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후기 현대와 파편적 글쓰기 /윤호병

2008. 2. 28. 12:37살다보니 이런일이/시(詩)를 위하여

후기 현대와 파편적 글쓰기 /윤호병


1. 감성의 언어와 인식의 언어

시의 무용성에 대한 플라톤의 주장에 반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는 있었던 사실만을 말하지만 시는 있을 수 있는 사실까지도 말한다.”면서 시의 효용성을 강조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강조는 낭만주의 시대의 상상력으로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점은 콜리지의 상상력 옹호와 워즈워스의 “시는 자연발생적 감정의 발로다”라는 명제에 의해서 구체화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상상력’과 ‘자연발생적 감정’이다.

콜리지의 관심사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진다. 하나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상징과 알레고리의 문제이며 또 다른 하나는 창작심리, 즉 상상력과 공상의 문제이다. 아름다움을 “통일성 속의 다양성”으로 파악한 콜리지의 정의는 첫 번째 문제, 말하자면 보편성은 특수성 속에 존재하고 특수성은 보편성을 단순히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관계된다. 상징을 알레고리보다 우월한 개념으로 파악한 콜리지의 견해는 낭만주의 이래 적어도 데리다의 해체주의 이론이 등장하기 전까지 시학에서 확고부동하게 자리잡아왔다고 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상징은 다양하게 분산되어 있는 생각을 하나로 종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의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콜리지에게 있어서 상상력은 의지와 이해, 동질성과 이질성, 일반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아이디어와 이미지, 개별적인 것과 대표적인 것 등에 의해서 행위로 나타나게 되며,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을 조화롭게 하는 힘에 해당한다. 콜리지가 강조했던 이와 같은 상상력은 공상보다 우월한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 콜리지의 이러한 상상력 개념은 워즈워스의 ‘자연발생적 감정’에 관계된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감정은 상상력의 실제 바탕이 되며, 상상력은 자연을 총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고 시인의 경험을 질서화할 수 있는 능력에 해당하며 결과적으로 시의 유기체론을 가능하게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전주의의 모방의 시학에서 워즈워스와 콜리지로 대표되는 낭만주의의 표현주의 시학으로 변화되는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모방대상과 시/시인과의 관계가 시/시인과 독자와의 관계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을 우리는 워즈워스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사람에게 말하는 사람이다. 더 많은 감성, 더 많은 열성과 이해심을 지니고 있는 시인은 보통 사람들보다 사람의 본성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지식과 사려 깊은 영혼을 지니고 있다.”

