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니 이런일이/시(詩)를 위하여
[스크랩] 시의 초심 닦기 (5) /위선환
麗尾박인태행정사
2008. 4. 23. 14:24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실험의식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방기하고 환상 속으로 접어드는 것도 역설적으로 시대의 삶을 드러내보려는 의지의 발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실험을 위한 실험, 환상뿐인 환상은 삶이나 시에는 너무 공허합니다.
최근 젊은 시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져있는 회고적 서정도 나는 염려합니다. 추억이나 그림움은 분명 시의 중요한 계기지만, 한편으로는 살아가는 생생함을 희석시킬 수 있습니다.
유행처럼 만연해 있는 소위 생태시 또한 이제는 경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시가 생명현상을 노래해야 하는 것은 당위지만, 집단적으로 시인들이 동일한 주제를 반복 노래해야 하는가, 회의가 요청되는 시점입니다.
시인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적인 사람이 갖추어야 할 삶의 덕목을 나는 용기, 독립심, 상상력, 감수성 등이라고 꼽아 보았습니다. 시인에게 용기는 創新에 투신하려는 무모함의 부추기고, 독립심은 나와 남이 차별되는 개성을 키우고, 상상력으로 미래의 밭을 갈며, 감수성으로 세상의 갈등을 끌어안습니다. 그리하여 시 쓰기는 이 네 가지 집중된 힘들을 한데 모아 스스로의 숙명과 맞서려는 인간의 염원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라고 규정해 봅니다.
그러나 완성되는 인간의 신화가 어디 있습니까? 인간적 뮈토스는 끝끝내 그리워할 뿐 마침내 도달하지 못하는 본향을 간직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도달하지 못하는 곳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우리에게 완성이 없기 때문에 시인 또한 완성을 그리워하는 길 위의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라면 잠잘 곳과 쉴 곳이 새삼스럽게 염려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길 위의 나그네는 이미 길 떠난 사람이니까.
- 김명인/대담에서 / '열린시학 2005년 가을호
신인을 뽑는 기준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좋은 시가 과연 어떤 것일까라는 점을 고민해보면 의외로 쉽게 답이 나올 수 있다. 신인이 갖추어야 할 문학적 역량에는 새로운 시적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온전히 소화해낼 수 있는 묘사력이 요구된다. 새로운 시적 상상력은 반드시 새로운 시적 대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아무리 낡고 가치 없는 것이라도 새롭게 보는 눈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움은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상상력을 온전히 소화해낼 수 있는 묘사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양자가 어우러질 때 좋은 시가 비로서 탄생되며, 우리는 시인이 만들어낸 세계에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년의 습작과정을 거치면서도 자신의 작품의 단점을 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 가까이서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되도록이면 멀리 서서 자신의 작품을 냉정하게 바라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반드시 이 작품은 나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 이지엽 / 신인상 심사평 / 열린시학 2005년 가을호
서투르거나 빈약한 시는 남의 흉내를 냈다든지, 상투적인 생각이나 표현이 많다든지, 절제나 균형감 없이 군말이 많다든지, 지나치게 조작적이라든지, 어휘 구성의 적합성이 없다든지 하는 공통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훌륭한 시편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고, 그 해석과 설명도 획일적일 수 없다.
- 유종호 / 저서 '시 읽기의 방법' 에서
우리나라 시집에는 거의 대부분 뒷부분에 평론가의 해설이 붙어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이러한 예는 1970년대 중반 민음사에서 시집을 기획하면서 김수영 시집에 처음 해설을 붙인 것이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창비, 문지의 시집 시리즈에서 따라하면서 보편화되었지요. 지금은 거의 모든 출판사들이 관행처럼 '친절한' 해설을 시집 말미에 장식처럼 붙여넣습니다.
해설은 독자들에게 시의 이해를 돕고, 시인의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알려준다는 점에서 많은 도움을 줍니다. 평론가들에겐 일정한 분량의 '일거리'가 확보되었고, 시인들에겐 자신의 시를 '칭찬해주는' 지원군을 만난 셈이어서, 그 효용가치를 모두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이 관행이 계속되면서, 문제점도 드러났습니다. 대개의 해설은 작품수준과 관계없이 칭찬만 하게되고 주례사 비평으로 흘러갑니다. 시집의 불필요한 장식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종종봅니다. 때로는 오히려 독자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작품보다 더 어렵고 어지러운 '현란한' 문장으로 독자를 모독하는 일도 있습니다.
시집에 해설을 붙이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일까요?
- 정한용 / 시집에 붙는 [해설]은 꼭 필요한가? / [빈터] 홈페이지에서
로키산맥 해발 3,000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인 지대가 있습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있어야 합니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이지만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를 발휘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을 꿇고있는 나무' 로 만든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 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온 사람입니다.
