麗尾박인태행정사 2009. 7. 2. 23:07

 

<비나리 시극 대본>

마스크 사내들


<등장인물 및 배역>

왕백수 - 08김민지 (작가지망생, 룸펜)

선배 - 08한아름 (공무원 고시 준비 중, 역시 룸펜)

후배 - 08김혜린 (졸업을 앞둔 4학년)

엄친아 - 08노나리 (왕백수의 친구,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성공가도를 달림)

꼬마 - 08진혜민 (오락이 낙인 불우한 가정의 아이)

면접관 - 07정다운(대기업 신입사원 면접담당)

면접지원자 - 중국인 유학생 (외국어 능통함)

담뱃가게주인 - 중국인 유학생

고깃집 사장 - 08혜린

*시 낭송 - 최금진「팝니다, 연락주세요」

《 1막 》

#뭔가 날카롭게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에 이어 무대가 환해진다. 무대 중앙에는 백수가 모로 누워있다. 마스크를 쓴 사내들이 일렬로 지나간다.

백수: (누워 있다가 음악이 흘러나오면 꿈틀거리다 배를 움켜쥐며 일어난다. 잔뜩 찡그린 표 정으로 쿨럭거리며) 으으… 징한 놈들… 마취는 해줘야 할 거 아냐…으으… (객석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온다.) 아아, 좀 더 자고 싶어. 난 사실 조금 행복한 꿈을 꾸 고 싶었을 뿐인데…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암전

백수: (후레시로 얼굴을 비추며, 음울한 표정으로) 여기가 제 방입니다. 좀 비좁긴 하지만 생각보다는 지낼 만 하답니다. 물론 저도 풀옵션 원룸에서 살고 싶지만 현실은 시궁 창이고, 무엇보다도 전 백수니까요. (휴대폰이 울린다.)

선배: (껄렁거리는 목소리로) 야! 왕백수! 어디냐?

백수: 집이지, 어디긴 어디야. 왜?

선배: 또 방구석에 처박혀 있구만. 애들 데리고 술이나 빨게. 나와.

백수: 형은 어디야? 형이 쏘는 거지? 낄낄. 어어, 지금 나갈게.

#백수는 무대 왼쪽 책상 밑에서 기어 나오고, 선배는 무대 중앙으로 이동해 만난다. 무대 중앙에 마련된 술자리에 여자 후배가 앉아 있다. 백수와 선배가 후배 양쪽으로 앉는다.

백수: (조금 찔려하며 어색하게) 이야~ 우리 혜린이도 있네? 하하하.

후배: (한심하다는 듯 퉁명스럽게) 오빠 왔어요? 요새 통 보기가 힘드네요? 그때 빌린 돈 언제 갚을 거예요?

선배: (술잔을 내밀며) 야야, 쟤 사정도 좀 봐줘야지. 백수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러냐, 넌. 요새 일자리 알아보고 있다잖냐.

후배: (치뜬 눈을 내리깔며) 하… 취직이라… 하긴 나도 이젠 졸업반인데, 뭘 해야 될 진 모 르겠고. 휴학을 할까? 엄만 빨리 시집이나 가버리라는데.

백수: 요즘엔 시집이 아니라 취집이란다. 취집. 시집가는 게 취업이 되는 세상 아니냐.

선배: 우울한 소린 집어치우고. 넌 요새 글 좀 쓰냐?

백수: 글은, 젠장.

후배: 왜요? 오빤 글 쓰는 거 아님 시체잖우. 흐흐.

백수: 글 쓰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젠장.

선배: 이 새끼, 너 변했다? 언제는 시 아니면 죽을 것 같다더니. 나 공무원 시험 본다니까 무시 했잖아. 문학청년은 어디 가셨나?

백수: (술잔을 들고) 됐고. 술이나 마셔.

#술잔을 부딪치고, 후배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부른다. 서서히 암전. (핀 조명) 백수가 술에 취한 선배를 업고 무대 중앙에 서 있다.