낭만주의에서 비롯된 표현주의 시학과 시와 독자와의 관계는 언어학에 근거하는 구조주의 시학이 출현하기 전까지 시학에서 하나의 성역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을 선도했던 비평은 물론 신비평이다. 그러나 로만 야콥슨을 중심으로 하는 언어학과 문학의 조응 그리고 프랑스 구조주의의 영향과 후기―산업시대로 접어들면서 글쓰기의 양상은 사뭇 반―글쓰기 혹은 파편적 글쓰기의 양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야콥슨은 자신의 「은유의 축과 환유의 축」에서 심리언어학과 문학비평의 관계를 전반적으로 조망하였으며, 그 결과 그는 화술행위에 영향을 끼치는 두뇌의 혼란, 즉 ‘실어증’의 유형을 개관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낭만주의에서는 은유가, 리얼리즘에서는 환유가 우세하게 작용하였다는 점을 들어 은유의 그늘에 가려진 환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리얼리즘의 언어와 산문의 언어를 강조하는 그의 이러한 입장은 결과적으로 문학비평과 언어학과 심리학이 상호 작용하는 ‘환유의 이론’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이론은 야콥슨이 자신의 「언어학과 시학」에서 강조했던 ‘언어의 여섯 가지 요인과 기능’ 및 “시는 언어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옮기는 것이다.”라는 명제와 더불어 프랑스 구조주의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야콥슨이 레비―스트로스가 함께 집필한 「보들레르의 ‘고양이’ 분석」은 언어학을 바탕으로 하는 구조주의에 의해서 시의 구조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전형으로 작용해왔지만, 마이클 리파테르가 「시의 구조 설명」에서 제안한 두 가지 명제에 해당하는 독자반응의 중요성과 독서과정, 자크 데리다의 해체비평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으로 인해서 글쓰기와 글 읽기는 점점 더 다양화되고 파편화되는 양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왜냐하면 구조주의에서는 ‘모든 문학작품에는 구조가 있으며 그 구조를 구체화할 수 있다’라는 명제에 충실한 반면, 후기구조주의에서는 ‘모든 문학작품에는 구조가 있지만 그 구조를 찾아가기까지의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리파테르는 ‘일반 독자’, ‘해박한 독자’, ‘만능독자’ 중에서 만능독자를 강조하였고, 데리다는 ‘아포리아’를 강조하였다. 데리다가 강조하는 아포리아의 의미는 ‘길은 길이지만 지나갈 수 없는 길’을 의미하며 그것은 진리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무수한 방법의 분산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합 핫산이 󰡔이론, 문화, 사회󰡕(1985)에서 맨 처음 제안하였고 데이빗 하베이가 󰡔후기현대의 조건󰡕(1989)에서 상세하게 논의한 바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모더니즘과 구별되는 서른두 가지 항목 중에서 파편적 글쓰기에 해당하는 항목은 ‘쓸 수는 있지만 읽을 수 없는 텍스트’(scriptible text)―이 용어는 롤랑 바르트가 발자크의 소설 󰡔S/Z󰡕를 분석했을 때에 사용하였다―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에 후기현대에서의 파편적 글쓰기를 만능독자, 아포리아, 쓸 수는 있지만 읽을 수는 없는 텍스트로 집약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오늘날의 글쓰기는 감성으로서의 언어에서 인식으로서의 언어로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구심력으로서의 글쓰기와 원심력으로서의 글쓰기

