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윤시병 - 일진회 회장으로 친일행각 본격화
일진회 초대 회장 윤시병
일진회 회장으로 친일행각 본격화
대동일진회선언(大東一進會宣言)
초대 만민공동회장의 빗나간 정치적 야심
우리는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 집단 하면 너무나 당연히 일진회를 떠올린다.그러나 그 일진회의 초대 회장이 독립협회운동 당시 초대 만민공동회회장으로 뽑혔던 윤시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한말개화파 정객 윤시병.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국권수호와 근대화운동의 상징으로 알려진 독립협회에서 만민공동회 회장까지 맡았던 그가 어떤 경로로 일진회 회장이 되었을까?
윤시병은 봉건사회가 해체되어 가던 1860년에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무과에 등과, 무관으로 출사하기 시작하여 충청병사까지 지냈다. 그런 그가 한말의 격동 속에서 정치적 활동을 시작한 것은 독립협회운동 때부터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그는 정치적 야심이 많던 신진 소장층의 한 사람으로 독립협회운동의 막바지라고 할 수 있는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가 활발하게 열리고 있을 때 동생 윤길병(尹吉炳) 등과 함께 이에 적극 참여하여 만민공동회의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경무사 신태휴(申泰休)가 독립협회 회원 이상재 등 17명을 고종 폐위와 공화국 수립을 주장하는 익명의 고시문을 붙였다는 명목으로 체포한 데 대해 그는 만민공동회 회장 자격으로 이들의 무고를 밝히고 공개재판을 열 것을 요구하는 소(疏)를 올렸다. 그리고 연이은 만민공동회의 투쟁으로 이들이 석방되자 윤시병의 존재는 더욱 뚜렷해져 독립협회의 총대위원을 맡게되었으며, 11월 29일에는 유맹(劉猛), 최정덕(崔廷德),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독립협회 출신으로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중추원 의관으로 있으면서 한때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어 박영효를 위시한 개화파 내각의 수립을 주장하는 통첩을 정부에 보내는 데 앞장 섰다. 이처럼 독립협회에서는 정치적으로 첨예한 사안을 제기할 필요가 있을 때, 정치적 야심은 많았지만 정계에 별다른 기반이 없던 그를 늘 앞장 세웠으며, 그 또한 이러한 역할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굳혀나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종은 박영효 대통령 추대설 등의 풍문이 나돌고 있는 가운데 전달된 이 통첩을 조선 정부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간주하여,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기로 결정하고 주요 간부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윤시병은 정부의 추적을 피해 미국인 집으로 피신하여 체포·투옥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정세 때문에 더 이상 공개적인 정치활동에 나설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고종의 조선 정부와는 정치생명이 걸린 대결을 하지 않을 수없게 되었다. 무과 출신으로 학문적 조예가 없던 그가 얼마나 국권수호나 근대적 개혁이념에 공감하여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했는가는 그야말로 의문스러운일이다. 그가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것은, 다른 많은 독립협회 회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말의 정치적 격동 속에서 자신의 출세를 노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일진회를 만들어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 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도 그의 이러한 정치적 야심과 고종 정부와 공존할 수없게 된 정치적 처지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볼 때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일진회 회장으로 친일행각 본격화
그는 독립협회 해산 이후 각처를 방랑하면서 정국을 예의주시하며 정치적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04년에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해 들어오자 당시 일본군 통역으로 서울에 온 송병준이 정치단체의 조직에 뜻을 두고 최석민(崔錫敏)의 소개로 그를 찾아왔다. 곧 의기 투합한 두 사람은 정치단체의 조직에 나섰다. 윤시병은 유학주, 염중모, 한석진 등 독립협회에서 같이 활동했던 출세주의자들을 끌어 모으고 송병준은 일본군의 지원을 끌어내 1904년 8월 18일 유신회를 조직하였다. 이틀 후인 8월 20일에는 특별회를 개최하여 회의 명칭을 일진회로 바꾸고 윤시병 자신이 회장 자리에 앉았으며, 그의 동생 윤길병은 평의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또 이 무렵 송병준, 윤시병은 국내에서 동학을 이끌고 있던 이용구와 결탁하여 동학교도들로 조직된 진보회와 통합함으로써 전국적인 조직을 갖게되었으며 이후 일진회의 본격적인 친일행각이 시작되었다.
