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진도의 삼별초
1270년 8월 19일(740여년 전) 삼별초군의 함대 1,000여척의 배가 조용한 벽파 항(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들어온다.
고려사 기록: <1270년(원종11넌) 8월 19일에 진도에 입거 도성으로써 용장성을 쌓고 궁실 등을 조영했다.>
군내면 용장리에 터를 잡은 삼별초군은 왕으로 추대된 원종(元宗- 고려 제24대 왕으로 1259- 74년까지 재위)의 6촌인 승화후 온(承化侯 溫)이 1271년 5월 여몽연합군의 공격으로 의신면 논수(論首)골(동)-지금의 의신면 침계리 사하마을- 에서 최후를 맞으며 9개월여에 걸친 진도에서의 대몽항쟁과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꿈을 접는다.
* 목숨을 의논(논수-論首)한 군사재판이나 군 참모회의가 열렸던 동네가 논수동이다.
전시(戰時)상황에 절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관용이 끼어들 여지가 적었을 것이다.
온 왕은 이 먼 고장에 몸을 누인다.
왕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 양편으로 붉은 동백꽃이 무리지어 피어있고, 왕 무덤 재 고개길섶에는 녹음(綠陰)이 짙어만 간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간 진도 인들의 넋은 어디쯤을 헤매고 있을까.
삼별초군과 함께 희생된 진도 민(民)들의 핏물이 내를 이뤘다는 핏기내(川) 마을(지금의 의신면 사천리) 들녘에는 노란 유채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데.......
고려 원종 11년(1270년) 고려가 몽고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환도를 강행하자 이에 불복한 삼별초군이 강화에서 황해(黃海)를 건너 진도로 온다.
배중손(1270-1271) 장군은 용장산성(사적 제126호)을 쌓고 이 섬에 자리를 잡고 김통정(1271-1273)은 제주로 근거지를 이동한다.
* 용장산성(사적 제126호): 용장리 뒷산 서남쪽에 위치한 토성(사적 제126호)으로 둘레가 약 13Km에 이르며 개성 송악산 만월대 왕궁터와 같은 9단(段)의 석축기군(石築基群)과 건물지(建物址)가 남아있다.
* 이후 삼별초는 제주. 장흥. 나주를 거쳐 전주, 배를 타고 남해 인근 육지와 김해, 동래지역으로 진출한다. * 삼별초: 고려 최씨 무인정권의 특수 사병부대로 고종 6년(1219년) 최충헌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가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최씨가(家)의 정치적 권력유지를 위해 야별초(夜別抄)를 만들어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나뉘며, 이후 신의군(神義軍 몽고군의 포로였다가 탈출해 온 군사들)을 포함하여 삼별초라 총칭하며 강력한 전투력을 갖는다.
몽고제국(징기스칸에서 손자 쿠빌라이칸)의 침략으로 개경정부는 1232년 강화 천도(江華 遷都)를 하지만 몽고의 힘에 밀려 개경으로 환도하고 속국이 된다. 삼별초는 반발하여 1270년(원종11) 봉기(蜂起)하여 왕족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부(官府)를 설치. 정권을 수립하여 1,000여척의 함선으로 1270년 8월 19일에 진도 벽파에 도착(강화 출발은 동년 6월 3일)하여 용장(성)에 자리를 잡는다. 고려사 기록: <개경으로 환도 할 것을 명하여 방을 붙였으나 삼별초는 따르지 않았다. 삼별초는 그들의 이름이 적힌 문서가 몽고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더욱 반역하는 마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 진도를 선택한 이유 거리, 선박이용이 용이, 몽고군이 기피하는 섬이라는 점, 농·수산물이 풍부하여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 경상도와 전라도의 조곡 수송선이 지나는 해상 교통의 요충지로 전략상 유리, 최씨 무인정권의 연고지였음을 들고 있다.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의 공격
- 중군(고려 김방경과 몽고 흔도)의 정면인 벽파진을 공격
- 좌군(몽고 장수 홍다구)- 노루목 상륙- 지막리, 오산리 방면- 두시난골- 용장성의 뒤편 골짜기로 진격.
- 우군(고려 김석-金錫과 몽고 장수 고을마-高乙麻)- 군직구미 상륙- 용장성 동쪽 난곡으로 진격.
왕 온(溫)은 패주하던 중 지금의 왕무덤재 일대에서 추격부대(홍다구)에 잡혀 참살당하고 김통정은 금갑포에서 제주도로 향한다.
- 왕 온(溫)은 고려 후기 왕족으로 영녕공 준(永寧公 綧)의 맏형이다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진도에서 아들 환(桓)과 함께 참살되었으며, 묘는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도 지정 기념물 제126호)에 있다. 매년 5월 15일 진도문화원 주최로 능제를 지내고 있다.