시에 있어서 구심력으로서의 언어는 체제 안정적이고 비유 중심적이며 현실 중심적인 언어이다. 체제 안정적이라는 말은 기존의 규범과 제약으로부터의 과감한 탈출을 시도하기보다는 시적 대상에 대한 표현의 다양성을 시도하는 것에 관계되고, 비유 중심적이라는 말은 그 동안 우월한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던 은유, 상징 등과 같은 비유법을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글쓰기에 관계되며, 현실 중심적이라는 말은 ‘나’와 ‘너’의 차별성보다는 동질성을 추구하면서 부단하게 중심을 향해 수렴되고자 하는 행위에 관계된다. 이와 같은 구심력으로서의 언어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를 포함하여 수성에서부터 명왕성까지의 행성이 일정궤도를 유지하면서 회전하는 태양계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김영랑의 “오메! 단풍들것네!”와 박목월의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같은 사투리, 서정주의 “애비는 종이었다/…어매는 달을 두고”같은 호칭법, 김수영의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같은 비속어 등에서 구심력으로서의 글쓰기에 나타나는 이탈을 찾아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중심회귀로서의 언어 활용이지 중심이탈로서의 언어 활용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중심이탈로서의 언어 활용의 예로는 반복구절과 숫자와 도식을 활용한 이상의 경우이고 후자는 시적 대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모색한 김춘수의 경우이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철(鐵)―이것은 내 새 길의 암시요 앞으로 제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겠지만 호령하여도 에코가 없는 무인지경은 딱하다”라고 절규한 이상의 이 말에서 중요한 부분은 ‘제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새 길’, 즉 ‘나만의 길’을 가겠다는 선언이다. 이러한 선언을 우리는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끝맺는 김종삼 시 「원정(園丁)」의 마지막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에서 ‘당신 아닌 사람’은 바로 체제 안정적이고 비유 중심적이며 현실 중심적인 언어에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김소월의 “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따다/가실 길에 뿌리오리다.”의 ‘식물로서의 꽃’과 한용운의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띠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러갔습니다”의 ‘광물로서의 꽃’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있어서 김춘수의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의 ‘인식으로서의 꽃’은 분명히 하나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충격을 우리들은 서구문학의 경우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월러스 스티븐스 등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들의 작품세계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주의 등에서 부단하면서도 새롭게 그 의미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까닭은 그들이 바로 읽기―중심의 시가 아닌 쓰기―중심의 시, 곧 파편적 글쓰기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시인도 구름의 왕자와 같아서/폭풍우를 다스리고 사수(射手)를 비롯되지만/야유 소리 들끓는 지상으로 추방되니/거대한 그 날개는/오히려 걷기에 거추장스러울 뿐”이라고 끝맺는 보들레르 시 「신천옹(信天翁)」이나 자신의 󰡔지옥의 계절󰡕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 랭보의 언급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 글에서 필자가 강조하는 파편적 글쓰기는 탈―중심적인 글쓰기, 체제―이탈적인 글쓰기, 비―순응적인 글쓰기이자 탈―영토화의 글쓰기라고 잠정적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출발하지 않는다. 내 악으로 점철된 이곳의 길을 다시 가자. 철들 무렵부터 내 곁의 고통의 뿌리를 내린 악, 하늘에 올라가 나를 때리고 나를 뒤엎고 나를 끌고 가는 악. 마지막 순진성과 마지막 법, 그것은 이미 말했다. 세상에 내 기분 나쁨과 내 반역을 가지고 가지 않는 것. 가자! 행진, 부담, 사막, 권태와 분노. 누구에게 나를 빌려줄까? 어떤 짐승을 성찬(聖餐)해야만 하는가? 어떤 성스러운 영상을 사람들은 공격하는가? 어떤 가슴을 나는 깨뜨릴 것인가? 어떤 거짓말을 고집해야만 하는가? 어떤 혈기로 걸어가야만 하는가? 오히려 정의를 조심할 것, 힘들 생활과 단순한 어리석음, 메마른 주먹으로 관 뚜껑을 들고 앉아 숨을 끊는다. 그렇게 되면 늙는다는 것도 위험스러운 것도 없다. 공포는 프랑스적인 것이 아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이와 같은 글쓰기의 비전에 대한 확신에 의해서 보들레르는 자신의 시를 조롱하는 파리시민들을 「신천옹(信天翁)」에서 질타하고 있으며 랭보는 모든 기성세대에 대한 철저한 거부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를 그림의 경우에서 찾아본다면 “내 그림이 팔리지 않는 것은 나는 참을 수 없지만, 내 그림이 그림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 때가 오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는 반 고흐의 절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집ㆍ반 고흐󰡕(문학과 비평사, 1987)에는 한국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로 이승훈의 「고호의 방」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무 말도 없는

