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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철영의 전라도 기행 25]전통 한선 `가거도 배`(05.9.13 오마이 펌)
麗尾박인태행정사
2007. 9. 16. 23:26
잊혀져가는 우리 배 ‘한선’을 되살린다 | |
[이철영의 전라도 기행 25] 전통 한선 '가거도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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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면이 바다인 한반도 역시 삼한시대부터 강과 바다를 통해 중국, 일본 등과 내왕했고, 삼국시대에는 세 나라가 해전을 벌이면서 힘을 겨뤘으며 주변국들과 독자적으로 교류했다. 특히 서남해안 지역은 발달된 내륙수로인‘강’과 바다의 연계를 통해 일찍이 해상활동이 왕성했다.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던 장보고는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바다를 장악하여 동아시아의 역사 속의 해상왕이자‘신(神)’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내륙 깊숙이 연결된 수운(水運)을 통해 세금으로 걷힌 쌀, 소금 등이 전국에서 모아지고 모든 물자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고려 태조 왕건은 궁예의 휘하 장수로 있던 시절, 영산강을 타고 들어와 나주를 점령하여 후백제를 견제하는 교두보이자 고려건국의 기초를 세웠다. 이처럼 당시 사회의 혈류(血流)였던‘물길’을 꿰뚫어 이용하지 못하고서는 정치, 경제, 군사적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수량이 풍부했을 당시의 강과, 수심이 얕은 연안의 조건에서 운항했던 우리의 배가 있었으니 이를‘한선(韓船)’이라 부른다. 이것은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형(平底船形)’ 구조를 갖고 있어 어느 나라의 선박과도 뚜렷이 구별된다.
완도 어두리섬 앞 바다에서 발견된 11세기 ‘완도선’역시 전형적인 전통 한 선의 구조를 갖고 있었으며, 일본정벌에 나섰던 여몽연합군의 선단 중에서 중국배는 대부분 태풍에 깨어지고 고려 배들만 남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뛰어난 배의 구조와 함께 한 발 앞선 조선술이었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으로 활약했던 판옥선(板屋船) 역시 우리 배의 전형이며 돌격함으로 쓰였던 그 유명한 거북선(龜船)도 판옥선의 갑판 부분만 떼어내고 거북등을 씌운 한선이다. 당시 일본 수군의 배들은 뱃전에 쓰인 목재의 두께가 상대적으로 얇고 넓어서 조선의 전선(戰船)이 쫓아가 부딪히면 맥없이 부서졌다.
1930년대 이후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전통 한선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배는 가장 최근까지 조업하였던 멍텅구리배와 강화도의 곳배, 가거도의 멸치잡이배 등인데 목포의 조일옥(63)씨는 1997년 목포해양유물전시관의 의뢰를 받아 가거도배를 복원하였다. “내가 원래 가거도 사람이라 열두어 살 때부터 배 짓는디서 심부름함서 배웠어. 지금은 누가 맨들어 도라고 하먼 이배도 저배도 다 맨들어 주지만, 여자도 이뻐야 쳐다보는거 아닌가? 가거도배 얼마나 이쁜가? 옛날에 멜치잡이 끝나믄 나무도 실어다 팔고 미역, 젓갈도 실어다 팔았제. 영산포까지 댕김서 돛바람만 불먼 파도고 뭣이고 신나게 달렸어. 이 섬 저 섬에서 개펄에 배 올려 놓고 옹기, 소금 같은 거 팔믄 사람들 다 나와서 구경허고 사 가고, 그것이 장이었제”
가거도 멸치잡이 노래는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정작 ‘한선’에 대해서는 노동부 지정 기능전수자만 있을 뿐, 국가지정은 물론 지방무형문화재 지정도 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해양유물전시관 앞바다에 떠 있는 가거도배가 다 삭고 나면‘우리 배’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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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열락연재
글쓴이 : 박양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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