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청교도(淸敎徒)`에 대하여...

2009. 9. 1. 13:11아름다운 세상(펌)/고운글(펌)

청교도(淸敎徒,Puritans)라고 하면, 영국에서 종교갈등으로 미국으로 유배되어 온 개신교의 일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사상적 배경은 칼뱅이즘이며, 영국의 종교개혁이 완벽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여 '보다 성스서운 공동체의 건설'을 내세웠다고 전해집니다. 즉, 미국이라는 나라의 사상적 배경을, 바로 이 청교도의 종교적 신념과 그들의 사상적 배경에서 찾아 볼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문헌에서 찾아보면, 이 들이 갈등을 빚은 곳은 다른 아닌, 영국의 본토인 '런던(London)'가 '요크(York)'가 되는데, 이 들의 사상적 배경을 제시한 칼뱅이라는 인물은 '프랑스인'이라는 점입니다.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칼뱅은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스위스로 들어가 저술활동을 했던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확히는 프랑스로부터 스위스로의 망명입니다. 그 이유는 자세히 나와있지 않지만, 그가 스위스 체류기간 동안 저술했던 <그리스도교 요강(要綱)>은 근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고. 이시기, 1533~1535~... 그는 <갑작스러운 회심>이라는 표현으로 복음주의로의 사상적 전향을 이야기하였지만, 그 이유는 역시 자세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후, 그의 저술은 '직업을 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직업윤리를 창조하였고, 프랑스, 네델란드, 스코틀랜드, 독일로 부터 신대륙(America)로 전파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정리해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를 건설했던, 청교도들의 사상적 배경인 '칼뱅이즘'의 탄생지는 프랑스라기 보다는, 정확히는 '스위스'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래의 몇개 글에서,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청제국의 논리를 전개하였었습니다. 또한, 청과 갈등을 빚은 몽고의 정체는 모스크바 북방에 위치한 스웨덴을 중심으로 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일 수 있다는 주장도 제시를 한 상태입니다. 이와 함게,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청과 갈등을 빚은 또 하나의 세력은 '서단', 풀어서 말하면, 서쪽 달단, 또는 서쪽 타타르라고 해석해 볼 수 있겠습니다. 만약, 몽고가 스웨덴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라면, '서단'이라면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서쪽에 위치하여야 하고, 해당위치는 헝가리 또는 프랑스 등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황제는 이들의 세력을 사교의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죠. 즉, 종교적인 부분에서 이단이며 정통교파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극단적인 표현으로는 이렇게 볼 수 있지만, 서단의 왕이 청황제에게 보낸 칙서를 보면, 땅의 넓이가 너무 넓어 하나의 왕으로는 해당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힘드므로 해당지역의 왕의 권한을 인정하게 해달라는 표현으로 나름대로 본인들의 위치를 낮추어서 양해를 구하는 내용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즉, 그들 스스로도 본인들이 정통은 아니지만, 필요한 부분이 있으므로 승인을 원하는 내용입니다.

 

만약, 프랑스, 스위스 지역이 이들 서단의 지역이었다면, 그 중에 그들의 종교적, 사상적 중심의 세력이 존재하였다면 그들이 추구했던 이념이 있을 것이며, 바로 칼뱅이 활동했던 주 지역이 바로 이들 '서단'의 지역이라는 것에서 청교도의 실체에 보다 근접하여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들이 주장했던 것 중에 하나가 위에서 언급한 '신성한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청교도(淸敎徒)'라는 이름을 만들어주게 하였던 '청교(淸敎)'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서 '청(淸)'이라는 이름이 이들 집단에게 부여된 것일까요?...

