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니 이런일이/시(詩)를 위하여
[스크랩] (시) 표현방법 / 윤석산
麗尾박인태행정사
2008. 4. 23. 13:58
어떻게 말할까 / 윤석산
시적 담화는 자기 느낌이나 생각 또는 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장르이다. 그런데, 이를 표현하려고 할 때 그에 따른 적합한 어휘를 발견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쓸쓸하다'는 느낌을 감정을 표현할 경우만 해도 그렇다. 친구가 없어 쓸쓸할 경우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떠나서 쓸쓸한 경우도 있고, 함께 있지만 그 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해 쓸쓸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잎들이 한 잎 두 잎 떨어져 가는 것을 보고 쓸쓸하게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낱말은 '쓸쓸하다'와 '고독하다' 그리고 '외롭다'라는 말 이외는 없다. 그리고, 그런 말들로는 각기 다른 색깔의 감정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 쓸 수는 없다. 그것은 노력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그런 언어들은 사회적 공인(公認)을 거치지 않으면 자기만이 사용하는 자의적 기호(記號)로 떨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정적 장르에서는 비슷한 사물의 의미와 느낌을 빌어 비유법(figurative diction)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서정적 장르에서 비유적 어법은 독자가 얼른 이해하기 어려?것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 쉬클로프스키(V. klovski)의 분류에 의하면 이와 같은 비유는 <산문적 비유(prosodic metaphor)>로서, 서정적 장르에서 택하는 <시적 비유(poetic metaphor)>는 독자의 습관적 반응(stocked response)을 차단하고 화자가 말하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유도하기 위해 낯설게 만드(makes strange)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 채택된다는 것은 다음 작품들을 살펴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광화문(光化門)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 - 서정주(徐廷柱), [광화문]에서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 김춘수(金春洙), [나의 하나님]에서 ⓒ내 침실(寢室)이 부활의 동굴(洞窟)임을 너는 알련만 - 이상화(李相和), [나의 침실로]에서 일반적으로 추상적 관념보다 구체적인 사물이, 특수한 것보다 보편적인 것이 더 이해하기 쉽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비유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라면, <관념→사물>·<추상→구상>·<특수→보편>으로 원관념의 의미를 이동시켜야 한다. 하지만, ⓐ에서는 '광화문'이라는 구체물을 '종교'라는 추상적 관념으로 바꾸고 있다. 그리고 ⓑ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비애'라는 추상적 관념과 '살점'이라는 구체물로, ⓒ에서는 '침실'이라는 구체물을 '동굴'이라는 구체물로 바꾸고 있다. 이와 같은 비유의 방향을 살펴보면, ①<추상→구상>, ②<구상→추상>, ③<추상→추상>, ④<구상→구상>으로서,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쉬운 것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하나의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치환하여 의미 차(意味差)가 나도록 만들고, 독자로 하여금 왜 유사성이 없는데도 그렇게 바꾸었는가를 주목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장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시적 비유는 낯설게 만들기 수법(defamilarization)을 통해 독자들의 원활한 독서를 고의적으로 방해하기 위한 장치(deliberately impeded contrivances)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낯설게 만들기의 효과는 전체를 그 무엇으로 바꾼 <본질적인 비유>를 채택해야 얻어진다. 그것은 다음 작품을 살펴 봐도 짐작할 수 있다. ⓐ하꼬방 유리 딱지에 애새끼들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 마냥 걸려 있다. 