선배: (업힌 채 몸을 요동치며 소리를 지른다) 야!! 한 잔 더해!! 집에 들어가기 싫어!! 나 벌 써 3년째 이러고 있는데. 뭐 그깟 공무원이 대수라고!! 엄마 얼굴 보기 미안해 죽겠 다. (박명수 톤으로) 야!! 야!! 야 이 멍충아!! 한 잔 더해!!

백수: (관객을 바라보며, 체념한 듯) 이 형은 대학 시절 저랑 함께 글 쓰던 사람입니다. 부 모님 성화에 못 이겨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죠. 예전에는 그래도 꽤 잘나갔었는데…

선배: (입을 틀어막으며) 우욱. 우욱.

백수: 젠장! 토하지 마!! (선배를 바닥에 패대기친 다음 책상으로 끌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눕는다.) 선배만 아니면 그냥. 으휴.

#암전.

*시 낭송 - 기형도「대학시절」

《 2막 》

#(핀 조명) 책상 아래, 선배와 백수가 서로 엉켜 널브러져 있다. 선배는 코를 골며 자고 있다. 백수는 머리를 싸쥐며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다. 2막에서부터 3막까지 백수는 쉴 새 없이 몸을 긁는다.

백수: (느릿느릿 바닥을 더듬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아, 담배가… 담배가… 없네. 으으.

#(핀 조명) 걸어가는 백수를 비춘다. 백수는 무대 오른쪽 담뱃가게 앞에서 멈춰 선다. 그 옆에 비치된 오락기 앞에서 꼬마가 오락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백수: (갈라지는 목소리로) 아저씨. 디스 한 갑이요. (느릿느릿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한참만 에 주머니에서 손을 뺐을 때 손에는 버섯이 들려있다. 자신의 몸을 킁킁거린 다음 망 연히 버섯을 바라본다.)

담뱃가게 주인: (코를 막고, 아래위로 훑어보며) 별 거지같은 놈을 다 보겠네. 퉷.

백수: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침묵. 얼굴은 개그콘서트의 안상태처럼 우습게 돌려가며) 난… 담배 사러 왔을 뿐이고. 주머니엔 곰팡이 좀 피었을 뿐이고. 난 거지같은 놈이고. (옆에 오락을 하던 꼬마아이를 힐끗 쳐다보며 힘없이 버섯을 떨군다.) 내게도 동전 몇 닢에 행복하던 시절이 있었더랬지. 후…

꼬마: (게임을 하다 말고 버섯을 주워 후후 분 다음 주머니에 넣는다.) 음식은 함부로 버리 는 거 아니에요.

백수: (황당해하며) 응? 뭐?

꼬마: 우리 엄마가 음식 버리면 지옥에 가서 그거 다 먹어야 된댔어요. 염라대왕님이 다 비 벼서 먹으라고 한댔어요.

백수: (놀리듯이) 크크크. 난 비빔밥 좋아해. 라면 먹기도 이젠 지긋지긋하거든. 넌 매일 엄 마가 해주는 밥 먹으니까 좋겠다. 그 때가 좋은 줄 알어. 임마. (꼬마의 머리를 부빈 다.)

꼬마: (머리를 흔들어 손을 뿌리치며 울먹거린다) 썅! 나 엄마 없단 말야! 거지같이 생긴 게, 뭘 안다고 지껄여! 우리 아빠는 막노동해도 아저씨보단 훨씬 나! 백수같이 생긴 게. 씨이. 지옥에나 가버려!!

백수: (충격 받은 듯 한참 서 있다가 꼬마 옆에 쭈그려 앉는다.) 그래… 아저씬 백수야… 아 저씨가 미안해. 근데 너 이렇게 오락만 하면 커서 아저씨처럼 된다?

꼬마: (울면서 달려 나간다.) 이…이거 뭐야, 무서워! 엉엉.

#백수가 걷는 방향으로 핀 조명 이동. 선배가 누워 있는 책상 위에 앉는다.

백수: (발로 선배를 툭툭 차며) 형, 일어나. 아, 좀 일어나라고.