 

사실 이들이 본인들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지역은 영국이 됩니다. 전쟁을 통한 결사적 항쟁을 계획했던 기록도 아래와 같이 나타납니다. "1642년 의회에서 J. 핌 등 5명의 의회파 지도자를 체포하려다 실패, 런던을 떠나 요크(York)에서 전쟁준비를 시작하였다."(야후백과). 이들이 초기 영국 왕당파와 갈등을 빚으면서 전쟁을 준비했던 지역이 바로 York(욕)였다는 사실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최대 도시중에는 New York(새로운 요크)가 있는 사실에 주목해 보면서 아래의 바이킹의 이동경로는 살펴보면, 이들의 보다 자세한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요크에서 이들이 미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그린랜드'를 거쳐 캐나다의 북동해안을 경우하여 보스턴을 지나 현재의 'New York'으로 이동하는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며 이 경로는 바이킹의 이동경로와도 중복이되며, 북미 인디언들의 이동경로로도 예측되고 있는 바로 그 바닷길이 됩니다. 다시말해, 이 길은 청교도가 처음 개척은 길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들이 영국의 런던과 요크에서 활동하기 전의 세대들은 현재의 스웨덴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일 수 있다는 가정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입구에 '표트르대제'가 건설했었던 성스러운 표트르의 도시인 '세이트페테스부르크'가 위치해 있는 것을 확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청교(淸敎)'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들 집단이 나름대로 시행했던 영국의 종교개혁에 만족을 못하고 보다 성스러운 종교이념으로 다가섰던 지리적 위치에 '세이트페테스부르크'가 나타난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만약, 러시아가 '청'이었다면, 이 들 청교의 집단은 초기 '청나라 인'들 이었지만, 어떤 이유로 배를 타고 서쪽으로 더 이동을 했어야 했던 숨겨진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들이 집착했던 '보다 성스러운 공동체' 즉, 보다 '평등하고 신성한 것에 대한 집착'의 근원에는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요?... 혹시, 표트르대제가 어린시절부터 갈등을 겪어온 바로 그 문제, 피부색과 눈의 색이 다른 것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신으로 부터 생명을 부여 받은 순간부터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원초적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한국의 전통적 표현으로 이야기 하면, '적자'와 '서자'의 갈등이라고 표현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집착과 열망이 더욱 강했던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배를타고 서쪽으로 더 서쪽으로 대해를 넘어서라도 가서 이룩하고 싶었던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마침내, 이들은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서 독립에 성공하지만, 문헌에서는 이들의 독립의 역사를 1783년으로 잡으면서도 영국의 런던평화조약이 아닌, 프랑스 파리의 '파리평화조약'이라는 표현으로 설명을 합니다. 전쟁은 영국과 했는데 어찌해서 인지, 가장 좋아했던 세력은 미국도, 영국도 아닌 프랑스였다는 신념이 굳어집니다. 이들은 '뉴욕'의 멋드러진 '자유의 여신상'도 엄청난 재원을 투자해 만들어서 대서양을 건네 보내주기도 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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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1763 2.10 파리평화조약. 프렌치-인디언전쟁 종결. 영국은 캐나다, 미시시피강 동쪽의 루이지애나·플로리다·서인도제도의 일부를 획득.
5.7 오타와족 족장 폰티액의 반란(~11.28).
10.7 국왕선언 발포
1764 4.5 사탕조례 제정
1765 3.22

인지조례 제정.

 

1783

1.20 평화예비조약 발효.
9.3 파리평화조약. 독립전쟁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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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연대기에서는 파리평화조약을 통해서 미국의 독립이 됨과 동시에, 프랑스와 인디언의 전쟁도 종결이 되었다는 종결을 의미를 가져다 주지만, 이후 미국의 인디언은 '독립된 미국인'들에 의해서 거의 전멸하게 된 것을 모두 알 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영국이 끼어있는 느낌이 왠지 강합니다.

 

여기까지 정리해 보면, 미국의 독립의 근간이되는 사상적 배경은 프랑스인 칼뱅이 스위스 체류중에 저술한 내용이지만 이 것을 바탕으로 대서양을 넘어간 세력은 '중국'의 중심적 위치에 올라갈 수 없는 유전적 운명을 타고 났던 러시아 지역의 사람들일 수 있으며, 그들을 가장 축하해 주었던 사람들도 역시 사상적 배경을 제시했던 프랑스인들이었다고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좋아했던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러부터 수년뒤이 1789년 프랑스에서는 미국의 독립혁명의 자극을 받은 시민혁명이 향후 10년동안 이어집니다. 10념이니까, 정확히 1799년이 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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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 5. 시에예스 총재 취임.
6. 프레리알 쿠데타.
11.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12. 공화력 8년 헌법 발포, 통령정부 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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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프랑스는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이 등장하여 1812년에는 모스카바까지 원정을 가게 됩니다. 구지 그들이 추운 날씨를 무릅쓰고 러시아의 수도까지 원정을 가야할 일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들의 독립을 완벽히 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원정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정확하게는 러시아의 '모스크바'원정이 되는 것이죠. 문헌을 찾아보지 않아도,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서 '러시아의 왕'과 '정치적 핵심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동쪽, 또는 동남쪽으로 이동을 해야 했을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쉽게 추측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후, 상당수 시간이 흐른후, 러시아에서도 역시 사회주의 혁명(1905년)이 나타납니다.