내려 쪼이던 햇살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 구상(具常), [초토(焦土)의 시]에서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들었다. - 전봉건(全鳳健), [피아노] 전문 ⓐ는 직유를 구사하여 <얼굴→해바라기>로 이동시키고 있다. 그러나 전체 의미를 이동시키는 게 아니라 부분적인 의미를 이동시킨 장식적 비유이다. 다시 말해, '애새끼들의 얼굴'은 이 작품의 주된 의미가 아니라 부분적인 것에 속한다. 반면에 ⓑ는 치환은유를 구사하여 전체 의미를 <피아노의 선율→물고기>'로 이동시킨 본질적 비유이다. 그런데, 모두가 <구상→구상>으로 이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 ⓐ보다 훨씬 신선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가 부분적인 의미를 이동시킨 데 비하여, ⓑ는 그 작품의 전체 의미를 이동시킨 데 원인이 있다. 따라서, 시적 비유가 낯설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친숙 낯설음> 사이를 이동시켜야 한다는 조건 이외도 <전체 의미>를 이동시켜야 한다는 조건을 추가시켜야 한다. 이와 갈은 본질적인 비유는 전체 구조는 물론 그에 따른 하부 조직까지 바꾸는 기능을 지닌다. 전봉건의 작품(ⓑ)에서 '피아노'와 별 관계가 없는 '바다'의 이미지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주 대상인 '피아노의 선율'을 '물고기'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다'가 제시되었기 때문에 '파도의 칼날'을 집어들었고, <여자-빛-파도-칼>의 이미지가 상호 침투하여 독특한 의미와 뉘앙스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보조관념을 '물고기'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꾸었을 경우 이 작품의 전체 조직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낯설음은 아니라 비유한 이미지들을 인과 관계를 차단하고 배열하는 병치적 방법으로도 얻을 수 있다. 새는 사철나무 키 작은 가지 ×? 바람은 멀리멀리 낮달과 함께, 혹은 막 잠깬 골목길 입구 손수레 곁에, 하느님은 어린 나귀와 함께 이번에도 동쪽 포도밭 길을 가고 있다. 해가 뜨기 전에, - 김춘수, [노래] 전문 이 작품의 주된 의미는 <새→바람→하느님과 어린 나귀>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배열에서 <새→바람>으로 연결한 것은 그런 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과 어린 나귀'로 연결시킨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새가 사철나무 가지 끝에 앉아 있다든지, 골목길 손수레 곁에 바람이 분다는 것은 경험상으로 연접(連接)된 감각이지만, '바람'과 '하느님'은 서로 단절된 감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왜 이와 같이 연결시켰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방법을 쓸 경우 유의할 점은, 너무 원관념을 잠재시킨 비유적 이미지를 너무 많이 병치하면 독자들이 추론할 수 없어 무의미한 말장난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구조에 따른 비유의 유형 종래에는 수사법에 따라 비유의 유형을 분류했다. 그리고, <은유(metaphor)>라면 <치환은유(置換隱喩, diaphor)>를 의미했고, 그 하위 유형을 분류한 다음 <상징(象徵, symbol)>을 별도의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은유의 형태를 취하지만 인과관계를 배제하고 보조관념을 전시(展示)하는 유형이 있음을 주목하고, 전통적으로 쓰여온 유형을 <치환은유(epiphor)>로, 새로 나타난 유형을 <병치은유(diaphor)>라고 부르고, 상징은 <확장된 은유(extensive metaphor)>로 바꿔 부르면서, 은유의 한 유형으로 분류하기 시작한다. ⑴ 치환은유의 구조와 하위 유형 치환은유는 <원관념(tenor, T)=보조관념(vehicle, V)>의 구조를 취하는 어법으로서, 종래에 <직유(simile)>·<은유(metaphor)>·<의인법(personification)>·<제유(synecdoche)>·<대유(代喩)>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직유적 표현인 <아이들의 얼굴은 불타는 해바라기 같다>와 치환은유적 표현인 <아이들의 얼굴은 불타는 해바라기이다>는 모두 <아이들의 얼굴은 불타는 해바라기처럼 환하다>에서 출발한 것으로서, 문장으로 기술하는 과정에서 달라졌을 뿐이다. 다시 말해, 직유는 【직유】 【은유】 또한 '나무가 춤을 춘다'든지 '새가 노래한다' 식의 의인적 표현은 <사물→인간>으로 이동시키는 어법으로서, 사물(T)의 어느 속성과 사람이 같다는 제한적 유사관계로 이동하고, '감투를 쓰다(벼슬을 하다)'나 '푸른 제복의 시절(군대 시절)' 같은 제유는 물질적 접촉성을 바탕으로 <부분→전체>로 부분과 전체를 유사한 것으로 보고 이동시키는 어법이다. 