- 여운학/ <지혜로 여는 아침>중에서
나는 집요한 시를 좋아해. 집요하다는 말은 곧 긴장과도 연결되는 거지, 그치? 하여간 그런거지 뭐, 나는 시의 승패가 늘 얼마나 집요했는가, 그 시에 집중했는가 하는 것에 있다고 봐. 그게 좋은 시가 태어나느냐 않느냐 하는 중요한 관건이라고 봐.
주로 70년대 생들 얘기지? 나는 후배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우스운 논리지만 나는 늘 그들로부터 충전을 받고 싶고 긴장을 하고 싶어. 그런데 원하는 만큼 충전이 잘 안 되더라구. 으음,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경우에 따라 그들의 시에 대해 옹호하는 마음이었다가 비판하는 마음이었다가 그래, 아니 솔식히 말하면 비판하는 쪽에 가깝지.
창조적 독창성의 스팩트램이 다양하다 했나, 그들의 시가? 나는 전혀 반대라고생각하는데? 나는 젊은 시인들의 시들을 읽으면서 어쩜 이렇게 '꼼수'들일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해. 물론 성장기와 이러저러한 문화의 변화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 같은 것이겠지만, 이를테면 실내에서 흔히 하는 카드놀이나 좀 잘아빠진 테크닉을 요구하는 당구 같은 거는 잘 하는데 넓은 잔디밭으로 나가서 뛰는, 땀을 흘리는, 장쾌한 스윙으로 홈런을 날리는 그런 시들은 안 보여. 스케일이 큰 서사구조를 가진 시나 야생의 시가 좀 나타나 주었으면 좋겠는데, 가만 들여다보면 늘 혼자만 노는 시들이야. 이름을 가려놓고 보면 누구의 시인 지 잘 모르겠어. 어쩌면 그렇게 발상부터 표현기법까지 한결 엇비슷한지.
종은 시의, 좋은 시인의 덕목은 그게 아니잖아. 오로지 나만의 목소리, 나만의 사고를 갖는 것이잖아. 시인으로서 개별존재의 자아를 (비록 그것이 허수아비나 허구라할지라도) 언어의 우주 한 가운데 세우는 것이잖아. 누구나 다하는, 할 수 있는 노래를 왜 해? 생각해보면, 나를 포함해서 어찌할 줄을 몰라하는 요즘의 젊은 시인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그래. 비판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도 같은데 이러다가 무슨 타개책이 생기겠지. 누군가는 출구를 찾아 빠져 나가겠지.
- 유홍준 / [현대시]2005년 8월호, 신동옥 시인과 대담하면서
시인 선서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좇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 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함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시詩이며, 거짓말시詩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에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온 세상이 권력의 전횡專橫에 눌려 핍박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
민주와 자유가 억압당하고,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시인이여, 그대는 어둠을 거쳐서 한 시대의 새벽이 다시 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라.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盟友여야 한다.
- 한국시인협회 회장 김 종 해/ 김종해 홈페이지에서 퍼옴
생태문학인은 종교보다 엄격해야 해, 실천적인 생태관이 필요해. 일종의 아나키지. 그런데 한국문학은 이런 문제를 외면해 왔어. 한국 현대시 100년은 9할이 형용사와 부사야. '보고싶다. 그립다. 아프다. 가고 싶다.....' 이게 우리 시야. 잠시 체언이었던 적이 있었을 뿐, 언제나 용언이었지. 안타까운 일이야.
이문재 / [현대시]2005년 3월호 , 평론가 김수이가 쓴 커버스토리에서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말) "시를 열심히 쓰세요" 는 정답이 아닙니다. "열심히 사세요"라고 해야겠지요, 순연한 가슴으로 삶을 사랑하며 그 떨어진 이삭으로 시를 주우십시오. 그리고 적어도 시인 부류에 있는 사람들은 행복 위에 가지를 놓으십시오. 좀 더 정신적이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이런 말이 되겠군요. 또한 저는 요새 젊은 시인들에게 감동에 있어서의 장엄성을 추구하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요새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보면 장엄성 등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기능의 부족이 염려되곤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알려지지 못하고 생애가 끝나는, 생전에 좋은 작품을 발표한 시인들을 기억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김남조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5년 7,8월호 '대담'에서
삼나무 향 짙게 밴 민박집에 삯일 나왔던 그를
술자리에 끌여들였다가
인간시대에나 나올법한 사연을 귀동냥 했는데요
섬사내의 순정에 먹먹해져 나도 모르게 그만
한라산을 한입에
탁! 털어 놓고 말았습니다.