방이 나를 섬뜩하게 한다

아무 말도 없는

방이 나를 섬뜩하게 한다

아무 소리도 없는

방이 나를 섬뜩하게 한다

…중략…

아무 것도 아닌 세월들이

나를 섬뜩하게 한다

아무 뜻도 없는

네가 나를 섬뜩하게 한다

―이승훈의 「고호의 방」 부분




후기현대와 파편적 글쓰기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그림과 시의 관계를 언급하는 까닭은 바로 그 자체가 파편적 글쓰기에 해당하기도 하고 상호텍스트성에 관계되기도 한다고 필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탈―영토화 개념은 데리다의 해체개념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데리다는 자신의 해체주의의 발원이 되는 그라마톨로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기술학(記述學): 문자에 대한, 알파벳, 음절화, 읽기 및 기술에 대한 연구. 내가 파악하기로는 또 우리 시대에 있어서 겔브가 현대과학의 연구 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기술의 연구: 기술학의 바탕」(1952)―1963년도 파에서는 부제(副題)가 삭제되었다―에서 이 말을 사용했을 뿐이다. 체계적이고 또 간략화된 분류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성경 필사본의 단일 기원설이나 다원 발생설에 대한 상반되는 가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기술에 대한 전통적인 모델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대상에 대한 단순한 해체가 아니라 해체―재구성에 해당하며, 그것은 들뢰즈의 탈―영토화 혹은 재―영토화에 접맥되어 있다. 말하자면 현 상황을 전반적으로 붕괴시켜 유사한 요소끼리 재결합하여 또 다른 의미의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 들뢰즈의 영토화 작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데리다가 서구인식론 전반에 대한 해체를 언어에 근거하여 진행하였다면, 들뢰즈는 서구사회의 지배논리를 정치ㆍ사회적으로 재구성하여 새로운 영역으로서의 영토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해체이든 영토화이든 간에 그것은 분산과 파편을 거쳐 또 다른 의미의 주도권의 장악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해롤드 블룸의 ‘시의 역사는 오독(誤讀)의 역사이다’라는 명제와 ‘수정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적 영향―그것은 강력하고 권위 있는 두 시인에 관계될 때 선배시인의 시에 대한 오독, 다시 말하면 사실상 필수적으로 잘못된 해석인 창조적 수정주의에 의해서 언제나 계속되어 왔다. 문예부흥이래 서구시의 중요 전통을 말하게 되는 실속 있는 시적 영향의 역사는 불안 및 자구책에서 비롯되는 풍자의 역사, 왜곡의 역사, 그것 없이는 그러한 근대시가 존재할 수 없었던 예상 밖의 의도적인 수정주의의 역사이다.” 블룸의 이러한 견해가 재―영토화 과정의 일환으로 파악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말하는 강한 시인은 수정주의는 ① 궤도이탈:시적 기만행위, ② 깨진 조각:성취와 대조, ③ 자기비하:반복과 단절, ④ 악령화:반―장엄화, ⑤ 금욕적 고행:정화론과 유아―독존론, ⑥ 환생:죽은 자의 회귀를 거쳐서 또 다른 의미의 강한 시인으로 탄생하는 반면, 약한 시인은 강한 시인의 주변만을 맴돌 뿐이기 때문이다. 블룸은 서구 시에서 이와 같은 여섯 단계를 거치면서 새로운 강한 시인이 출현하기까지 250년이 걸린다고 파악하였다. 그의 이러한 파악은 앞에서 언급한 해체와 탈―영토화의 개념에 접맥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쓴다는 것, 파편적으로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을 필자는 ① 반―유기적 형식의 글쓰기이자 ② 정의가 유보된 글쓰기라고 파악하고자 한다. 반―유기적 글쓰기는 통일성의 해체, 다시 말하면 콜리지가 그렇게도 강조했고 신비평에서 시 읽기의 기본원리로 인식했던 시의 유기체론에 대한 반전 혹은 뒤집기라고 볼 수 있다. 기승전결, 긴장과 이완, 비유와 상징처럼 ‘잘 빚은 항아리’로서의 일련의 글쓰기에 대한 전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예를 우리는 장정일 시 「길안에서 택시 잡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길안에 갔다.

길안은 시골이다.

길안에 저녁이 가까워 왔다.라고

나는 썼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서두를 새로 시작해야 했던가?

타자지를 새로 끼우고, 다시 생각을

정리한다. 나는 쓴다.




이 인용문에서 실제 시에 해당하는 부분은 “길안에 갔다./길안은 시골이다./길안에 저녁이 가까워 왔다”까지 이며 그것은「길안에서 택시 잡기」의 ‘매트릭스’(모체)이다. 나머지 부분은 글쓰기에 대한 설명부분이다. 그리고 뒤이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길안에 갔다.

길안은 아름다운 시골이다.

그런 길안에 저녁이 가까워 왔다.

별이 뜬다.

이렇게 쓰고, 더 쓰기를

멈춘다.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나는 끼워진 종이를 빼어,

구겨버린다.




