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과 당골의 차이

2007. 8. 17. 17:40아름다운 세상(펌)/고운글(펌)

 

우리시대 재인의 계보학②





박정진 / 세계일보 문화부장·문화인류학


세습무와 재인


김택규는 한반도의 문화영역을 논하면서 단오권과 추석권, 추석·단오 복합권을 주장한 바 있다(김택규,「한국 농경세시의 연구」, 영남대 출판부, 1982, pp. 445∼470. 그림 1참조)

이들 문화권은 대체로 고대문화로 볼 때 부여·고구려(단오), 마한·백제(추석), 진·변한·신라(추석·단오 복합권)에 속한다. 연희의 특징은 도당굿-입체적·동적(단오), 당산굿-평면적·장적(추석), 별신굿-평면적·동적(복합권)으로 보았으며 주요 예능으로 산대(단오), 판소리(추석), 들놀음(복합권)으로 보았다.(표1 참조)

단오권은 대체로 태백산맥에서 속리산을 잇는 소백산맥과 남한강의 흐름을 따라 동서로 그을 수 있는 선의 이북이다.

추석권은 남한강 이남, 속리산 가야산제, 지리산제를 거쳐 남행 하는 소백산맥 이서의 한반도 남서북이다. 추석·단오 복합권은 두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의 동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김택규,「한국 농경세시의 연구」,영남대 출판부, 1982, pp. 445∼470).

한편 무당의 종류는 크게 강신무(降神巫)와 세습무(世襲巫)가 있는데, 대체로 지금의 북한 지역(함경도·평안도·황해도)과 한강 이북의 강원도가 강신무 지역이고 한강 이남의 경기도·경상도·전라도 지방과 태백산맥 동쪽의 동해안 일대의 무당들은 모두가 세습무이다. 그러나 제주도 지역에만 세습무와 강신무가 공존하고 있다(김인의,「한국무속사상연구」,집문당, 1987, pp.197∼198).

동해안 지방과 영호남 지방의 세습무가 모두 여성이고 제주도는 남녀가 공존한다. 호남 지방에서는 세습무를 '당골'이라 부르고 영동 지방에서는 '무당', '무당각시'라고 부른다. 대개 무당의 남편들인 악사를 호남 지방에서는 '고인', 영동지방에서는 '앵중', '화랭이', 한강 이남 경기 지역에서는 '화랭이', '산'이라 부른다.

무당의 가계는 부자 관계로 세습되고 무당의 자격은 고부간의 학습에 의해 세습된다. 즉 무당의 딸은 무당의 아들에게 시집가서 시어머니로부터 학습 받아 무당 일을 세습한다.

 

그림 1 : 한국기층문화영역도(가설)

 

표 1 : 한국기층문화영역과 문화요소(연구과제)

우리나라 전통 민속 예술의 본원지로서 세습무를 연구하고자 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세습무가 일차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그 가운데서도 재인의 빈도가 높은 호남 지방의 「당골」에 주목하고자 한다.

강신무는 신내림에 의해 무당이 되기 때문에 종교적 성격이 강하다. 물론 무병(巫病)에 걸린 사람이 신어머니(神母)의 내림굿과 무업(巫業) 교육에 의해 한 사람의 무당으로 탄생하지만 예능적 훈련이 세습무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세습무는 세대를 걸친 훈련에 의해 '신바람'이나 '신올림'에 의해 무업을 계승하기 때문에 예능에 대한 전문 직업적 훈련이 강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러한 기반 위에서 무업이 도시화·산업화·근대화의 문맹에 의해 밀려나면서 무(巫), 굿판이 갖고 있던 종합 예술적 성격이 각종 예능으로 분화되어 적응하는 과정에서 세습무가 전통민속예술의 원천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택규도 언급했지만 마한·백제문화권, 즉 호남문화권은 「당골」 지역으로 굿이 무가 중심인 때 비해 경상도 「무당」의 굿은 연극적(종합적) 형식이 강하다. 또한 「당골」은 주로 청각적인데 비해 「무당」은 시각적 특성을 보인다(최길성, 「한국 무속론」, 형설출판사, 1981, p.136).

무속 이외에 다른 민속과 특성을 보아도 경상도 지방에는 비교적 가면극이나 무동이 전승되고-하회가면, 동래야유, 수영야유, 통영·고성오광대, 진주검무들-이에 비해 전라도 지역에선 판소리가 발생한 점이 두드러진다(최길성, 「한국 무속론」, 형설출판사,1981, p.136).

특히 전라도 지역의 판소리 발생은 굿으로부터 판소리의 분화·독립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지역의 세습무가 거의 사라지는 것과 관련이 없을까.

최길성은 '동해안의 세습무는 아직도 비교적 전통적인 모습을 많이 전승하고 있으나 전라도 지방의 세습무들은 거의 사라져 갔다'고 밝히고 있다(최길성, 「한국 무속론」, 형설출판사, 1981, p.22).

서울 굿이 신탁이 중심인데 비해서 전라도 굿은 무가가 중심이 되고 경상도 굿이 가무가 중심이 된 점도 특징으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전라도 지방이 판소리라는 창극이 중심인데 비해 경상도 지방이 오광대·수영야유·가면극 등이 정착해 온 것과 대조를 이루는 것에도 유사하다. 즉 전라도가 노래라면 경상도는 춤으로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최길성, 「한국 무속론」, 형설출판사, 1981, p. 151).

전라도 당골 지역에서 판소리의 발생은 전통적인 굿판을 세습 무가에서 전문예능 집단으로 변천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굿의 3요소인 무가(巫歌)와 무무(巫舞), 무악(巫樂)은 노래와 춤, 국악 연주로 그대로 발전한다.

다시 말하면 판소리는 굿판이라는 특별한 일을 일상적 예능으로 전환시키면서 전반적으로 추석권의 예능을 노래 중심으로 변모시키면서 예능의 특성을 청각적·평면적으로 만들어갔다.