- <한라산> 부분
이 시에 대한 나의 독서경험을 그대로 말해본다면,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한라산을 한입에 / 탁! 털어 넣고 말았습니다> 라는 구절이 나를 긴장하게 했었다. <한라산>을 한입에 털어 넣다니! 이 시의 화자가 지닌 내공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시의 말미에는 <한라산 : 화산암반수로 빚어진 제주 소주> 라는 주석이 붙어 있었다. 강렬했던 인상이 단번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주석이 없었다면 이 시는 중의적 울림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재연예술이 사실과 정보,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될지라도 그 사실과 정보를 독자에게 모두 솔직하게 알려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소박한 친절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시의 미감 형성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바닷물의 들고남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던가 / 수백 리 밖에서 몰려오는 우기를/ 귀밑 스치는 바람자락만으로 예견하는 일 따위가 / 마음 외부의 시력을 필요이상으로 밝히는 동안 / 마음 안쪽의 눈은 청맹과니처럼 아득해져 / 낮고 소소한 것들의 아픔 따위 / 안중에서 지워버린지 오래인 뭇사람들에게는 / 하찮고 미욱하게 여겨질지 모를 일이나 / 양쪽 눈 가운데 하나쯤은 / 깊어질대로 깊어져 한 길 우물이 되어버린 / 어머니의 고요한 눈을 닮아도 좋겠다고 / 저문 하늘빛과 같이 쓸쓸해져도 좋겠다고 / 그렇게 한 생을 가만가만 내려놓아도 좋겠다고 / 열차 떠난 역사에 우두커니 서서 / 불현듯 생각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 <까막눈> 부분
무려 15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구를 자세히 보면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비교적 문장이 잘 정돈되어 있기 때문에 의미 전달에는 문제가 없을 지 몰라도 독자의 호흡을 불편하게, 혹은 숨가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현상은 어머니와 뭇사람을 대비시키는 지루한 설명방식에서 연유하는 것은 아닐까?
엄경희 (문학평론가) / '현대시학' 2005년 7월호/ 작품론에서
1) (예시: 어떤 시의 마지막 행) "조금씩 바깥으로 흘려보내는 것들을 보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코메디언이 자기가 먼저 웃으면 우리가 따라 웃을 수 없듯이 시인이 자기가 슬프다고, 그것도 마지막 행에다가 자신의 시적 감정을 그렇게 정리해 주면 독자들을 난감해진다. 시에서는 슬프다고 말하면 안 되고 그 시 자체가 슬퍼야 함을 시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터인데도 시적 긴장력이 툭 끊어지면서 정형화된 결론이 성급하게 맺어지는 경우를 확인하는 일은 다소 맥 빠지는 노릇이다.
2) (예시) "궁전에는 낮밤음악이 냇물처럼 흐르고"
'낮밤음악'은 교차적 리듬이 음악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주의 교차적 주기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의 양과 음을 '음악'앞에 놓은 것이다. '밤낮'이라는 익숙한 합성어를 사용할 경우 그러한 깊은 의미가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낮밤'으로 표기하였다. '밤낮' 이라는 관용화된 표현은, 반의적 개념이 한순간에 융합하여 전체를 형성하는 양상에 주목하게 하는 힘을 감소시킨다는 점도 계산되어 있다.
- 이필규(평론가) / 한 시인론에서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 문태준, <가재미> 전문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가 2004년 최고의 시로 뽑혔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아마도 비평가와 시인들이 어우러진 결과이니 상당한 타당성과 공정성이 담보되어 있을 것이다. 더불어 문태준 시인처럼 우수한 시인의 행보를 좇는 재미도 쏠쏠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글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일단의 문제제기를 목적으로 한다. <가재미>가 2004년 최고의 시로 뽑혔다는 소식은 대략 3주 전에 들어 알고 있었고, 나는 즉각 그 사실을 확인했다. 그 이후로 <가재미>에 대해 여러 생각들을 공굴려 봤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서, 내게는 이런저런 갈등‘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끝내는, ‘최고의 시’라는 레테르를 꿀꺽 넘기지 못했다. 모든 문제제기는 일단의 적을 만든다. 더군다나 나 같은 소심하고 문학적 성과가 빈한한 자에게는 어떤 비웃음도 곁들여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저질러 보자면, 정말 <가재미>가 최고의 시인가라고 나는 묻고 싶다. 잘 씌어진 시, 우수한 서정시, 이런 게 아니고 ‘최고의 시’인가? 물론 뽑은 선자들의 안목이나 감식안을 또 그 문학적 주관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평론에는 염 젬병이니 좀 거칠게 말하겠다. <가재미>는 잘 씌어진 슬픈 서정시다. 시집 『맨발』을 의식하고 시를 읽었을 때, “암투병 중인 그녀”는 시인의 어머니다. 어머니가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 있을 때, 자식 된 자의 마음은 어떠할 것인가. 불문가지 아닌가.
