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서를 소재로 하는 시

2008. 1. 11. 10:21살다보니 이런일이/시(詩)를 위하여


시의 소재란 일상세계를 구성하는 일체의 사물로서 상상력이 그러하듯이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편의상 구체적으로 시에 등장하는 소재를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볼 수는 있다. 정서와 현실과 관념이 그것이다.



*정서를 소재로 하는 詩


시의 소재 가운데 비교적 흔하게 사용되는 것이 정서적 세계이다. 서정시의 본질은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써 표출하는 데 있다. 시인의 감정은 추상적 이거나 우연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니라 시인이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가 쉽다.

숯검정을 칠한 듯 몸이 온통 꺼어먼 혈거인, 몸집이 우람하고 힘도 세지만 눈알에는 또록또록 겁이 박혀 있는 혈거인. 짐승같이묻혀 사는 동굴 속에서 오랜만에 그가 밖으로 나와 시야에 무한정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과 푸르디 푸른 녹음이 고요한 산중에 밀교의 성찬처럼 가득히 펼쳐져 있음을 보았을 때!

아, 그때 그의 마음 속 깊숙이 매장되어 있던 기쁨의 원석들은 뇌관을 얻어 맞은 폭약, 그 순식간의 발파로 터져서 그 산협을 향하여 참을 수 없이 분출 하는 희열을 토해 내며 발성하였다.(힝히, 힝히야, 힝야!)

이 돌연한 야만의 웃음소리가 익을 대로 무르익은 산의 고요의 정수리에 비수처럼 꽂히자 일대의 원시림이 품고 키우던 뭇새들이며 산짐승들은 놀라 후두둑 후두둑 뛰쳐 달아나고, 맞은편 계곡에서는 또 다른 혈거인이 살고 있는 듯 이 희열에 찬 웃음을 따라 흉내내는 것이었다.
(힝히, 힝히야, 힝야!)

거대한 숲의 덩어리가 이렇듯 단순한 기쁨의 탄성을 듣고 놀라기란 실로 모처럼의 일이었다.