호남 지방 이외에도 세습무가 많은데 왜 하필이면 이 지역이 민속가무가 성행하고 재인의 분포에서 압도적일까 ? 여기엔 농업 곡창지역으로서의 생산기반과 아전(衙典) 계급의 후원자 역할 또는 지주계급과의 중개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예로부터 중앙(한양)에서 지방관리로 부임할 때 선비사회에 '경상도 유림(儒林) 조심하고 전라도 아전(衙典) 조심하고 충청도 전관(前官) 조심하고 평안도 기생(妓生) 조심하고 함경도 변방 장수(將帥)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

이만큼 전라도 아전은 지역적 특색을 요약한 계급이다. 세습무 집단에서는 무계(巫系)가 아니면서 굿판(어정판)을 잘 아는 사람을 가르켜 비가비(非可非·非甲以)라 하는데 판소리 이론가 신재효(申在孝)도 비가비였다.

여기서 한가지 언급하고 넘어갈 것은 한국사회의 전통적 계급의식의 문제이다. 과연 한국의 계급의식이 서구의 것만큼 확실하고 엄격한 것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한국 전통사회의 경우 계급 이동의 기회는 비교적 많은 편이었고 오히려 양반이 천민으로 전락하거나 중인이 양반이 되고 양반이 중인이 되고 천민이 양반, 중인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것은 한국의 계급이 매우 상황적(contextual)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민(民)의 계급적 의미에도 적용된다. 양반이나 중인, 천민의 결정은 하나의 텍스트(text)에 의해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호남 지역의 아전은 중인의 신분이지만 토호세력과 유착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계급이다.

서울에서 내려온 중앙의 관리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떠돌이인 반면 이들은 붙박이로서 실질적으로 지방 행정을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판소리에 관한 최고(最古) 문헌은 조선조 영조 30년 유진한(柳振漢)의 「만화집(晩華集)」의 '춘향가'를 넘지 못하지만 판소리가 재인 광대들이 벌이는 '판놀음'에서 여러 놀음 틈에 끼여 '한 놀이'로 구성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큰 마을 굿에서는 흔히 창우(倡優)의 판놀음이 딸렸고 이 중 소리광대가 벌이는 놀음이 판소리였던 바 판놀음이 마을 굿에서 떨어져 따로 벌이는 놀음이 되면서 판소리가 발전했을 것으로 본다. 판소리는 이어 민중의 판놀음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방안놀음으로 끼이면서 더욱 복합적인 모습으로 발전한다.

판소리 명창들의 출신지는 남한강 이남, 소백산맥 이서로 이 지방의 향토 음악이 육자배기 토리나 시나위 토리가 주가 되는 것으로 보아 판소리의 토대가 되는 것은 계면조를 비롯한 패개성 음으로 된 가조에 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 장단이었던 것 같다(한국정신문화 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991, p.353).

무의식(巫儀式둔) 때의 무가(어정)는 바로 사설만 정리하면 판소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조 때 민간에서 즐길 수 있는 음악이란 바로 무악(巫樂)이었고 판소리의 가락도 그 당시의 무가의 좋은 점을 따왔을 것이다(진봉규, 「판소리」, 수서원, 1988, p.30). 춘향가의 경우도 춘향 굿이 인기를 더하자 무가에서 광대들이 판소리화 한 것으로 생각된다(진봉규, 「판소리」, 수서원, 1988, p.32).

판소리는 대체로 17세기말에서 18세기초(숙종·영조)에 이르는 동안 광대들에 의해 구전되어 하한담(河漢譚)과 결성(結成) 최선달(崔先達) 등의 선구자에 의해 개척된 독연형태의 극예술이다(이두현, '한국연극사', 「한국문화사 대계」4권, 1965, p.958). 이것은 다시 18세기 중엽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에 의하면 열두 마당의 고정된 레퍼토리를 갖는다. 다시 정조(正祖) 때 권삼득(權三得: 1771∼1841년)이 소리의 '제(制)'를 순화한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송염모(高宋廉牟: 공주의 고봉관(高奉寬), 운봉의 송흥록(宋興祿), 여주의 염계달(廉季達), 죽산의 모흥갑(牟興甲)의 4대 명창과 해미(海美)의 방만춘(方萬春)같은 명창들이 순조·헌종·철종 때에 뒤를 이어 나타나 완전한 짜임새를 가진 '노래'와 '아니리', '율문'과 '산문'으로 교착된 독특한 극시로 완성시켰다. 그 후 신재효(申在孝: 1812∼1884년)가 판소리 여섯 마당(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적벽가·횡부가)의 극본을 재정리했다. 마침내 신재효의 횡부가(橫負歌: 일명 가루지기타령)를 제외한 다섯 마당이 판소리의 고전이 되었다.(이두현, '한국연극사', 「한국문화사 대계」4권, 1965, p.959).

전남 고창 출생의 신재효는 이방·호장을 지냈다. 그는 1876년(고종 13년)에 기전삼남(幾甸三南)의 한재민(旱災民)을 구제한 공으로 정3품 통정대부가 되고 후에 호조참판으로 동지중추부사를 겸하였지만 아전 신분이 그 바탕이었다.

그는 자신의 넉넉한 재력을 이용해 판소리 광대의 생활을 돌보아 주면서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동편제와 서편제의 장점을 살려 판소리의 듣는 측면을 강조했으며 진채선(陳彩仙) 등의 여자 광대를 길러 여자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광대가'를 지어 판소리 이론을 수립, '인물·사설·득음·너름새'라는 4대 법례를 마련하였다.

신재효는 특히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벽가·적벽가·변강쇠가 등 판소리 여섯 마당의 사설을 아전취향으로 개작, 상층 취향의 전아(典雅)하고 수식적인 문투와 남녀 관계의 비속한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리는 등 상하의 관심을 아우르면서 신분을 넘어선 민족문학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991, pp. 916∼917).

