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니 이런일이/시(詩)를 위하여

[스크랩] (시) 화자 선택 / 윤석산

麗尾박인태행정사 2008. 4. 23. 13:58

(시) 화자 선택 / 윤석산 문학의 향기

2005/05/16 20:59

http://blog.naver.com/jinguja/80012985643

1. 시인과 시 속의 인물 관계


일상 생활에서 담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이야기의 주체인 <화자(話者)>, 그 이야기 내용
에 해당하는 <화제(話題)>, 그 이야기를 들어줄 <청자(聽者)>가 있어야 하고, 이들의 상호 역동적인 관계에 의해서 탄생된다.  문학적 담화도 이와 유사하게 진행된다. 다시 말해, <시인-작품-독자>의 관계에서 이뤄진다.

 

그로 인해 종래의 시에서는 대부분 작품 속에 시인이 직접 등장하여 자기의 정서나 상상한 것들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해 왔다. 이와 같은 화자(話者)는 <자전적(自傳的) 화자>로서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장점을 지닌다. 그러나, 자전적 화자를 택할 경우, 시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이나 갈등을 비롯하여 부도덕한 것은 표현하기가 어려워진다. 인간은 누구나 도덕적이며, 진실하고, 고상하게 보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현대시로 접어들면서 시인이 자기가 선택한 화제에 적합한 가공적 인물, 다시 말해 <허구적 화자>를 택하는 경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컨대,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김소월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바와
같이 남자 시인이다. 그런데,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여성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순응하는 여성적 사랑을 그리기 위해 꾸며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이 지극히 아름답고 순정적인 화제를 떠올리고, 그에 적합한 인물은 여성이라고 판단한 다음 자기의 의식 속에 숨겨진 남성적 속성(animus)과 여성적 속성(anima) 가운데 여성적 속성만 강화시켜 부각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시적 담화에서 화자는 시인이 그와 같은 입장이 되어 그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경우에 그런 행동을 할 수도 있는 가상적인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니, 작중의 인물을 시인 자신으로 내세운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그대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기를 쓸 때를 생각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그대로 쓰려고 해도 그 당시에 겪고 생각한 것만 쓰는 게 아니라, 부분적으로 꾸미고 보충하기 마련이다. 이와 반대로 허구적으로 만들어낸다고 해도 완전히 꾸며내는 것은 아니다.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의식이 지향하는 바에 따라 재구(再構)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화자는 시인 그 자신의 반영도 허구적 존재도 아닌 절충적 존재(折衷的存在)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인이 작중의 화자로 바뀌는 과정은 [①실제 시인≥②함축적 시인≥③화자〕의 순으로 축소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화자의 기능과 역할


서정적 담화에 인물이란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 담화가 소설이나 희곡에서처럼 타자(他者)를 모방하는 장르가 아니라, 시인이 직접 등장하여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토로하는 장르라는 표현론적 관점이 오랜 동안 지배해 왔기 때문이다. 현대의 주지주의나 비롯하여, 형식주의(形式主義) 시론으로 접어들어 서정적 장르에도 서사적 장르의 인물(character)과 대응되는 개념으로 <화자(speaker)>·<시적 인물(poetic character)>·<서정적 자아(lyrical self)>·<퍼소나(persona)>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다. 화자라는 용어는 종종 서사와 극적 장르의 <해설자(narrator)>나 <중개자(median)>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수가 있다. 하지만 서사나 극적 담화에서 '해설자'는 작품 밖에서 작중 인물의 행위나 심리를 설명하는 사람이란 뜻을 지니고 있으며, '중개자'는 해설을 통하여 작중 인물과 인물 또는 인물과 상황 사이를 중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서정적 장르의 화자는 주인물(主人物)의 성격을 지닌 존재로서, 의미적 국면(意味的局面)의 주체요, 전략적 국면(戰略的局面)의 주도자요, 조직적 국면(組織的局面)의 산출자로서 훨씬 강력한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다.

 

돈 없으면 서울 가선
용변도 못 본다.

오줌통이 퉁퉁 뿔어 가지고
시골로 내려오자마자
아무도 없는 들판에 서서
그걸 냅다 꺼내 들고
서울 쪽에다 한바탕 싸댔다.
이런 일로 해서
들판의 잡초(雜草)들은 썩 잘 자란다.
서울 가서 오줌 못 눈 시골 사람의
오줌통 뿔리는 그 힘 덕분으로
어떤 사람들은 앉아서 밥통만 탱탱 뿔린다.

