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96. ‘환향녀(還鄕女)와 호로자(胡虜子)’의 유래

2018. 2. 22. 15:55아름다운 세상(펌)/고운글(펌)

96. ‘환향녀(還鄕女)와 호로자(胡虜子)’의 유래

 

평소 남자관계가 복잡한 여자를 나쁘게 욕할 때 환향년또는 화냥년이라 하고, 버릇없이 못된 짓을 하는 남자들을 욕할 때 호로자식’, 또는 후레아들이라 하지요.

그런데 이 욕들은 역사적 비극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후금(後金)1636년 국호를 청()나라로 바꾼 후, 조선과 설정한 형제(兄弟)의 관계를 임의로 폐기하고 새로이 군신(君臣) 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 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했지요.

그러자 이는 부당한 처사임을 강조하며 조선이 거부하자, 청나라는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어요. 청나라 대군(大軍)에 밀린 조선군(朝鮮軍)은 남한산성을 최후의 보루로 삼고, 13천의 군사로 대적했지만 세력의 열세로 45일 만에 항복하고 말았어요.

인조대왕(仁祖大王)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나라와 군신(君臣)의 예()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지요. 이때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와 항전을 주장하는 주전파 중 척화론(斥和論)을 펼치던 삼학사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도 청()나라로 끌려갔으며, 이 뿐만 아니라 청군들은 철수하면서 60만에 이르는 조선 사람들을 전리품으로 끌고 갔어요.

이 중 50만은 부녀자(婦女子)로서 시집간 아녀자, 처녀, 며느리들이었는데, 이들에게 끌려간 부녀자들은 돈을 주고 풀려날 수도 있었으나 돈은 신분에 따라 1,500냥에서 25냥까지 거래가 이루어진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 가족들은 대부분 가난한 양민들이라 속전((贖錢))을 마련할 수가 없었는데, 속전(贖錢)이란 생명을 대신하여 지불하는 돈을 말하는 것이지요. 속수무책(束手無策)인 백성들은 궁궐 앞에 모여들어 청()나라에 끌려간 딸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를 구해달라고 아우성을 치자, 인조대왕(仁祖大王)은 청()에 사신을 보내 조선의 부녀자를 돌려보내 줄 것을 정식으로 요구하였으나 오랑캐 청()나라는 끌고 간 사람들에게 등급을 매겨놓고 엄청난 돈을 요구하였지요.

그러나 패전으로 인해 헐벗은 조선은 그 많은 돈을 충당할 수가 없었어요.

인조는 피눈물을 흘리며 와신상담(臥薪嘗膽) 하였으며 절치부심(切齒腐心) 한 끝에 수삼 년이 흐른 뒤에야 인조(仁祖)는 엄청난 돈을 마련하여 청나라로부터 부녀자들을 데려올 수 있었는데, 그때는 이미 흉악한 오랑캐들에게 겁탈당하고 유린당하며 창녀처럼 짓밟히고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오매불망(寤寐不忘) 천신만고(千辛萬苦)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부녀자들은 기쁨도 잠시 더 큰 아픔을 느껴야만 했는데, 그것은 유교사상에 젖어있던 우리나라 풍토는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지요. 오르지 하나의 지아비만을 섬기고 정절을 유지해야만 했던 조선의 여인네들이 오랑캐 땅에 끌려가 몸을 더럽히고 돌아왔으니 환향녀(還鄕女)가 된 부인은 남편에게 버림받고 처녀는 시집을 가지 못했지요.

더군다나 오랑캐의 씨를 임신하고 돌아온 여인들이 자식을 낳으면 호로자(胡虜子)’라 하여 사회의 따돌림과 냉대를 받으며 자라야만 했지요.

열녀지상주의의 조선 땅에서 그들의 운명은 천민(賤民) 그 이하였지요. 사람들은 환향녀(還鄕女)’라는 이름으로 낙인찍어 손가락질하며 멸시했으며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남편들로부터 공개적으로 가혹행위를 당하였고 힘없는 나라가 잘못하여 끌려가 몸까지 빼앗기고 돌아온 여성들을 이 땅의 남성들은 등을 돌리고 용납하지 않았어요.

결국 수많은 환향 여인들은 냉대와 질시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自盡)의 길을 택하기도 하는 등, ‘환향녀가 사회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인조(仁祖)는 특단의 조서를 내렸어요.

 

환향녀(還鄕女)가 절개를 잃은 것은 음행(淫行)때문이 아니라 전란 탓이다. 대동강,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 등 전국 각지의 강()과 천()을 내 친히 지정하노니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환향녀들은 이 강물에 심신을 정결하게 씻어낼 것을 명하노라. 강물에 몸을 씻어낸 환향녀들은 잃어버린 정조를 다시 되찾은 회절(回節)여인 으로 간주할 것이니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거부하는 집안은 중벌로 다스릴 것이다.”

 

훗날 나라에서 지정한 이 강들이 정조를 되찾는 회절강(回節江)’이 된 것이며, 서울의 홍제동 홍제천(弘濟川)도 이때 회절천(回節川)’이 되었다 합니다.

아무튼 이때 만들어진 말이 환향녀인데, 청나라로 끌려간 많은 부녀자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집에 돌아 왔으나 청나라에 끌려가 정조를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환향년으로 낙인찍어 받아주지 않고 내몰아 때로는 목을 매어 자결하고 때로는 저자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인으로 전락한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이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없이 정조를 잃고 임신까지 한 여인이 낳은 자식을 호로자식이라 했지요. ‘호로자식이란 호로아(胡虜兒)’, ‘호래아(胡來兒)’라고도 했는데, 호로(胡虜)는 오랑캐호()자에 포로로()자를 쓰며 오랑캐의 자식이라는 뜻이지요.

그 옛날 환향녀호로자의 기구한 운명이 어디 그때뿐이었나요? 임진왜란 때도 숫한 양민들이 끌려가 환국을 못했고, 100여 년 전에는 일제의 침탈에 징용과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가 수난을 당하기도 했지요.

훗날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환향녀(還鄕女)’화냥년으로 변질되어 정조관념 없이 아무하고나 잠을 자는 헤픈 여자로 쓰이고 있으며, ‘호로자(胡虜子)’호로자식(호로아들)’ 또는 후레자식(후레아들)’로 변질되어 나쁜 짓을 일삼는 방탕아를 욕할 때 사용되고 있는데, 어찌 보면 환향녀호로자식은 우리 조상의 가장 치욕적인 모습이지요.

화냥년이니 호로자식(후레아들)’이니 하는 쌍욕은 우리 조상을 한 번 더 욕보이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스스로 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냥년이나 호로자식과 같은 말은 사용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치욕적인 역사를 잊어서는 안 는 것이지요.

아무튼 다시는 이 땅에 그러한 슬픈 역사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굳건한 나라 강건한 나라 더 이상 침략을 당하지 않는 나라가 되어야겠어요.


출처 : 전민욱
글쓴이 : 전민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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