그리고, '왕관→왕', '이광수→이광수 소설'을 나타내는 환유는 정신적 접촉 즉 인과성을 토대로 <부분 전체>로 이동시키는 어법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치환은유의 하위 유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치환은유의 하위 유형이라 해도 시적 효과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화자(시인)가 얼마나 원관념의 의미 이동 과정에 개입(介入)하느냐에 따라 해석 방법이 달라지고, 그로 인해 시적 효과가 달라진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다음 작품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 같은 등어릿 길로, 님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 서정주, [대낮]에서 ⓑ아슬한 가지 끝에 내 예감(豫感)은 꽃이 되어 있다가 피어서 빛이 나는 잎새들의 둘레 안에 고운 햇살로 익어 - 조상기(趙商箕), [예감] 직유는 화자가 직접 개입하기 때문에 청자들의 사고 과정이 절약된다. 따라서, 직접적(直接的)이고, 경제적(經濟的)이라는 장점을 지닌다. 반면에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율적으로 해석할 기회를 제약하여 자동적인 수용(受容)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에 치환은유는 화자의 개입이 없기 때문에 독자 스스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유사성이나 인과관계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독자들은 여러 가지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므로 직유보다는 간접적(間接的)이고, 비경제적(非經濟的)이며, 잘못 이해할 소지가 높아진다. 반면에 자율적 해석권(解析權)이 확대되고, 그로 인해 시적 긴장이 높아진다. 의인법은 물활론적(物活論的) 정신을 배경으로 삼아 탄생된 어법이기 때문에 신비적(神秘的)·동심적(童心的) 효과를 띠기 쉽다. 하지만, 산문적 비유인 경우에는 어린이 같은 미분화(未分化)된 의식 상태를 드러내어 유치한 느낌을 주기 쉽다. 그리고, 제유나 환유는 물질적이거나 정신적 접촉성을 바탕으로 삼기 때문에 전달의 속도가 빨라지는 대신 자동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치환은유의 하위유형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에 따라 재분류할 경우, 우선 원관념이 문맥의 표면에 현시(顯示)되느냐 잠재(潛在)되느냐를 기준으로 삼아 나눌 수 있다. 다음, ⓐ는 <현시형 치환은유>에, ⓑ는 <잠재형 치환은유>에 속한다. ⓐ언덕은 꿈을 꾸는 짐승 언덕을 깨우지 않으려고 유월이 능금꽃 속 숨어 있었다. - 김요섭(金耀燮), [옛날]에서 ⓑ경춘선을 타고 한 시간쯤 가다가 문득 어느 산협촌(山峽村)에 내렸다. 늙은 역장과 코스모스, 그리고 나무로 만든 긴 벤치가 있었다. 거기 앉아, 담배나 피다 가기로 했다. 모두들 잠든 탓일까. 이 그림 속의 세계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결국 나는 혼자 내렸듯 혼자서 떠나야겠지. -김시태(金時泰), [우리들의 간이역(簡易驛)] 전문 잠재된 경우를 원문자(圓文字)로 표기하기로 하면, ⓐ는 【현시형 치환은유】 【잠재형 치환은유】 (*원문자는 의미의 잠재를 나타냄) 또 치환은유를 살펴보면 ⓐ나 ⓑ처럼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높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 노을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한용운, [알 수 없어요] 복합 치환은유의 현시형과 잠재형의 구조를 그리면 다음과 같다. 【복합 치환 현시형 은유】 【복합 치환 잠재형 은유】 <현시형>보다는 <잠재형>이 시적 긴장도가 높고, <단일형>는 <복합형>이 더 의미가 풍부해진다. 그리고, 복합치환은유의 경우는 결합 양식에 따라서, 병치은유가 될 수도 있고, 알레고리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잠재형 복합치환은유 가운데,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가 <1 : 1>이면 알레고리로 분류해야 한다. 이 양식은 치환은유와 상징의 중간 형시이라고 볼 수 있다. 잠재형 복합치환은유 가운데,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가 잠재형 복합치환은유 형식을 취하되, 보조관념들끼리 인과관계가 없으면 병치은유로 바뀐다. 병치은유는 잠재형 복합치환은유의 변형으로서, 나열된 보조관념 사이에 인과관계를 설정하지 않고 '조합(組合, Combining)'하는 형식을 취하는 유형을 말한다.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 김춘수, [눈물]에서 이 작품은 <남자와 여자의 젖은 아랫도리→오갈피 나무의 젖은 아랫도리→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의 젖은 발바닥>으로 전개되지만, 왜 이와 같이 연결시켰는가를 짐작하기 어렵다. 