위의 시에서 최초의 부분은 “길안에 갔다./길안은 아름다운 시골이다./그런 길안에 저녁이 가까워 왔다./별이 뜬다.”로 전환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의 기본은 앞에서 언급한 ‘모체’(매트릭스)에 있으며 글쓰기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까닭은 버려지는 종이와 새로 끼우는 종이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버려지는 종이의 의미이다. 바바라 존슨은 글쓰기에 있어서 버려지는 순백의 종이를 여성의 처녀성으로, 그 위에 글쓰기를 하는 펜을 남성성의 특징으로 파악한 바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위의 시에 나타나는 파편적인 글쓰기는 남성성의 하나의 특징이 된다. 남성성의 특징은 물론 폭력성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분열증, 자기혐오증, 탈―신비화, 탈―중심화, 새로운 영역을 위한 재―영토화 등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 모든 특징으로서의 남성적인 글쓰기를 우리는 말라르메 시 「주사의 던지기」나 「목신의 오후」 등에서 파악할 수도 있다. 전자는 오만한 문자에 대한 가차 없는 질타에 관계되고 후자는 자기도취적인 목신으로 대표되는 남성성에 조롱에 관계된다. 이승훈 시 「답장」의 마지막 부분 “‘계속 쓴다는/것은 우리 인생에 의미가 없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고/방랑이고’(아무튼 시작도 끝도 없지요)”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글쓰기’에는 그것이 파편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암시되어 있기도 하고 정의가 유도된 글쓰기에 관계되기도 한다.

정의의 유보―그것은 이미 데리다가 제창하였으며 가야트리 시피박이 구체적으로 설명한 바와 같이 ‘기호는 잘못 명명된 것이다’라는 명제와 ‘기호…잘못 명명된…’이라는 명제는 다른 것이다. 전자가 명확성, 결정성, 중심성, 수렴성, 구심력 등을 바탕으로 한다면, 후자는 불명확성, 미결정성, 탈―중심성, 분산성, 원심력 등을 바탕으로 한다. 나아가 전자가 일상적이며 상식적인 글쓰기에 관계된다면, 후자는 비―일상적이고 비―상식적인 글쓰기에 관계된다. 위의 두 명제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주격 조사 ‘는’과 계사 ‘이다’이며, 이 두 가지가 생략되었을 때 ‘기호’와 ‘잘못 명명된’의 관계는 언제나 부적절한 등식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구심력으로서의 글쓰기가 아닌 원심력으로서의 글쓰기, 곧 파편적 글쓰기로 나아가게 된다. 정의가 유보된 이러한 파편적인 글쓰기는 이승훈의 「준이와 나」 같은 사진 시나 「뒤샹의 샘」 같은 설치물 시, 황지우의 「‘일출’이라는 한자를 찬, 찬, 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같은 도형 시 및 고원의 일련의 구체시로 귀결된다. 한글 자음 ‘ㅁ’을 기본축으로 하는 고원의 구체시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아래의 인용 시에서 네 모서리의 ‘ㅁ’은 물론 ‘미음’이지만 ‘잘못 발음하거나 잘못 듣게 되면’ 그것이 ‘미움’으로 되기도 하고 모음 ‘ㅜ’는 그것을 보는 위치에 따라서 ‘ㅜ’가 되기도 하고 ‘ㅏ’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시는 전체적으로 ‘ㅁ’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ㅁㅜㅜㅜㅜㅜㅁ

ㅜ ㅜ

ㅜ ㅜ

ㅜ ㅜ

ㅜ ㅜ

ㅁㅜㅜㅜㅜㅜㅁ


― 「미음 속의 미음 또는 나와 우리」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제 글쓰기는 구심력에서 원심력으로의 글쓰기는 개성―지향적인 경향을 지니게 되며 그것은 몰―개성주의에서 탈―개성주의를 지향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시인 자신만의 개성지향주의를 표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언어중심주의와 반―언어중심주의

