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 작가 100인 총서는 참신하고 유망한 작가의 주옥 같은 창작의 글을
발굴 보존하여 시대의 글잡이로 이 땅을 문학의 옥토로 가꾸고자 마련되였습니다.
참신하고 독창적인 원고를 소장하고 있는 작가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한비시선------------⑪
제 목 : 당신이라는 나
저 자 : 박인태
발 행 일 : 2008년11월25일
면 수 : 170
이 책은
아주 좋아서싫은 것에 대한 나의 연민(憐憫)이다.
어느 때는 나는 내가 아니었으면 하는 때도 있고 그럴 때마다
나의 내면에 있는 당신에게로 회귀(回歸)한다.
『내가 살던 고향은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여미리 1213번지.
서 남해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남들은 이곳을 곱다고 극찬한다.
아름다운 섬은 항상 그대로 있지만,그 섬을 향한 마음은 항상
똑같지 않았다. 원망도 했고 사랑도 했고 어느 땐 꿈에 보여서
몸서리치도록 싫어도 했다.』
부지런히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인생의 가을에 해당하는 시기에
이르니 자기 앞에 펼쳐진 작은 알곡들을 주섬주섬 주워 모으다
가끔 근처의 들을 힐끔 바라볼 때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하여 정리해 보고 싶었다.
비록 아름다운 봄도 모르고 보냈고, 여름은 무얼 일군다며 주위를
볼 틈도 없었지만 이제 가을의 문턱에 소산(所産)만 적다고 탓하기는
인생이 아깝다.
비록 겨울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계절의 변화와 함께 낮게 드리워진
태양의 따사로운 햇살은 웅크린 서재 가운데로 점점 깊숙이 강한 빛의
산란을 일으키며 찾아 들어오고 있었다.
결국, 내속에 자리한 당신을 눈부시게 하였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를 향해 가는가?
정리되지 않는 난제(難題)를 향한 이야기를 하나 둘 이 책에 풀어본다.
고향 그리고 그리움, 부모 자식 사랑이야기,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의
귀한 것 사랑하는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찬가, 사람 사는 이야기를
갓 시집 온 새아씨의 마음으로 보여 드립니다.
-시인 여미(麗尾) 박인태-
여미리 시인 박인태, 그 진솔한 삶의 역설적 고백 ㅡ 여미(麗尾) 박인태 시인의 첫 시집에 부쳐
碧波 김철진(시인, 극작가)
1
지금처럼 이렇게 시인의 시집에 발문을 쓸 때마다 나는 먼저 '과연 나는 타인의 시에 대해 말할 능력과 자격이 있는가?'라고 자신에게 되묻곤 한다. 대답은 언제나 '없다.'이다.
그러면서도 발문을 쓰게 되는 것은 아주 미미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시인과의 소중한 인연 때문이다. 더하여 '50여 년 동안 시를 짓고 시집을 읽으며 살아온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시를 읽고 느낀 생각을 글로 적는다는 것을 발문의 변으로 삼고 있다. 나는 시를 잘 짓는 사람 안 된 시인보다는 시를 잘못 짓더라도 먼저 사람이 된 시인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시보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신조요 철학이라면 철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시인의 시에 대해서는 결코 발문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처녀 시집을 상재하는 박인태 시인과는 개인적인 인연은 기실 거의 없는 셈이다. 대구에서 발간되는 월간 종합 문예지인 '한비문학'의 문학상 심사를 맡은 인연으로 들른 시상식에서 두어 번 지나치며 인사를 주고받았을 뿐 따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도 나의 뇌리에 박인태 시인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에 나 자신도 놀랐다. 이 사실은 곧 그의 후덕한 인상이 나로 하여금 이 발문을 쓰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 인연이었음을 뜻한다.
2
우리가 어느 시인의 시집을 읽을 때, 그 시인의 사람됨이나 성장 과정, 생활환경 등등을 알고 읽으면 이미 그 시의 50%는 이해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시인의 문학관이나 인생관, 세계관 등을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여기서는 먼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박인태 시인의 살아온 삶의 여정에 대하여 아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 넘어가고자 한다.
박인태 시인은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여미리 태생으로 지금은 우리나라 남해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경관이 수려한 고장이지만 그가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섬은 가난과 한숨으로 찌든 눈물의 삶터였다.