그러나 신재효 이후 이동백, 송만갑, 정응민 등을 비롯한 명창들에게 주어지는 관작(품계)은 국창의 경우 임금 앞 당상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따른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편이 옳다. 평소에 벼슬 행세는 못하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볼 때 판소리는 굿에서 독립한 놀음이며 음악도 시나위라는 무악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단지 사설이 차용되고 있다. 무경(巫經·巫本) 대신에…….

굿은 당골무당(여자)의 가무와 악사들(친인척)의 연주로 구성되는데 반해 판소리는 초기에 남자소리꾼에 의해 이끌어진 점이 특이하다. 그럼에도 이들 소리꾼들의 거의 대부분이 세습 당골 출신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메커니즘을 추측케 한다. 즉 세습 당골의 남자가 사회변천과 더불어 신분상승을 꾀하기 위해 소리꾼으로 변신하였으며 이러한 이탈과 더불어 당골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실지로 소리꾼들은 성공만 하면 양반들과 사귀면서 은근히 양반행세를 하기도 했다.

당골에서 남자들의 이탈은 후에 여창 판소리의 길이 열림과 동시에 여자들의 이탈로 이어져 점차 호남지역의 세습 당골은 크게 판소리꾼으로 직업적 전환(신분상승)을 꾀하게 된다.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의 집안에서 여자는 대를 물려서 굿(巫業)을 하고 남자는 조무(助巫런)와 악공 노릇을 하며 재능에 따라서 광대나 재인 노릇을 하였다. 판소리와 더불어 최상의 자격자는 가객이 되고 성악의 소질이 없으면 악사가 되고 그도 안되면 땅재주 재인이 되었으며 그도 저도 할 수 없으면 방석 화랭이가 되었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991, pp.383∼384).

김동욱은 판소리의 역사에 대해 제1기(형성기)는 판소리가 판놀음에 끼어 존재한 때, 제2기(전성기)는 열두 마당이 형성되고 신재효가 새롭게 정리한 때, 제3기(쇠잔기)는 일제 이후로 보았다(김동욱. 「한국가요의 연구」, 을유문화사. 1961). 판소리는 민속예능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양반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놀음이라고 여겨진다. 실지로 재인 세계에서는 소리꾼이 가장 대접을 받은 게 사실이다.

이들 재인들은 당골 집안에서 일종의 가정교육으로 길러지기도 했지만 교방이나 기방에서 그리고 재인청에서 조직적으로 길러지기도 했다. 재인청은 광대청·장악청·신청(神聽)·풍류방·공인청이라 하기도 했다. 이들은 말하자면 선비들과 같이 중앙과 지방에서 교육(학습) 기관을 통해 길러졌다. 이중 신청은 가장 주목되는데 마치 서원처럼 사설 교육기관으로 무당의 자녀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쳤고 삼현육각-젓대·피리·해금·장구·북-을 가르치는 한편 친목활동도 도모했다.

이들 예능인 세계에선 첫째가 소리였으며 그 계통에선 소리꾼이 양반인 셈이다.

당골 출신의 남자가 판소리꾼으로 전향하면서 계급상승과 사회변화에 적응하는데 반해 여자들은 당골 계급 내혼(endogamy)을 벗어나기 위해 기생으로 출신 하는 경향이 많았다.

일제 때 광주 권번, 남원 권번 소속 기생 중 무당집 출신이 많았으며 목포 권번에서는 '옛날에는 기생이 사령의 집에서 생기지만 지금은 원칙적으로 무가에서 생긴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아키바(秋葉隆), 아카마스(赤松智城) 공저, 「조선 무속의 연구」, 1938, pp. 259∼260).

이 같은 사실은 무당 은어와 기생 은어가 매우 일치하는 것이 많았음에도 알 수 있다(이종석, '기생방 은어', 「신동아」22호, 동아일보사, 1966, p. 293). 무당들은 무당으로 인정되는 사람을 '동관내'라고 하여 비가비에게는 절대로 은어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골 출신 여자의 기생 전출을 뒷받침한다(최길성, 「한국 무속론」, 형설출판사, 1981, p. 97).

전라도 지역의 판소리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가정해 볼 수 있다.

첫째 판소리는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무적(巫的) 문화의 문적(文的) 문화화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굿이 갖고 있는 문무(文武) 두 가지 속성 가운데 놀이적 속성보다는 풀이적 속성이 강화되고 풀이가 종국에는 놀이의 중심이 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역사적으로 종교적 무사(武士)의 속성을 가진 화랑도가 후대에 가면 점차 문사(文士)의 속성을 가지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판소리는 사회적으로 철저히 신분차별을 받던 세습 당골들의 굿이라는 종합예술에서 '소리'를 분리, 독립시켜 독특한 예술장르로 만듦으로써 전문예능인(직업인)이 됨과 아울러 사회적 신분상승을 꾀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중개(징검다리) 역할을 한 계급은 아전계급(중인계급)이라는 사실이다.

아전계급은 양반과 상민의 중간 계급적 성격으로 '소리'의 필수요소인 양반관료 및 지주계급과 이들 재인 집단을 연결시키고 때로는 후견인 역할을 함으로써 직업적 보장을 했다는 점이다.

셋째 전라도 지역이 곡창지역으로 농업 문화적 배경이 풍부하여 이들 전문예능인을 키울 만한 경제적 여건을 들 수 있다. 이들 예인들은 당시로써는 생산집단이라고 볼 수 없으며 결국 이들의 생활을 이 지역이 보장했다는 점이다. 세습 당골들은 이제 더 이상 굿을 하지 않고도 먹고살게 되었으며 이는 이 지역 세습무가 다른 지역보다 더 격감해 거의 멸실 되어 가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세습무가는 소리꾼을 배출하는 것을 마치 양반 집에서 과거 급제자를 내는 것과 같이 취급했다. 소위 학습도 양반들이 서원에서 전문교육을 받듯이 신청에서 소리를 배웠다. 소리학습을 위해 독공(獨功)은 흔한 예이다. 문화의 상부 구조는 신체나 사회, 심리의 그것과 일치되는 경향을 보인다.

