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제목은 거창합니다만;;;
일단 사건의 발단을 보시겠습니다.
-여송국(呂宋國)의 표류인(漂流人)을 성경(盛京)에 이자(移咨)하여 본국(本國)으로 송환(送還)시키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신유년 가을 이국인(異國人) 5명이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도착하였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오랑캐들의 말이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나라 이름을 쓰게 하였더니 단지 막가외(莫可外)라고만 하여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자관(移咨官)을 딸려서 성경(盛京)으로 들여보냈었는데, 임술년 여름 성경의 예부(禮部)로부터도 또한 어느 나라인지 확실히 지적할 수 없다는 내용의 회자(回咨)와 함께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그중 1명은 도중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그리하여 우선 해목(該牧)에 머루르게 한 다음 공해(公廨)를 지급하고 양찬(粮饌)을 계속 대어주면서 풍토를 익히고 언어를 통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가운데 1명이 또 죽어서 단지 3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표류되어 여송국(呂宋國)에 들어갔었는데, 그 나라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 그들의 방언(方言)을 또한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그런데 표류되어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용모와 복장이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問答)하니 절절이 딱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미친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차리고서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정상이 매우 딱하고 측은하였다. 그들이 표류되어 온 지 9년 만에야 비로소 여송국 사람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른바 막가외라는 것 또한 그 나라의 관음(官音)이었다. 전라 감사 이면응(李冕膺)과 제주 목사 이현택(李顯宅)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으므로 이 명(命)이 있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9년 을묘조(6월 29일)
-제주 목사(濟州牧使) 한정운(韓鼎運)이 치계(馳啓)하기를,
“지난 신유년 8월에 이국인(異國人) 5명이 본주(本州)에 표류해 왔는데, 글과 말이 모두 능히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같은 해 10월에 비국(備局)의 행회(行會)로 인해 저들 5명을 이자(移咨)하여 성경(盛京)에 입송(入送)하였는데, 5명 중 1명은 도중에 병사하였고, 대국(大國)에서 도로 출송(出送)하였으므로, 저 네 사람은 도로 본주로 돌아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을축년에 병으로 죽었고, 남은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조금 지각이 있으나 그 통하는 말이란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로 이해하기 곤란하고 그 배운 글은 어로(魚魯)를 분별하지 못할 판입니다. 그 나라에 대해 말을 하고 그 나라를 그려 보이는데, 언제나 ‘막가외(莫可外)’라 일컬으며 멀리 동남쪽을 가리켜 보입니다만, ‘막가외’란 나라 이름은 일찍이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유구(琉球)에서 표류해 온 사람에게 사정을 물을 적에 그 사람들이 유구의 표류인을 보고서 발광을 하며 소리를 질러대었으므로, 유구 사람이 모여 앉아 있는 곳에 불러들여 얼굴을 맞대게 했더니, 한참 동안 서로 보고도 처음에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조금 있다가 유구 사람 중에 궁평(宮平)이라 이름하는 자가 드러나게 알아차리는 기색이 있어 두서너 마디 말을 나누며 흔연히 서로 대면했는데, 이른바 막가외란 말에 그 사람이 넓적다리를 치고 뛰쳐나가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눈물을 비처럼 흘렸습니다. 유구 사람 통사(通事) 경필진(慶必進)이 그 사정을 궁평에게 물었더니, ‘임술년 경에 중국인 32명과 조선 사람 6명이 폐국(弊國)에 표류해 왔기에, 폐국에서 배를 정하여 양국의 표류인을 중국 복건성(福建省)으로 호송하였으나, 바다 가운데서 큰 바람을 만나 여송국(呂宋國)으로 표류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수초(水梢)로 같이 표류하여 그 나라에 다섯 달을 머물렀으므로, 그 나라의 사람을 대개 알게 되었고, 수로(水路)를 좇아 복건성으로 돌아가 복건성에서 각각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이 사람을 보고 이 말을 들었으니, 아마도 여송국의 사람인 듯합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듣고 보니 심히 기이하였습니다. 