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셋째로 시조의 연원을 巫歌에 의한 종교적인 神歌의 노랫가락의 脫化에서 찾기도 하였다. 이희승은「시조기원에 대한 一考察」에서 이같은 주장을 전개하였다.
이상의 여러설을 바탕으로 하여 시조의 연원을 탐색해 볼 때, 시조는 우리 고유의 시가로서 특히 오늘까지 그 명맥이 유지되고 이것이 노래로 불려졌다는 점에서 가장 한국적인 정취가 담긴 시형임을 알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시조의 원류는 한국의 옛노래인 향가나 민요, 속요에서 찾아지며, 이런 시형을 이어받아 세련되게 마무리 지은 것이 바로 조선조의 시조 시형이라 하겠다.

2.時調의 形式
시조는 가지런한 정형을 이루고 있어 정형시로 논의되고 있으며, 또 이것이 노래로 불려진다는 점에서 창조적인 면에서 시조 시형을 논의할 수 있다.
珍書刊行本인 『청구영언』에 따르면 이 잠 이하 申 欽까지 28인의 작품인 139수를 자수에 따라 통계를 낸 결과를 보면 43자 30수, 44자 32수, 45자 29수, 45자 이상 7수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시조는 44자로 이루어진 것이 가장 많음을 알 수 있다.
시조를 3장으로 나누고 章 속의 句를 몇 개로 보느냐에 따라 6구, 12구로 大別할 수 있다.
시조는 短形의 정형시가 가장 대표적인 형식이지만 이런 단형에다 조선조 후기에 오면서 여러 가지 잡설과 차령조의 사설이 덧붙여짐으로써 길이가 늘어났다. 이런 시조를 엇시조, 또는 장형시조라 한다. 그리고 단형의 정형시가 여러 수편이 모여 연작의 형태를 이룬 시조가 있는데 이를 연시조라 칭한다
시조의 형태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3장 45자 내외의 단형적인 정형시라 할 수 있다. 좀 더 세밀히 분석해 본다면 시조는 3행으로써 1연을 이루고 있으며, 각 행은 4보격으로 되어 있고 이 4보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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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다시 두 개의 숨묶음(breth group)으로 나뉘어져 그 중간에 사이 쉼(cesura)을 넣게 되어 있다. 그리고 각 음보는 3또는 4개의 음절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마 이것은 가상적인 기준형이고 절대 불변하는 고정적인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님은 우리말 자체의 성질에서 오는 신축성에서라 할 것이다.

3.時調의 主題
현존하는 옛 시조집을 통해 시조를 주제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가 있다.
고금가곡에서는 단형 시조 246수를 19개 항목으로 분류하였다.
김천택은 珍書刊行本인 『청구영언』에서 무명씨 작인 단형 시조 104수를 분류하여 戀君, 江湖, 山林, 閑適, 放浪, 修身, 歎老 등 총 54조목으로 나누었다.
조선조의 시조는 대체로 남녀의 이별이나 산림에서 유한하게 삶을 누리는 작품이 많았으며, 동시에 세상을 개탄하고 임금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보인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忠義歌類에만 국한되어 詩化되었던 것은 아니다. 즉 한가하고도 평화로운 서경시가 오늘날 전하는 고시조의 태반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시조문학의 본령을 이해하는 데에 충분하다고 본다.
바꾸어 말하면 이같이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근원은 어디까지나 군주의 어진 은혜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을 한적하게 찬양할 수 있는 것은 곧 어진 군주를 찬양하는 심정에서 우러나왔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뜻 보아 자연시처럼 보이는 이들 일련의 시조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유교적인 충의사상을 표현하는 데에 변함이 없었다.


Ⅱ.本論-時調發生의 學說

시조는 고려말에 움트기 시작하여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서서히 제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틀도 건국초기의 새로운 문화제도가 형성되는 시기에는 자연 여기에 영향을 받아 독창적으로 발전하기에 많은 시일이 걸렸다. 그리하여 초기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고려의 유신들이 나라를 잃고 초야에 묻혀 옛 감회를 읖은 노래가 대부분이다.
김종서 성삼문 등의 시조를 보면 대중감정에서 벗어나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점이 비친다.
시조는 국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시조는 고려시대에 나타나서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장르이며, 작자층이 실로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 왔고, 그 형식이나 미의식에서 한국 문학을 대표할 수 있다는 견해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과 상응해서 시조에 관한 연구는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광범위하게 진척되었다,
이미 몇 백년 전에 청구영언, 해동가요, 등이 편찬되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국문학에 대한 학적 연구가 시작되면서 국문학의 장르들 중에서 제일 먼저 진지한 연구의 대상으로 등장한 것이 시조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훈민정음의 창제로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던 것이, 문자로 정착됨에 따라 개성적인 한 분야의 문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신흥사대부들은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을, 또 한편으로는 사실에 속한 것과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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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를 이루는 것을 함께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기철학을 이룩하자는 모색이 심화되어 밖에서 들어
온 학설이 적절하게 적용되었다. 그래서 사대부에게는 경기체가와 같은 교술시와 함께 시조와 같은 서정시도 필요했다.