그는 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등학교 때는 목포로 유학(?)을 갔고, 학업 성적도 우수하여 줄곧 1~3등을 벗어나지 않았으나,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체에 입사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학업에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어 한국방송대 초등교육과'에 진학하여 초등 준교사 자격증을 획득했으나 교사의 길은 좌절되었고, 다시 지방공무원 시험을 치러 합격하여 공무원으로서 19년째 공직자의 길을 걸으며 현재는 천안시청에 근무하고 있는 공무원 시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사실만으로도 박인태 시인의 삶의 자세가 얼마나 성실하냐 하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시인의 시는 그 시 자체가 바로 그의 삶의 흔적이 되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지천명을 지나 등단한 늦깎이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편들은 재기 발랄한 신선도는 다소 떨어질지라도 바탕에 깔린 문학에 대한 열정과 그동안의 오랜 습작 과정에서 비롯된 저력이 탄탄하게 작품들을 받치고 있어서 오히려 나는 그동안 오랜 시간을 지내오면서도 문학에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뜻을 이루어낸 박인태 시인의 뜨거운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에 먼저 기꺼이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3
박인태 시인의 시를 관통하고 있는 시심의 가장 큰 흐름은 대부분 고향인 조도 여미리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의 등단작 중의 하나인 '호롱불'만 보더라도 시인은 그 자그마한 호롱불 하나에서 여미리에 살고 있던 어린 시절 한 가정의 피붙이 삶을 끌어내어 소박하게 한 편의 훌륭한 시로 형상화 시키고 있다.
꺼질 듯 / 가물거리는 작은 빛 / 서서히 / 온 방을 가득 채운다. // 수줍은 / 영양실조로 / 핏기없는 노오란 얼굴 / 새 각시 어깻숨 몰아쉬듯 // 꿈처럼 / 어언 옛날 / 고조부 장죽에 불붙여 드리며 / 입김 닿을락 말락 엿듣던 / 할아버지 아버지 / 그리고 / 나 태어날 때의 / 베갯머리 이야기 // 불은 / 꺼지지 않고 / 인생은 이어지는 / 비밀이라고 / 입술을 꼬옥 다문 채 / 이 밤 / 까맣게 애를 태운다.
ㅡ'호롱불' 전문
이 시는 요즘 같은 핵가족 시대에는 상상도 해 볼 수 없는, 5대가 한 가정에 살면서 끈질긴 목숨을 이어가는 간난의 삶을 바람만 불면 꺼질 것 같은 호롱불에 비유하여 시로 형상화 시킨 수작이다. '영양실조로 / 핏기없는 노오란 얼굴'은 그대로 그 시절 섬사람들의 한숨뿐인 삶이며, 그 힘든 삶 속에서도 노동에 지친 밤 호롱불 아래서 '고조부 장죽에 불붙여 드리'는 고손자에게까지 이어지는 피붙이의 따뜻한 모습을 눈물겹게 형상화 시키고 있는 이 시는 우리로 하여금 좋은 시를 읽었을 때의 감동이 어떠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고 있다.
'보리 베는 여인들'과 '돛배'에서도 시인은 40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뛰어 넘어가 어린 날 섬사람들의 고되고 힘들던 토속적인 삶을 기억의 창고에서 찾아내어 현재로 끌고 와 훌륭한 시 작품으로 빚어내고 있다. 이도 역시 고향 여미리에서 모티브를 찾은 것이다. 먼저 '보리 베는 여인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나비도 앉지 않는 보리밭에 누가 있다 / 분명히 까칠한 보리 모개를 가르며 / 바람처럼 날쌔게 저쪽으로 달려간다 // 놀란 종달새가 / 하늘 한가운데서 새끼들을 모은다 / 이제 떠날 때가 되었으니 둥지에서 나오라고 // 우주인처럼 서클을 만들며 / 새벽녘에 보리밭으로 들어간 여인들 / 아직 허리를 바로 펴기에는 산그늘이 멀다// 숨 막히는 보리 모개 사이 낫을 든 여인의 / 마른 가슴을 열어 달라고 보채는 아이 / 젖 먹이러 온 애업이 큰놈은 먼바다를 본다 // 에메랄드 빛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 금 보리밭 물결 따라 달리고 싶다 / 다 익은 보릿대 피리 소리 들을 수 있도록
ㅡ'보리 베는 여인들' 전문