또 그 막가외의 국호(國號)를 물었더니, 답하기를, ‘이 또한 여송국의 관음(官音)으로 말한 것인즉, 아마도 그가 여송국의 사람임은 정녕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같이 실어 나라로 돌아가서 여송국에 전송(轉送)하라는 뜻으로써 여러 가지로 글을 써서 달랬으나, 다른 나라의 표류인은 싣고 가기 어렵다며 계속 거절하였습니다. 이제 유구 표류인의 문답으로 보건대, 여송에서 복건까지는 배가 서로 통하고 있음을 미루어 알 수가 있고, 이미 그 국호를 안 뒤라면 본국으로 돌려보낼 방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유치해 두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이번에 이치를 논하여 치계하니, 청컨대 머물러 있는 저 세 사람을 다시 이런 뜻으로 성경에 이자(移咨)하고 입송(入送)하여 본국으로 전송하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 유구 사람의 말하는 바로 말미암아 비로소 여송국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뜻밖이니, 기이하다 하겠다. 여송은 복건성과 대개 배가 서로 통하나 제주는 성경(盛京)으로 이미 곧장 부탁하는 전례가 없으니, 본국에 전송하는 등의 절차를 묘당(廟堂)에서 품지(稟旨)하여 분부토록 하라. 그리고 길에 올랐을 때의 고휼(顧恤)하고 양식을 주는 방도와 거느려 보낼 때 주접(住接)하고 간검(看檢)하는 절차를 혹시 털끝만큼도 소홀히 하지 말아서, 이방(異邦)에 기우(寄寓)한 종적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의 회유(懷柔)하는 뜻을 알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이른바 여송에 관한 사실을 여러 글에서 상고해 보았더니, 민장(閩漳)과 멀지 아니한데, 지금은 불랑기(佛郞機)에 병합된 바 되었습니다. 본디 통공(通貢)하는 나라가 아니라 마땅히 사신의 왕래가 없으니, 북경(北京)에 입송하여 본국에 전송(轉送)하는 것은 실로 난편(難便)하겠습니다. 또 임술년에 성경 예부(禮部)에서 이자하여 도로 보낸 일이 있었으니, 또 여송이란 이미 없었던 나라를 유구 사람이 우연히 인정한 말에 경솔히 의거하여 자문을 갖추어 성경에 보낼 수는 없습니다. 이번 절사(節使)가 가는 길에 역관(譯官)의 무리로 하여금 이 일을 가지고 예부에 상세히 탐지해 보고서, 만약 회송(回送)할 길이 있다고 한다면 그때 다스려 보내어도 또한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제주 목사가 보고한 바를 보건대, 같이 실어 나라로 돌아가 여송에 전송하라는 뜻으로써 글로 유구 사람에게 달래자, 저들이 비록 다른 나라의 표류인이라 하여 실어 가기 어렵다며 계속 거절하였다고는 합니다만, 이미 인근에 있는 나라라 또한 왕래하는 길이 있을 것이니, 이번에 만약 조정의 지위(知委)로써 다시 유구의 표류인에게 효유(曉諭)한다면, 마땅히 듣지 않을 수가 없어 일이 심히 편리하고 좋을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만약 아직도 바람을 기다리느라 출발하지 않고 있다면, 이에 의거해 거행할 것을 청컨대 제주 목사에게 분부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는데, 곧 유구 사람이 곧장 돌아간 일로 인해 붙여 보내지 못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7년 기묘조(8월 10일)
간단히 보면. 여송국 사람 5인이 표류해 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난관을 겪게 되죠.
하멜이 표류했을때는 박연(벨테브레)이라도 있었지만, 이번엔 당최 말이 통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니 난감했겠죠.
하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끝내는 청나라로 보내게 됩니다. 성경(盛京)은 바로 심양입니다.
그런데 청나라에서도 이들이 누군지 알지못하니 다시 돌려보내고, 이 와중에 여송국 사람 2명이 죽었습니다.
간신히 나중에야 유구 사람 궁평을 통해 여송국의 존재를 알게 되지만
이 매몰찬 유구 사람은 여송국 사람들을 그냥 놔두고 가버립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문순득이란 흑산도 사람이 이들의 의관, 형모를 알아보고 더구나 이들의 말까지 알고있었던 겁니다;;;
문순득은 어떻게 당시로서는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던 여송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말까지 알고 있었던 걸까요?
여송국은 오늘날의 필리핀이라고 합니다.
현재 필리핀의 공식 언어는 영어지만, 에스파냐의 식민지였으니 에스파냐어가 쓰였을 겁니다.
그리고 타갈로그 어가 공용 언어이고 각 지방마다 민족별로 100여개의 언어가 사용된다는군요.
타갈로그 어 역시 원래부터 공용어는 아니었고 마닐라 일대 민족의 말(우리로 치면 서울말 정도?)이었답니다.
즉, 수많은 섬들이 있는 필리핀 어디에 표류했는지도 알수없는 문순득이 말이 통했을 정도면,
어느정도 필리핀 내에서도 공통적으로 쓰이던 언어였을겁니다.