그것은 여러 개의 <원관념=보조관념>을 병치하는 형식으로서, 나열한 보조관념의 의미가 하나로 수렴되지 않으며, 그로 인해 전체의 원관념이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병치한 이미지나 관념들을 자의적으로 연결하여 하나로 의미 있는 그 무엇으로 바꾸려고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이 지니고 있던 감각이 상호 침투하여 새로운 의미나 사물로 발전하게 된다. 병치은유의 하위 유형으로는 병치한 자질들이 무엇이냐에 따라 <이미지 병치>, <리듬 병치>, <에피소드 병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음운 병치(音韻竝置)>나 <어휘 병치(語彙竝置)>도 가정해 볼 수 있지만 음운이나 어휘만으로는 완결된 의미를 형성할 수 없으므로 이론상으로 가능할 뿐 실제 작품 속에 채택되는 경우가 드물다. 이미지 병치는 앞에서 인용한 김춘수의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 같은 김춘수의 작품 가운데 다음 ⓑ는 <리듬 병치>에 해당한다. ⓑ불러다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 누이는 어디 있는가, 말더듬이 일자무식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 누이는 어디 있는가, 불러다오. 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 [처용단장] 제2부 5 이 작품에서는 '불러 다오'라는 청유문(請誘文)과 '어디 있는가'라는 의문문(疑問文)을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리듬이 텍스트의 조직에 참여하는 요소들을 반복적 제시하여 얻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문형(文型)의 반복은 리듬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의 리듬은 '불러 다오'와 '어디 있는가'의 반복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리듬병치는 시를 순수한 음악 상태로 이끌어 간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리듬은 의미에 비해 전달력이 약하므로 독자로 하여금 리듬병치임을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의미를 약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의미를 약화시키지 않으면 그에 가리어 반복된 자질을 리듬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멕시코'가 사람이나 동물이 아닌데도 불러 달라고 요구하고, 특별한 의미가 없는 '사바다'를 반복한 것은 의미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 작품은 에피소드 병치에 속한다. ⓒ태초에 무정부주의가 있었다. 무정부주의는 발이 없다.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바쿠닌은 입이 ʼn?br /> 크로포트킨은 수염이 아름답다. 가을에는 모과빛이 난다. 시베리아 오지에는 일년 내내 눈이 오고 예예족(芮芮族)의 마을은 너무 멀다. 죽은 늑대의 목뼈가 부러져 있다. 모든 것 다 잊으라고 눈이 쉬지 않고 온다. - [처용단장] 제3부 31 이 작품에서는 <무정부주의>,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의 입술과 수염>, <시베리아 오지와 예예족 마을>, <목뼈가 부러져 죽은 늑대>, <모든 것을 다 잊으라고 내리는 눈>이라는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에피소드 병치는 동일 에피소드 안에서는 인과관계를 유지하지만 다른 에피소드와는 단절된 상태이다. 따라서 소설의 단속적(斷續的) 구성과 유사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에피소드 병치를 택하면 의미의 전달과정이 <원활한 연결+의미의 단절>의 구조가 반복되어 이미지나 리듬병치보다 한결 의미를 표현하기가 용이해진다. 병치은유는 나열된 보조관념들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문장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오직 인과관계가 없는 보조관념들의 이미지와 그들이 빚어내는 리듬뿐이다. 그리하여 무의미한 이미지의 집합이나 말장난처럼 보이기 쉽다. 하지만, 시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고정 관념의 껍질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다른 어떤 구조를 채택한 작품보다 창조적인 것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3)상징의 구조와 하위 유형 휠러(C. B. Wheeler)는 상징을 <언어적 상징>과 <문학적 상징>으로 나누고, 랭거(S. K. Langer)는 <비추리적 상징>과 <추리적 상징>으로 나눈다. 