신흥사대부가 시조를 필요로 했던 절실한 이유는 나아가 세상을 바로 잡지 못하고 번민하는 감정을 토로하자는 데 있었다. 우탁과 동시대 사람이며 후배인 이조년(1269-1343)이 지은 '梨花에ㅔ 月白?耽?'로 시작하는 작품이 그런 예이다. 자연을 향한 마음과 정치에 대한 관심이 다를 바 없다는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더욱 잘 나타나는 사대부 시조의 기본방향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 시발점을 이조년의 시조와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시조는 경기체가에 이어서 나왔으며 경기체가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또다른 표현 영역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참으로 긴요한 구실을 하고, 신흥사대부가 역사의 전환기를 맞이해서 더욱 심각하게 지니게 된 내면의식의 문제를 절실하게 다룰 수 있도록 했다.
우리말 서정시를 다시 이룩하는 것은 교술시의 경우보다 더욱 큰 의의와 사명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시조를 사뇌가와 견주어본다면 다섯줄이 세줄로 줄어들었다고 하겠다. 처음 네줄이 그 반수인 두 줄로 되고 마지막 한줄은 그대로 있는 셈이다. 시조는 누가 일시에 창조해 낸 형식이 아니다. 네토막이고 세 줄인 노래가 원형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광의의 시조는 <정읍사>나 <만전춘별사> 같은 데서 찾을 수 있다.
시조는 경기체가처럼 한문어구를 열거해서 표기할 수 없고 향찰로 정착된 바도 없기 때문에 이른 시기의 작품을 다루는데 적지 않은 지장이 있다. 몇백년동안 구전되다가 비로소 국문으로 기록된 것을 두고서 작자를 살피고 작품론을 전개하자면 쉽사리 해소될 수 없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가로놓여 있다.
청구영언 이하 여러 시조집을 보면 삼국시대나 고려 전기 사람들이 지었다는 시조도 몇 편 전하지만, 모두 후대인의 擬作이라고 보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고려후기에 이르면 시조를 남겼다는 작자가 많아질 뿐 아니라 후대인의 의작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나타난다.
북한에서는 향가가 자취를 감춘 10세기 후반기에 시조가 발생했다고 보고, 그 구체적 증거로 최충(984-1068)의 '白日은 西山에 지고'와 一生에 原?貪綬?'로 시작하는 작품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 시기를 끌어올리려는 경향과 고구려와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적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북한쪽의 사관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이룩되는 과정이나 그 직후의 상황에서 시조가 상당한 구실을 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장차 조선왕조의 태종이 된 이방원이 정몽주의 속셈을 떠보느라고 <하여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시조를 짓자, 정몽주는 이에 대해서 <단심가>라고들 하는 시조로 응답했다는 것은 후대문헌에 거듭 오른 일화이다. 그런 판국에 시조가 등장했다고 하는 것은 시조의 구실이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고려말의 정치적 격동과 관련해서 창작된 시조는 두 가지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시조가 그만큼 큰 구실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처럼 절박한 상황에서도 다양하면서 묘미 있는 표현이 개척되었다는 것이다.
국문학 연구를 개척한 安廓, 李秉岐, 趙潤濟 같은 분들은 한결같이 시조에 정열을 기울였다. 그 뒤를 이어서 鄭炳昱, 李能雨, 李太極, 沈載完 제 교수가 시조연구를 심화하고 확대했으며, 시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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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한 문헌적인 정리의 성과로 「시조문학사전」과 「역대시조전서」가 출간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청구영언에서 역대시조전서까지의 업적을 개관해보면 시조의 경우에는 국문학 연구가 순조로운 발전을 해왔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청구영언을 비롯한 몇몇 시조집을 보면 삼국시대 작품으로 알려진 시조들이 몇 편 전하기는 하지만 후대의 모방작으로 봄이 옳겠다.
현재 남아있는 시조집에서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작가들을 들어보면 충숙왕 때의 우탁, 충혜왕 때의 이조년, 정도전, 변계량, 맹사성, 황 희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전부가 고려말 초의 유학의 중진대가였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당대의 쟁쟁한 성리학의 석학 師宗들로써 초기의 시조작가가 조직 망라되어 있다는 사실은 곧 시조가 형성되는 데 있어서 그 내용적인 형성 요건을 제시하는 데에 중대한 의의를 가졌음을 암시하여 주는 바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시조는 새로운 지도 이념으로서의 주자학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유학도들에 의하여 창조된 새로운 시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Ⅲ.結論-時調發生의 學說에 관한 나의 見解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희 고
내 음 둘 듸 업셔 냇 에 안 시니
저물도 니안  야 우러밤길 녜놋다.