'호롱불'이 한 가정에 초점이 맞추어진 시라면, 이 '보리 베는 여인들'은 피붙이 중심의 가정에서 벗어나 시야를 더 확대시켜 섬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그만큼 박인태 시인의 시적 대상이 확대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섬마을 야산을 일구어 심어 놓은 보리가 누렇게 익고, 그 뒤편 멀리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가 한 폭의 풍경화처럼 떠오른다. 이 자체만으로도 한 편의 훌륭한 서경시가 되겠는데, 박인태 시인은 거기에다 그렇게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섬사람들의 서정적 애환을 녹여 담음으로써 시적 완성도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특히 '새벽녘에 보리밭으로 들어간 여인들 / 아직 허리를 바로 펴기에는 산그늘이 멀다'는 이러한 표현이야말로 체험에서가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시구이다. 이 두 행의 뛰어난 시구만으로도 시인은 섬 여인들의 고단한 삶을 비유적으로 표현해 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어지는 '숨 막히는 보리 모개 사이 낫을 든 여인의 / 마른 가슴을 열어 달라고 보채는 아이 / 젖 먹이러 온 애업이 큰놈은 먼바다를 본다.'에서 굶주려 말라붙은 젖을 달라고 우는 어린 동생을 업고 밭으로 찾아와 먼바다를 보는 애업이 큰놈은 어쩌면 시인 자신일 수도 있겠지만 벌써 세상 물정을 알만큼 철이 들어 있다.
'돛배'는 섬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뭍과의 유일한 연계 수단이다. 그런 '돛배'를 두고 박인태 시인은 단순한 연계 수단으로서의 '돛배'가 아닌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섬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실현시켜 주는 매체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좌절로 끝나고 말지만 결국 섬사람들은 섬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깨달음을 '공덕이 누님'을 끌어들여 설파하고 있다.
섬마을 / 동네잔치 하던 날이 / 공덕이 누님 시집가던 날 // 이팔 / 천연두 곰보딱지 소녀 / 애물단지 / 시집보낸다고 좋아들 하는데 // 골방에서 / 족두리 쓴 여인이 울고 있다 / 정 없이 가는 것도 서러운데 / 서른 댓 중늙은이가 웬 말이랴 // 꽃가마 실은 돛배 / 시퍼런 바다 위 보이지 않을 때 / 공덕 엄니는 까만 눈물로 젖은 / 하얀 수건을 흔들었다 // 가서 잘 살라고 / 돛배 태워 보낸 누님 / 살다 살다 못 살겠다고 // 붉은 꽃물 든 흰 적삼 입고 돌아와서 / 인생사 공(空)이요 덕(德)이라 / 이제 자유롭게 실실 웃고 살겠다 하네
ㅡ'돛배' 전문
'공덕이 누님'은 하필이면 '이팔 / 천연두 곰보딱지 소녀 / 애물단지'다. 뭍으로 가서 잘 살라고 '서른 댓 중늙은이'에게 시집을 간 공덕이 누님은 결국에는 '살다 살다 못 살겠다고' 다시 섬으로 돌아와 '이제 자유롭게 실실 웃고 살겠다'고 한다. 이 '공덕이 누님'을 통해 박인태 시인은 해학적으로 노래하면서도 그 밑바탕에는 섬사람들은 역시 섬에 살아야 한다는 섬사람들의 숙명적인 삶을 역설적으로 천연덕스럽게 그리고 있다. 나는 여기서 박인태 시인의 그 천연덕스러움에 놀랄 수밖에 없다. 그 천연덕스러움이란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관조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박인태 시인의 고향 조도 여미리 사랑은 오히려 역설적이다. '어머니'란 시와 '여미리가 싫다'는 어린 시절 지긋지긋하게도 싫던 고향 조도 섬마을 여미리의 추억이 나이 들어가면서 오히려 지독한 그리움과 애정으로 변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어머니 / 명절이라 조도가리 객선을 탑니다. / 파도가 허옇게 뒤틀리고 / 작은 여객선은 몸부림을 칩니다. / 애기는 울고 / 며느리는 창자를 비우느라 / 여객선 난간을 붙들고 씨름을 합니다. / 난, 멀쩡한데 말이요 // 어머니 / 짧고도 아쉬운 시간이 지나 / 며느리는 어린애를 들쳐업고 / 똥 가방까지 벌써 챙겨들었습니다. / 당신은 / 멸치 마른고기 미역 둠부기 마늘 / 온갖 것을 자루에 칭칭 동여매시며 / 그렁그렁 고인 눈물을 훔쳐내시면서 / 아가, / 담에는 오지 말거라 / 보고 싶어 하던 것이 / 빨리 보내는 지금보다 천 배는 더 낫것다. //
ㅡ'어머니' 부분
명절이 되어 아내와 아기를 데리고 고향 여미리로 가는 객선을 타지만 섬사람이 아닌 아내는 배멀미로 고생을 한다. 그 상황이 한 폭 그림처럼 눈에 선하다. 그러나 이 시를 살리고 있는 것은 구름처럼 더디게 왔다가 바람처럼 빠르게 돌아서서 가는 아들 며느리를 보내며 아쉬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렁그렁 고인 눈물을 훔쳐내시면서' 내뱉는 어머니의 역설이다.