가끔씩 밥통이 터져나는 소리에
들판의 온갖 잡초들이 귀를 곤두세우곤 했다.
- 김대규(金大圭), [야초(野草)] 전문

 

이 작품은 현대 도시인들의 비인간적 삶을 비판하려는 목적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테마
에는 어울리는 화자는 아마도 어쩌다가 서울에 올라 간 시골 사람 가운데에서도 우직한 남자일 것이
다. 의미적 국면에서 전체를 3연으로 구성한 것은 화자의 행위가 <서울의 경험> <시골에 내려온 다
음의 행위> <서울에 대한 생각>으로 나눠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울에 대한 부분을 짧게, 시골에
대한 부분을 길게 이야기한 것은 '서울'이라면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는 거부감과, '아, 고향에 내려오니 살 것 같다'라는 해방감이 작용한 탓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자세히 이야기하고, 싫어하는 것은 짧고 추상적으로 말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시어의 선택과 어조도 마찬가지이다. 세련된 시어를 골라 점잖은 어조로 말한다면 우직한 시골 사
람답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용변 같은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 그래서, 시골 사람답게 '오줌통이 뿔어', '그걸 냅다 꺼내 들고/서울 쪽에다 한바탕 싸댔다'라고 걸쭉한 어휘를 선택하고, '밥통만 탱탱 뿔린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각 행의 길이를 짧고 불규칙하게 잡으면서 리듬을 배제한 것은 화자의 다급한 정서와 서민층의 정제되지 않은 어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시 창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테마의 발견보다는 테마에 걸맞는 화자를 설정하는 일
이라고 할 수 있다.

 

3. 화자의 유형


화자의 유형은 <시인과의 관계>에 따라 나눌 수 있다. 그리고 <화자의 신분과 계층>에 따라서도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동일 화자라고 해도 <담화의 담당 층위(層位)>와 <태도>에 따라서도 나눌 수
있다. 화자의 유형에 따라 시적 특질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알아보기로 하자.


(1) 시인과 관계에 따른 유형


화자와 시인과의 관계에 따라서는 <자전적 화자(自傳的話者)>와 <허구적 화자(虛構的話者)>로 나
누는 것이 보통이다. 전자는 작품 속에 시인이 직접 등장하는 유형을 말하고, 후자는 테마에 따라 시인이 꾸며낸 유형을 말한다. 이와 같은 분류는 화자의 모습이 실제 시인과 얼마나 닮았느냐 하는 양과 빈도에 따라 나눈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전적 화자>를 택할 경우에는 회고적·고백적 어조를 띠며, 표현 기능이 강화되고,
독자들은 <시인=화자>로 받아들이면서 시의 내용을 시인과 연관지어 해석하기 때문에 다른 유형의
화자를 선택했을 때보다 한결 더 그 내용을 신뢰하게 된다.

 

오늘
아버님을 뵈오러
경기도양주군진접면장현리
산소엘 갔더니
아버님은 안 계시고
무덤만 텅 비어 있더군요.
지난 밤 꿈 속에서
아버님께서는 기러기 비낀
달빛 받아 술을 빚으시더니
그걸 들으시고
훨훨
날아
평안남도안주군동면명학리
선산 조상님들 뵈오러
떠나셨나 봅니다.
- 전봉건, [성묘]에서

 

시인 전봉건(全鳳健)의 고향은 이 작품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평안남도 안주군 동면 명학리(平安
南道 安州郡 東面 鳴鶴里)'이다. 그리고 선친의 무덤은 생존시에 늘 고향을 그리워하여 북쪽으로 가는 길목인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京畿道 楊州郡 榛接面 長峴里)'에 마련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시 속에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간 화자는 허구적인 인물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화자가 자전적인 성격을 띠면 리얼리티가 증대되지만, 시적 변용을 거치지 않았을 경우
에는 산문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감상성을 면하기가 어려워진다. 이 작품에서 추석을 맞는 화자의 쓸쓸한 정서를 최대한도로 자제한 점이라든가, 아버지 무덤이 '텅 비어' 있으며, '기러기 비낀/달빛을 받아' 술을 빚고, 그것을 들고 고향 선산(先山)의 조상님들을 뵈러 떠났기 때문이라고 상상을 사실처럼 허구화한 것도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허구적 화자를 채택할 경우에는 시인과 화자가 분리되기 때문에 일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데 용이하다.