세습 당골 출신들이 직업전향으로 예능계를 택하는 것은 굿판 자체가 종합 예술적 성격을 가져 예술에 대한 기본인식과 소질을 체득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 문화의 원형이 굿(ritual)인 점을 감안하면 문화의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이 만나는 것은 결국 예술적인 형태로 남기 때문에 보다 전문화된 산업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예능종목을 전략적으로 택하는 것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인류문명사로 볼 때 무교(주술)는 고대나 선사시대에 예술적 외형이 크게 클로즈업된 문화의 원형이며 문화가 보다 발전하여 종교나 과학이 등장함으로써 문명의 외형은 '종교→과학'으로 중심 이동을 하자 예술은 독립적인 장르로 되어간다. 바로 이러한 문명사의 과정에서 세습무들은 고등 종교나 과학자가 되기보다 예술가의 길을 택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예술은 이들에게 낯설지 않은 종목이다.

조사대상이 된 재인 1백 명에 대한 통계를 보자.

우선 재기별로 보면 판소리가 17명, 판소리 외(민요·잡가·가곡·시조·독경·범패) 17명, 춤 20명, 기악 24명, 연희(야유·사당패·창극·재주) 10명, 무(巫) 12명(이 중 강신무 4명) 등으로 나타났다.

표 2: 우리시대 재인과 문화권

 

 


 

그런데 이들 재인 중 세습무가 출신은 55명(55%)으로 반수를 넘었다. 이들을 종목별로 보면 판소리는 17명중 14명(82%)으로 세습무가 출신 비율이 가장 높았다. 판소리 다음으로 세습무가 출신들이 선호하는 종목은 기악으로 24명중 18명(75%), 춤은 20명 중 8명(40%)이었다.

세습무가 출신으로 무업을 계속한 재인은 12명 중 6명(50%)의 수준이었으며 연희가 10명 중 4명(40%), 판소리는 17명중 3명(18%)으로 가장 낮은 비율을 보였다.

이 같은 통계를 보면 세습무가 출신들이 가장 선호하는 종목은 판소리이며 그 다음이 기악, 춤의 순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흔히 '방안학습(소리)이 안되면 마루학습(기악), 마루학습이 안되면 마당학습(춤·재주)을 가르친다'는 세습무가들의 소리에 대한 선호를 입증하는 결과였다.

소리 다음으로 기악, 그 다음으로 춤이 세습무 출신에 의해 보충되고 있었는데 이들 종목의 비율도 만만치 않았다. 이것은 비교적 계급 터부에서 가장 일찍 풀렸다는 의미와 함께 오늘날 놀이문화의 중심 축이 노래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이러한 판소리와 관련된 문제들을 이번 조사대상이 된 재인들을 통해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자. 이들 재인들을 문화권별로 보면 추석문화권 72명, 추석·단오 복합권 14명, 단오문화권 14명으로 나타났다. 추석문화권이 72%로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

추석·단오 복합권 출신들은 춤이 5명, 연희 2명, 무(巫) 3명, 판소리 2명, 기악 2명으로 소리(2명)보다 놀이(10명)가 압도적이었다. 단오문화권도 판소리 이외가 4명, 기악 1명, 무(巫) 4명, 춤 3명, 연희 2명 등으로 소리(4명)보다 놀이(9명)가 지배적이다.(단오문화권은 주로 북한 지역이기 때문에 재인의 선택에서 제한 받을 수밖에 없다)

추석문화권은 판소리 15명, 판소리 이외가 13명, 기악 21명, 춤 12명, 무(巫) 5명, 연희 6명 등으로 소리 (28명)가 놀이 (23명)보다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상은 우리가 앞에서 제시한 문화권별 예능의 특징을 그대로 입증하고 있다.

추석·단오 복합권과 단오권은 '놀이', 추석권은 '소리(풀이)'라는 특징을 읽을 수 있다.

'표 2'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판소리·세습무 출신=추석권의 커넥션(連繼)이다. 판소리꾼은 대부분 세습무 출신이고 이들은 또한 추석문화권에 속한다. 무업을 계속하는 재인은 상대적으로 단오권이나 복합권에 많이 존재한다. 결국 추석권의 호남 세습 당골은 대개 판소리꾼으로 전향했다는 주장이 성립된다.

유명 재인 가계


이번 조사대상이 된 재인 1백 명 중 36명(36%)이 2대 이상 활동하고 있었다. 심지어 직계 및 방계, 친인척을 포함하여 4∼5대에 걸쳐 재인 가계를 형성한 사실도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전남 진도의 남해안 세습 당골 박병천(朴秉千)·김대례(金大禮)가와 경북 동해안의 김석출(金石出)·송동숙(宋東淑)·신석남(申石男)을 들 수 있다. 이들 남해안 및 동해안 세습무가는 부계로 이어지는데 이에 못지 않게 내륙지방인 전남 승주군 주암면 봉암리의 박덕삼(朴德三)가도 이름난 세습 당골이었다. 박씨의 부인 배씨는 '봉암 지무(知舞)'로 호남에서 이름난 당골이었다. 호남의 3대 무당은 배씨와 함께 전남 곡성군 입면 양천리 '악내당골'(정창석(鄭昌碩)의 어머니)과 '샘쟁이 당골'이 유명했다는 사실을 이번 조사에서 밝혀냈다.

박씨 세습 당골은 딸만 9형제 낳았는데 이들이 재인 가계를 이룬다.

박씨 가계는 딸뿐이므로 여계(女系)에서 많은 재인을 배출했다. 박초선(朴初仙)·박초월(朴初月)·조통달(趙通達)·서용석(徐龍錫)이 그들이다.