 

한국의 역사로 따지면, 조선후기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시기에 발생된 상당히 알 수 없는 신비한 전설이 말레이시아 '멜라카해엽'지역의 사람들 사이에 현재까지 구전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중국의 왕이 배를 타고 해당지역'으로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의아했던 것은 중국이라 하면 현재의 중앙아시아, 또는 러시아로 대충 잡아보더라도, 해당지역에서는 배를 타고 멜라카해엽으로 올 수 가 없기 때문이죠. 올 수 있는 최단거리는 히말라야 산맥 부근의 샛글을 통해서 현재의 네팔을 거쳐서 오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전통요소들이 해당지역에서 나타나는 것을 바탕으로 그 것을 예측해 보기도 하였었습니다.

 

그렇다면, 해당지역으로 대략 200여년전(?) 배를 타고 그 지역에 유유히 나타났다던 '중국의 왕'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중국의 왕이 맞는 것이냐?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중국의 왕'이냐? 아니면, '중국의 왕이라고 자칭하는 사람'이냐? 이것이죠... 하지만 누군가가 배를 타고 오긴 왔던 모양입니다. 멜라카지역의 해외교류역사를 살펴보면 초기 포루투갈->네델란드->프랑스, 영국등의 나라들과 교류를 했던 흔적을 유적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이 중국 왕의 배가 이 들 나라들로부터 올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현재도 해당지역에는 Chinese 집단 거주촌이 관광지 형태로 개방되어 있으며, 상당수는 현지에서 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Chinese의 거주촌의 외부색상과 서양세력들이 만들어 놓은 성당의 색이 모두 '붉은 자줏빛'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드시 그 색이 되어야만 했던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 중,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초기 베트남과 갈등을 빚으며 초기 세력확장을 주도했던 나라중에 하나입니다. 조선의 역사에서도 프랑스 선교사와 갈등을 빚은 내용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즉, 천주학이 되는 것이죠...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은, 이 천주학을 멜라카해엽에 나타났었다는 '중국의 왕'이 가져온 것은 아닐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중국이라고 이야기하는 나라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생겨납니다. 조선의 역사에서는 천주학을 정통교파로 인정하지 않고, 일종의 사교의 세력으로 규정하여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었습니다.

 

상당히 신기한 것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유럽에서도 정교와 사교의 갈등으로 북의 '몽고'와 서쪽의 '서단'의 갈등이 빚어졌다면, 대륙의 동남쪽에서도 거의 유사한 사상적 배경으로 상당수 시간이 지난후, 동일한 갈등이 유발되었다는 점입니다. 주목해 볼 만한 사실은, 양 갈등 사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국가가 바로 미국의 독립혁명을 가장 열렬히 축하해 주었던 '프랑스'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프랑스는 강력한 '외인부태'라는 전세계 최초 다국적 용병부대를 창설하여 'Global 군사 경영'의 모범을 보여준 최초 국가가 됩니다. 영국에는 '그루카 용병'이라는 것이 있었죠. 한국전에도 참여를 했었구요. 그러나, 시초는 프랑스 외인부대가 됩니다. 일본의 Animation에는 프랑스 외인부대를 배경으로 했던 것도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서로 다른 인종과 국적이지만, 하나의 집단으로 성장케 할 수 있는 경험과 기술이 축적되었던 나라가 바로 프랑스라는 것이죠. 영국보다 프랑스를 유럽의 중심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동남쪽으로 이주해온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누구를 쫒아서 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입니다. 반드시 쫒아 와야 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만약, 이들이 사서에서 나타나는 정통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서단'의 세력중에 하나였다면,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도 있다고 판단됩니다. 미국의 독립혁명 이후, 프랑스 혁명과 이후 러시아 혁명을 통해 시작된 공산주의 운동의 정점은 현재의 China대륙으로 번져가게 되는 것이죠.