아이들을 데리고 영월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이 시조가 떠 올랐고 단종의 애사에 대한 왕방연의 심정을 그렇듯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시조라는 형식의 시가가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고대시가의 종류 중 향가라든가 경기체가의 형식이 그 시절로 마감된 데 비하여 시조라는 형식의 문학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3434 3434 3543의 형식을 거의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요조의 노래가 오늘날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리듬감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정하게 반복되는 일정한 형식의 시조가 소멸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가장 큰 힘은 아마도 리듬감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시조에 대한 연구가 두드러지지 않고 과거의 연구논문들로 다시 답습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와 같이 된 이유중의 하나는 이미 발표되고 알려진 시조분야의 연구가 이미 거의 다 된 상태에 있어서 연구할 새로운 과제가 쉽사리 나타나지 않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런 걸 보면 시조는 자료가 일단 완결된 셈이다.
조동일 교수의 견해를 보면 국문학연구의 이상은 국문학 작품을 근거로 하고 한국철학의 전통을 밑천으로 하여 국문학자가 문학의 일반 이론과 한국문화연구의 기본이론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시조만큼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두드러지게 한국적인 문학은 없다고 본다. 그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그렇듯 다양한 주제와 소재들을 은근하게 표현한 문학은 없을 것이다.
시조창을 듣다보면 오랜 숨결이 보인다. 시조라는 형식이 발생되기까지 문학, 아니 글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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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사대부나 양반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시조라는 형식의 문학이 생성되면서 글을 짓는 일이 서
민들에게 허락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런 우리만의 것인 시조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다. 또한 시조에 대한 이론들이 보다 더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립될 수 있기를 바란다.
향가와 고려속요가 노래로 불려지듯 시조도 노래로 불려져 일상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기에 오늘날까지 그 이어지고 그 작자층의 다양함이 허락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北窓이  다커늘 雨裝업시 길을 난이
山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비로다
오늘은  비 마잣시니 녹아 갈까 ?殆융?

내가 외우고 있는 몇 안 되는 시조 중의 하나이다.
'백호'가 '寒雨'라는 기생에게 준 이 시조에 답한 한우의 화답시 또한 걸작이어서 이 한 쌍의 시를 나는 좋아한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도 얼어 잘이
원앙침 비취잠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비 마잣시니 녹아 잘까 하노라

이 두 사람의 화답시는 언제 읽어도 운치 있고 멋스럽다.
이처럼 기녀들의 시조는 훨씬 소박하고 진솔하며 오히려 더 고아한 기품까지 지니고 있던 것으로 느껴져 그네들의 생활을 짐작하게 해준다.
생활이 바뀌고 풍습이 바뀌어 지금은 편지도 아닌 전자mail 시대가 왔다.
어쩌면 이미 잊혀진 향가나 경기체가처럼 시조도 과거의 고전문학으로 밀리는 그런 순간이 생각보다 훨씬 더 일찍 오게 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대에 맞게 조금씩 변형된 사설시조와 엇시조처럼 현대시조가 그렇게 조금씩 변형되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미 발표된 시조에 대한 자료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이 있고 체계적인 우리 한국문학의 본류로서의 시조를 발굴하려는 학자들의 노력과 시조를 짓는 문인들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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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目:이 사회에서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할 세가지
-편견, 아집, 무관심에 대하여


Ⅰ.序論-편견, 아집 무관심의 개념 ....................1


Ⅱ.本論...............................................................2
1.편견의 예.................................................2
1)정신장애에 대한 편견 10가지
2)입양아에 대한 편견
2.아집-고집과 아집의 차이점.....................................5
3.무관심의 예..............................................6
1)환경보호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무관심
2)청년들의 정치무관심 증후

Ⅲ.結論-바람직한 사회를 위하여...........................7

Ⅳ.참고자료...........................................................9


Ⅰ.序論-편견, 아집 무관심의 개념
어떤 특정된 개인, 집단, 이데올로기, 제도 등에 대해 정확한 근거 없이 형성되는 고정적, 선인적 관념과 그것에 기초된 태도, 편견이 꼭 사회적 차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이 차별을 낳고 있다. 이러한 편견은 사회에서 학습되고 여러 계층으로 확산되어 나간다.
편견은 인간이 내집단성원이 외집단 성원보다 더 같다고 생각하고 외집단을 더 균일시하고 내집단을 편애하는 것에 기초한다.
