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니 이런일이/시(詩)를 위하여

[스크랩] 시쓰기 실제 예 분석

麗尾박인태행정사 2008. 4. 23. 13:24

안도현시인의 말을 인용하여 세상을 보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80년대 시인들이
망원경으로 세상을 보았다면, 90년대 시인들은 현미경으로 본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한다고
하자. 그러나 모든 것을 현미경으로만 보려고 하는 90년대적 세상 읽기 방식이 슬프게 한다.
거기서 싹트는 새로운 상투성이 슬프다.
더욱이 시인들이라는 허명 아래 쓴 글들...
너나 할 것 없이 시라는 형식아래 배속에 있는 말을 꺼내놓은 그들을 보면서 사이버라는
이 황량하면서 우스운 공간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이후 나는 문학사이트라는 곳이라면 아예 찾지 않는다. 가봐야 뻔하다는 생각...
이미 그 편견이라는 것이 필자를 지배하고 있었다


詩의 기본의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위에서 언급한바로 단지 배속에 들어 있는 말을 뱉어 놓는다고 그것이 詩가 되는 것인가?
인터넷이 급속히 발전된 이후 많은 이들이 글을 쓰면서부터 "시란 씌어지는 것이고 시인이란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가는 웃음 거리가 되기 쉽상이라고 말한 신경림시인의 말에도
필자는 공감을 한다.
이것은 오늘의 시인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시에 대한 생각이고 시인 역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력하면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있고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재능을 의심하면서도 시를 공부하거나 계속 시를 쓰는 많은 사람들의 위안이 되는
소리이기도 하며 또 어떻게 보면 부분적으로 맞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의 정의도 제대로 알지 못한채 배속에 있는 말을 시의 형식으로 옮겨 놓는다하여
그것이 시가 되는 것인가?

나는 독자에게 가장 먼저 해 주고 싶은 말은 物을 보는 눈부터 키우라고 말을 건네고 싶다.
어떤 物를 이미지로 상징화하여 의인화 시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상징은 사물을 전달하는 매개적 작용을 하는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상징은 "짜 맞추다"라는 뜻을 가진 희랍어 동사에서 유래 되었다.
상징은 서로 다른 둘이 결합됨으로써 독립된 하나의 의미를 나타내는
언어 양식인 셈이다. 카시러(Cassirer)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상징이야말로
인간이 다른 동물과 비교되는 고도의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카시러는 동물은 수용계통과 운동계통의 해부학적 구조로써만 살아가고 있는데
반해, 인간은 이 구조 외에 제3의 연결물인 상징의 체계 속에서 살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황혼은 으스름이 밀려오는 노을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사물이나 의미를
전달하는 역할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것이 그 성질을 직접 나타내는 기호(sign)와는
달리, 상징은 그것을 매개로 하여 다른 것을 알게 하는 작용을 가진 것으로서,
인간에게만 부여된 고도의 정신작용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시에서 상징을 강조한 것은 19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사실주의에 반대로 유미주의와 일맥을 같이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보들르에르(영), 랭보, 폴발레리,릴케 등이다
더 쉽게 설명을 부가 하자면 시에 가장 기초는 내가 보고, 느끼고, 듣는 어느 物에 대한 상징을
불어 넣는 것이다.
이는 서정시에 그 기본을 둔다.
서정시와 자유, 산문, 그 밖에 시들이 그러한 틀을 벗어나 시를 쓰려 한다면 초등학생도
시를 쓰겠다고 하지 않겠는가?
좀더 해부해 보기로 하며 하나를 이야기하여 보자


오늘은 당신에게 말하고 싶어요
좋아한다고..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고

연에서 말하고 싶은 대상은 분명 화자가 사랑하는 이가 될 것이다.
가장 쉽게 말해 꽃을 보고 꽃이 아름답다라고 표현하는 것과 틀린것이 무엇인가?.
이는 초등학생도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화자의 감성에 젖은 보다 깊은 내면을 말해 보는 것을 어떨까?
예컨데 화자가 있는 그 시간(낮, 밤)적 요소를 넣고 주위에 있는 物의 대상으로
상징적 의인화를 시켜 표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시가 되는 것이다.
단지 꽃을 보고 꽃이 아름답다라고 한다면 이는 시가 아닌 그저 혼자 쓰는 낙서에 불과하다.

詩에서는 시간이 멈추어 있는 정태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 소설이
총체적인 인생을 서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시는 인생의 단면을 한 컷의 사진처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 양상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시는 대체로 시간이 멈추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헤어지는 한 장면, 만나는 한 장면, 그리워하는 시간과 기다림의 나날들도
대체적으로 하나의 정지된 화면으로 표현된다.
시간이 멈추어 있을 수 없지만 시적화자에게 큰 의미가 있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들이
시적화자의 시간으로 볼 때 멈추어 있는 정태적 시간이 된다. 바로 그 시간이 시가 되고
의미가 되고, 존재가 되는 것을 늘 상기하였으면 한다.