그런 심사를 시인은 자기의 장점을 살려 빼어난 시 한 편으로 표현해 냈다. 그 놀라운 형상화 능력이라든가,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 같은 시적 이미지는 얼마나 절묘한가.
그런데 문제는 보다 더 원론적이고 본질적인 데 있다. 시는 여기까지인가? 개인적으로 문태준 시인의 시에게 큰 감동을 얻지 못한다. 왜 잘 씌어진 시가, 우수한 시가 내게는 감동을 주지 못하는가? 이 점은 물론 그와 나의 서정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나는 그의 보수적인 가족 공동체로의 회귀본능에 동의하지 못한다. 과거를 불러내 현재화시키는 시적 전략을 신뢰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건 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다 그는, 시를 구축(?)할 때 비뚤어진 벽돌 한 장을 용납하지 않는다. 시는 허술하고 어눌해야 감동이 깊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기교나 예술적 형상능력 이전에 있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 했던가. 문태준의 치밀한 기교와 빼어난 형상능력은 역설적으로 그의 시를 졸(拙)해 보이게 만든다. 그의 시를 읽은 후 그의 시세계를 캐치해 내고, 그가 인도하는 가족 공동체의 기억 속으로 따라가는 것도 좋다. 그러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시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자는 반론이 귓가에 맴돈다. 시는 시로서 족하다, 시를 읽고 그 시의 서정을 따라 한 순간이라도 다른 순간을 갖는 것은 좋은 일 아닌가, 그게 시의 매력 아닌가, 는 거절할 수 없는 명제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가 더 다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내 삶이, 내 인식이, 내 사유가, 달라져야 하는 건 아닌가, 지금 달라지지 않아도 달라질 수 있는 우연적 계기를 몸의 느낌으로 알아야 하는 건 아닌가, 이렇게 주장하고 나면 이제부터는 시 한 편에 대한 입장을 훌쩍 넘어서게 된다.
나는 여기까지 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암, 가야 되고말고.
그래서 내가 제기하는 ‘최고의 시’에 대한 문제는 문태준 시에 대한 것보다는, 그렇다면 전반적인 우리의 시가 어떤 관행 및 타성의 족쇄에 얽혀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닿게 된다. 이 지점에서 싸움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나와 문태준, 김 시인과 나, 홍 비평가와 문태준, 자기와 자기… 이런 확전이 필요하다.
어찌 보면 이 글은 <가재미>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가재미>를 매개로 한 싸움과 이의가 없음을 개탄하는 글인 것 같다. 싸움과 이의는 없고 동의와 수긍만 있다면, 그건 니체가 말한 ‘낙타의 긍정’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아이 경지의 무구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자의 포효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게 내 주장의 요지다!
- '최고의 시' 이의 있습니다 / 황규관(시인)
현대시의 난해함은 기호와 대상 간의 불화를 자축하고 기표들의 기의로부터의 독립을 권장하는 시인들 득의의 전리품이 되었다. 그러나 발화된 시, 인쇄된 시의 현장은 통약을 전제로 한 최소한의 의미론적 규약들이 교통하는 장소이다. 약호화(codng)와 그것의 해독(decoding)은 흥미로운 지적 게임을 촉발시키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공통된 약호의 존재와 그것을 통한 통약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라면 기호들은 기의화의 결별을 못견디고 기의와 더불어 자진自盡하거나 직관의 자의성과 함께 증발한다. 그리고 물론, 시적 소통의 최소공약수마저 사라지면 시 역시 죽는다.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은 시관은 엄살이며 맨 살을 드러내 구애는 지나친 넉살이다.
- 조강석/ '열린시학' 2005년 여름호/ 시의 소통방식에도 표준은 있는가? 에서
....그리고, 또 시란 일종의 접속사를 통해서 붙여나가는 거라 생각해요. 접속사 '그리고, 그런데, 그러나'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러나'로 가기에는 상당한 긴장과 에너지가 필요하고, 또 잘못 뒤집었을 때는 완전 말장난이 되지. 대충 '그런데' 라고 이야기 했을 때 , '그러나'가 수직으로 벌어진다면, '그런데'는 처음 벌릴 때는 아주 호기심 찬데 나갈 때는 다른 성격이 되지. '그런데'로 말문을 열고 붙여나가서 새로운 틈새를 만드는 거, 그런게 시가 아닌가? 왜 축구선수들 하는 거 보면, 앞이 가로막히면 일단 볼을 띄워주고 돌아가서 공을 차지 않아요. 그런 것처럼 언어를 먼저 띄워주고 그 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주고.