 

꿈에서 본 몇 집밖에 안되는 화사한 소읍(小邑)을 지나면서
아름드리 나무보다 큰 독수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내일(來日)에 나를 만날 수 없는
미래(未來)를 갔다

소리 없이 출렁이는 물결을 보면서
돌뿌리가 많은 광야(廣野)를 지나
- 김종삼, [생일]

 

화자는 대낮에 간 밤 꿈 속에서 본 것과 비슷한 소읍(小邑)을 지나 '내일에 나를 만날 수 없는/미래'로 가고 있다. 그리고 그 읍에는 '아름드리 나무보다 큰 독수리'가 날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를 뛰어넘어 '미래'로 갈 수 없다. 그리고 아름드리 나무보다 더 큰 독수리를 만날 수도 없다. 따
라서 이 작품의 화자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그의 의식 세계 속에 담긴 그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꾸며낸 인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허구적 화자를 선택하면 시인과 분리되어 소재의 선택이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어떤 관점
을 다루든 부담이 없으며,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극적으로 드러낼 뿐만 아니라, 주관적 감상성에서 벗어나는 것도 용이해진다. 하지만 꾸며낸 이야기임을 드러내 놓고 밝히는 결과가 되어 리얼리티가 떨어지고, 난해시(難解詩)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게 약점이다.


⑵ 신분에 따른 유형


화자는 결국 인간을 모방하는 관념체로서, 어떤 사람을 모방하느냐에 따라 그 유형을 다시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이 나눌 경우에는 사회적 계층(社會的階層)·연령(年齡)·성(性)에 따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서정적 장르에서 화자의 성이나 신분은 소설의 경우처럼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인물은 '허생원'이나 '복녀'처럼 고유명사(固有名詞) 형태로 제시되고, 모든 행위를 지시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 이름만 들어도 신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시에서는 이런 것들이 제거되고, '나'·'너'·'그'와 같은 대명사(代名詞) 형태를 취하면서 암시적이고도 상징적인 방법으로 제시되어, 얼른 분간이 되지 않는다. 특히 화자를 잠재시키거나, 이와 반대로 노출시키더라도 비일상적인 의식 상태를 다루는 현대시로 내려올수록 이런 구분은 어려워진다.


이와 같이 문맥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화자의 성·연령·신분은 텍스트 속에 나타난 화자의 태도와 어조 및 화제의 성격으로 미루어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어려울 경우에는 그 담
화 속에 담긴 상징물을 분석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보통이다. 성의 경우, 상징물을 분석하는 방법으로는 융(C. G. Jung)을 비롯한 분석 심리학자들의 견해와, 그런 해석이 너무 남성 중심이라고 비판한 길리건(C. Gilligan)을 비롯한 여성 심리학자들의 견해를 참조하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연령과 신분은 사회 언어학적(社會言語學的) 지식을 원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와 같은 견해들을 종합할 때, 문맥에 드러나지 않는 화자의 성은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시의 의미적 국면
ⅰ) 화자의 태도와 정서 : 대상으로부터 독립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이성적(理性的) 능동적(能
動的)으로 대응하는 화자는 남성, 대상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감성적(感性的) 수동적(受動的)으로 대
응하는 화자는 여성으로 나눈다.
ⅱ) 화제의 성격 : 국가 사회 윤리 같은 공적(公的) 추상적(抽象的) 화제를 택하는 화자는 남성,
이별 사랑 아름다움 같은 사적(私的) 구체적(具體的) 화제를 택하는 화자는 여성으로 나눈다.

 

② 시의 형식적 국면
ⅰ) 시형과 율격 : 상대적이지만 자유율(自由律)을 택하는 경우 자유분방한 시형은 남성, 정제된 시
형은 여성으로 나눈다. 그리고 정형율(定型律)을 택하는 경우에는 4음보처럼 균형적(均衡的)이며 대응적(對應的)인 음보는 남성, 3음보처럼 가변적(可變的)이며 대응된 짝이 없는 음보는 여성으로 나눈다.
ⅱ) 음성 조직 : 기능적이고 소박한 음성은 남성, 섬세하고 장식적인 음성은 여성으로 나눈다.

다음 김소월(金素月) 작품들만 해도 그렇다. 이들은 모두 쓰여진 시기가 비슷하고, 시인 자신이 골
라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한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의 성차(性差)에 따라 텍스트의 모든 특질이 달라지고 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 [진달래꽃] 1, 2연

 ⓑ마소의 무리와 사람들은 돌아들고, 적적(寂寂)히 빈 들에
엉머구리 소리 우거져라.
푸른 하늘은 더욱 낮춰, 먼 산(山) 비탈길 어둔데
우뚝우뚝한 드높은 나무, 잘 새도 깃들어라.

