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기 위한 마음의 준비 / 윤석산
1. 모든 글을 쓰기 전에 먼저 알아둬야 할 것들
젊은 날에는 누구나 한번쯤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독자들이 자기 작품을 감탄하며 읽고, 영원히 기억하면 얼마나 멋질까 꿈을 꾼다. 이와 같은 꿈을 꾸는 것은 <유한한 자아>를 <무한의 자아>로 확대시키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편쯤 쓰다가 이내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는 글을 쓰는 것도 좋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거나, 재능이 부족하다고 속단을 한다. 이와 같이 쉽게 포기하는 것은 글쓰기에 대하여 몇 가지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글을 쓰던 먼저 잘못 생각하는 것들을 바로잡지 않으면 끝까지 쓸 수가 없다.
1)글쓰기가 가장 중요한 공부임을 인정해야 한다
글을 쓰는 것은 취미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갖추어야 기본적 기능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기본 욕망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를 발달시키지 않으면 지적 불균형을 이룰 뿐만 아니라, 또한 정신적 만족을 시킬 수 없다.
우선 기본 기능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인간의 활동 영역을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생활의 절반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산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전개하는 활동은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수용(受用) 활동>과, 자아의 존재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표현(表現) 활동>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수용 활동은 주로 <듣기>와 <읽기>에 의하여, 표현 행위는 <말하기>와 <글짓기>에 의하여 이뤄진다.
그런데, 수용행위는 궁극적으로 표현행위를 밑받침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글짓기>가 <말하기>보다 고차적인 기능에 속한다. 그것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달변가나 웅변가는 아니어도 논리적이며 설득력 높은 말을 하는 점이라든지, <인문>·<사회>·<예능> 계열의 학문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점으로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글짓기를 못하는 것은 단순한 취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갖춰야 할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능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글쓰기는 인간의 기본적 욕망에 뿌리를 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히 살고, 보다 많은 사람에게 뚜렷이 자기를 인식시키려고 한다. 그것은 자아를 <홀로 있는 나(en-soi)>와 <타인과 관계를 맺은 나(pour-soi)>로 나눌 경우, 자아의 가치를 발생시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맺은 나>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해도 현실적으로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이와 같은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 보다 많은 사람들과 의도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이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꿈에 부픈 젊은이들이나, 노년으로 접어든 사람들이 글을 쓰고 싶어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말과 글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글은 말하듯이 쓰면 된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실제로 말하듯 글을 쓰면 논리가 비약할 뿐만 아니라, 엉성한 글이 되고 만다. 말하듯이 글을 쓰라는 것은 리얼리즘 문학관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서, 문학에서 다루는 제재와 어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 일상적 담화를 그대로 옮겨 쓰면 작품이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므로 글을 쓰려면, 일상적 담화에서 택하는 제제를 골라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되, 문자언어의 어법과 음성언어의 어법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문자언어가 지니고 있지 않은 요소들을 보완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일상적 담화에서는 화자(話者)와 청자(聽者)가 직접 대면玖庸?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러므로 화자와 청자는 시간적(時間的).공간적(空間的) <배경(背景)>과 <상황(狀況)>을 공유한다. 반면에 글쓰기에서는 화자에 해당하는 <필자>와 청자에 해당하는 <독자>가 독립된 상태에서 이야기(글)을 주고 받는다. 그로 인해 독자는 필자가 이야기하려는 상황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글로 바꾸려면 먼저 시간적 공간적 배경과 이야기 주체가 처해 있는 상황을 눈에 보이듯 묘사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글이 첫머리에 <언제>, <어디에서>라는 시간적·공간적 배경을 제시하고, 그 배경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한 다음 본격적인 이야기를 넘어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또 음성 언어는 <높낮이>, <빠르기>, <크기>, <뉴앙스>, <몸짓>, <표정>의 보조를 받는다. 그러므로, 너무 자세하기 이야기하면 장황하게 들린다. 