- 이성복/ '열린시학' 2005년 여름호 / 대담에서
최근 젊은 시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져있는 회고적 서정도 나는 염려합니다. 추억이나 그림움은 분명 시의 중요한 계기지만, 한편으로는 살아가는 생생함을 희석시킬 수 있습니다.
유행처럼 만연해 있는 소위 생태시 또한 이제는 경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시가 생명현상을 노래해야 하는 것은 당위지만, 집단적으로 시인들이 동일한 주제를 반복 노래해야 하는가, 회의가 요청되는 시점입니다.
시인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적인 사람이 갖추어야 할 삶의 덕목을 나는 용기, 독립심, 상상력, 감수성 등이라고 꼽아 보았습니다. 시인에게 용기는 創新에 투신하려는 무모함의 부추기고, 독립심은 나와 남이 차별되는 개성을 키우고, 상상력으로 미래의 밭을 갈며, 감수성으로 세상의 갈등을 끌어안습니다. 그리하여 시 쓰기는 이 네 가지 집중된 힘들을 한데 모아 스스로의 숙명과 맞서려는 인간의 염원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라고 규정해 봅니다.
그러나 완성되는 인간의 신화가 어디 있습니까? 인간적 뮈토스는 끝끝내 그리워할 뿐 마침내 도달하지 못하는 본향을 간직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도달하지 못하는 곳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우리에게 완성이 없기 때문에 시인 또한 완성을 그리워하는 길 위의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라면 잠잘 곳과 쉴 곳이 새삼스럽게 염려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길 위의 나그네는 이미 길 떠난 사람이니까.
- 김명인/대담에서 / '열린시학 2005년 가을호
신인을 뽑는 기준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좋은 시가 과연 어떤 것일까라는 점을 고민해보면 의외로 쉽게 답이 나올 수 있다. 신인이 갖추어야 할 문학적 역량에는 새로운 시적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온전히 소화해낼 수 있는 묘사력이 요구된다. 새로운 시적 상상력은 반드시 새로운 시적 대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아무리 낡고 가치 없는 것이라도 새롭게 보는 눈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움은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상상력을 온전히 소화해낼 수 있는 묘사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양자가 어우러질 때 좋은 시가 비로서 탄생되며, 우리는 시인이 만들어낸 세계에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년의 습작과정을 거치면서도 자신의 작품의 단점을 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 가까이서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되도록이면 멀리 서서 자신의 작품을 냉정하게 바라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반드시 이 작품은 나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 이지엽 / 신인상 심사평 / 열린시학 2005년 가을호
서투르거나 빈약한 시는 남의 흉내를 냈다든지, 상투적인 생각이나 표현이 많다든지, 절제나 균형감 없이 군말이 많다든지, 지나치게 조작적이라든지, 어휘 구성의 적합성이 없다든지 하는 공통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훌륭한 시편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고, 그 해석과 설명도 획일적일 수 없다.
- 유종호 / 저서 '시 읽기의 방법' 에서
우리나라 시집에는 거의 대부분 뒷부분에 평론가의 해설이 붙어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이러한 예는 1970년대 중반 민음사에서 시집을 기획하면서 김수영 시집에 처음 해설을 붙인 것이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창비, 문지의 시집 시리즈에서 따라하면서 보편화되었지요. 지금은 거의 모든 출판사들이 관행처럼 '친절한' 해설을 시집 말미에 장식처럼 붙여넣습니다.
해설은 독자들에게 시의 이해를 돕고, 시인의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알려준다는 점에서 많은 도움을 줍니다. 평론가들에겐 일정한 분량의 '일거리'가 확보되었고, 시인들에겐 자신의 시를 '칭찬해주는' 지원군을 만난 셈이어서, 그 효용가치를 모두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이 관행이 계속되면서, 문제점도 드러났습니다. 대개의 해설은 작품수준과 관계없이 칭찬만 하게되고 주례사 비평으로 흘러갑니다. 시집의 불필요한 장식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종종봅니다. 때로는 오히려 독자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작품보다 더 어렵고 어지러운 '현란한' 문장으로 독자를 모독하는 일도 있습니다.
시집에 해설을 붙이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일까요?
- 정한용 / 시집에 붙는 [해설]은 꼭 필요한가? / [빈터] 홈페이지에서
로키산맥 해발 3,000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인 지대가 있습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있어야 합니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이지만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를 발휘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을 꿇고있는 나무' 로 만든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 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온 사람입니다.