태도가 고정관념(streotype)과 틀린 점은 고정관념이 개인이나 집단의 속성들에 대한 고정된 신념체계인 반면 태도는 감정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또 편견과 구별할 때는 태도와 고정관념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경험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면 편견은 경험이나 실제적 근거 없이 형성되는 관념이라고 볼 수 있다. 편견이 타인에게 차별적 요소를 주는 부정적 면이 있다면 고정관념은 그 자체로 차별적 요소를 지니지는 않는다. 상식의 이러한 일반적 편견은 집단적 편견과 결합하여 공동체의 왜곡된 변증의 일부 측면들을 설명한다. 집단적 편견의 경향은 어떤 결실 풍부한 이념을 차단하고, 타협에 의하여 다른 것들을 절단하는 것이다. 이제 결실 풍부한 이념들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그것들은 기술적이고 물질적인 진보로 나가거나 경제적 질서들을 조정하거나 정치적 구조를 변양시킬 수 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기술적이고 물질적인 개선들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제도들에서의 변화들보다는 지배적 집단들의 거부권을 적게 받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왜곡된 변증의 이차적 국면으로 이동해 나아갈 때, 물질적 상태를 반영하는 실패한 자들의 경제적 요구들은 물질적 복지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변화를 향한 요청이 고조될 때 그러한 변화는 단지 보다 체감적으로 이익을 갖는 목적들을 획득하기 위한 필연적인 수단들로서만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상식의 일반적 편견은 단순히 태만에 의한 누락인 동시에 또한 적극적인 거부라는 죄악을 가지고 있다. 상식의 흡족한 실천성은 재촉하는 갈망들과 위축시키는 공포들이 이념들의 실현을 필수 불가결하게 만들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갈망이나 공포가 수반되는 심적 보장을 갖지 않는 이념들에 대해서는 관심 둘 바 없다는 의견에로 쉽사리 왜곡된다. 장기적 관점, 보다 높은 통합, 논쟁되고 있는 이론적 논점은 실천적인 영역 외부로 밀려나간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이 가진 독특한 고집 또는 아집이 있다. 설령 자신의 주장이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신념을 여간해서 버리지 않는다.
우직한 고집은 곧 개성으로 연결되어 자존심으로 승화되어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러한 고집이 때로는 추잡한 아집으로 추락하여 흉한 몰골을 드러내 보이는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나 고집이 있는 사람과 아집이 있는 사람은 확연히 구분된다. 유익한 고집이 교언영색을 잘 하는 아집으로 연결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유연한 것 같은 아집은 우직하고 바보스러운 고집과는 달리 깊은 곳에서 '유아독존'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렬하게 꿈틀거리고 있다.
아집쟁이의 특성은 대개 자신의 실력으로는 출세가 힘들고 반면 출세욕은 클 때 전면에 부상한다. 실력이 없으니 잘난 남을 모함하고 짓밟아야만 출세가 가능하다. 아집쟁이는 온통 그러나 아주 조용히 더러운 흙탕물을 퉁기며 남의 시체를 '즈려밟고' 올라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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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無關心). 이기심 .교만이란 관심. 공평. 겸손과 대립되는 개념들이다 무관심(無關心).이기심. 교만은 인간의 성품과 속성 일수 없다. 우리들은 무관심(無關心).이기심. 교만이라는 말의 적당한 만족 속에 있다 .관심과 공평과 겸손이라는 인간의 성품을 가능한 한 무리 없이 왜곡시키면서 이에 상응하는 언어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즉 어떤 언어들도 상대적으로 대립적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고 자기에 편한 편의주의적 형태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Ⅱ.本論
1.편견의 예
1)정신장애에 대한 편견 10가지
우리는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여러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편견은 정신장애 자체의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정신장애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이다. 이러한 사회의 편견이 그들에겐 병으로 인한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이 된다. 우리가 믿고 있는 잘못된 인식들이 그들의 정신건강 회복에 지장을 준다면 우리는 먼저 그런 시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1. 위험하고 사고를 일으킨다
정신질환자는 '무섭다, 겁난다,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실제 피해를 경험해서가 아니다. 정신질환자를 접해 본적이 없는 사람일수록 두려움이 많고 위험하다고 느끼는데 이런 편견이 그들을 멀리하고 자신의 그릇된 생각을 바꿀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한다. 정신질환은 투약관리만 제대로 해도 거의 위험하지 않다. 정말 위험한 것은 우리의 편견이다.
2. 격리 수용해야 한다
'정신질환' 하면 쇠창살이 있는 수용소를 연상하기 쉽다. 그 곳에 격리 수용하는 것을 당연시했고 그래야 치료할 약도, 충분한 관리 인력도 없던 시절에 그나마 환자를 안전하고 손쉽게 관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곳에서 치료받더라도 장기간 격리하면 사회적응능력이 떨어져 결국 사회복귀가 어려워지므로 가급적 시설에 격리 수용하지 말고 개방적인 지역사회에서 치료·재활시키려는 것이다. 물론 증상이 심하면 가정에 있기보다 잠시 입원시킬 필요가 있긴 하지만 그러나 지나친 입원은 안 된다.