즉, 문순득은 에스파냐어를 배워온 것입니다;;;
'막가외'가 그 나라의 관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마리아'의 음역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아무래도 카톨릭 국가인 에스파냐의 식민지다 보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여송국 사람은 정말 운이 좋은 셈이죠. 백여개 다른 언어를 가진 민족들 가운데 하필 자기네
표류했던 사람을 만나 말이 통하게 되었으니...로또같은 확률이죠.)
위의 기록대로 문순득은 어디서 여송국 말을 배워온 것일까요?
문순득에 관한 다른 기록들을 보겠습니다.
-나주 흑산도 사람 문순득(文淳得)이 가경(嘉慶 : 淸仁宗의 연호, 1796~1820) 신유년 겨울에 서남(西南) 바다에 표류하여, 유구(琉球)ㆍ중산국(中山國)ㆍ영파부(寧波府)ㆍ여송국(呂宋國)ㆍ안남국(安南國)을 두루 구경하고 광동(廣東) 향산(香山) 모퉁이에 이르러 해외 여러 나라 큰 장사치들을 많이 보았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돈이 대개는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지금의 동전 한 닢 무게로써 은전 한 닢을 주조하여 동전 50을 당하고, 또 은전 한 닢 무게로써 금전 한 닢을 지어서 은전 50을 당하게 하되, 대ㆍ중ㆍ소 3층이 있도록 하면, 3종류의 금속이 총 9종류의 돈으로 되는바 참으로 9부환법이라 할 수 있겠다.
-경세유표(정약용) 권2
놀랍게도 정약용 선생도 문순득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중이었던 만큼, 그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했을 가능성이 높죠.
위 기록을 보면, 신유년 겨울에 표류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순조 1년(1801)입니다.
그리고 여송국 사람들이 표류해 온 것이 신유년 가을이니, 같은 해로군요.
이 불쌍한 여송국 사람들을 위해 문순득이 선택된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순득은 여러 지방을 둘러보는데 유구(오키나와), 중산국(이곳은 잘 모르겠습니다. 설마 중국 내륙의 중산국???)
영파부(강남 절강), 여송국, 안남국(배트남 일대)에 광동까지!!!, 그야말로 마르코 폴로가 부럽지 않은 대모험을 했군요.
또 다른 기록을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흑산도(黑山島) 백성으로서 남해에 표류하여 이리저리 헤매다가 이곳에 도착하여 관사에 머물고 있는 사람 넷이 있었다. 이날 밤 그들을 불러다가 그 전말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신유년 겨울에 물고기를 사기 위해 곡물(穀物) 약간을 배에 싣고 소흑산도에서 대흑산도로 갔다가 이듬해 정월 돌아오는 길에 바다 가운데서 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10일 만에 어느 한 항구에 닿으니 마침 어떤 사람이 물 건너편에서 영접을 하였는데 그 사람은 우리나라 말을 약간 알았습니다. 그에게 그 지방을 물었더니, 그곳은 바로 유리국(琉璃國)이었습니다.
조금 후에 관(官)에서 배를 검색하더니 곧 관청에 안접(安接)시키고 의식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10월 초에 그들의 연경 진공사(燕京進貢使)를 따라서 배를 출발시켰었는데, 10여 일 만에 또 바람을 만나 표류, 진공사의 배 두 척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던 끝에 어느 한 곳에 정박했더니, 언덕 위에 흰옷 입은 사람이 있다가 멀리 바라보더니 곧 달려왔습니다. 배에 같이 탔던 사람들은, 이제야 살아날 길이 있구나 하고는, 그를 따라간 자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한 사람이 바삐 돌아와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무리들 태반이 그들에게 피해를 당했다. 그래서 나는 도망해 왔다.’ 하기에, 드디어 그와 함께 바삐 배를 옮겨, 바다 가운데에 닻을 내렸으니, 정박할 곳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되풀이한 지 4일째 되던 어느 날, 갑자기 바다를 가로질러 달려온 자그마한 배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소주(蘇州) 사람으로서 상업(商業)을 하느라, 여기에 이르게 된 자들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드디어 그들의 힘을 입어 방옥(房屋)에 안접(安接)되고, 또 쌀을 무역하면서 서로 돕게 되었습니다. 이 지방이 어느 지방이냐고 물었더니, 일록국(日鹿國)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또 길을 떠나 15일 만에 사분지(沙分地)에 닿았으니, 이날은 바로 3월 소회(小晦)였습니다.
