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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난해(難解) 詩에 대한 소고(小考)

麗尾박인태행정사 2014. 9. 5. 13:19

난해시(難解詩)에 대한 소고(小考)

 

                 

                                                                   개동(開東)

 

*아마 8여 년 전에 쓰고 중간에 퇴고를 거쳤는데 찾지를 못한 건지 흔적이 안 보여 다시 올려봅니다.

 

 

 

 

시란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써야 한다는 말은 시를 결코 쉽게 쓰라는 말은 아니다. ‘쉽게’라는 기준은 시인이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감동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지 무성의한 창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난해시라고 하면 일반 독자들이 해석하기 어려운 시를 말하는데 이는 무성의한 창작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시는 문학의 범주에서 독자나 당대현실은 없고 작자와 작품만 있는 것이다.

 

공개 되었을 때 범수필에 속하기는 하나 엄격한 의미에서 일기는 문학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데 이는 독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자 자신만 아는 난해시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난해시는 작자에게는 쉬웠을지 몰라도 독자들에게는 되레 혼란을 주고 이해할 수 없는, 다시 말하자면 시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어떤 형식이든 문학은 내보인다는 점에서 일기와는 다르다.

 

수필이나 소설과는 달리 압축과 함축을 기본으로 하는 시는 시인의 창작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아전인수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시라면 결코 좋은 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이것이 바로 난해시이다.

누가 말했듯이 ‘중학생 정도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를 탓하는 것은 그 글을 왜 독자 앞에 내놓았는지를 자신도 모른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 모든 시가 잘못되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독자를 일일이 붙잡고 해석해 줄 의향이 없다면 독자의 가슴에 가 닿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천재시인’과 ‘극단적 관념주의’라는 극단적 평가를 받고 있는 이상(李箱) 시인의 삶에 대해서는 대체로 알고 있으나 그의 대표작인 [오감도]에 대해서는 아직 그 누구도 명확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를 천재시인이라 칭송하는 측은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파격성에 그 의미를 두었을 것이고 반면 ’극단적 관념주의자‘로 폄하하는 쪽은 그의 삶의 행적들에 그 무게를 두었을 것이다. 어쨌든 [오감도]라는 작품만 두고 봤을 때는 시인이나 독자 모두 불행하다고 해야 것이다. 난해시의 대명사로 지칭(指稱)되는 것이 결코 찬사가 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모방이라고 하여 모든 예술을 <모방의 양식>이라고 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모방은 모든 문화예술분야에 널려있고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것도 모방이라고 해야 하는가? 

최근 이상(李箱) 시인의 서체를 모방한 작품을 만난 적이 있다. 여기서 모방이라는 것은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따위의 의미 없는 것을 말하는데 사실 ‘모방’이라는 단어를 부여하는 것조차 민망하다.

시에 대한 정의는 아직도 애매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맞춤법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그러나 원칙이 중요하지만 필자는 띄어쓰기가 다소 서툴어도 메시지가 묻어 있는 작품을 선호한다. 물론 필자가 선호한다고 해서 그 작품이 꼭 좋은 작품일 수는 없다. 하지만 메시지가 와닿는다면 적어도 난해시는 아니기 때문이다. 맞춤법이 몇 군데 틀렸다고 그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즉 단순 실수라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적허용(詩的許容)의 범위는 맞춤법에서부터 비롯된다.

 

산문체가 주류를 이루는 현대시에 대해 난감해 하는 독자들을 만나본 경험이 있는데 한결같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고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대답하기가 난감했던 것이 솔직히 필자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운문체라고 모두 쉽고 산문체라고 모두 어려운 것은 아니겠지만 요즘의 시들은 왜 어렵게만 보이는 것일까?

 

우리는 사람 냄새라는 말을 자주한다.

 

물론 창작을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독자의 입장에서 다소 난해한 작품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의도적으로 난해한 글을 만드는 것은 독자에 대한 기만(欺瞞)이다. 난해시는 독자가 감당해야 할 숙제가 아니라 시인이 창작과정에서 녹여주어야 하는 기본 예의이다.

난해시에서는 사람 냄새를 맡을 겨를이 없다.

 

작자의 창작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난해시를 쓰고 안 쓰고는 본인의 자유일 수 있으나 이를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순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고혈을 짜며 어렵게 창작한 시는 대체로 읽기가 쉽다. 메시지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난해하다는 것은 쉽게 쓴 어려운 글을 말한다. 

 

이해가 쉽지 않다는 것은 메시지를 분간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나름대로 고뇌했을 창작의 결과물이 일반 독자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것이라면 그 불행은 일반 독자의 몫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쉽게 읽히고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데 어려움이 있다.

 

 

시인은 운명이다.

누구를, 무엇을 위해 쓰는가?

밤잠을 설치며 지우고 다시 써도 아침이면 아닌 것을 어쩌랴.

그렇더라도 독자를 기만하고 무시할 그 어떤 권한도 시인에게는 없다.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출처 : 개동의 시와 수필
글쓴이 : 개동시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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