이들 박병천, 김석출, 박덕삼가는 상세한 계보 분석을 통해 재인 가계임을 밝히고자 한다. 이밖에도 경남 진양의 남사당패 박계순(朴季順)가, 전남 보성의 판소리 명창 정회천(鄭會泉)가, 경기 도당굿의 김숙자(金淑子)가, 또 남창가곡의 이동규(李東奎)가를 정악부문에서 들 수 있다. 설 장구의 전사섭(全四燮)가도 빼놓을 수 없다.

박병천가(진도씻김굿·중요무형문화재 72호)

진도 세습당골은 박·함·노·채·최·이·김씨 등 일곱 성씨가 있다.

박씨 가문은 진도에서 3백년 가량 대물림해왔는데 이제 박씨의 대에서 이을 사람이 없다. 박씨의 아들 환영(桓永)은 대금주자(국립국악원), 딸 미옥(美玉)은 창(唱), 윤정(允晶)은 설 장구 등 모두 소리와 기악으로 진출했다.

 

〈朴秉千·金大禮家 系譜〉

박씨의 처인 비가비 정숙자(鄭淑子)씨는 물론 무무(巫舞)로 유명하고 박씨의 부모 범준(凡俊)-김소심(金小心) 부부도 이름난 당골이었다. 박씨의 증조부 종기(種基)씨는 대금의 대가였으며 진도씻김굿 기능보유자 김대례(金大禮)씨는 종기씨의 외손녀이다. 박병천의 여동생 박옥진(朴玉鎭)은 김씨와 결혼해 국악인 김성녀(金星女), 김성애, 김성아를 낳는다.

김대례가(진도씻김굿)

김대례는 진도 세습무가 중 수장격인 박종기(朴種基)의 외손녀이다. 박종기의 셋째 딸 박소심(朴小心)이 어머니다. 김씨의 시할아버지(한씨)-시할머니(성씨 모름). 시아버지(한성윤)-시어머니(김씨)도 세습 당골이다. 말하자면 외가·시가·친가(?)가 모두 세습장골인 셈이다.

김석출가(동해안 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 82호)

 

〈金石出·申石男·宋東淑家 系譜〉

김씨의 세습무는 할아버지 김천득(金千得)가의 할머니 이옥분(李玉粉)과 결혼함으로써 비롯된다.

김씨의 큰아버지 김범수(金範守)-큰어머니 김운화(金雲花) 부부, 그리고 사촌과 당질 중에서 무업을 계승한 사람만도 사촌형 해초(海草)-사촌형수 김후화(金後花) 부부, 당질녀 해중월(海中月), 조희(朝憙), 사촌형 용출(龍出)-사촌형수 신석남(申石南) 부부, 당질인 명대(明大)씨가 무업에 종사하고 있다. 사촌여동생 송례 (宋禮)씨도 마찬가지다.

김씨의 부친 성수(成守)-친모 이선옥(李仙玉) 부부, 계모 한봉필(韓奉必)씨도 이름난 세습무. 형 호출(好出)씨(작고)-형수 김채봉(金菜鳳) 부부도 세습무였으며 조카며느리 신길자(申吉子)씨, 조카 업용(業用), 용택(龍澤)-김영숙(金英淑) 부부도 세습무에 종사하고 있다.

김씨의 첫 부인 변난호(邊蘭湖)씨, 장인 장모도 세습무. 김씨의 현부인 김유선(金有善)씨도 비가비였으나 함께 어정판에 서고 있다.

김씨의 딸 영희(映熙)-제갈태오(諸葛泰梧) 부부, 동연(東衍), 동언(東彦)-김동열(金東烈) 부부, 동율(東律)씨도 같이 종사하고 있다.

김씨의 동생 재출(載出)-김채난(金蔡蘭)부부, 조카 정희(正熙), 정국(正國)씨, 질녀 정숙(正淑)씨도 무업을 계승하고 있다.

김씨의 숙부 김영수(金永守)-숙모 이영파(李英波)도 세습무이다.

송동숙가(동해안 세습무)

송씨는 증조부 일명 송화랑(宋花朗)대부터 4대째 세습무를 이어오고 있다.

증조부 대근(大根), 대봉(大鳳), 조부 학봉(學奉), 그리고 큰아버지 일선(一善), 아버지 도선(道善), 작은아버지 기성(基成)씨가 무업에 종사하고 있다.

 

송씨의 할머니 이씨, 어머니 박악이(朴岳伊)씨도 큰무당이었으며 어머니는 개가하여 제갈성도(諸葛聖道: 세습무)를 맞아들였다.

송씨는 광복 후 첫 부인인 변연호(變蓮湖)와 갈라서고 변씨 부인 소생의 딸 명희(明姬)씨는 김장길(金長吉)과 결혼, 영해 및 신굿의 일인자가 되어가고 있다.

한편 송씨의 첫 부인 변난호(變蘭湖)의 동생으로 김씨와 송씨는 동서간이다.

신석남가(동해안 세습무)

신씨는 할머니(성씨 모름)대부터 부당을 시작했으며 할머니가 어정판에서 데리고 다니다 며느리 삼은 어머니 이씨의 소생.

신씨의 남편은 김용출(金龍出)씨로 동해안 최고무당 김천득(金千得)씨의 장남인 김범수(金範守)씨의 둘째 아들이다. 신씨는 또 동해안 별신굿의 김석출(金石出)씨의 사촌형수이다. 김석출씨는 첫 부인 변난호(變蘭湖)씨의 외할머니가 신씨의 첫 어머니가 된다.(신씨의 아버지는 세 번이나 결혼했다) 또 신씨의 두 번째 어머니 이씨는 동해안 세습무 송동숙(宋東淑)씨와 사돈간이며 송씨는 다시 김석출씨와 사돈간이 된다.

신씨의 시어머니 김운화(金雲花)와 시숙모 이영파(李英波)씨와 함께 굿을 했다.