볼수록 넓은 벌의
물빛을 물끄러미 드려다 보며
고개 수그리고 박은 듯이 홀로 서서
긴 한숨을 짓느냐. 왜 이다지!
- [저녁 때] 1.2연

 

ⓐ는 상대가 '님'인 점으로 미루어 여성화자로, ⓑ는 '-어라'와 같은 남성적 어미를 택한 점으로
미루어 남성화자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는 개인적인 사랑을 다루고, ⓑ는 일제(日帝)의 토지 수탈 정책에 의해 농토를 빼앗긴 농민들의 문제라는 공적·사회적 화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님이 떠나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변함없는 사랑을 다짐한다. 반면에, ⓑ에서는 한숨을 지으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자기가 땅을 빼앗긴 것이 과연 정당한가 따지려 하는, 다소 능동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형식과 율격 면에서 살펴보면 두 작품은 모두 4연시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는 하나의 율행(律行)을 2개의 층량(層量) 3보격으로 나누고, 2개의 율행(律行)을 한 연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정형성이 강하게 드러나고, ⓑ는 각 행이 2음보(音步)에서 6음보 사이를 불규칙하게 넘나들면서 자유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 대응(對應)되는 짝이 없는 3보격을 규칙적으로 택한 것은 여성의 가변적(可變的)이면서도 정제된 정서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며, ⓑ가 자유시 형식을 택한 것은 남성의 자유분방하고도 격렬한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특질은 시어와 통사 구조(統辭構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어에서 화자의 행위와 정서
상태를 드러내는 성분은 서술어(敍述語)이므로 그를 살펴볼 경우, ⓐ는 전(轉)의 '가시옵소서'를 제외하고 모두 '보내드리우리다'·'뿌리우리다'·'흘리우리다'와 같은 극존칭(極尊稱) 종결어미와 음성모
음 및 활음조 현상(euphony)이 우세한 시어들을 선택하고 있다. 그리고 서술어를 수식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반면에, ⓑ에서는 '-져라'·'-어라'·'-느냐'와 같은 오연(傲然)한 어미와 투박하고도 실용
적인 어휘들을 선택하고 있다. 그리고 행 가운데 쉼표를 찍고 과감한 생략법(省略法)을 구사하며, '푸른 하늘은 더욱 낮춰, 먼 산 비탈길 어둔데/우뚝우뚝한 드높은 나무, 잘 새도 깃들어라'와 '긴 한숨을 짓느냐. 왜 이다지!' 같은 구절에서는 도치법(倒置法)을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화자의 남성적 성격과 격정적 정서를 반영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화자의 성은 인간의 신체적 특징처럼 분명하게 나눠지는 것이 아니므로, <여성화(女性化)된 남성
화자(男性話者)>나 <남성화(男性化)된 여성화자(女性話者)> 같은 중간 유형을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화된 남성화자>는 '못난이' 같은 느낌이 들고, <남성화된 여성화자>는 너무 거센 느낌이 들어 적합하지 않다. 다음 작품 소월의 작품만 해도 그렇다.

 

밖에는 눈, 눈이 와라,
고요히 창 아래로 달빛이 들어라.
어스름 타고서 오신 그 여자는
내 꿈의 품 속에 들어와 안겨라.

나의 벼게는 눈물로 함빡히 젖었어라.
그만 그 여자 가고 말았느냐.
다만 고요한 새벽, 별 그림자 하나가
창 틈을 엿보아라.
- [꿈꾼 그 옛날] 전문

 