선배: 네. 이병 김선배.

백수: (연민의 눈길로 바라본다. 악몽이 떠오른 듯 도리질을 치며 눈을 감는다.)

선배: 으음…여긴 어디냐?

백수: 안드로메다.

선배: (한심하단 듯 쳐다본다. 몸을 일으켜 책상에 걸터앉는다.) 야, 해장은 해야지. 너 돈 있냐? 어제 소주 사고 나 돈 하나도 없는데.

백수: 백수가 무슨 돈이 있어? 아… 잠깐만.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어어, 엄친 아. 오랜만이다! 광주 내려왔다며? 술 한 잔 해야지! 어어, 그래. (전화 끊는다.) 학교 다닐 땐 그렇게 찌질대더니. 역시 부모를 잘 만나야 된다니까. (잠시 뒤)

친아: (거만한 걸음걸이와 표정, 손을 들며) 여어, 선배 오랜만이에요. 왕백수! 잘 살았나! (백수와 선배는 엄친아의 세련된 옷을 만져보며 탄성을 지른다.)

선배: 오, 너 많이 용 됐다. 몰라보겠는데?

백수: 그러게 말이에요. 야, 너 술 한 잔 사라!

친아: (둘이 만진 어깨와 팔을 털어내며) 야, 좀 씻어라. 씻어. 왜 이렇게 거지 같이 하고 사 냐. 쪽팔리지도 않냐? 안 그래요, 선배?

선배: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꽉 쥔다.)

친아: (백수에게 귓속말로) 선배랍시고 저런 인간이랑 어울리니까 네가 요모양 요꼴이지. 너 한테 도움 되는 놈이랑 놀아. 글 쓸 땐 어렸을 때고, 이젠 살 길 찾아야 하잖아? 내 가 친구니까 이런 말 해주는 거야. (선배를 보며) 술이나 한 잔 하러 갈까요? 선배 님?

선배: (모멸감으로 어쩔 줄 몰라한다.)

백수: (헛기침하며) 으흠. 우선 밥부터 먹으러 가자.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네.

#무대 중앙으로 이동. 고기집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친아: (손을 들고) 사장님! 여기 항정살 3인분 주세요.

사장아줌마: 네. (쟁반을 들고 바로 나온다.)

백수: (고기가 나오자 허겁지겁 달려든다. 선배도 먹느라 정신없다.)

친아: 너 아직도 글줄이나 쓴다고 놀고 있냐? 청년실업? 웃기지마. 그거 다 지들이 못나서 그런 거지 누굴 탓해? 너나 선배나 쫌만 열심히 하면 될 걸. 학교 다닐 때 그렇게들 뻘짓만 하더니.

선배: 야, 넌 안 먹냐?

백수: 그래, 너 좀 먹어. 고기 진짜 맛있는데? 맨날 대패삼겹살만 먹다가 항정살 먹으니까 위장이 춤을 추는 것 같네. 허허. 목구멍에 때 좀 벗겨지겠어. 크하하.

친아: (팔짱을 끼며) 나야 뭐, 요즘 관리 좀 하느라구. 저녁엔 닭 가슴살 스테이크랑 양상추 샐러드밖에 안 먹어. 난 잘나가는데다 집안도 빵빵하고 잘 생겼지만, 관리는 꾸준히 해 줘야지. 하하. 여자들이 아주 그냥 환장을 해. 한번만 만나주라고. 결혼하자고. 우 리도 이제 결혼 생각 해봐야지. 그나저나 취직자리는 좀 알아봤냐?

선배: 난 공무원 시험 올해까진 매달려봐야지.

백수: 난… 글 쓰고 싶은데… 돈은 또 벌어야겠고… 후…

친아: 언제까지 그런 헛된 꿈이나 꾸면서 살 거야? 우리 엄마 회사 이번에 신입 사원 모 집하니까 거기에 원서 한 번 내봐. 내가 엄마한테 말 해둘 테니까. 언제까지 애들처 럼 꿈이니 뭐니 하며 살 거야? 현실을 직시해. 한심해 보이니까.