신씨의 2남 명철(明哲)-빈순애(賓順愛) 부부, 4남 명대(明大)-이순덕(李順德) 부부가 세습을 잇고 있다.

신씨의 조카며느리 김영숙(金英淑)씨와 신씨의 남동생 신동해(申東海)씨가 무업에 종사하고 있다.

 

박덕삼가(세습당골)

전남 승주군 주안면 봉암리의 세습 당골인 박씨가는 부인 배씨와 함께 '봉안 지무'로 크게 알려진 집안, 그러나 박씨가는 딸만 9형제를 낳아 당골 세습이 끊긴다. 그러나 박씨 가계는 재인들을 배출한다.

맏딸 박초선(朴初仙)은 일제 때 명창이었으며 셋째 딸 박초월(朴初月)이 동편제 명창이었으며 일곱째 딸 박옥주(朴玉珠)도 창을 했다.

박씨의 넷째 딸 박점례(朴點禮)는 당골을 이었는데 여기서 강산제 명창 조통달(趙通達)과 대금명인 서용석(徐龍錫)이 배출됐다.

 

〈朴德三·朴初月·趙通達·徐龍錫家〉


서용석가(대금)

전남 곡성 출신인 서씨는 고조 때까지 유명한 당골 집안이었으며 명창 박초월(朴初月)씨(83년 작고)가 친이모였으며 외할아버지 박덕삼(朴德三)씨도 당골이었다.

서씨의 어머니 박점례(朴點禮)씨도 국악에 소질이 컸다.

서씨의 장남 영호(永浩)씨가 아쟁, 셋째 아들 영훈(永勳)씨가 되어 막내 영민(永珉)씨가 해금, 부인 최선옥(崔仙玉)씨가 창, 그리고 세 며느리가 모두 국악인이다.

 

〈徐龍錫 대금 계보〉

조통달가(판소리)

조씨는 외가의 재능을 물려받았다. 전남 승주군 주암면 봉암리의 외할머니 배씨-외할아버지 박덕삼(朴德三: 별명 박도구대)은 유명한 세습 당골로, 이들의 딸 9형제 중 큰 이모 박초선(朴初仙)은 일제 때 여류 명창이었고 셋째 이모가 박초월(朴初月), 일곱째 이모도 창을 조씨와 함께 배웠다. 조씨의 생모 박점례(朴點禮)씨는 조씨를 낳아 일점 혈육 없던 박초월에게 위탁했다

아쟁의 명인 서용석씨는 모계로 보면 조씨의 친형이 된다. 조씨는 재인의 핏줄을 타고났으면서도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철저하게 예능훈련을 거쳤다.

 

〈趙通達 명창 계보〉

정회천가(판소리 보성재·전북대 국악과 교수)

정씨는 4대째 재인 가문을 이끌어 오고 있다. 정씨 문중에 소리판을 연 사람은 종증조부인 정재근(鄭在根)씨로 박유전제(制) 명창이었다.

증조부 재옥(在玉)씨는 피리, 정씨가 고수, 부인 안희정(安姬貞)씨도 가야금산조(전주도립국악원 교수), 동생 희완(會浣)씨도 대금(전남도립국악원), 회안씨의 부인 최미애(崔美愛)씨도 한국무용, 막내 회석(會石)씨도 판소리(국립국악원), 회석씨의 부인 정수년씨도 해금(KBS 국악관현악단)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판소리 부문에서 중요한 특징은 보성제의 성립이다.

판소리는 원래 호남지역 섬진강을 경계로 남원·구례·고부 등에서 부른 소리를 동편제(東便制)-강동쪽이라 하여 붙인 이름-라 하고 광주·나주·보성·장흥을 서편제(西便制)-강 서쪽이라 하여 붙인 이름-라 했다.

한편 금수(錦水·錦江) 이북 충청도의 강경·청주·서천 등지의 소리를 중고제(中古制)라 했다. 이밖에도 서편제의 일분파로 강산제(江山制)가 있었다.

강산제는 서편제의 소리를 연 박유전(朴裕全)이 구한말 대원군으로부터 '네가 천하제일 강산(江山)'이라 칭송을 받은 것에 비롯된다. 박유전은 전남 보성군 강산면(江山面) 출신으로 이를 따서 그의 아호도 강산(江山)이라 이름한데서 박유전계를 강산제라 한다.

보성제는 강산제에서 다시 갈라진 맥인데 정재근(鄭在根)이 박유전으로부터 소리를 배우고 그의 아들 정응민(鄭應珉)이 전북 부안의 김찬업을 만나면서 태동된다. 김찬업은 김세종(金世種)-순창 출신의 동편제의 대가-의 당대 동편소리를 물려받은 명창이다. 따라서 보성제는 서편제, 강산제에 이어 동편제를 받아 잡종강세한 신종(新種) 소리제이다.

보성제는 정응민→정권진(鄭權鎭)→정회천(鄭會泉)·회완(會浣)·회석(會石) 등 정씨 일가를 통해 확립되어 가고 있다.

보성제를 굳혀주고 있는 명창들은 성우향(成又香), 조상현(趙相賢), 성창순(成昌順), 조통달(趙通達)씨를 들 수 있다.

 

〈鄭會泉家〉

박종선가(민속악)

박씨는 세습 당골 출신으로 백부 박동실(朴東實)이 판소리 명창이었으며 백부의 큰딸 수길(작고)씨가 역시 명창이었다.

박씨의 아버지도 판소리에 능했다. 박씨의 외할아버지 공창식(孔昌植)씨는 희대의 명창으로 임방울의 스승이었으며 명창 공거님씨도 사촌지간이다.

병신춤으로 유명한 공옥진(孔玉振)씨의 아버지 공대일(孔大一)씨는 공창식씨와 사촌지간이다.

유명한 춤꾼 한진옥(韓振玉)씨가 박씨의 고모부다.