문맥적 의미나 '-아라', '-어라'와 같은 어조로 미루어서는 남성적이고, 사적인 사랑을 수동적인
입장에서 다룬다는 점으로 미루어서는 여성적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화자는 <여성화된 남성화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같은 시집에 수록된 것들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못난이'의 넋두리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화자의 성과 화제의 성격 및 그에 대한 태도를 일치시키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정철(鄭徹)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이나 [속미인곡(續美人曲)]을 비롯하여, 한용운
(韓龍雲)의 [님의 침묵(沈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의 작품은 당대의 여타 작품들에 비하여 분명히 탁월한 작품이다. 그러나, 소월의 [진달래꽃]이나 [못잊어]와 비교할 때 상당히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은 <국가(임금)> <애국(충성)>과 같은 여성화자에 어울리지 않는 공적인 주제를 택한 데다가, 만해의 경우에는 사랑하는 님에게 호소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사적인 정감을 배제하고 공식적 어조를 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의 발상 단계에서는 먼저 화자와 화제의 관계를 따지고, 그에 어울리지 않는 부분을 생략하거나 수정해야 한다. 그것은 작품의 개연성(蓋然性)을 결정짓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화자의 유형을 성으로 나누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문학 작품에서 인물의 유형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대별해 온 것은 오랜 관례에 속한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편견이라 할지라도 창작의 실제에서는 고정관념에 가까운 인물을 제시할수록 리얼리티가 강해진다.
문학 작품은 어느 특정한 인물의 개별적 성격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관념 속에 숨어 있는 보
편적 인간상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문제로 삼아을 수는 없는 일이다.


⑶ 담화의 담당 층위에 따른 유형


모든 담화는 겉으로 하는 말과 속으로 하는 말이 일치할 수는 없다. 특히 정서 상태를 말하는 시
적 담화에서는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비평에서 반어(irony)와 역설(paradox)의 어법을 중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이 표층적 진술(表層的陳述)과 심층적 진술(深層的陳述)의 의미가 달라질 경우에는 화자 역시 분열하여 <표층(表層) 화자>와 <심층(深層) 화자>로 나눠진다.

 

 예컨대, [진달래꽃]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겉으로는 '말없이 고이' 보낸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간절히 만류하고 있다. 그리고, 그로인해 태연히 보내고 싶어하는 화자와 붙잡고 싶은 화자로 나눠진다. 이렇게 표층화자와 심층화자가 분리되면 하나의 작품도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명백한 의미보다는 복합적인 의미를 중시하는 영미 신비평에서 아이러니와 패러독스의 어법을 중시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역설이나 아이러니의 채택은 두 가지 상황을 상정할 수 있다. 우선 화자가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감성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를 꼽을 수 있다. 화자의 생각이 둘로 분열되었을 때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청자가 화자보다 상위라서 직설적으로 말하면 역효과가 나타나리라는 판단에서 속셈을 감추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동일 화자의 분열을 인정하기로 한다면, 초점에 따라서도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따라 나눌 경
우에는 <이성적 화자>·<감성적 화자>·<무의식적 화자>·<추상 논리적 화자>로 나눌 수 있고, 이
들의 결합형까지 따지면 화제의 유형만큼 증가한다.

 

⑷ 태도에 따른 유형 

   
평소 논리 정연하게 말하던 사람도 다급하거나 격정에 빠지면 횡설수설하고 어법에 맞지 않게 말
하는 것이 보통이다. 라이트(G. T. Wright)는 이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정상적인 정서 상태의 화자는 <문명화자(civilized persona)>, 격정에 빠졌을 때의 화자는 <원시화자(elemental persona)>로 나눈다.


하지만 시인의 실수로 나타나는 표현의 미숙이나 문장의 혼란과는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작
품의 첫머리부터 원시화자를 등장시키는 문제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먼저 문명화자를 등장시키고, 정서가 격앙하는 과정을 그려 준 다음, 원시화자를 등장시키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담화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시에서 원시화자를 구사한 예는 서정주(徐廷柱)의 초기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 아름다운 베암…
ⓒ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 꽃다님 같다.
ⓔ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 소리 잃은 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 푸른 하눌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무러뜯어,

ⓗ 다라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麝香) 방초(芳草)ㅅ길
ⓙ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 석유(石油) 먹은 듯…석유(石油)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

ⓜ 바늘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 크레오파투라의 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슴여라! 베암.

ⓞ 우리 순네는 스믈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슴여라! 베암.
- 서정주, [화사(花蛇)] 전문

 