‘시는 언어를 매개로 한다.’라는 명제가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후기현대로 들어서면서 이제 시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언어를 매개로 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진, 설치물, 도형, 만화 등이 시의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체시의 경우처럼 언어를 매개로 하면서도 의사소통중심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의미의 암시나 상황의 제시를 위한 매트릭스로 언어를 활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글쓰기에서의 반―언어중심주의는 언어에 대한 자각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것을 김경린은 「현대시의 구상성」(1948. 4)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현대시인들은 언어의 시각적, 취각적, 음향적, 색채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예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언어와 언어와의 새로운 결합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수정막적 효과는 현대시가 쌓아올린 화려한 피라밋이 아닐 수 없다…우리들은 새로운 시적 사고를 표현하기 위하여, 하나의 현실을 과학적인 면에서 정확한 속도로 채택되어야 하며, 그 현실은 현실과의 새로운 결합에서 신선한 회화적인 이매지네이션으로서 구성되어야 한다.” 김경린의 이러한 파악이 언어와 시의 이미지의 관계를 강조하였다면, 시와 한국어에 대한 송욱의 다음과 같은 파악은 시어의 정확성을 강조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한국어는 나의 또 하나 다른 육체이다. 나는 이 육체로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웃고 울려고 한다. 나의 모국어는 나의 법신(法身)이다. 한국어는 나의 조국이다.” 40년대와 50년대 시인들의 언어/한국어에 대한 이와 같은 자각은 60년대 시인들에 의해서 구체화되며 이들은 언어에 대한 지성적인 성찰과 내면의식의 표출을 강조함으로서 사물을 언어화하고 언어화된 사물을 다시 인간화시키든가 비―인간화시키게 된다. 전자에 대해서 정현종은 「말의 형량」에서 “말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 말의 사랑을 모든 자의 무신적 폭력, 가엾음, 분노, 분노의 바였음, 말이 머리 둘 곳 없으매 시대가 머리 둘 곳 없다”면서 언어와 인간행위를 일치를 강조하였으며, 후자의 경우는 이승훈 시 「사물 A」에서 구체화되어 있다.




사나이의 팔이 달아나고 한 마리 흰 닭이 구 구 구 잃어버린 목을 좇아 달린다. 오 나를 부르는 깊은 명령의 겨울 지하실에선 더욱 진지하기 위하여 등불을 켜 놓고 우린 생각의 따스한 닭들을 키운다. 닭들을 키운다. 새벽마다 쓰라리게 정신의 땅을 판다. 그리고 그것은 하아얀 액체로 변하더니 이윽고 목이 없는 한 마리 흰 닭이 되어 저렇게 많은 아침 햇빛 속에 뒤우뚱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 이승훈, 「사물 A」 전문




‘달아나는 사나이의 팔’과 ‘목이 없는 닭’의 섬뜩한 이미지의 분산은 이 시가 발표되었던 그 당시나 지금이나 하나의 충격에 해당한다. 그것이 충격인 까닭은 ‘나를 부르는 깊은 명령’은 완료된 행위가 아니라 ‘달아나다’에 의해서 여전히 위압적이고 강요적이면서도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목이 없는 닭’은 시인의 사유행위, 말하자면 ‘생각의 따스한 닭들’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시인으로 하여금 ‘정신의 땅’을 밤새워 파게하고 모든 사유가 완료된 시점에 해당하는 ‘시간의 사슬이 끊어진 새벽 문지방’에 ‘소리’로 환생되어 시인의 의식을 일깨우게 된다. 여기서 ‘문지방’은 하나의 경계, ‘혼돈의 사유’와 ‘질서의 사유’의 경계에 해당하며 그 문지방을 넘으면서 어둠은 밝음으로, 다시 말하면 “하아얀 액체”로 비유된 “아침 햇빛”으로 전환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료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목이 없는 닭’으로 비유되는 시인의 사유행위는 “뛰기 시작한다.”의 마지막 구절처럼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은 ‘시간’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전통은 바로 전통 자체에 반대되는 전통일 뿐이다’라는 점을 강조했던 옥타비오 파스는 ‘시간’의 흐름은 전진과 정지라는 모순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 즉 순간순간의 정지를 바탕으로 하여 시간은 전진할 수밖에 없다고 파악하였다. 완료되지 않은 진행으로서의 행위는 ‘시간’과 언어의 반―언어적인 활용, 다시 말하면 의미의 수렴보다는 분산을, 결정보다는 미결정을, 중심지향보다는 탈―중심지향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글에서 논의하고 있는 후기현대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볼 수 있다. 모더니즘이 구심력을 주축으로 하는 엘리트의식과 권위와 선별성을 바탕으로 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원심력을 주축으로 하는 탈―권위와 차별성을 바탕으로 한다. 원심력을 지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언어를 찰스 스콧은 다음과 같이 파악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언어는 그 형성과정에서 주관적인 아이디어에 대한 통제력이 없는 제한적이면서도 복잡한 일시적인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언어관의 출현에서…변화는 주관적인 통제를 파괴하게 되었고 대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역사는 ‘주관성’이 어떤 의미를 지니든 간에 이제 주관성에 대한 서술이 아니다. 질서 있는 현대사상의 발전 덕분으로 지속성이나 의미 중에서 그 어느 것도 과거에 발생한 사건 및 그것과 다른 사건과의 수많은 관계와 상관성에 대한 읽기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