* 왕무덤재- 온왕이 죽어 묻힌 곳으로 가는 언덕(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왕 온의 묘 안내판 뒤편)
* 진도 아녀자, 궁녀, 관아에서 부리던 종 등은 몽고군에 잡혀가느니 죽음을 택해 돈지벌(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큰 둠벙(삼별초 궁녀둠벙)에 몸을 던진다.
고려사 기록
<몽고는 군사가 부족하니 문무관 산직과 백정, 잡색 및 승려까지 검열하여 충당하라>
<고려 정부 4품관 이상 집에서는 종 1명씩을 내어 김방경 혼도· 홍다구 등과 함께 진도 토벌 작전에 들어갔다.>
<처음 관군이 자주 적과 싸워 이기지 못하니 적이 업신여겨 방비를 하지 않았는데 관군이 협공 작전으로 냅다 치니 적이 처자를 버리고 도망갔다.>
고려사 기록: <1270년(원종11넌) 8월 19일에 진도에 입거 도성으로써 용장성을 쌓고 궁실 등을 조영했다.>
<김방경이 몽고 원수 아해와 군사 1천을 거느리고 진도는 쳤는데 그때는 적의 기세가 매우 성하여 적에게 항복했다.>
<적 배중손은 함께 갔던 몽고 사신을 억류하고 황제의 조서를 박천주에게 돌려주면서 말하기를 ‘이 조서는 받을 수 없다.
다만 우리 국서(國書)라면 명하는대로 따르겠다고 말했다.>
* 삼별초는 진도 정부만이 정통고려 라고 명명(命名)했다.
일본 동경대학 사료 편찬소에 진도 정부의 외교문서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 不審條條)가 보관되어 있다.
* <고려사>를 편찬한 역사가들에 의하여 주동자인 배중손을 반역전(反逆傳)에 넣고 <삼별초의 난>으로 기록했으나,
1977년 이후 삼별초 호국정신이 재평가 되면서 <삼별초의 항쟁>으로 기록되었다.
<관련 자료들>
* 군내면 녹진리 망금산: ‘조선보물고적 조사자료’에 삼별초성이라 기록되어 있음 (여몽연합군이 삼별초 총 공격을 단행했을 시 상륙지임)
* 금갑진성: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국가지정 사적 제127호 )
* 배중손(裵仲孫)
* 배중손 장군 사당: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매년 6월 15일 제사를 지내고 있음)
- 배중손의 출생지를 진도로 보는 견해가 있다.
고려사 기록: <역적들의 고향이었던 상주, 청주, 해양, 진도 등의 고을 이름을 격하시킬 것을 청하였다.>
- 고려 때 진도군 임회현의 토착 성씨가 배씨였다.
- 최씨 무인정권이 소유한 대규모 농장이 진도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이점- 삼별초 대장 격인 배중손의 죽음에 대하여는기록이 없다.
* 1273년(원종 14년) 김방경이 혼도와 함께 병력 1만명과 전함 160척을 끌고 제주에 들어가서 삼별초를 붕괴시켜(4월) 삼별초의 4년 항쟁은 끝이 난다.
* 용장사 석불좌상(유형문화재 제17호)은 삼별초가 용장산성을 쌓을 때 조성한 것으로 전해오는 약사여래, 일광보살, 월광보상의 삼존불이다.
중앙의 약사여래는 4각 연화 좌대에 놓여 져 있으며 어깨너비 27Cm, 좌불 높이 2m로 양편으로는 일광보살, 월광보살이 입상되어 있다.
남도석성(南桃石城- 사적 제127호.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149)
삼별초군이 진도에서 머물면서 해안 방어를 위해 쌓은 것이라 하며, 삼별초군이 제주도로 건너갈 때도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온다.
조선 초기에는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해 수군을 파견하였으며 당시 이곳의 지명이 남도포(南桃浦)였으며, “남도포 수군만호진성”이라 하였다.(만호-萬戶가 책임자).
기록에 의하면 남도포에 만호가 처음 생긴 것은 조선 세종20년(1438) 정월로 현재 남아있는 성은 세종 20년 이후에 쌓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의 둘레는 610m, 높이 2.8m∼4.1m에 이르며 성문과 옹성도 형태가 뚜렷하다.
그날의 함성이 아스라이 들리는 듯도 합니다.
밝은 햇살아래 신록이 무척 아름다운 날입니다.
고군면 용장리 마을, 복원중인 용장산성터, 용장산성 홍보관, 용장사, 고려항몽충혼탑(高麗抗蒙忠魂塔)입니다.
사진 찍은 날: 2011. 4. 21 ∼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