백수: (손을 번쩍 들어) 아줌마!! 여기 잎새 한 병!!

#암전.

*시 낭송 - 박진성「목숨을 걸다」

《 3막 》

#면접실. 면접관 한 명이 앉아 있다. 그 앞으로 백수, 선배, 면접자 한 명이 나란히 앉아 있다. 면접관은 냉철한 어조로 질문한다. 백수는 마스크를 쓰고 쿨럭댄다.

선배: 야 너 뭐야, 면접 보는데.

백수: (마스크를 내리며) 어제 술 먹고 감기 걸렸어. 쿨럭. 쿨럭.

면접관: (의자에서 일어나 세 명의 주위를 서성인다. 선배에게 가까이 다가가) 김선배씨. 영 어로 자기소개 한 번 해 보세요.

선배: (몸을 움츠리고 몹시 더듬거리며) 네. 암… 암… 마이 네임 이즈 선배 킴. 암고나 메 큐뭅 하… 하우 아 유? 아임 파인 땡큐. 앤드 유?

면접관: 네네. 됐습니다. 그 다음. 에… 유학생씨. 혹시 외국어 할 줄 아는 거 있습니까?

유학생: (자신감 있는 말투로) 네. 중국어를 좀 할 수 있습니다.

면접관: 그럼 스테그플레이션에 휩싸인 한국의 경제와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자신 의 생각을 중국어로 대답해 보세요.

유학생: (유창하게) 쏼라쏼라.

면접관: 네. 훌륭하군요. 다음, 왕백수씨.

백수: 쿨럭. (긴장한 목소리로) 넵!

면접관: (지원서를 말아 손바닥을 두드리며)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합 니까?

백수: 쿨럭……다른 것보다, 쿨럭, 글을 쓰는 것을…….

면접관: 지금 현재는 대학을 졸업하신 상태시고, 토익은… 공란이네요?

백수: 네…쿨럭, 전 영어보다 한국말을 쿨럭 사랑합니…….

면접관: 하지만 이 시대에 외국어 하나쯤은 기본 아닙니까? 우리 회사는 세계화에 발맞출 수 있는 유능한 인재를 우선으로 뽑습니다만.

백수: 아… 예… 쿨럭, 하지만 저는, 쿨럭.

면접관: (말 끊으며) 됐습니다. 나가보시죠. 다음!

백수: (다들 무대 밖으로 나가고 백수는 연신 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온다. 그때 전화벨이 울 린다. 목을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는다.) 네. 네? 어머니가요? (무대 뒤로 달려 나간 다.)


#암전. 터미널 화장실. 백수가 변기에 앉아 있다. 타일에 붙은 전단지를 바라본다.

백수: (변기의자에 쭈그린 채 고개를 끄덕이며) 신장 삼천만원 매매. 쿨럭. 삼천만원… 삼천 만원… (바지의 추켜올리는 모션) 삼천만원이면 어머니 수술비용을 댈 수 있어…쿨 럭, 삼천만원이면… 삼천만원… (물 내리는 소리)

#백수가 천천히 무대를 한 바퀴 돈 다음 무대 중앙에 눕는다. 마스크를 쓴 사내들이 무대로 들어와 칼과 갖가지 연장들로 백수의 몸을 가른다. 이 때, 마스크들은 뒷모습만 보인다. 조금 과장된 모션으로. 1막 도입부에서와 마찬가지로 날카롭고 시끄러운 음향이 들린다. 암전.

백수: (후레시를 관객석을 향해 비춘 다음, 자신의 얼굴을 비춘다. 쓰고 있던 마스크를 턱밑 으로 내린다.) 저의 이름은 왕백수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좋아하는 음악 과 즐겨보는 영화의 장르는 무엇입니까? 어떤 류의 소설을 좋아하시나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요?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건 뭐죠?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당 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마스크를 쓰고, 후레시 끈다.)

*시 낭송 - 박장호「내 마음의 스키드마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