박씨의 아들 기영(起永)씨와 큰딸 희정(熺貞)씨가 아쟁으로 민속악의 대를 잇고 있다.

 

〈朴種善·孔玉振家〉

박계순가(남사당)

박씨 가계는 남사당패로 구성돼 있다.

이 분야 중흥조인 남운룡(南雲龍·본명 형우(亨祐))씨가 남편이며 장남 남기환(南基煥, 52세, 준인간문화재), 차남 기문(基文), 3남 기선(基善, 32세, 이수생), 친정동생 박용태(朴龍泰, 54세, 이수자)씨가 남사당패에서 한데 어우러지고 있다.

또 박씨은 손자인 남동현(南東鉉, 19세, 기환씨의 아들) 손녀 남현경(南鉉景, 10세, 기문씨의 딸) 이질 조카 이동훈(李東勳, 19세) 친정조카 박준섭(朴俊燮, 19세, 이봉태씨의 아들)씨가 무동에서 사물, 소고까지를 맡고 있다.

 

〈朴季順 남사당 계보〉

김숙자가(도살풀이)

경기도 도당굿의 도살풀이의 김씨는 조부 김석창(金碩昌)씨가 경제(京制) 판소리 명창이었으며 아버지 덕순(德順)씨도 판소리로 유명한 세습무가 출신. 어머니 정귀성(鄭貴星)씨는 세 

〈金淑子 도살풀이춤 계보〉


습무였고 외사촌 정일동(鄭日東, 78세)씨는 경기무악의 일인자이다. 김씨의 딸 김운선(金雲仙)씨도 도살풀이·입춤·부정놀이 춤·승무 등을 전수 받고 있다.


이동규가(남창가곡)

이씨는 고조부 이인식(李寅植)에서부터 아악의 대물림을 받는다. 이인식은 조선조 헌종 13년(1847년) 궁중아악부 가전악(假典樂)을 지냈고 고종 13년(1876년) 전악(典樂)직에 오른 정악계의 거봉이다.

그후 증조부 이원근(李源根)이 고종 6년(1869년) 가전악, 고종 14년∼광무 6년(1902년) 집박(執拍), 1913년 아악부 악수장(樂手長)을 지냈으며 피리의 달인이다.

조부인 이수경(李壽卿)도 아악수장(雅樂手長)을 지냈으며 아버지 이병성(李炳星)도 이왕직 아악부 2기생이다.

 

〈李東圭 정악 계보〉


전사섭가(설 장구)


'후드룩' 가락의 전사섭씨는 단소의 대가였던 추산(秋山) 전홍련이 전씨의 재당숙(7촌)이다. 전씨의 부친 전학술(全學述)은 설 장구는 물론 남도창에 피리, 젓대(대금)를 잘 불었다. 전씨의 둘째형 이섭(二燮)은 쇠(꽹과리)와 북 장단에, 셋째형 삼섭(三燮)은 육자배기 등 잡가에 능했다.

전씨의 증조부 전창봉도 명창이었으며 전창봉 명창의 아들 전황(全璜)씨는 국악협회 이사장이다. 전씨의 둘째아들 부부 전순덕(全順德)-홍신자(洪信子)와 큰며느리 장길자(張吉子), 큰딸 전희(全姬), 막내딸 전미영(全美英)씨도 설 장구, 또는 상쇠에 능하다. 손자 국성씨도 장구를 계승, 4대째 장구 집안을 이루고 있는 셈.

 

 

〈全四燮家〉

전창봉의 딸 전옥(全玉)은 일제 때 가극계에서 '눈물의 여왕'으로 날렸으며 사위 강홍식(姜弘植)은 〈황성옛터〉의 작곡가이며 이들 부부의 딸 강효실(姜孝實)은 연극·영화배우이다. 강씨의 남편 최무룡(崔戊龍)은 영화배우, 그의 아들 최민수(崔敏洙)도 영화배우 겸 TV 탤런트이다.


지금까지 판소리는 섬진강을 기준으로 좌도는 동편제, 우도는 서편제로 나누었다. 물론 소리가 강(江)을 경계로 나누어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고 실제로 판소리의 분포가 강을 경계로 나뉘어져 있음도 사실이다.

표 3: 우도민속과 좌도민속의 비교

 


 

 

종 목

기 준

예능특징

테크닉

우도민속

춤·음악

노령산맥

여성적

테크닉 위주

판소리

섬진강

좌도민속

춤·음악

노령산맥

남성적

힘 위주

판소리

섬진강

이 땅의 꾼재인 2이 땅의 꾼재인 2

그러나 강보다는 산·산맥이 문화의 경계가 되는 경우가 많음을 인류학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판소리의 경우 섬진강을 기준하고 있지만 민속악 전반을 보면 오히려 노령산맥 좌도와 우도가 뚜렷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민속악·춤 등 판소리 이외의 민속예능 전반에 걸친 성격규정으로 노령산맥 기준 좌우(左 右)의 개념이 학문적 의의를 포괄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좌도 농악·우도 농악', '좌도 춤·우도 춤'.

먼저 노령산맥 좌도 농악은 꾸밈이 적고 기교가 없이 원박(原拍)으로 가고 춤도 담백하고 선이 굵고 잔재주가 없다. 젓대·피리·가야금·거문고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섬진강 서쪽(좌도)의 동편제가 우조(羽調) 꿋꿋하고 장엄하며 엄격한 맛을 지닌 조격-를 띄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전반적으로 좌도 음악은 남성적이고 우도 음악은 다분히 여성적이다. 이것은 좌도가 산맥을 낀 구릉지대이고 우도는 평야지대인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노령산맥 우도는 농악도 기교가 많고 춤도 잔잔하게 잔재주가 심하다. 섬진강 동쪽(우도) 서편제도 기교가 다양한 계면조인다.

