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 23. 20:02ㆍ아름다운 세상(펌)/고운시
사단법인 한국한비문학 작가협회 출범을 내심 기대하며
김경덕
2008년 2월 25일 청천벽력의 메일이 발행인으로부터 한비문학 작가협회에 날아들었다. "..... 출판사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부득이 3월호를 결간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문학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반년간지도 아니요, 계간지도 아니요, 시초에 월간지로 출발하여 지방이라는 척박한 문화적 토양안에서도 지금껏 단 한 번의 결간 없이 묵묵히 문학의 뿌리를 뻗어왔건만 이 무슨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란 말인가ㅡ. 그러나 절망은 잠시였다. 결간이란 있을 수 없는 일! 소속작가들의 의지는 강건하였고 그들의 지혜로움은 이미 하늘에 닿아있었다. 아무도 시키지 아니 하였거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십시일반, 자발적으로 후원금이 쇄도하여 사납기만 할 것 같았던 회오리바람이 간지러운 미풍처럼 스쳐 지나가고 맑고 푸른 하늘의 숨결을 마주 대하는 지금, 무릇 이참에 아예 계간지를 하나 더 만들자는 의견까지 나오는 양상이다. 이러한 추세라면 한비문학이 사단법인으로 새롭게 출범할 날도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이라. (이 문제에 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의견수렴 과정을 거친 후 다음호에 재차 언급하기로 하자.) 비 온 뒤에 땅이 더욱 굳어지듯 절망의 끝에서 우리는 희망을 쏘아 올렸다.
지난 3월 한비문학에 게재된 작품 중에서 오인자의 <영원한 빛을 찾아서>, 엄혜경의 <어머니의 노래>, 곽송자의 <초콜릿처럼 달콤하게>, 박진아의 <내 마음의 별>, 이상 네 편을 살펴 보고자 한다.
비온 뒤
서산마루 걸터앉은 무지개 꽃도
자유로이 훨훨 날으는 새도
볼 수 없는 푸른 빛을 잃어가요
딸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얀 건반 위에서 요술 부리면
그 마술에 흠뻑 취함도
볼 수 없는 그 빛을 자꾸만 잃어가요
달콤했던 순간도
장엄했던 순간도
아름다운 바다 한 아름 안아 줄 수 있는
중년의 초록 꿈이 자꾸만
어둠 속으로 빛을 잃어가요
ㅡ 오인자의 <영원한 빛을 찾아서> 전문
체득된 詩들에는 공통적으로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가 늘 그 저변에 깔려 있다. Story가 있기에 투박한 묘사가 오히려 詩를 대하는 독자들에게 시나브로 이미지화 되어져서 감동으로 어울리게 된다. 시인의 삶을 직설적으로 드러낸 진정성(眞情性)이 독자에게 진실한 울림으로 전이될 때 이질적 극성(極性)들이 서로 맞물려 융착효과를 거두게 된다. 필요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얼핏 삶을 부정하는 듯한 상흔들을 글 속에서 자신의 삶에 점차 긍정성으로 투영시키고자 하는 고통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시적 화자는 생명을 갉아먹듯 언제부터인가 시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푸른 빛이 어둠을 비켜가지 못하고 관통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적막하게 짙어오는 병증을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피해갈 수가 없다.
그러나 딸 아이의 엄마인 화자의 애절한 절규에서 반대로 우아하고 느릿한 저녁풍경이 떠오르는 까닭은 시 전반에 걸쳐 강한 울림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근한 구어체의 사용과 유사한 형태의 문장을 반복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음악적인 리듬과 운율이 내재되어 있으며 편안한 느낌을 준다. 꽃, 새, 건반, 바다 등 종내에 가서는 결국 바라볼 수 없는 구체적인 대상들을 형상화시킴으로써 Plot가 강한 한 편의 시나리오를 대하는 듯하다.
<사라>호 태풍에 집과 농작물이 휩쓸려가던 날 더 이상 가난이 싫어 부모 몰래 처자식 끌고 야반도주했던 불효자, 자식에게만은 가난 물려주지 않겠다고 산 중턱에 슬레트 집 둥지 하나 털어놓고 아버지는 노동자로 사우디 파견 떠나셨다. 구멍 뚫린 문풍지 사이로 들어오는 것은 칼바람과 매케한 연탄냄새. 커져만 가는 아버지의 빈자리로 눈물처럼 <바다가 육지라면>이 어머니의 18번이 되더니, 아버지 편지를 받는 날이면 우리 4남매 한 방에 몰아 재우고 밤늦도록 어머니의 방 불은 꺼지지 않았다. 달 밝은 밤이면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만들어 놓으신 마당 한가운데의 시멘트 마루에 걸터앉아 그 노래 흥얼거리셨다. 내 나이 중년이 된 지금 파도소리 귓전에 출렁이는 밤이면 남편 곁에 두고 나도 어머니의 18번 흥얼거리고 있다.