- 이수익, <단순한 기쁨> -

<단순한 기쁨>은, 이수익의 전체 시의 주조를 형성하는 비애나 슬픔의 미학이 잘 드러나 있지 않아서 그의 시 가운데 방계에 속하는 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가 그의 전체 시들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주목해서 살펴보면 단순한 기쁨이란 슬픔의 역설적 표현임이 대번에 드러난다.
몸집이 우람하고 힘이 센 혈거인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 그대로이다. 인간의 능력이란 거의 무한한 것이어서 특히나 과학분야는 발전 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의 눈알에는 또록또록 겁이 박혀 있다. 인간은 과학의 힘을 빌려 태산도 옮겨놓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과학과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인간들로부터 소외되고 고립된다. 그는 자연으로부터도 소외된다. 자연은 그를 낳고 길러준 어머니와 같다. 자연은 무한한 생명력을 지닌다. 그러나 현대인은 자연의 생명력을 알 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것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과 같다. 자연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고 겨울잠을 자는 짐승처럼 도시에서만 살아가는 시인이 산을 찾았다. 자연을 알지 못하고 도시에서 사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도시인은 짐승이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실로 오랜만에 산을 찾은 그의 앞에는 자연의 햇빛과 녹음이 밀교의 성찬처럼 펼쳐져 있다. 현대인이 자연을 찾는 것은 금지된 신을 섬기는 것만큼이나 불경스런 행동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자연과 어울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도 그 자연스러운 행동이 오히려 불경이 되어버린 모순된 상황이 슬픔의 단초를 보인다.
풍성한 자연의 축복 앞에서 시인은 마음 속 깊숙히 보존되어 있는 기쁨의 탄성을 질러댄다. 실제로 그 소리는 야호-하고 외치는 소리였겠지만 시인의 귀에는 '힝히, 힝히야, 힝야!'하는 야만의 웃음소리로 들린다.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이 시인의 가슴 속에 깊숙히 매장되어 있는 기쁨을 끄집어내는 자연과 이간의 교호가 실로 오랜만에 이루어진다. 그 웃음소리가 참을 수 없이 분출되는 희열인 것은 원시의 생명력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거스를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시인은 희열을 토한다.
산은 고요가 무르익을 정도로 오래도록 고요하였으므로 이 야만의 웃음소리는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이다. 원시림이 품고 있던 뭇새들이며 산짐승들도 오랫동안 인간의 자취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인간의 소리를 낯설어 한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과 같은 자연물이기 때문에 후두둑 후두둑 뛰쳐달아남으로써 시인의 웃음소리에 화답한다. 그것은 잔치집에서 경험하는 부산스러움과도 같다. 시인의웃음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면 얼마나 맥빠졌을 것인가. 그것에 더해 맞은편 계곡에서 또 다른 혈거인이 야만의 웃음소리에 화답을 한다. 그 웃음소리는 물론 시인이 지른 소리가 메아리로 되돌아 오는 것이지만 시인의 귀에는 산이 화답하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이렇듯 시인이 자연을 인격화하는 것은 곧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자연의 교호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수긍하는 데에까지 이른다.
거대한 숲의 덩어리가 이렇듯 단순한 기쁨의 탄성을 듣고 놀라기란 실로 모처럼의 일이었다고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고백하고 있다. 거대한 숲의 덩어리란 숲, 즉 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원시림이 품고 키우던 뭇새와 산짐승들, 그리고 맞은편 계곡의 또 다른 혈거은(또 다른 혈거인이란 야만의 웃음소리를 낸 시인 자신이다)을 포함한다. 시인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도 모른 채 기쁨의 탄성을 내지른다. 그러자 그 탄성은 산의 고요의 정수리에 꽂히고(그러니 산은 얼마나 놀랐을까)이어 산새와 산짐승이 놀라 달아난다. 시인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명을 받아 탄성을 지르자 자연은 시인의 찬사에 떠들썩하게 화답한다. 그런데 자연가 인간의 교호는 단순히 교호로 그치지 않는다. 시인이 내지른 기쁨의 탄성은 메아리가 되어 시인에게 되돌아옴으로 해서 시인 또한 그 소리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시인도 거대한 숲의 덩어리에 포함되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교호가 결국 자연과 인간의 일체가 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른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자연의 아름다움(자연)→기쁨의 탄성(인간)→고요한 산, 산새와 산짐승이 그 소리를 듣고 기뻐 화답함(자연)→시인 또한 기쁨을 느낌(인간)→인간과 자연이 숲의 덩어리를 이룸(인간과 자연이 일치됨)

인간과 자연이 일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둘이 애초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을 모태로 하고 태어났으며 자연의 손에서 자라났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원시의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다. 그 생명력은 과학문명이 발달한 현대에 이르러서 인간이 삶을 살아나가는 동력으로서 작용하지 못하고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묻혀 있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그 둘이 합일을 이룬 것이 실로 모처럼의 일이라는 시인의 발언에서 우리는 어떤 슬픈 어조를 느낀다. 자연스러운 일상사가 되어야 할 일이 특별한, 실로 오랜만의 일이 되었고, 따라서 그 단순한 기쁨 또한 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귀한 것이 되어버렸따. 멸종의 위기에 놓인 천연기념물과도 같이, 자연이 갖는 원시의 생명력에 몸담음으로써 느끼는 인간의 기쁨은 점점 사라져간다.
단순한 기쁨의 이면에 배어 있는 슬픔을 시인은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지만 그 슬픔을 직접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시에서 슬픈 빛을 띤 기쁨이라는 희귀한 정서를 맛본다. 이러한 정서는 시인이 우연히 체험한 자연스러운 정서이며 시의 주된 소재가되었다.



-펌-

출처 : 내 고향 정자나무
글쓴이 : 촛불잔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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