3. 낫지 않는 병이다
과거에는 정신질환에 걸리면 잘 낫지 않았기에 입원과 퇴원을 수없이 반복하고 굿도 해보고 좋다는 약 다 먹였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정신질환은 불치병이고 그 집은 패가망신한다고 했지만 오늘날 정신질환은 뇌질환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부작용이 적으면서 약효가 뛰어난 약물이 속속 개발되고 있어 치료하기가 수월해졌다. 아직까지 만성화되기 쉬운 병이라서 약물을 비교적 장기간 복용하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낫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4. 유전된다
유전이란 의학적으로 피해갈 수 없이 대대로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정신질환이 차라리 유전질환이라면 치료대책은 오히려 단순해진다. 또한 유전이라면 정신질환자는 아무래도 결혼이나 출산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지금쯤은 정신질환이 거의 없어져야 하는데 동서고금을 통해 유병률이 비슷하게 유지되는 것을 보면 유전으로만 볼 수 없다. 지금까지 정신질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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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색맹이나 혈우병처럼 명백히 유전으로 확인된 병은 없다. 다만, 다소의 유전적 경향성이 있다고 보는데 이것은 가족 중에 누가 정신질환을 앓게 되면 나머지 가족이나 자손도 이 병이 나타날 가능성이 다소 높아진다는 뜻이다.
5. 특별한 사람이 걸리는 병이다
흔히 정신질환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가족이나 주변에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라고 믿지만 열명 중 세명은 평생에 한번쯤 정신질환에 걸리고 미국·일본의 경우 연간 정신병 치료 유병율이 7∼10%나 된다. 그렇다면 결코 드문 병이 아니다. 실제 우리는 매일 이들을 만나며 살고 있는데 증상이 심하지 않으면 대부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가까운 사이조차 편견이 두려워 병을 숨기다 보니 그 사실을 알지 못할 뿐이다. 정신질환은 당뇨병이나 고혈압, 위장병처럼 비교적 흔한 병이다.
6. 이상한 행동만 한다
우리는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의 부적절한 행동을 볼 때가 있다. 그러나 모든 정신질환자가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며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환자라도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부적절한 행동은 불안할 때나 병이 심해졌을 때 잠깐 잠깐 나타나며 물론 치료가 시작되어 안정되면 부적절한 행동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일반인들도 당황하거나 긴장하게 되면 부적절한 행동을 보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우리는 환자의 모든 행동을 병적 증상으로 보지말고 환자가 실수를 해도 비웃지 않아야 한다.
7. 대인관계가 어렵다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은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소극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이 많다. 그러나 활발하고 쾌활한 성격을 지닌 사람도 정신질환에 걸린다. 또한, 환자들이 혼자 지내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병으로 인한 열등감·불안감 때문이며 실제는 만날 친구가 없어서이다. 흔히 오해하기를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어울려 지내기가 어렵고 혼자 지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로부터 빠져 나오기 위해 대인관계를 필사적으로 원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남과의 대화가 세상을 접하며 건강을 회복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8. 직장생활을 못한다
직장인들이 정신질환 병력을 가진 사람에 대해 우선 불안과 거부감을 느끼지만 정신장애 경험자도 보통사람과 같이 하는 모든 종류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이 직장생활을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정신질환을 극복하고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마저 사회적 편견 때문에 자신의 병력을 감추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이미 가지고 있던 기능이 상실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는 병 때문에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고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병이 회복되지 않는 것이다.
9. 운전·운동을 못한다
흔히 정신질환 병력을 가진 사람이 운전을 하게 되면 갑자기 무슨 사고라도 저지를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는데 이것은 편견이다. 운전이나 운동기능은 정신질환과 직접 상관이 없으며 정신질환 모두가 운동기능에 장애를 가져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급성 발병기나 상태가 악화된 경우 등 특수한 상황에서만 주의하고 제한되어야 할 것이다.
10. 나보다 열등한 사람이다
정신질환이 심할 때 일시적으로 어린아이처럼 퇴행된 행동을 보일 수 있는데 이러한 행동을 보고 '게으르다, 지능이 낮다, 매사에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성격이 나약하다, 의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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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다’고 하는 것은 환자를 낮추어 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러나 정신질환으로 지능이나 능력이 감소하지는 않는다.
2)입양아에 대한 편견
입양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하지만 막상 자신은 입양하지 않는 풍토에 대한 생각을 밝히라고 한 대학의 면접시험에서 "입양" 문제가 출제된 적이 있다.