- 여운학/ <지혜로 여는 아침>중에서
나는 집요한 시를 좋아해. 집요하다는 말은 곧 긴장과도 연결되는 거지, 그치? 하여간 그런거지 뭐, 나는 시의 승패가 늘 얼마나 집요했는가, 그 시에 집중했는가 하는 것에 있다고 봐. 그게 좋은 시가 태어나느냐 않느냐 하는 중요한 관건이라고 봐.
주로 70년대 생들 얘기지? 나는 후배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우스운 논리지만 나는 늘 그들로부터 충전을 받고 싶고 긴장을 하고 싶어. 그런데 원하는 만큼 충전이 잘 안 되더라구. 으음,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경우에 따라 그들의 시에 대해 옹호하는 마음이었다가 비판하는 마음이었다가 그래, 아니 솔식히 말하면 비판하는 쪽에 가깝지.
창조적 독창성의 스팩트램이 다양하다 했나, 그들의 시가? 나는 전혀 반대라고생각하는데? 나는 젊은 시인들의 시들을 읽으면서 어쩜 이렇게 '꼼수'들일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해. 물론 성장기와 이러저러한 문화의 변화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 같은 것이겠지만, 이를테면 실내에서 흔히 하는 카드놀이나 좀 잘아빠진 테크닉을 요구하는 당구 같은 거는 잘 하는데 넓은 잔디밭으로 나가서 뛰는, 땀을 흘리는, 장쾌한 스윙으로 홈런을 날리는 그런 시들은 안 보여. 스케일이 큰 서사구조를 가진 시나 야생의 시가 좀 나타나 주었으면 좋겠는데, 가만 들여다보면 늘 혼자만 노는 시들이야. 이름을 가려놓고 보면 누구의 시인 지 잘 모르겠어. 어쩌면 그렇게 발상부터 표현기법까지 한결 엇비슷한지.
종은 시의, 좋은 시인의 덕목은 그게 아니잖아. 오로지 나만의 목소리, 나만의 사고를 갖는 것이잖아. 시인으로서 개별존재의 자아를 (비록 그것이 허수아비나 허구라할지라도) 언어의 우주 한 가운데 세우는 것이잖아. 누구나 다하는, 할 수 있는 노래를 왜 해? 생각해보면, 나를 포함해서 어찌할 줄을 몰라하는 요즘의 젊은 시인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그래. 비판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도 같은데 이러다가 무슨 타개책이 생기겠지. 누군가는 출구를 찾아 빠져 나가겠지.
- 유홍준 / [현대시]2005년 8월호, 신동옥 시인과 대담하면서
시인 선서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좇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 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함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시詩이며, 거짓말시詩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에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온 세상이 권력의 전횡專橫에 눌려 핍박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
민주와 자유가 억압당하고,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시인이여, 그대는 어둠을 거쳐서 한 시대의 새벽이 다시 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라.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盟友여야 한다.
- 한국시인협회 회장 김 종 해/ 김종해 홈페이지에서 퍼옴
생태문학인은 종교보다 엄격해야 해, 실천적인 생태관이 필요해. 일종의 아나키지. 그런데 한국문학은 이런 문제를 외면해 왔어. 한국 현대시 100년은 9할이 형용사와 부사야. '보고싶다. 그립다. 아프다. 가고 싶다.....' 이게 우리 시야. 잠시 체언이었던 적이 있었을 뿐, 언제나 용언이었지. 안타까운 일이야.
이문재 / [현대시]2005년 3월호 , 평론가 김수이가 쓴 커버스토리에서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말) "시를 열심히 쓰세요" 는 정답이 아닙니다. "열심히 사세요"라고 해야겠지요, 순연한 가슴으로 삶을 사랑하며 그 떨어진 이삭으로 시를 주우십시오. 그리고 적어도 시인 부류에 있는 사람들은 행복 위에 가지를 놓으십시오. 좀 더 정신적이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이런 말이 되겠군요. 또한 저는 요새 젊은 시인들에게 감동에 있어서의 장엄성을 추구하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요새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보면 장엄성 등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기능의 부족이 염려되곤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알려지지 못하고 생애가 끝나는, 생전에 좋은 작품을 발표한 시인들을 기억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김남조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5년 7,8월호 '대담'에서
삼나무 향 짙게 밴 민박집에 삯일 나왔던 그를
술자리에 끌여들였다가
인간시대에나 나올법한 사연을 귀동냥 했는데요
섬사내의 순정에 먹먹해져 나도 모르게 그만
한라산을 한입에
탁! 털어 놓고 말았습니다.