반면에 글은 추상적 기호인 문자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작중 인물의 행동을 묘사할 때에는 이와 같은 연행적 요소들을 부각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다음 문장들을 비교해 보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는 나즉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이를 부드득 갈면서 아주 음산한 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는 그냥 고맙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처럼 '나즉히'이라는 음성적 요소를 묘사하고, ⓒ처럼 표정과 뉴앙스와 음성의 높낮이를 묘사하면 '고맙다'는 이야기는 보복하겠다는 협박으로 바뀌고 만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글로 바꿀 때에는 음성적 특징과 표정 등을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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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일상적 담화는 청자를 대면하고 진행하기 때문에 상대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못마땅한 반응을 보이면 부연해서 설명하거나 이야기의 방향을 수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글에서는 청자의 반응을 살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 아래 논리적으로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3)읽기 방법을 바뀌야 한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많이 읽어야한다. 글을 쓰는 행위는 모방(模倣)이나 모작(模作)의 충동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글을 읽는 동안에 나도 이처럼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든지, 내가 쓰면 이보다 더 잘 쓸 수 있다는 창작 의욕이 발생하고, 작품을 감상하는 안목이 그 사람의 문학적 수준을 결정하는 지표 구실을 할뿐만 아니라, 문학적 관습(文學的慣習)을 터득하고, 자기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모티프(motif)나 소재(meterial)를 발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좋은 글을 쓰려면 '다독(多讀)'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좋은 글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글쓰는 능력이 반드시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글쓰기에 알맞은 독서 유형을 선택해야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글만 읽지 말고 보다 많은 글을 읽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독서의 유형은 크게 <이해(理解)의 독서>, <감상(鑑賞)의 독서>, <비판(批判)의 독서>, <창조(創造)의 독서>로 나눌 수 있다. <이해의 독서>는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밑줄을 그으면서, 그 글의 주제에서부터 낱말뜻이라던가 숨은 의미를 파악하며 읽는 방법을 말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유형의 독서는 정보의 파악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증가시킬 뿐, 글쓰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상의 독서>는 지식보다는 글의 흐름에 따라 읽으면서, 그 글의 줄거리나 표현의 재미를 맛보며 읽는 방법을 말한다. 이 방법은 <이해의 독서>보다는 한결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작품 그 자체에 몰입했기 때문에 글을 읽는 재미를 맛보고,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그 글이 다른 사람의 글과 어떤 차이가 있으며, 어떤 기법을 구사했는가를 파악하지 못하여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판의 독서>는 그 글을 읽으면서,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테마를 구현하는 데 적합한가, 그에게 부여한 상황과 배경은 적절한 것인가, 작중 인물의 행위는 개연성(蓋然性)과 개성(個性)을 지니고 있는가, 앞뒤 단락은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가, 각 문장에 동원된 어휘들은 인물과 상황에 적절한가, 그 어휘들의 음성 조직은 의미만을 나타내지 않고 기분까지 드러내고 있는가를 살펴보며 읽는 방식을 말한다. 이와 같은 방식은 그 글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 글의 장점은 받아들이고, 자기의 단점을 발견하여 고칠 수 있기 때문에 한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창조적 독서>는 <비판적 독서>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지는 독서로서, 그 글을 소재로 삼아 머릿속에서 또 다른 작품을 구상하면서 읽는 방식을 말한다. 가령,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라는 문장을 읽고 있다고 하자. 문장이 지시하는 의미만 떠올리지 않고, 해풍에 휘날리는 머릿결을 떠올리고, 그 머릿결의 색깔과, 간밤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연인의 모습과, 그들이 앉아 있었던 카페의 탁자 위로 내리던 조명의 빛깔, 그 조명에 반짝이던 그라스를 떠올리면서 자기 나름대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독서는 그 작품을 끝까지 다 읽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게 만드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글을 쓰는 데에는 이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오랜 동안 글을 써온 사람으로서 마땅한 소재를 떠올리기 어려운 사람의 경우에는 책장을 넘기면서 아무 곳이나 읽고, 그런 상상에 빠지는 방법을 택하면 아주 훌륭한 글감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일부 문학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문인의 작품만 골라 읽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의 독서 방법은 그리 좋은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한 사람만 작품만을 골라 읽으면 어느 덧 그 문인의 아류(亞流)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보다 많은 문인들의 작품을 읽고, 그 작품의 장점이 무엇인가를 발견한 다음,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장점을 받아들일 경우, 그의 문학적 깊이가 심화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총화가 곧 그의 개성으로 되기 때문이다.
4) 너무 잘 쓰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쓸 때마다 미문(美文)이나 명문(名文)을 쓰겠다고 벼른다. 그리하여 미사려구(美辭麗句)를 동원하고, 새로운 글감을 찾으려고 애를 쓴다. 아름다운 글은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역사 속에 오래 남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신비평가들(New-Critics)이 지적했듯이 아름답게 쓰려고 해서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름답게 쓴 글이 감동을 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욕심은 심리적 부담을 가중킬 뿐,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글을 만들고 만다.