'아가, / 담에는 오지 말거라 / 보고 싶어 하던 것이 / 빨리 보내는 지금보다 천 배는 더 낫것다.'
어느 시인이 '긴 기다림과 짧은 만남 후의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기가 쉬울 것인가. 직설적 화법을 통한 역설적 표현은 바로 박인태 시인의 탄탄한 시적 저력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박인태 시인의 역설은 '여미리가 싫다.'에서 그 절정을 보여 주고 있다.
여미리가 싫다 / 허름한 그곳에서 태어나서 싫다 / 태어난 것이 내 탓은 아니지만 / 어쨌든 그곳에서 태어나서 싫다 // 여미리가 싫다 / 너무 싫다 / 부쳐먹을 땅덩어리 좁아서 싫다 / 그래 어렸을 적 날마다 배고팠기 싫다 // 여미리가 싫다 / 꿈에서라도 싫다 / 마른 샘물 기다리는 것이 싫고 / 학교 멀어 숙제할 시간이 없어 싫고 / 새벽이슬 맞으며 여객선 타러 가던 것이 싫다 // 여미리가 싫다 / 지겹도록 싫은 것은 / 아무리 멸치 많아 잡아 삶아 말려도 / 우리 집은 부자가 못 되는 것이 싫다 / 아무리 미역 많이 캐내다 팔아도 / 목포 부자 상회 빚 못 갚는 것이 싫다 // 여미리가 싫다 / 일하기 싫을 때면 / 배때기에 두드러기 나서 근지러워서 싫고 / 짠 냄새 가시지 않은 바지 못 벗어서 / 가랑이에 부스럼 나는 것이 싫다 // 너무 싫다 / 섬이 싫다 / 이제 더 여미리가 싫어지는 것은 / 잠자리에 누워도 생각나서 싫다 / 싫어서 떠나왔는데 생각나서 싫다 //
ㅡ'여미리가 싫다.'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열거법과 점층법과 역설법의 수사 기교를 사용하고 있다. 여미리가 싫은 이유를 하나하나 들어가면서 싫어하다가 넷째 연에서는 진짜로 싫었던 이유를 들고 마지막 연에서는 그 지겹던 여미리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잠자리에 누워도 생각나서 싫'고 '싫어서 떠나왔는데 생각나서 싫다.'는 이 표현이 역설의 절정이다. 평소에 생각하지 않으면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 법인데 '여미리'는 시인이 떨치려 떨치려 해도 떨어지지 않고 시인을 따라다닌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싫어서 떠나온 '여미리'가 박인태 시인을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시인 박인태가 '여미리'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아 주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러면 어떠랴. 우리에게 고향은 목숨이 있는 한 끝내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의 대상인 것을.