그리고 휠라이트(P. Wheelwright)는 이들과 달리 언어적·비추리적인 상징을 <약속 상징(steno symbol)>, 문학적·추리적 상징은 <긴장 상징(tensive symbol)>이라고 부르면서, 문학 작품에서 쓰여 온 상징은 후자로서, 이들이 쓰인 것은 다양한 의미가 상징체(象徵體)로 수렴되어 긴장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호적 상징을 배제하는 인간의 전인적 인식 가운데 추상 정신을 배제하는 할 뿐만 아니라, 문학사에서 다다, 큐비즘, 미래파 등의 작품을 제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전달성만 염두에 두고 비추리적 상징을 배제하는 일은 재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은유는 하나의 낱말을 일회적으로 바꾸는 양식(Word1 : Word2=1 : 1)이고, 상징은 다회적으로 바꾸어 사물성을 형성하도록 유도하는 양식(N·word1=thing1)이다. 다시 말해, 시인이 표현하려는 어떤 사물을 내세워 독자로 하여금 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양식으로서, 독자는 그 사물이 거느리고 있는 관념만큼(about thing) 많은 의미를 떠올릴 수 있어, 어느 양식보다 의미 전달의 폭이 커진다. 문학적 상징은 다시 그것을 탄생시킨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개인적 상징(personal symbol)>, <보편적 상징(universal symbol)>, <원형적 상징(archetype)>으로 나눌 수 있다. 개인적(個人的) 상징은 그 시인만의 체험을 바탕으로 채택한 상징을 말한다. 김춘수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바다'나, 서정주의 [화사(花蛇)]에 나타나는 '고양이 입설'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전자의 경우 바다를 '질병·죽음·회복·부활·유년·무덤' 같은 특수한 의미로 사용하고, 후자의 경우 고양이 입술을 관능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누구나 바다와 고양이 입술을 그런 의미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편적(普遍的) 상징은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같이하는 집단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상징을 말한다. 이런 상징은 다시 <인습적(因襲的)>·<제도적(制度的)>·<전통적(傳統的)>·<문화적(文化的)>·<자연적(自然的)> 상징으로 나눌 수 있다. 인습적 상징은 그 사회에서 습관적으로 널리 쓰이는 상징을 말한다. '십자가(十字架)'를 희생, 사랑, 봉사, 고통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그런 예에 해당한다. 그리고 전통적·문화적 상징은 그 민족의 전통이나 문화에 의해 채택되는 유형을 말한다. 다음 작품에 쓰인 상징은 문화적·전통적 상징에 해당한다.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너무들 인색치 말고 있는 사람은 병약자한테 시량(柴糧)도 더러 노느고 홀어미 홀아비들도 더러 찾아 위로코 첨성대 위엔 첨성대 위엔 그중 실한 사내를 놔라. 살(肉體)의 일로써 살의 일로써 미친 사내에게는 살 닿는 것 중 그중 빛나는 황금 팔찌를 그 가슴 위에, 그래도 그 어지러운 불이 다스려지지 않거든 다스리는 노래는 바다 넘어서 하늘 끝까지. 하지만 사랑이거든 그것이 참말로 사랑이거든 서라벌 천년의 지혜가 가꾼 국법(國法)보다도 국법의 불보다도 늘 항상 더 타고 있거라. - 서정주, [선덕여왕(善德女王)의 말씀]에서 이 작품은 선덕여왕이 자기를 짝사랑하다 쓰러져 잠든 지귀(志鬼)의 가슴 위에 팔찌를 얹어 놔 위로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일화를 제재로 삼고 있다. 따라서 수사법상으로는 인유(allusion)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지귀와 선덕여왕의 이야기는 단순한 인유(引喩)에 그치지 않는다. '홀아비', '홀어미', '지귀', '선덕여왕'은 <외로운 사람들>을, '피'와 '살'은 <현실적·육체적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낡은 제도와 관념에 얽매인 사랑을 비판하기 위해 채택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돕는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배경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문화적·전통적 상징을 채택하면, 독자들은 시인과 함께 같은 문화권에 포함되어 있다는 공동 의식(togetherness)을 느낄 수 있다. 자연적 상징은 상징물과 원관념이 유사하여 채택한 유형을 말한다. 돌은 앞뒤가 없다 누구나 돌을 보고 이쪽이 앞이다 하면 거기가 앞이 되고 이쪽이 뒤다 하면 거기가 뒤가 된다 마음 속에 감추어진 영원히 토해 낼 수 없는 비밀스런 한 마디처럼 돌은 깊이 깊이 가라앉아 있다 돌은 이 지구 위 어디에 갖다 놓아도 어울리지 않는 곳이 없다 - 김윤성(金潤成), [돌]에서 이 작품에서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존재의 불변성과 침묵적인 상태이다. 