입양문제는 곪을 대로 곪은 우리 사회 문제중 하나이다. 물론 "입양" 이란 "어려운" 화두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해외입양을 줄이고 국내입양을 늘려야한다" "이제 우리도 잘 살게 됐으니 우리 자식을 해외에 내다 파는 일은 없어야 한다" "고아수출국이란 오명은 벗어야 한다" 는 등등.
이 "좋은" 말에 누가 이견을 달까. 그러나 문제는 이론이 아니다. 실제로 입양문제를 풀기란 대학시험에 내야할 만큼 어렵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왜 우리에게는 입양이 그토록 어려울까.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입양을 원한다 해도 뜻을 관철하기란 쉽지 않다. 우선 이 "엉뚱한 생각" 을 한 사람에게는 원하지 않아도 각종 부정적인 자료가 주어진다. 주위의 사람들은 입양했다 잘못된 예를 어디서든 찾아내어 들려주고, "근본을 모른다" "머리 검은 짐승…" "더러운 피" 등 갖은 말로 심기를 흔들어 놓을 것이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입양하려면 일단 이사할 집을 봐둬야 한다. 입양 후 그냥 살게된다 해도 결국은 이사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관심이 지나쳐 무례한 사람들의 상처 입히는 날카로운 시선과 화살은 집요하다. 물론 이사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왜 부모를 하나도 안 닮았어요?""형제들이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입양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런 끈질긴 질문공세를 펴온다. 사춘기를 맞은 입양아에게는 상처 입히기 딱 좋은 상황이 펼쳐진다. 그래서 입양아를 키우려면 최소한 5번, 많으면 10번도 넘게 이사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오죽하면 입양하려면 이삿짐을 풀지 말랄까.
미국 신문 워싱턴 포스트는 한국아동을 입양한 미국가정이 한국인들의 질시로 곤욕을 치른다는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미국인 부모는 입양아에게 배려하는 마음에 한국인의 문화를 알려주려고 한국인 사회로 접근하지만 오히려 한국인들의 편견에 입양아나 양부모들이 함께 상처를 입는다는 말이다. 이를 재미교포들만의 무교양쯤으로 치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입양기관 한 관계자는 해외입양에 관해 우리는 "감정적" 이고 "비논리적" 이라고 지적했다. "이 땅에서 발생한 문제를 외국인에게 맡기는 셈"인 해외입양이 결코 좋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국내입양을 늘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는 것이다. 이런 편견이 입양아를 병들게 하고 있다.
해외입양을 치부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국내입양은 늘어나지 않는 현실. 사람들은 말한다. "정부는 무엇 하느냐?"그리고 아동보호시설, 고아원의 증설만을 강조한다. 물론 사회복지시설도 확충돼야 하지만 이미 사회시설의 한계는 드러나 있다. 그보다는 국내입양을 늘리려면 정책적인 배려, 현재 장애아를 입양하는 경우에만 주어지는 몇 가지 혜택을 일반 아동에게까지 늘리고 예를 들면 아파트 입주권이나 은행대출 등 보다 현실적인 문제로 도와줘야 한다는 말도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대부분 국내입양을 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황임을 볼 때 이는 대폭적인 복지혜택으로 돌아가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앞서 우리의 의식을 바꾸는 것, 그것이 입양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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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입양아들을 괴롭히는 교포들의 관심의 실체는 바로 "국민적 수치심" 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새로운 가정을 외국에서 찾아야 했던 입양아들의 절박함을 이들은 "외국인들에게 부끄럽다" 고 치부해 버린다.
"해외입양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결코 국내입양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입양기관에서는 입양준비는 바로 "태교" 라고 한다. 아이를 낳기전 태교가 필요하다면 이미 다른 경험을 가진 아이를 우리 가족으로 맞기 위해서는 몇 배의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내입양을 막는 문제는 또 있다. 최근 IMF이후 가난이나 깨어진 가정 때문에도 입양된 아동도 있지만 대부분 혼외출산으로 인한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더러운 피" 로 몰아붙이게 마련이다. "아이가 무슨 죄냐?" 는 말은 수긍해도 이를 출신성분으로 생각하는 의식이 남아 있다. 이런 피가 우리 가문에 들어온다는 것에 망설인다. 그리고 또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니 자라서 친부모를 찾아갈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국내입양은 모두 "비밀" 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낳은 부모에게도 비밀이어야 하고, 아이 자신에게도 비밀이어야함은 물론 주위에게도 모두 비밀유지가 선결조건이다. 그래서 갓난아이가 아니라면 아예 국내입양은 생각할 수도 없다. 혹시 "예쁜 여자아이" 라면 좀 나이가 들어도 국내입양이 가능할 지 모른다. 그러니 장애아의 국내입양은 거의 불가능하다.
