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휘파람 (외 1편)/ 최문자
휘파람 (외 1편)
최문자
암 병동 베란다에서 한 청년이 휘파람을 불고 있다
저런 휘파람에 취해서 휘파람을 따라한 적이 있다
길을 걷다가 발을 멈추고
휘파람 때문에 휘파람 속으로 들어갔다가
휘파람에서 나와 보니
간다는 말도 없이
악보와 함께 휘파람은
바다를 건너갔다
빈집 같은 몸에서 몇십 년 둥둥 떠다니던 휘파람 소리
지금,
췌장암 말기 청년의 심장에서 다시 그 소리가 난다
어둠이 될 그 높은 음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파람 숨 마디마디 피가 고인다
아무리 닦아도 고이는 피 같은 음절
지붕으로 보이는 암병동 베란다
뭉텅뭉텅 살아 있는 시간들이 빠져나간다
허공에 걸려 있다 죽음의 음역
서부역
옛날에는 동쪽에서 그를 기다렸다
난해한 책을 끼고 그가 내려오던 계단을 향해 서 있었다
지금은 세상 전부가 서부
없어진 방향이 그리웠다
사랑의 절반은 반대 방향에서 기다리는 것
자작나무 숲길을 끝까지 걸어가도 못 만나는 것
피고도 남은 꽃 위 바람 어디쯤
한 번도 태우지 못한 생풀 타는 연기 오른다
매워서 잡지도 놓지도 못하고 눈물로 쓰라렸던 얼굴
지금은 서부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시집『사과 사이사이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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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자 / 1943년 서울 출생.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및 같은 대학교 총장 역임. 시집『귀 안에 슬픈 말 있네』『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울음소리 작아지다』『나무 고아원』『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사과 사이사이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