ㅡ 엄혜경의 <어머니의 노래> 전문
우리 세대의 과거 어머니들은 의사와는 무관하게 한없이 순종하며 운명을 운명으로만 수용하는 피사체로서 그들의 삶을 스스로 황폐화 시킨 지극히 피동적인 존재였다. 가두어진 상황에 의해 굴절된 어머니의 삶을 뛰어난 감수성을 지닌 시인은 개인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어머니의 노래>에서 시적 공간은 바로 "집"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제한된 구역일 뿐이다. "집"은 아버지가 돌아올 곳이며 중년이 된 화자가 돌아가야 할 곳이기도 하다. "슬레트 지붕", "구멍 뚫린 문풍지", "연탄냄새", "어머니의 18번", "시멘트 마루" 등 일상의 오브제를 매개로 점점 잊혀져 가는 존재의 기억들을 반추하는 시인은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집"으로의 무사귀가를 지금 열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자인 시인은 남성인 남편이 곁에 있어도 파도소리가 들리는 밤에는 유전적인 모성성이 발동하여 여성본능에 대한 의문을 "어머니의 노래"를 빌어 자신에게 더욱 가멸차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어머니의 노래"는 한세대에 머무르지 않고 시인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진 동행(同行)인 동시에 생성을 되풀이 하는 순환적 이미지이다. 어머니가 부른 "노래"를 매개로 한 여성 정체성에 관한 시인의 사유는 그동안 발표해 온 작품과는 확연히 구분이 되는 시작정신의 새로운 인식방식으로 보인다.
향후에는 엄혜경시인의 詩가 낮은 곳에서 체험된 상처들을 부디 온몸으로 밀고 나아가 좀 더 희망적이고 밀도있게 치유되어지는 시적 언어들로 구현되어지길 기대해 본다.
대형마트 각양각색의 풍선이 달린 웨딩 아치처럼
화려한 인파 속을 비집고 들어간다
모양도 예쁘고 입에 넣으면 살살 녹을 것 같은
발렌타인 데이를 준비하는 소녀 가슴이 콩닥 인다
주부 미스 심지어 아이들까지 북새통이다
넌지시 먼 눈으로 몇 알 점 찍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 또래는 없다
더 깊이 말하자면
딱히 줄 남자친구가 없다는 것, 망령일까
남편에게 주긴 좀 쑥스럽다
도대체 분위기란 찾아 보려해도 없는 사람이니
차마 살 용기가 없어 슬그머니 발길 돌린다
ㅡ 곽송자의 <초콜릿처럼 달콤하게> 전문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공간(時空間)과 시인의 시각 사이에 일정한 간격이 유지되어 있기 마련인 일련의 관조주의적인 詩들에 반(反)하여 곽송자의 詩 <초콜릿처럼 달콤하게>와 같은 현실 자체를 미적 대상으로 표출한 사실주의적인 詩들에는 시인의 감수성이 감각적일 뿐만아니라 현실에 대해 지극히 긍정적이며 수용적인 자세를 보인다.
화자는 이방(異邦)에서 전래된 발렌타인데이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이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소소한 일상의 일부분으로 충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더 깊이 말하자면/딱히 줄 남자친구가 없다는 것, 망령일까//남편에게 주긴 좀 쑥스럽다/ 와 같은 일상의 한가운데에 시인 스스로 성큼 걸어 들어가기도 하는 것이야말로 삶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라고 하겠다.
<초콜릿처럼 달콤한 세상>이 시사하는 바도 있지만 작품에 나타난 화자의 어눌한 행위가 독자들에게 잔잔한 아름다움으로 재구성 되어짐을 평자는 시인의 현실참여적 자연심상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정을 박아 피를 토해내어
가슴 속 빈자리에 별을 새긴다
시리도록 아픔의 역경을 딛고
낡아빠진 실루엣을 걸치고
허연 속살을 들어 내민
심장에 비수를 꽂아
퇴색된 희미한 옛 그림자에
생명의 씨앗 하나 숨기어
밤하늘에 등불을 밝힌다.
ㅡ 박진아의 <내 마음의 별> 전문
그리움이 절실한 까닭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꽃을 보라. 사시사철 각기 다른 감동을 지닌다. 절대적으로 소멸성이다. 그러나 그리움은 처음과 끝이 다르지가 않다. 시인의 詩는 이러한 절절한 감정이 있기에 독자들에게 은근히 순수함으로 다가갈 수 있다. /정을 박아 피를 토해내어/가슴 속 빈자리에 별을 새긴다// 결론을 먼저 도출시킴으로써 시인의 의도가 선명해지며, 피를 토할만큼 강한 그리움이 가슴에 별로 박히면서 징징 울리고 있는 듯하다. /시리도록 아픔의 역경을 딛고/낡아빠진 실루엣을 걸치고//허연 속살을 들어 내민/심장에 비수를 꽂아//퇴색된 희미한 옛 그림자에/생명의 씨앗 하나 숨기어// 그리움은 "실루엣"이었다가 "허연 속살의 심장"이었다가 "생명의 씨앗"으로 환치된다. 2.3.4연에 집중된 강렬한 시어들이 함께 용해되어 공간을 뛰어넘기도 하고 시간을 초월하기도 하면서 한 폭의 단아한 정물화가 화면에 배치되는 것이다. /밤하늘에 등불을 밝힌다.// 마지막에 가서 등불로 귀결된 그리움이 별빛 여운으로 남아 조용히 빛을 발한다.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은 그리움에 시인 스스로 순응하는 듯하다. 그리움은 멀리 있는 것 같으나 언제나 가까이에 있으며 한발짝씩 더 다가가게 되는 것임을 전혀 무리하지 않고 가식됨이 없는 어투로 시인은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작품 외에도 김중영의 <생명의 줄기>, 김광련의 <침묵>, 김용길의 <水 전자>, 박인태의 <벌레잡이 제비꽃>, 한영숙의 <봄밤> 등 화사한 봄날씨처럼 우수한 작품들이 전과 비교해 볼 때 특히 많은 3월이었으나 제목만을 소개하게 되어 대단히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다음호에서는 더 많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3월호 월평을 여기에서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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