과거의 언어와 현재의 언어, 현재의 언어와 미래의 언어를 연결짓는 시간의 전진이 시간의 정지를 바탕으로 하여 전진하듯이 포스트모더니즘도 모더니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파악한 휴 J. 실버먼은 “포스트모더니즘은 오히려 모더니스트의 근본적인 경해와 활동을 확장하고자 하며 이러한 요소를 용의주도하게 개괄하고자 한다.”라고 정의하였다. 모더니즘의 연장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앞에서 설명한 파스의 시간개념처럼 ‘변화’라는 축을 근간으로 하여 변화해 가는 진행의 과정에 관계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마샬 버먼은 「모더니즘은 왜 아직도 문제인가?」에서 “그 자체를 포스트모던이라고 지칭하는 최근의 운동이 모더니즘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과 곤란한 점을 극복하기보다는…모더니즘을 재규정하게 되었다.”라고 파악하였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에 대한 파스의 견해는 다시 실버먼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재―확인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동질성이나 통일성이 없이도 모더니즘을 확정짓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조각조각 분산되어 있고 불연속적이고 다면적이고 확산적이다. 모더니즘이 전통과 일단 단절되고 나면 중심적이고 집중적이고 연속적인 것을 주장하는 반면, 포스트모더니즘 궁극적으로 번성하고자 하는 모더니즘의 이상을 탈―이상화하고 규제하고 단정시키고 산산 조각낸다. 그러나 이러한 자체경계 설정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20세기 초에 있었던 대등한 입장에서 철학적 실천은 고유한 자체구역을 위한 영역을 재―확인하고 재―구성한 후에 설정한 것이었다. 형이상학의 목적과 사고의 수단을 결정짓는 것은 또는 모더니즘을 종결짓기 위한 골격이 된다.




모더니즘이 새로운 사고, 최첨단 의식, 자유로운 자유정신, 지성적 비판정신 등을 바탕으로 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모든 점을 통합하면서도 글쓰기의 주관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 때의 글쓰기는 물론 이 글에서 파악하고 있는 파편적인 글쓰기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 파편적 글쓰기는 도널드 커스피스가 문화적 장치로서 강조했던 ‘상호주관성’에 관계되기도 하고 할 포스터가 강조했던 문학의 대중성과 보편성에 관계되기도 한다. 커스피스가 강조하는 상호주관성은 모더니즘에서는 거부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수용하였으며, 포스터의 대중성과 보편성 개념 역시 모더니즘에서는 거부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수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에서 ‘파편적 글쓰기’에서는 상호주관성을 인정하면서 언어의 동질성보다는 언어의 차별성을, 언어중심의 사유행위보다는 반―언어중심의 사유행위를 강조하게 된다.