- <한라산> 부분
이 시에 대한 나의 독서경험을 그대로 말해본다면,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한라산을 한입에 / 탁! 털어 넣고 말았습니다> 라는 구절이 나를 긴장하게 했었다. <한라산>을 한입에 털어 넣다니! 이 시의 화자가 지닌 내공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시의 말미에는 <한라산 : 화산암반수로 빚어진 제주 소주> 라는 주석이 붙어 있었다. 강렬했던 인상이 단번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주석이 없었다면 이 시는 중의적 울림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재연예술이 사실과 정보,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될지라도 그 사실과 정보를 독자에게 모두 솔직하게 알려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소박한 친절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시의 미감 형성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바닷물의 들고남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던가 / 수백 리 밖에서 몰려오는 우기를/ 귀밑 스치는 바람자락만으로 예견하는 일 따위가 / 마음 외부의 시력을 필요이상으로 밝히는 동안 / 마음 안쪽의 눈은 청맹과니처럼 아득해져 / 낮고 소소한 것들의 아픔 따위 / 안중에서 지워버린지 오래인 뭇사람들에게는 / 하찮고 미욱하게 여겨질지 모를 일이나 / 양쪽 눈 가운데 하나쯤은 / 깊어질대로 깊어져 한 길 우물이 되어버린 / 어머니의 고요한 눈을 닮아도 좋겠다고 / 저문 하늘빛과 같이 쓸쓸해져도 좋겠다고 / 그렇게 한 생을 가만가만 내려놓아도 좋겠다고 / 열차 떠난 역사에 우두커니 서서 / 불현듯 생각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 <까막눈> 부분
무려 15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구를 자세히 보면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비교적 문장이 잘 정돈되어 있기 때문에 의미 전달에는 문제가 없을 지 몰라도 독자의 호흡을 불편하게, 혹은 숨가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현상은 어머니와 뭇사람을 대비시키는 지루한 설명방식에서 연유하는 것은 아닐까?
엄경희 (문학평론가) / '현대시학' 2005년 7월호/ 작품론에서
1) (예시: 어떤 시의 마지막 행) "조금씩 바깥으로 흘려보내는 것들을 보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코메디언이 자기가 먼저 웃으면 우리가 따라 웃을 수 없듯이 시인이 자기가 슬프다고, 그것도 마지막 행에다가 자신의 시적 감정을 그렇게 정리해 주면 독자들을 난감해진다. 시에서는 슬프다고 말하면 안 되고 그 시 자체가 슬퍼야 함을 시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터인데도 시적 긴장력이 툭 끊어지면서 정형화된 결론이 성급하게 맺어지는 경우를 확인하는 일은 다소 맥 빠지는 노릇이다.
2) (예시) "궁전에는 낮밤음악이 냇물처럼 흐르고"
'낮밤음악'은 교차적 리듬이 음악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주의 교차적 주기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의 양과 음을 '음악'앞에 놓은 것이다. '밤낮'이라는 익숙한 합성어를 사용할 경우 그러한 깊은 의미가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낮밤'으로 표기하였다. '밤낮' 이라는 관용화된 표현은, 반의적 개념이 한순간에 융합하여 전체를 형성하는 양상에 주목하게 하는 힘을 감소시킨다는 점도 계산되어 있다.
- 이필규(평론가) / 한 시인론에서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 문태준, <가재미> 전문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가 2004년 최고의 시로 뽑혔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아마도 비평가와 시인들이 어우러진 결과이니 상당한 타당성과 공정성이 담보되어 있을 것이다. 더불어 문태준 시인처럼 우수한 시인의 행보를 좇는 재미도 쏠쏠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글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일단의 문제제기를 목적으로 한다. <가재미>가 2004년 최고의 시로 뽑혔다는 소식은 대략 3주 전에 들어 알고 있었고, 나는 즉각 그 사실을 확인했다. 그 이후로 <가재미>에 대해 여러 생각들을 공굴려 봤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서, 내게는 이런저런 갈등‘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끝내는, ‘최고의 시’라는 레테르를 꿀꺽 넘기지 못했다. 모든 문제제기는 일단의 적을 만든다. 더군다나 나 같은 소심하고 문학적 성과가 빈한한 자에게는 어떤 비웃음도 곁들여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저질러 보자면, 정말 <가재미>가 최고의 시인가라고 나는 묻고 싶다. 잘 씌어진 시, 우수한 서정시, 이런 게 아니고 ‘최고의 시’인가? 물론 뽑은 선자들의 안목이나 감식안을 또 그 문학적 주관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평론에는 염 젬병이니 좀 거칠게 말하겠다. <가재미>는 잘 씌어진 슬픈 서정시다. 시집 『맨발』을 의식하고 시를 읽었을 때, “암투병 중인 그녀”는 시인의 어머니다. 어머니가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 있을 때, 자식 된 자의 마음은 어떠할 것인가. 불문가지 아닌가.