참다운 존재는 영원히 침묵할 뿐이며, 어디에 갖다 놔도 잘 어울리고, 어떤 각도로 해석해도 다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어떤 해석도 틀리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존재의 신비와 영원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보조관념으로 돌을 선택한 것은 돌 역시 침묵적인 사물인 동시에 영원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원형적(原型的) 상징은 문학·종교·풍습 등에서 무수히 되풀이되는 원형적 이미지(archetypical image) 나 화소(motif)를 채택할 경우를 말한다. 다음 작품에서 '십자가'를 희생이나 봉사의 의미로 사용한 것은 종교적 인습에서 채택된 상징이지만,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죽겠다는 것은 전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속죄양(scapegoat) 의식을 모티프로 삼은 것으로서, 원형 상징에 해당한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윤동주, [십자가]에서 이런 원형적 상징은 앞에서 인용한 서정주의 [선덕여왕의 말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첨성대 위엔 첨성대 위엔 그중 실한 사내를 놔라.'는 구절이나, '황금 팔찌' 같은 것이 그런 예에 속한다. 전자는 윤동주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속죄양(贖罪羊) 설화보다도 훨씬 고형(古形)인 인신공양(人身供養)의 설화를 변형시킨 것이고, 후자는 프로이트나 융의 심리학에 의하면 여성 성기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작품 속에 원형적 상징을 채택하면 인간과 자연과 신이 하나라는 초월적(超越的) 동일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들의 삶과 욕구가 동일하다는 통시적(通時的) 동일성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속죄양의 설화만 해도 그렇다. 성경 속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비롯하여, 엘리어트(T. S. Eliot)의 [황무지(Waste Land)]나 우리 나라의 [심청전(沈淸傳)] 등은 모두 이런 원형을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독자들은 신도 인간처럼 대가(제물)를 요구한다는 사실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에 대한 관점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신화는 상고 시대에만 탄생되는 것은 아니다. 니버(R. Niebuhr)의 주장에 의하면, 신화란 그 자체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는 물론 미래로 연결되고, 또 현대에도 탄생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고대에서 현대까지 계속되는 신화로는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종말론을 꼽고, 현대에 탄생된 새로운 신화는 산업계의 '총파업'을 비롯하여 '진보'와 '평등' 같은 신념이라고 주장한다. 비유의 기능과 전달 과정 비유는 유사성(類似性)을 바탕으로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결합시키는 양식이라 해도 근본적으로는 서로 다른 것들을 강제로 결합시킨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서로 다름 속에서 유사성(similarity indifference)'을 발견하여 동일성(identity)을 증명하는 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화자가 이와 같은 비유의 기능은 시인의 정서를 형상화를 우선 꼽을 수 있다. 인간의 정서란 불안정하고 객관성이 없는 감성의 산물이다. 그리고 아무리 설명을 가해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감정과 유사한 등가물(等價物)을 제시하여 그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고, 그 과정에서 시인과 유사한 감정을 맛보게 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은유적 어법을 서정적 장르의 기본 어법으로 삼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둘째로 작품 전체의 유기성(有機性)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꼽을 수 있다. 시인이 어떤 보조관념을 선택할 경우 그것만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을 묘사하고, 그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상황을 제시한다. 따라서 치환은유이든 병치은유이든 그것이 본질적인 은유(essential metaphor)일 경우 그 작품의 모든 조직은 보조관념 중심으로 짜여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로 인해 텍스트의 유기성이 강화되고, 통일된 감각과 관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다. 