2.아집-고집과 아집의 차이점
고집쟁이는 최소한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지 않는다. 구구절절 청산유수인 사람들의 말속에 진실이 은폐될 개연성은 훨씬 높다. 말을 잘한다는 평가는 그래서 진실의 유무를 먼저 집고 넘어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이라고 해도 진실을 변형시키고 왜곡시키면서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곤란하다. 우리사회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논리들이 잘 통하고 있다.
고집쟁이는 말은 유창하지는 못해도 순수한 구석이 있고 아집쟁이는 말이 천리를 가지만 순수함이 결여되는 악의 근원이 있다. 작게는 친구들간의 대화에서부터 크게는 정치마당도 아집쟁이가 고집쟁이를 능가하는 것은 예사이다.
고집과 아집은 유사한 것 같지만 절대 똑같지 않다. 고집이 주는 인상은 논리전개에서 보이지 않는 유격이 있지만 아집이 주는 인상은 자기만이 최고라는 주의로 가장 잘 보이는 유연한 테크닉이 발휘된다. 그리고 교묘히 주변 사람들을 옭아매며 곡예사처럼 자기만이 살겠다고 하는 줄타기를 자랑삼아 하곤 한다.
대개 큰 일을 일군 사람들은 우직한 고집쟁이들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유연한 척 하는 아집쟁이들이 온갖 시기와 질투를 퍼부어 대든 전혀 신경을 두지 않고 오직 자기 길만을 간다.
고집은 최소한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알지만 아집은 타인의 주장을 자기의 논리에 이리저리 꿰어 맞춰버리는 착각과 오류를 수시로 범한다. 고집은 상대의 예리한 말봉에 방패를 들이댈 수는 있어도 아집처럼 말봉을 아예 꺾어 버리지는 않는다. 고집은 주의주장은 명쾌하면서 최소한 관용과 인내를 한번쯤 돌아보는 여력이 있고 아집은 항상 배수진을 치며 이기주의의 구덩이에서 허우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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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쟁이가 많은 사회는 건전한 경쟁적 발전이 가능하지만 아집쟁이가 많은 사회는 모래알처럼 쪼개고 쪼개어져 말만 무성하고 알맹이 없는 껍데기 사회가 된다.
고집쟁이는 남의 이익이 적을 경우 남의 손해를 한번쯤은 집고 넘어가지만 아집쟁이는 남의 이익에 배가 아픈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남의 일을 철저히 방해한다. 그러면서 유창한 말솜씨로 항상 자기가 최고라고 주장하고 결정적으로 진실을 가리는 능수능란한 수법을 동원한다.
우리사회는 자존심이 있고 줏대가 있는 고집쟁이를 보호해야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앞에서는 간도 쓸개도 다 빼는 [척] 하며 뒷구멍에서는 온갖 협잡을 다 떠는 쓰레기 같은 부류들을 몰아내야 희망적이다.
진실을 그럴듯하게 은폐하는 아집쟁이들이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는 사회는 썩은 사회임이 분명하다. 우직한 고집쟁이들이 많은 사회는 희망적이고 발전적이다.
아집쟁이가 득실거리는 사회는 일하는 사람이 또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항상 희생타자가 되는 웃지 못할 현상들이 발생한다. 고집쟁이가 지배하는 사회는 노력한 만큼 대가를 청구할 수 있는 꼿꼿한 집단이 될 것이다.
노력하는 사람이 많아야 모두가 공영할 수 있다. 남을 짓밟고 노력은 뒷전에 있는 사람이 많으면 모두의 몰락을 재촉한다. 우직한 고집쟁이들이 사회 곳곳에 당당히 포진해 있을 때 교언영색하는 아집쟁이들이 발디딜 틈이 없다.
살인하고 도둑질한 사람도 나쁘지만 이처럼 교묘하게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마음을 품고서는 사람은 더욱 일고의 가치가 없는 시체 같은 부류들이다. 설사 주위의 사람이 그런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면 모든 사람이 동시에 족쇄를 차는 형국이다. 그런 사회는 모두 폭삭 망할 수밖에 없다. 나라도 분명히 망한다.
정도를 걷는 고집쟁이는 시련은 많으나 언젠가 반드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우직한 고집쟁이는 언제나 바보같이 희생만 당하는 것 같지만 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마라톤의 끝지점을 항상 놓치지 않고 주시한다.
3.무관심의 예
1)환경보호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무관심
언젠가 신문보도에 임진강 수계의 수질개선을 위해 96년 한시적으로 구성된 「임진강유역 정화대책본부」의 재편 문제를 놓고 환경부와 경기도가 대립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임진강 대책본부는 96년 8월 임진강과 한탄강의 물고기 떼죽음 사건 발생 이후 한시 기구로 발족, 폐수배출업소 지도단속과 수질관리 업무를 맡아왔으며 존속기한이 두 차례에 걸쳐 올해 말까지로 연장됐다."