그런 심사를 시인은 자기의 장점을 살려 빼어난 시 한 편으로 표현해 냈다. 그 놀라운 형상화 능력이라든가,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 같은 시적 이미지는 얼마나 절묘한가.
그런데 문제는 보다 더 원론적이고 본질적인 데 있다. 시는 여기까지인가? 개인적으로 문태준 시인의 시에게 큰 감동을 얻지 못한다. 왜 잘 씌어진 시가, 우수한 시가 내게는 감동을 주지 못하는가? 이 점은 물론 그와 나의 서정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나는 그의 보수적인 가족 공동체로의 회귀본능에 동의하지 못한다. 과거를 불러내 현재화시키는 시적 전략을 신뢰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건 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다 그는, 시를 구축(?)할 때 비뚤어진 벽돌 한 장을 용납하지 않는다. 시는 허술하고 어눌해야 감동이 깊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기교나 예술적 형상능력 이전에 있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 했던가. 문태준의 치밀한 기교와 빼어난 형상능력은 역설적으로 그의 시를 졸(拙)해 보이게 만든다. 그의 시를 읽은 후 그의 시세계를 캐치해 내고, 그가 인도하는 가족 공동체의 기억 속으로 따라가는 것도 좋다. 그러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시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자는 반론이 귓가에 맴돈다. 시는 시로서 족하다, 시를 읽고 그 시의 서정을 따라 한 순간이라도 다른 순간을 갖는 것은 좋은 일 아닌가, 그게 시의 매력 아닌가, 는 거절할 수 없는 명제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가 더 다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내 삶이, 내 인식이, 내 사유가, 달라져야 하는 건 아닌가, 지금 달라지지 않아도 달라질 수 있는 우연적 계기를 몸의 느낌으로 알아야 하는 건 아닌가, 이렇게 주장하고 나면 이제부터는 시 한 편에 대한 입장을 훌쩍 넘어서게 된다.
나는 여기까지 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암, 가야 되고말고.
그래서 내가 제기하는 ‘최고의 시’에 대한 문제는 문태준 시에 대한 것보다는, 그렇다면 전반적인 우리의 시가 어떤 관행 및 타성의 족쇄에 얽혀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닿게 된다. 이 지점에서 싸움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나와 문태준, 김 시인과 나, 홍 비평가와 문태준, 자기와 자기… 이런 확전이 필요하다.
어찌 보면 이 글은 <가재미>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가재미>를 매개로 한 싸움과 이의가 없음을 개탄하는 글인 것 같다. 싸움과 이의는 없고 동의와 수긍만 있다면, 그건 니체가 말한 ‘낙타의 긍정’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아이 경지의 무구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자의 포효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게 내 주장의 요지다!
- '최고의 시' 이의 있습니다 / 황규관(시인)
현대시의 난해함은 기호와 대상 간의 불화를 자축하고 기표들의 기의로부터의 독립을 권장하는 시인들 득의의 전리품이 되었다. 그러나 발화된 시, 인쇄된 시의 현장은 통약을 전제로 한 최소한의 의미론적 규약들이 교통하는 장소이다. 약호화(codng)와 그것의 해독(decoding)은 흥미로운 지적 게임을 촉발시키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공통된 약호의 존재와 그것을 통한 통약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라면 기호들은 기의화의 결별을 못견디고 기의와 더불어 자진自盡하거나 직관의 자의성과 함께 증발한다. 그리고 물론, 시적 소통의 최소공약수마저 사라지면 시 역시 죽는다.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은 시관은 엄살이며 맨 살을 드러내 구애는 지나친 넉살이다.
- 조강석/ '열린시학' 2005년 여름호/ 시의 소통방식에도 표준은 있는가? 에서
....그리고, 또 시란 일종의 접속사를 통해서 붙여나가는 거라 생각해요. 접속사 '그리고, 그런데, 그러나'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러나'로 가기에는 상당한 긴장과 에너지가 필요하고, 또 잘못 뒤집었을 때는 완전 말장난이 되지. 대충 '그런데' 라고 이야기 했을 때 , '그러나'가 수직으로 벌어진다면, '그런데'는 처음 벌릴 때는 아주 호기심 찬데 나갈 때는 다른 성격이 되지. '그런데'로 말문을 열고 붙여나가서 새로운 틈새를 만드는 거, 그런게 시가 아닌가? 왜 축구선수들 하는 거 보면, 앞이 가로막히면 일단 볼을 띄워주고 돌아가서 공을 차지 않아요. 그런 것처럼 언어를 먼저 띄워주고 그 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주고.
- 이성복/ '열린시학' 2005년 여름호 / 대담에서
출처 : 시인 박정원의 [함께하는 시인들]
글쓴이 : 장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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