그것은 젊은 시절에 누구나 한두번 쯤 써보는 연애 편지의 경우를 되돌아보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밤새도록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사전을 뒤적거리고 자기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하면서 아름다운 말을 골라 쓴 글을 아침에 읽으면 공허한 어휘들의 나열로서 유치하게 느껴지기가 일 수 있다. 그것은 아름답게 쓰려는 의도가 심리적 부담을 가중시켜 적절치 않은 어휘를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글의 감동은 근본적으로 독자의 인식 태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독자가 원하는 방향의 이야기이고, 또한 진실한 이야기일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보편적이면서도 진실되게 쓰려는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들이 원하고, 또 진실한 글이란 어떤 글인가. 이에 대한 견해는 학자마다 달리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장르마다 또 다르다. 우선 서사적 장르에서는 루카치의 견해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것들 속에 있으며, 단순히 현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상 세계를 이루려는 열망을 그려야 할 때 아름다움과 감동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발견할 때 어느 쪽이 성공할까 하는 글을 읽는 재미가 발생하고, 그런 현실을 뚫고 이상을 지향하는 자세에서 나도 저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감동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정적 장르는 <현재 이 순간의 느낌이나 생각>을 다룬다. 그러므로, 서사적 장르처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그릴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서 제재를 취하되, 그에 대한 느낌이나 상상이 다른 사람과 얼마나 차이가 나며, 또한 솔직한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많이 다듬고 부지런히 발표해야 한다.
처음 글을 쓰는 사람들은 초고가 끝나면 마침법 정도만을 고친 다음 팽개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문학 수업을 받은 사람들은 서너 번 고친 다음 뛰어난 문인들의 작품과 비교하면서 자기 글이 부족하다는 걸 발견하고 절망한다. 그리고, 뛰어난 문인들은 단번에 매끈한 글을 써낼 수 있는 것으로 믿는다.
브라크는 예술가의 두 유형을 <베토벤 형(形)>과 <모짜르트 형>으로 나눈다. 그리고, 음악 연구가들이 그들을 연구할 때의 태도를 소개한다. 베토벤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흔히 어떻게 이런 조잡한 악상(樂想)에서 위대한 교향곡이 완성되었는가를 놀라고, 모차르트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단번에 이처럼 완벽한 악곡을 써낼 수 있는가를 놀랜다고 한다. 그러면서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형은 단번에 완벽한 작품을 써낼 수 있지만 그 크기가 작은 작품을 쓰고, 베토벤과 같은 노력형은 조잡한 발상에서 시작하지만, 오랜 노력 끝에 대작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사에서 더욱 상찬되는 사람은 아마도 베토벤형일 것이다. 그것은 동양의 문학사를 살펴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조(朝鮮朝) 때 과거를 보려는 젊은이들을 위해 칠보시(七步詩)를 짓던 이백(李白)의 시를 언해(諺解)하지 않고, 오랜 동안 다듬고 고치던 두보(杜甫)의 시를 언해하여 읽힌 것으로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인이 쓴 글은 우열의 차이는 있을망정 보통 사람들이 쓴 글보다 문학적 가치를 지닌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학적 가치는 누구가 썼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글은 나름대로의 '문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도달하지 못한 글은 누가 썼던 잘못 쓴 글이다. 그리고 그런 깊이는 단번에 관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며, 여러 번의 개작 과정을 통하여 그 깊이에 도달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천재가 아닌 경우에 훌륭한 글을 쓰느냐 여부는 얼마나 개작하느냐 여부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글을 쓰려면 반드시 발표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욕망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이 욕구를 만족시켜주지 못하면 글을 쓰는 것이 부담스럽고 귀찮은 일로 바뀌고 만다. 하지만 너무 발표에 급급해서도 안 된다. 글은 자기의 정신적 육체로서 완성되지 않은 글을 발표하기는 것은 치부를 내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작품 감상>
다음 최남선(崔南善)의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를 읽고 나름대로 생각해 봅시다.
1
처…ㄹ… 썩, 처…ㄹ… 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ㄹ… 썩, 처…ㄹ… 썩, 척, 튜르릉, 꽉.
2
처…ㄹ… 썩, 처…ㄹ… 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육상(陸上)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 썩, 처…ㄹ… 썩, 척, 튜르릉, 꽉.
3
처…ㄹ… 썩, 처…ㄹ… 썩, 척,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通寄)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秦始皇), 나파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처…ㄹ… 썩, 처…ㄹ… 썩, 척, 튜르릉, 꽉.
4
처…ㄹ… 썩, 처…ㄹ… 썩, 척, 쏴……아.
조그만 산모를 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뼉만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 <소년> 창간호, 1908.1
<생각해 볼 사항들>
○여러분이 쓴 작품과 최남선의 작품과 비교해 보십시오. 누가 잘 썼습니까? 왜 최남선의 작품이 문학사에서 거론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작품에서 주로 사용한 수사법은 어떤 것입니까? 그 수사법은 어떤 효과를 가져오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은 이 작품이 쓰고 있는 수사법을 채택하지는 않고 있습니까?
○이 작품은 각연과 각행의 길이를 똑같이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행과 연의 설정은 어떤 효과를 가져오고 있습니까? 부자연스럽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행과 연을 나누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