파편적 글쓰기와 상호주관성의 관계는 불변의 축으로서의 전통(정지로서의 시간)과 변화의 축으로서의 현대(진행으로서의 시간)의 관계에 대한 옥타비오 파스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들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순간의 전통을 거부하고 또 차이 나는 전통을 제안한다면 현대성은 그러한 것을 적용할 수도 있다. 새 것과 똑같은 모순 세력에 의해서 신성시되는 가장 오래 된 것―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다. 모순에 대한 우리들의 열정은 가장 오래된 것을 되살려 내고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그것을 우리 시대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현대 예술과 문학은 바로 그 오래된 것과 먼 거리에 있는 것을 지속적으로 발견함으로써 형성되어 왔다.


이렇게 볼 때에 포스트모더니즘 시대(후기현대)의 파편적 글쓰기는 과거 지향적이라기보다는 과거적인 것을 새롭게 변화시켜 활용하는 글쓰기이자 기존의 여러 가지 방법들, 말하자면 의사소통으로서의 방법들을 서로 접목시키는 글쓰기라고 볼 수 있으며, 그러한 글쓰기는 유기적 통일성보다는 비―유기적 분산을 강조하게 된다.




4. 후기산업화와 파편적 글쓰기

이상에서 살펴본 바를 바탕으로 하여 이 글의 주제에 해당하는 ‘후기산업화와 파편적 글쓰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은 글쓰기에 있어서 감성의 언어에서 인식의 언어로 전화되었음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시가 언어를 매개체로 하기는 하지만, 그 언어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비유―중심의 글쓰기보다는 언어―중심의 글쓰기 혹은 시는 느낌으로 쓰인다는 사실에서 시는 지성으로 쓰인다는 사실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낭만주의이래 적어도 구조주의 이전까지 불변의 진리로 작용해 왔던 시의 유기체론 혹은 통일성에서 시의 비―유기체론 혹은 분산성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향의 길잡이 역할은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 기호학, 해체론, 포스트모더니즘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구심력―지향의 글쓰기에서 원심력―지향의 글쓰기로 나아가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전자가 리리시즘 중심의 글쓰기라면 후자는 모더니즘 중심의 글쓰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어느 한 쪽의 우월성이나 열등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향성이 다르다는 점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서정성을 강조하는 글쓰기에서는 기승전결, 통일성, 긴장과 이완, 의미의 집중, 비유의 합리성과 참신성 등으로 나아가게 되지만 현대성을 강조하는 글쓰기에서는 이 모든 요소들에 대한 집중보다는 반―집중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대상보다는 비―대상을, 정의의 확정보다는 정의의 유보를 강조하게 된다. 그 결과 현대성을 강조하는 글쓰기에서는 대상에 대한 설명보다는 대상 자체를 강조하게 되며 그러한 예를 우리는 “어서 사물이 되시오! 오늘도 서러운 말을 먹고사는 이 문학이라는 애처로운 놈 앞에서! 우린 실어증에 걸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물의 편에 서십시오”라고 끝맺는 이승훈 시 「사물의 편에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에 의해서 대상을 파악하기보다는 대상에 의해서 언어를 파악하는 일에 관계되면 이 때의 언어는 다분히 인간―중심적인 영역에 해당한다. 따라서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중심주의로부터 사물중심의 반―언어중심주의를 강조하게 된다.

반―언어중심주의의 기본 매트릭스는 ‘쓸 수는 있지만 읽을 수 없는 텍스트’에 있다. 이 명제에서는 가능성으로서의 쓰기와 읽기를 강조하게 되며 그것은 후기현대사회의 글쓰기의 파편성에 관계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제 글쓰기는 다양화되어 있으며 분산화되어 있다. 다양하다는 것은 글쓰기가 곧 문자중심이거나 언어중심이 아니라는 점에 관계되고 분산적이라는 것은 중심으로부터의 이탈에 관계된다. 이러한 점은 보들레르―랭보―말라르메, T. E. 흄―에즈라 파운드―H. D.,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월러스 스티븐스―알렌 긴스버그 등의 글쓰기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윤호병|문학평론가․추계예대 교수


출처 : 월간 한비문학
글쓴이 : 麗傘김광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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