보다 쉽게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에게 글을 배우는 한 사람의 시를 살펴보기로 하자

<원문>
자갈치시장 사람들/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들려오는
삶의 맥박 소리가
침묵을 깬다

비린내 찌든 앞치마
깡통속의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에 아름다운 청춘을
저당잡힌 사람들

반쯤 감긴 눈 비비며
살가운 미소로 찬란한
황금빛 일출을 맞이한다
==============================================================

위 시 '자갈치시장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한 내용처럼 정태적 시간이 된 부분과
그렇치 않은 부분이 있어 아이러니함을 준다.
아래 1연을 살펴보자

초롱이던 별들마저/
잠든 고요의 밤/
어디선가 들려오는/
삶의 맥박 소리가/
침묵을 깬다/

위 1연 하나를 놓고 보면 정태적 시간으로 되어져 있음이다.
그러나 2연, 3연을 놓고 보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마지막 3연에서 "살가운 미소로 찬란한/ 황금빛 일출을 맞이한다"라고 했다.
1연은 잠든 고요의 밤을 표현하였으면서 마지막 3연은 일출을 맞이 한다.
이는 긴 시간을 화자가 자갈치 시장이란 곳에서 머믈렀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표현에 있어 잘못되어져 있음으로 발견된다.
1연을 자세히 살펴보면 1행, 2연에서는 "별들마저 잠든 고요의 밤"이라 했다가
4행, 5행에서는 "삶의 맥박소리가 침묵을 깬다"라고 했다.
이를 볼 때 정태적 시간이 아닌 움직이는 사물(시간)을 그려넣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움직이는 사물을 시로 표현하기 위해선 우선 시의 전체적인 흐름이 동적으로 흘러야
함이 옳바른 표현방법이다. 그러나 자갈치시장 사람들에서는 전체적으로 동적이 아닌
정태적으로 그려 넣었다는 점이다.
2연에서는 사물에 대한 이미지를 상징화 시킨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3연은 시제에 대한 결과물을 상징화 시켰다.
결과적으로 '자갈치시장 사람들'은 '새벽을 여는 사람'이라는 것과 그들의 삶의 모습을 담아
독자에게 알리고자 했으나 1연의 1행, 2행으로 인해 시의 요태를 배제하게 된 부분이 되었다.
다음과 같이 퇴고가 되었다.

<퇴고>
자갈치시장 사람들/

바람이
골목마다 탐욕스럽게 핥으며
등이 시린 한기를 품은 새벽,
삶의 맥박소리에 여명이 튼다

비린내 찌든 앞치마,
깡통속의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에
아름다운 청춘을
저당잡힌 사람들의 얼굴에는
삶의 고단함이 꿈을 삼켜도
끝없는 꿈들이 묻어나고
노동의 삶의 애한속에도
그 푸르른 눈빛,
빨간 통안에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이다

위 시가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에 억지가 없다.
신경림시인의 말 처럼 현대에 들어 시를 억지로 만들다보니까 오늘의 우리 시 중 많은 것들이
말장난으로 시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에는 말장난이라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말을 가지고 하는 예술에서 말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싶은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은 그 나름으로 매우 의미있고 재미있는 시적 동력이 될 수도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그 말장난이라는 것이 "이걸 몰랐지" 식의 천박한 발상에 그치거나 질 낮은 개그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말장난이라고 할 수 없다.
말장난 자체가 적어도 시에서라면 읽는 사람에게 즐거움이나 생각하게 하는 의미를 주어야
하며 그 즐거움과 생각은 분명 천박한 발상이나 질 낮은 개그에서 오는 것과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말은 경험의 축적이요 그 구체화로, 말장난에도 삶의 무게가 실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데 요즈음 시들의 말장난에서는 그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삶과는 아무 관계 없는 말들을
이리저리 뒤바꾸고 돌리고 비틀고 해서 말의 난장판을 만들어 놓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를 보아도 근래의 시인들의 시는 너무 가볍다라고 생각하게 하고 또한 사실 그러하다.
가벼움이 우리 민족성과 맞는다는, 그래서 인터넷 시대는 바로 우리 시대이기도 하다는 우스개도 있다. 너무 쉽게, 너무 함부로 시를 쓰는 지금의 문학 가벼운 현실이 안타깝다.
===============================
귀하께서 진심으로 시에 대한 열정을 품고 배우고저 한다면 단순히 머리속에 있는 단어를
뱉기보다는 시의 정의 대해 많은 공부를 해야 할 것이며, 가슴으로 物에 대한 느낌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요.

출처 : 시쓰는사람들
글쓴이 : 맘짱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