"환경부는 임진강 대책본부를 직속 본부에서 한강유역 환경관리청 한강환경감시대로 다시 편성해야 한다는 주장한데 비해 경기도는 도(道)로 이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이 지역의 폐수관련 공장들을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환경부 지 맘대로 중기청의 요청을 받아 2년씩 연장하기를 무려 3차례나 하였다. 2년씩 연장할 때마다 그 규제 조건들이 완화되더니 심지어는 1997년에 연장할 때는 하루 50톤 이하의 폐수배출업소는 단속대상에서 제외된다고까지 고지하였다. 임진강유역의 폐수배출공장(가죽공장)들은 IMF라는 논리로 무기한 연장한 후 공청회도 안 거치고 주민들 몰래 결정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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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은 화학적 오염도가 너무 심해 회생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지 아무도 가늠하지 못한다. 20여년전 합수머리에서 어른 허벅지 만한 쏘가리가 잡히던 임진강은 이제 죽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임진강이 죽었다해도 임진강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우리들에게 그다지 큰 충격인 것 같지는 않다.
오늘 우리는 늘 그렇듯이 계속 무심하게 살다가 내일 또 그런 물고기 떼죽음 사태를 맞고 한동안 아우성을 치다가 그 물을 먹는 인근 주민들만 분통을 터뜨리다 말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모른 체 저지르고 있는 환경에 대한 무관심이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주변환경의 여러 문제들을 제기하고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이 환경운동가들이다. 내가 아니어도 된다는 의식은 더 이상은 안 된다.
방관과 침묵은 죄악이다. ‘나 아니어도 누군가 하지’는 이제 20세기에 흘려보내야 한다. 참여하고 실천하는 ‘작은 용기’를 지닌 자만이 21세기에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누릴 자격이 있다.
2)청년들의 정치무관심 증후
요새 젊은이들에게 정치인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물어보면, 현 대통령을 비롯하여 십여 년 전 대통령 선거에 출마,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서너 정치인들의 이름만 겨우 손꼽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정부의 고위직에 누가 있는지 그들이 과연 어떠한 일들을 전개해 나가는지에 대해서는 머뭇거리는 이들이 태반이라 한다. 심지어 자신의 선거권이 몇 연도에 유효하게 되는지 조차 모르는 이들조차 많다는 것이다. 젊은 층의 이같은 정치 무관심 현상은 매우 극심하다.
여론의 힘은 무시할 수 없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지난날 전직 대통령 구속사건과 그 외 비리 척결과정에 있어서 여론이란 힘은 더욱 건재함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었다. 때문에 조만간 지금의 젊은이들이 이 나라의 중역이 되는 그 때, 젊은 시절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가 힘들게 일구어 낸 '여론의 힘'을 훗날 유명무실케 하고 말 것이다.
보통 민주주의라 하는 말은 국민의 대의로 나라의 일에 좌우됨을 의미하지만 우리 한국의 현실은 결코 그렇지가 않은 듯하다. 지금까지 높은 지위와 권력, 경제력을 가진 소수의 생각과 주장 하나로 이 나라의 중대사가 좌지우지되었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이러한 때 과격한 데모 행위가 아니더라도 평화적인 방법, 우리의 옳은 뜻을 전달하고 실행시키기 위한 대응 방법들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여왔던 타협과 굴종도 아니요, 회피와 무관심도 아닐 것이다.

Ⅲ.結論-바람직한 사회를 위하여
우리는 위에서 편견과 아집, 무관심이 사람을 얼마나 황폐화시키고 사회를 황폐화시키는지 구체적인 예를 통하여 알아보았다. 장애인은 타고날 때부터 정해진 게 아니라 이 사회에서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으며-가령 교통사고나 비행기 선박사고, 기타화재사고로 인한 후천적 장애인을 생각해보자-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 역시 남의 일이 아니다.
입양에 대한 편견을 버린다면 우리는 불임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불임의 부부들이 아이를 갖기 위해 겪는 고통은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경비를 요하는 지는 겪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버려진 아이를 국외로 수출하지 않고 우리가 보듬어 키우려면 먼저 입양에 대한 우리의 편견, 혈연과 핏줄의 그 아집부터 고치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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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헐뜯고 자신을 좀먹는 아집을 버린다면 우리는 보다 더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사회에 대한 무관심, 정치에 대한 무관심,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곧 남이 나에 대한 무관심으로 온다는 것을 인식하고 환경에 대한 무관심이 우리의 후손에게 최악의 삶터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번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이 사회는 좀 더 바람직하고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출처 : 뇌졸중의재발방지
글쓴이 : 행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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