ⓐ에서 ⓓ까지는 문명화자의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터는 갑자기 기독교 신화인 에덴
동산의 전설을 거론하는가 하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도 일상적 감각을 초월하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원시화자의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곱다'의 보조관념으로 동원한 '피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이나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
(ⓞ)'만 해도 그렇다. 피먹은 입술은 징그럽고, 고양이 같은 입술은 야옹하고 할퀼 것 같다. 그런데도
아름답다는 의미를 보조하기 위해 차용하고 있다. 그리고 뱀을 무슨 헝겊처럼 바늘에 꼬여 두르고 싶어하며(ⓜ), 액체처럼 입술로 스며들라고 명령하는 것(ⓝ,ⓞ) 역시 비논리적이다. 이와 같이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폭력적(暴力的)으로 결합한 것은 화자의 정서 상태가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유사성 여부를 따질 만큼 이성적인 상태가 아님을 의미한다. 통사 구조 역시 뒤틀린 상태이다. '너희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라는 구절 뒤에는 그 상태가 <어떻다>든지, <무엇을 한다>라는 서술부(敍述部)가 와야 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소리를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푸른 하늘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무러뜯어 (ⓖ)'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ㅅ길/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는 구절 뒤에는 무엇 때문이라는 이유가 와야 하는 데도 '석유 먹은 듯…석유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로 이어지고 있다.


연이나 행의 배치에서도 혼란을 발견할 수 있다. ⓐ에서 ⓓ까지는 한 행을 하나의 완결된 의미로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부터는 한 연을 하나의 문장으로 짜는가 하면, 한 행의 길이를 2음보에서부터 7음보까지 불규칙하게 구성하고 있다. 이 역시 화자의 정서가 적당한 단위로 의미를 분절할 만큼 이성적 상태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에서 ⓓ까지는 이성적인 문명화자가 지배하고, ⓔ에서 ⓜ까지는 원시화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며, ⓝ 이후는 완전히 원시화자가 지배하는 곳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시적 담화는 적절한 비유와 완전하고 매끄러운 문장으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믿어
왔다. 완벽한 비유와 완벽한 문장만이 시의 주된 무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아어(雅語)와 율문(律文) 중심의 고전적 시어관의 잔재로써, 일상적 담화의 논리와 문법이 화자의 정서에 따라 파괴될 수 있듯이, 시적 담화 역시 파괴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4. 화자의 이동 방향


화자의 변천 방향을 살펴보면, 우선 시인과 화자 관계에서는 <시인=화자>인 <자전적 화자>에서
출발하여 <시인≠화자>인 <허구적 화자> 쪽으로 이동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변모의 계기
는 문학 작품을 자아의 표현으로 보던 고전적 관점이 오락이나 미학적 질서의 구축으로 바뀌기 시작한 뒤부터라고 추정할 수 있다.


화자의 신분은 <상위→하위>으로, 성은 <남성→여성>으로 이동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문
학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신(神)→영웅→위인→범인(凡人)→열등한 인간> 쪽으로 하강해 왔다는 프라이(N. Frye)의 지적이나, 고대로 올라갈수록 남성 시인이 여성화자를 택하여 노래하는 작품이 드문 반면에 현대시로 내려올수록 여성화자를 빌어 노래하는 작품이 늘어가는 점을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하강 현상은 모든 장르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리얼리즘을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성별의 이동 방향은 리얼리즘의 강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남성의 성
격이 이성적이고 여성의 성격이 감성적이라고 할 때, 리얼리즘이란 결국 남성적 이성주의를 배경으로 탄생되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개화기 이후 우리나라가 처했던 역사적 특수성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고 있으나, 이 역시 우리 문학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세계 각국의 문학에도 두루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그 원인은 시문학의 생산과 소비 층이 여성 쪽으로 이동했다는 점과 엥겔(E. Engel)이나 벨브렌(T. Veblen)같은 사회학자들이 주장한 <광내기 소비(conspi cuous consumption)>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실용성(實用性)이나 기능성(機能性)보다는 장식성(裝飾性)과 세공성(細工性)을 중시하는 문화가 형성되었고, 그런 가치관으로 인하여 남성적 특질인 사상성과 교훈성보다 여성적 특질인 정서성과 섬세성을 강조하는 작품이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화자의 분열 방향은 <표층화자→심층화자>, <의식화자→무의식화자>, <문명화자→원시화자> 쪽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표층화자만 차용하던 작품에 심층화자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를 중시하는 낭만주의 시대에서 출발하여 주지주의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의식과 원시화자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초현실주의 시가 등장한 뒤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시적 인물의 이동 방향은 전인성(全人性)을 상실하고 비인간화(非人間化) 내지 해체화(解體化) 쪽으로 진행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성의 해체 작업은 그리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볼 수 없다. 문학 작품이 사회보다 앞
서 인간성을 해체하는 것은 문학의 본래 목적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독자와 작가의 관계를 파괴하고, 자아와 사회의 해체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 시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전자아(全自我)를 대변할 수 있는 화자를 발견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출처 : 뇌졸중의재발방지
글쓴이 : 행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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