다리를 묘하게 꼬고 창가에 걸터앉아 있는 빗소리. 네 침묵이 서글프다! 그러나 아무 생각도 하지 말기. 멕시코인처럼 몸매가 따스해 보이는 커피잔만 생각하기. 그래도 무료하면 정겹게 먼지 앉은 책을 펴들 것. 단, 활자는 읽지 말고. 비에 젖은 숲을 헤치듯 활자와 활자 사이를 헤쳐 나갈 것. 활자의 가지마다 늘어지는 넝쿨 꽃잎. 희디흰 꽃잎은 그리움의 관절 속으로 큼직큼직 떨어지고. 그래도 개구리 심장처럼 벌떡벌떡 웃는 그대가 생각나면 곁에 없는 그를 개굴거리며 땅 속에 묻어 버릴 것. 개굴 개굴 개 굴 간혹 개굴거리며 그가 생각 나는 아침은…… 개굴 개굴 개굴……. - 서안나(徐安那), [단상(斷想)] 이 작품에는 '창가에 걸터앉은 빗소리', '멕시코인처럼 몸매가 따스해 보이는 커피잔', '무료해서 펴든 책', '활자 사이에서 피어나는 넝쿨꽃과 그리움', '개구리 심장처럼 벌떡벌떡 웃는 그'가 열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유기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비오는 날 아침 풍경>이라는 보조관념을 중심으로 조직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의미와 정서를 확대시키는 기능을 꼽을 수 있다. 비유란 <원관념=보조관념>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관념이거나 사물이다. 그런데 시인이 인용한 작품에서도 그런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멕시코인처럼 몸매가 따스하게 보이는 커피잔'이라는 구절에서 '멕시코인'은 따뜻해 보이는 '커피잔'을 수식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그러나 문맥의 뉘앙스로 미루어 보면, 화자가 그리워하는 것은 단지 따뜻함만이 아니라, 사람의 체온을 그리워한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시의 주제인 그리움과 결합하면서 화자의 외로운 정서를 상승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넷째로 대상의 새로운 모습이나 의미를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기능을 꼽을 수 있다. 비유란 근본적으로 유사한 사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물로 치환하는 양식이다. 독자는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사물과 비교하면서 유사성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문맥적 차원을 뛰어 넘어 사물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다섯째로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다리를 묘하게 꼬고 창가에 걸터앉아 있는 빗소리'라는 구절은 '빗소리'를 감각화하기 위한 수식이지만, 그를 구체화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다. 원관념이 보조관념으로 치환되는 과정에서 원관념인 '그대(T)'도 보조관념인 '빗소리(V)'도 아닌 제3의 사물(T+V)로 발전하고 있다. 자기 작품 속에 어떤 비유를 선택할 것이냐는 개인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다. 웰렉(R. Wellek)과 워렌(A. Warren)은 이런 점을 주목하고 베르너(H. Werner)의 설명을 빌어 선사 시대에는 신을 비롯하여 직접 거론하기 어려운 금기(禁忌)의 대상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유추(類推)가 가능한 은유를 구사하고, 신고전주의 시대에는 종(種)에서 유(類) 또는 유에서 종으로 이동하는 환유적 어법과 직유·완곡법·장식적 형용사구·균형·반대 명제 등의 비개성적 비유가 주류를 이루었다고 한다. 또 바로크 시대에는 역설과 모순 어법을 비롯하여 비유의 남용(catachresis)이 특징이었으며, 근대로 접어들어서는 과격한 비유(radical metaphor), 현대에는 과학적이고 기술적이며 그로 인해 비시적(unpoetic)으로 보이는 비유와 무의식적이고 성적(性的)인 비유가 주류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우리 시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가 없어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비슷한 변천 과정을 거쳤으리라고 추측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 민족의 의식구조가 중용적(中庸的)이며, 재도적(載道的) 문학관이 우세했고, 자연 친화적(親和的)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과격하고 비시적이며, 무의식적이고, 성적이고, 개인적인 비유를 구사한 시기가 서구보다 늦고, 또 빈도도 그리 잦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
출처 : 뇌졸중의재발방지
글쓴이 : 행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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