또 석 달을 가서 소주(蘇州)에 닿았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배에서 내려 육지로 갔는데 관가(官家)에서 공궤(供饋)해 준 것이 아주 좋았습니다.
10월 3일 소주에서 출발, 12월 4일 연경에 닿았더니, 예부(禮部)에서 의식을 급여하고 절사(節使)가 올 때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일행 중 두 사람은 다른 배에 탔었는데, 여태껏 이르지 않으니, 그의 생존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보면, 그들은 천하를 훌륭히 구경했다고 할 만하건만, 무식한 탓에 그것을 만분의 일도 기록하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표류된 사람의 성명은 즉, 문호겸(文好謙)ㆍ문순득(文順得)ㆍ박양신(朴亮信)ㆍ이백근(李百根)ㆍ이중태(李重泰)ㆍ김옥문(金玉文)인데, 문순득,김옥문은 여태껏 이르지 아니한 자들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들을 장하게 여겨, 술 한 잔을 가득히 부어 주었다.
-계산기정 권3 갑자년(1804년) 을미조(1월 5일)
위에도 문순득의 기록이 나옵니다. 원래 표류했던 인원은 6명이죠.
저 위에 유구 통사 경필진의 말에서도 '조선사람 6명'이 표류했다고 하죠.
위의 계산기정은 이해응(李海應)이 동지사 일행으로 중국에 갔을 때 견문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때 우연히 연경 객사에서 문호겸 등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 낸 부분입죠.
(머나먼 타지 이국땅에서 같은나라 사람을 만났을때의 기분이란;;;)
위의 갑자년(1804)은 순조 4년입니다. 이때껏 여송국 사람들은 조선에 있었고
문호겸 등 4인은 여송국까지는 가보지 못하고 일찍 복귀햇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라면 이들에게 여송국 사람과 통역을 시켰겠지요.
소주에서 연경에 올때까지 문순득, 김옥문은 다른 배를 탓고 그들의 행방은 알수 없다고 합니다.
결국 이때 돌아온 것은 문호겸 등 4인뿐이죠. 결국 문순득은 이때도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아마도...또 표류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대단합니다...세번이나 표류당하다니;;;)
아마 문순득은 이때 여송국, 안남국 등 동남아 일때까지 흘러가 둘러본 듯 싶습니다.
(김옥문은 기록이 없고, 문순득이 귀환한 후에도 기록이 없는걸로 봐서 표류중 사망한 듯합니다)
파란만장한 대모험을 거쳐 귀환한 문순득은 자신의 경험담과 견문, 그리고 여송국과 유구의 말을 기록하여
정리한 것이 바로 표해록(漂海錄)입니다.
표해록이란 것은 특정한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표류기의 통칭입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성종대 제주도 사람 최부(崔溥)의 표해록이지요.
(최부는 제주도의 관리였습니다. 이 표해록은 성종의 명으로 지어 성종에게 바친 것이죠.
이 사람도 대단한 것이 절강성부터 하북성 일대는 물론 월남(배트남)까지 갔다왔던 사람입니다.)
이외에도 최금남(崔錦南)의 중국 표해록, 제주 사람 김광현(金光顯)의 표해록, 영조 때 제주 선비 장한철(張漢喆)의 표해록,
(김광현의 표해록은 마치 관광일지처럼 당시 항주와 소주, 전당 일대의 경치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표류했다고 하니 그 즉시 전당 사람들의 대스타가 되어 서로 집으로 모셔가려했다는군요,)
이종덕(李種德)의 표해록 등이 있습니다. 이종덕의 표해록은 당시 세계 정세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는데,
아란타(阿蘭佗 화란<和蘭>, 네덜란드)가 양력을 쓰는 일(매양 조선보다 한달 절기가 빠르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일본에 있는 여관(與官)이란 네덜란드 사람에 대해서도 서술했습니다.(직접 만나본 걸까요?)
이 여관의 종자가 이외에도 오로사(五老沙, 러시아)사람이라고도 하여 러시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종덕은 순조 16년으로 문순득보다 뒤에 표류했던 사람입니다. 국제 감각이 있었군요.)
물론 이 표해록을 문순득이 직접 작성하지는 못하고
바로 정약전 선생이 대필(마르코폴로와 비슷하네요^^)하는 형식으로 작성했답니다.
이 때문에, 정약전의 장례시 많은 도움을 줬다는 흑산도 문씨를(정약용이 감사의 편지까지 보냈답니다)
'문순득'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문순득...정말 조선의 마르코폴로라고 할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