5
이제 여미리에서 벗어나 박인태 시인의 다른 시편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 많은 시를 일일이 여기서 살펴볼 수는 없으니, 그 중에서 나에게 감동을 준 시 두어 편을 살펴본다. 가장 눈에 띈 시는 '송홧가루'라는 시이다. 비록 6행의 짧은 시이지만 '바로 이런 것이 시다!'라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오월 도화지 아직 덜 마른 연초록 물감
솔바람에 놀라 노란 가루주머니를 터뜨리다
오메 저 건너 산 금칠 하는 중
ㅡ'송홧가루' 전문
이 얼마나 짧고 간단한 시인가? 그러나 이 시는 제목부터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던져 주고 있다. 송홧가루는 옛날부터 우리 고유의 명절 손님 접대상이나, 제사상, 더러는 찻상에 다식으로 만들어져 귀하게 올라가던 솔꽃 가루 아닌가. 아니더라도 산마을에 뻐꾸기 울음 울면 솔꽃은 익어 터져 온 마을 마루를 노랗게 물들이지 않았던가. 도화지를 펼쳐 놓은 듯한 깐깐 오월, 푸르러지기 시작하는 나뭇잎새들의 빛깔이 연초록 물감을 칠해 놓은 것 같은데, 때맞추어 부는 바람에 솔꽃은 익어 터지며 온 산과 들로 노란 가루를 날려 보낸다. 여기까지는 시인의 눈이라면 시인의 표현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를 살리고 있는 마지막 두 행 '오메 / 저 건너 산 금칠 하는 중'이라는 이 시각적 이미지는 박인태 시인만의 것이다. 여기서 물론 혹자는 '오메'를 보며 영랑의 '오메, 단풍들겠네'를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오메'는 전라도 지방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영탄이니 그냥두고, '저 건너 산 금칠 하는 중'이라는 이 마지막 행이야말로 박인태 시인의 눈으로 발견한 박인태 시인만의 '송홧가루'인 것이다. 시인은 이처럼 시인만의 독특한 시안을 가져야 할 것이다.
'소주 한잔'이란 시는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은 그런 생각을 했을 법한 그런 내용의 시이다. 그러나 내가 이 시를 굳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시 속에 박인태 시인의 인간적인 진솔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삼일을 겨우 참고 / 소주 한 잔술 고파서 / 뉘 불러 주길 바라지만 / 아쉬운 사람이 먼저 전화한다 // 일차로 끝내기는 / 왠지 서운하고 노래방도 좋아 / 술값은 당연 / 불러낸 내가 계산한다 // 하지만 / 왠지 서운한 생각 / 돈 잘 버는 친구가 / 눈치껏 계산하면 좀 좋을까 / 돈 있는 놈이 더 무섭다 // 내 돈은 마누라한테 타온 거고 / 지놈 돈은 집세 받은 여유 돈이잖아 / 돈이라고 다 같은 돈은 아닌데 / 소처럼 살아온 삶 걸어도 걸어도 / 이 밤 내 집은 아직 멀기만 하다 //
ㅡ'소주 한잔'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술이 마시고 싶어서 친구를 불러내어 노래방까지 둘러 나오면서 불러낸 사람은 자신이기에 당연히 계산을 한다. 그리고 나서 느끼는 진솔한 생각, '돈 잘 버는 친구가 / 눈치껏 계산하면 좀 좋을까 / 돈 있는 놈이 더 무섭다.'라며 자신만의 생각인 치부를 스스럼없이 드러낸 그 용기에서 박인태 시인의 인간성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소처럼 살아온 삶 걸어도 걸어도 / 이 밤 내 집은 아직 멀기만 하다'는 이 표현 속에서 나는 소와 오버랩 되는 박인태 시인을 발견하며 혼자 머리를 끄덕여 본다.
6
한 사람이 한 시인으로 탄생하여 자신의 첫 시집을 상재한다는 것은 그 시인으로서는 온 우주를 품에 껴안은 듯한 기쁨이요, 전율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모든 독자들 앞에 실오라기 하나 가리지 않은 발가벗은 알몸으로 나서서 '이것이 나입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하니 시집 한 권 상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이제 나는 이 어려운 결단을 내린 박인태 시인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당부하고자 한다. 첫째, 이제까지 살아온 진솔한 삶의 자세를 계속 유지해 나가기를 바란다. 이 말은 곧 시류에 영합하여 떠도는 그런 시인이 아니라, 시인 정신을 지닌 참 시인으로서 시의 길에 묵묵히 정진해 달라는 뜻이다. 둘째, 대상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아 달라는 것이다. 세상은 부정적 시각으로 보면 부정적인 것밖에 안 보이고, 긍정적 시각으로 보면 긍정적인 것밖에 보이지 않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셋째, 이제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체계적으로 문학 수업에 평생 매진해 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등단하고 시집 한두 권 내고는 사라지는 시인들을 수없이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박인태 시인의 처녀 시집 발문을 마무리하며, 격려의 말과 함께 머지않아 이 땅에 훌륭한 시인 한 명이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지켜보리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