 

요약해 보면, 청교도의 사상적 배경을 통해 미국의 자유독립을 가져오게 되었다면, 이후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적인 러시아와 현재의 China의 정체성이 만들어 졌다는 내용입니다. 이 시기에 맞추어서, '미국'과 '러시아' 'China'의 역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국가가 바로 청교도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칼뱅의 조국인 '프랑스'가 되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러시아와 China의 공산혁명으로 더욱 더 동쪽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던 세력은 해당지역의 '부르주아'라고 지칭 상류층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며, 그들은 해당지역의 역사를 현재도 간직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이들은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이야기 할때, 형인 미국이 아우인 한국을 잘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역사적 단계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형은 한국(적자)'이 되는 것이고 '미국(서자)이 아우'가 되는 것이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또한, 요즘 인터넷언론을 통해서 자주 등장하는 '북미'간의 갈등이야 말로, 진정한 '형제'간의 갈등이 아닌지?... 형제간의 갈등은 '인륜'으로 풀어야 하는 것인데 '이념'으로 풀려다 보니 문제가 더 커지는 것이 아닌지?...

 

어쩔 수 없이 유전적으로 절대 동일해 질 수 없었던 갈등의 구조의 틈을 벌린 세력은 과연 누군가요?... 그 틈을 더욱더 벌려서 서로 죽고 죽이는 원수의 관계로 발전시킬 수 있는 습득되고 개발된 '고도의 Know-how'를 가지고 있었던 '배를 타고 대륙의 동남쪽으로 유유히 흘러들어 왔었던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런데, 어제 모 언론을 통해서 베링해엽을 뚫어서 러시아와 미국이 철도로 연결될 수 있다는 구상을 접하였습니다. 이 것은 '시베리아 철도'위 전초적 성격이 강한것 같은데요... 드디어 미국이 과거로 부터 쌓여 왔던 갈등의 원인을 서서히 파악한 것은 아닌지? 세인트페테스부르크->욕->그린란드->뉴욕->캘리포니아->알래스카->를 거쳐서 다시 -> 러시아로 회귀되는 역사의 굴레를 보면서, 과거에 쌓였던 갈등의 구조를 풀 수 있는 concept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고,

 

또한, 그들도 서서히 역사의 진실을 깨닳아 가고 있고, 또 다른 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청교도'의 역사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참고>

1. 야후백과 청교도: http://kr.dictionary.search.yahoo.com/search/dictionaryp?&p=%EC%B2%AD%EA%B5%90%EB%8F%84&subtype=enc&pk=18613400&field=id

2. 야후백과 청교도혁명: http://kr.dictionary.search.yahoo.com/search/dictionaryp?&p=%EC%B2%AD%EA%B5%90%EB%8F%84&subtype=enc&pk=18613500&field=id

3. 야후백과 칼뱅: http://kr.dictionary.search.yahoo.com/search/dictionaryp?&p=%EC%B9%BC%EB%B1%85&subtype=enc&pk=18915500&field=id

4. 야후백과 미국의 독립혁명: http://kr.dictionary.search.yahoo.com/search/dictionaryp?&p=%EB%AF%B8%EA%B5%AD%EC%9D%98+%EB%8F%85%EB%A6%BD%ED%98%81%EB%AA%85&subtype=enc&pk=13568200&field=id

5. 야후백과 프랑스혁명: http://kr.dictionary.search.yahoo.com/search/dictionaryp?&p=%ED%94%84%EB%9E%91%EC%8A%A4%ED%98%81%EB%AA%85&subtype=enc&pk=19758600&field=id

6. 조선일보 뉴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26/2009062601410.html?Dep0=chosunmain&Dep1=news&Dep2=topheadline&Dep3=top

[Source: http://cafe.daum.net/ancientkoreanhistory/KhV4/59]

출처 : 아시아문화사연구회
글쓴이 : 김재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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