그러나 잔재주나 꾸밈이 적은 좌도 음악은 점차 퇴조하고 소리맥도 끊기고 있으며 그 순수성도 변질되고 있다.

예컨대 판소리 동편제의 경우 출신지역이나 소리맥은 동편제에 속하지만 실지로 순수성을 지키고 있는 소리꾼은 몇 손가락에 들 정도이다.

그 원인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지만 크게는 현대문명이 점차 여성적인 경향을 갖는 데 있다. 또 잔재주·꾸밈·변형 등에 관심을 더 기울이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도시화와 더불어 산간지역의 남성적인 이미지(image)·선(線)·기운(氣運)이 점차 여성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예술일반으로 볼 때 예술이 힘(power)보다 테크닉(technic) 우선으로 바뀌는 후기적 양상과도 상통한다고 본다. 이것은 힘 자체, 본질적인 것에 충실한 최초의 예술적 형식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너무 테크닉에 치중하면 예술의 형식들은 흔히 타락하거나 끝내 힘을 상실하고 만다. 이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형식(새로운 고전)이 배태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노령산맥 좌도 음악의 남성적인 특징은 우리 민속예능의 발전을 위해서도 보존과 육성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 전통예술의 구조적 대립항의 교체적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표 3 참조).

남성명창이 줄어들고 춤꾼이 줄어드는 것도 민속예능의 여성화 경향이다.

이번 조사의 학술적 의의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 동안 자신의 신분 노출을 꺼려하던 재인들의 상당수가 당골 출신임을 밝혔고 본인이 확실히 실토하지 않더라도 당골 출신임이 주변 취재에 의해 밝힌 점이다.

한농선·박범훈씨 등이 전자이고 한승호·전경환·정경파·김오채·박후성·안동숙·정달영 ·김윤수·김수익·박송희씨 등도 후자이다. 결국 당골 가계야말로 재인들의 생산 배출구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세습 당골들의 신분 탈출과 관련된 이야기는 눈물겨운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피 속에 흐르는 재능은 또한 이들을 다시 그토록 탈출하고자 했던(수대에 걸쳐서) 재인의 생활로 돌아오게 하고 만다. 이러한 회귀는 한 세대 건너서 일어나기도 하지만 몇 세대가 지난 후 어느 날 불쑥 솟아나기도 한다. 반대로 양반이나 중인계급 출신이 판소리를 할 경우 신분하강을 막기 위한 집안의 노력 또한 비정한 것이었다.

판소리를 둘러싼 신분상승 및 신분하강과 관련한 이야기는 봉건사회의 신분 제도와 계급의 이동(mobility), 그리고 문화의 차별화를 보여준다.

권삼득(權三得)은 전북 익산출신 양반인데 부형이 판소리꾼은 문중치욕이라며 죽이려 하자 마지막으로 판소리를 부르면서 죽겠다고 〈유언가(遺言歌)〉를 불렀는데 감동한 일가가 죽이지는 않고 족보에서 지워버린 이야기는 처절하다.

판소리 동편제의 중흥자 송만갑(宋萬甲)은 자신의 아들 기덕(基德)을 판소리를 못하게 해 경찰로 만들었다.

판소리 명창 정응민(鄭應珉)씨도 아들 권진(權鎭)씨를 경찰로 만들었으나 권진씨가 재능을 못 버려 소리를 다시 시작했고 권진씨는 또 다시 아들 회천(會泉)을 방송국 프로듀서로 만들었으나 회천씨는 다시 민속음악을 택했다. 이 같은 정씨 3대의 판소리 이탈 및 회귀는 재능과 사회차별과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다. 이들 정씨가는 판소리 보성제(寶城制)를 쌓아가고 있다.

동편제 명창 김소희(金素姬)씨도 처음에는 딸 박윤초(朴倫初)의 소리학습을 말렸으며 판소리 〈적벽가〉의 한승호(韓承鎬)씨는 대를 잇는 자녀가 한 명도 없다.

피리의 박범훈(朴範勳)씨는 할아버지(박창두(朴昌斗))가 가야금에 능했고 내당숙 함동정월(咸洞庭月)은 가야금 산조로 유명했고 판소리 서편제 대가였던 정응민(鄭應珉) 선생은 박씨의 할머니와 사촌지간이었다. 그런데 일찍 아버지를 여윈 박씨를 키운 작은아버지(의사)가 격리시키기 위해 경기도 양평으로 이사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 박씨는 결국 피리와 작곡으로 국악계의 기둥이 되었다. 동편제 명창 강도근(姜道根)씨도 자기 대에서 소리를 마감했다.

한편 정부의 무형문화재(인간 문화재) 보호·육성·정책은 문제가 많다.

동편제 중에서도 진동편은 강도근·박송희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사라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판소리 명창은 남자는 8명인데 비해 여자는 10명으로 1세대의 경우 전부 남자이던 것에 비하면 여성화되어 가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춤꾼도 소리에 비해 수적으로 크게 열세인데 총 20명에 불과하다. 이중 남자가 8명, 여자가 12명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고성오광대나 동래야유, 밀양백중놀이, 양주별산대놀이 속의 춤꾼들을 발굴, 포함시킨 경우이고 순수한 춤꾼은 남녀 각 3∼4명에 불과하다.

남자의 경우 이동안, 김천흥(궁중무)·이매방·김덕명·김진홍(이외에 송화영) 등이며 여자는 김수악·장금도(이외에 조갑제) 등이다.

굿이나 연희에서 소리나 춤을 따로 분리해 내어 집계하더라도 소리가 춤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 재인들은 소리(歌)·기악(樂)·춤(舞)·연희(演戱) 그리고 그 원형인 무(巫) 등의 종류로 나누어지지만 대부분이 관련 분야의 학습을 골고루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리하는 사람이 악기 한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춤 연기 못하는 사람이 없다. 때로는 재주가 너무 많아 어느 것을 주종목으로 해야 할지 망설이게 하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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