일진회는 설립 이후 경향 각지에서 끊임없이 강연회를 개최하여 한국 정부의 학정을 비난하는 한편, 일본은 문명 선진국으로 한국의 독립을 유지시키기위해 의협심을 가지고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을 치르고 있는 은혜로운 우방이라고 선전하였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동맹국인 일본을 군사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 일진회 회원을 동원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그들은 러일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본군의 북진을 지원하기 위해 연 11만4500명의 함경도 지방 일진회 회원을 동원하여 일본군 군수물자의 수송을 떠맡았으며, 함경도와 간도 지방에서는 러시아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첩보 수집 활동까지 벌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병력과 군수물자를 만주지역으로 수송하는 데 긴요했던 경의선 철도 부설 공사를 돕기 위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지방 일진회 회원을 동원하였다. 이 때 동원된 연인원이 무려 14만 9114명에 이르렀다. 일진회 회장 윤시병은 일진회의 이러한 친일행각 덕분에 일제로부터 일훈욱일4등장(日勳旭日四呂章)을 받았다.
윤시병이 회장으로 있던 일진회의 친일행각은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승리가 굳어지고 국제적으로 일본의 한국 보호통치가 공인되는 가운데,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伊廬博文)가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한 그들은 그에 한 발 앞서 1905년 11월 6일 일본에 외교권 위임을 주장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 선언문을 보면 "대저 일본은 선진 선각국이라, 동양의 평화 극복에 주력하였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도 모두 의협심에서 일으킨 것이니……외교의권리를 일본 정부에 위임하여 재외공사를 소환하고 주한공사관을 철거한다고해서 과연 무슨 문제가 일어나겠는가?……우리 당은 일심동기(一心同氣)하여 신의로써 우방과 교제하고 성의로써 동맹에 대하여 그 지도에 의지하며 그보호에 의거하여 국가 독립을 유지함으로써 안녕과 형복(魂福)을 영원무궁토록 유지할 것을 선언하노라"고 되어 있다.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의 한 단계를 지도와 보호에 의한 독립유지의 방안이라고 망발하고 있으니, 그들이 얼마나 도착된 의식을 가지고 충심으로 일본을 떠받들고 있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강요에 굴복하여 을사조약의 체결에 동의했던 '을사오적'보다도 한 발 앞선, 그야말로 자발적인 친일행각의 시범을 보인 것이다. 그런 만큼 당시 민중들이 "2천만인민을 노예로 만들려 하는 매국노로, 그들의 살을 찢고 뼈를 갈아 마셔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고 일진회를 규탄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제에 충성하던 일진회 회원들은 을사조약에 따라 이토가 한국통감으로 부임하여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자 너도 나도 그 밑에서 출세길에 오르기 위해 광분하였다.
1907년 박제순 내각이 총사퇴하자 일진회를 배후에서 조종하던 우치다(內田良平)는 이토 통감에게일진회 간부 이용구, 송병준, 윤시병, 윤길병, 윤갑병 등의 기용을 건의했고, 이에 그들은 한동안 대신(大臣)이 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이토에 의해 대신으로 임명된 사람은 농상공부의 송병준 하나로 그쳤는데, 이후 송병준의 힘으로 많은 일진회 회원들이 하루아침에 관찰사, 군수 등으로 벼락 출세를 하게 되었다. 그 덕에 윤길병은 충북관찰사, 중추원찬의가 되었으나, 평리원 수석판사를 노렸던 윤시병은 송병준과 사이가 벌어지면서 결국 관리로 출세하지 못하고 일진회와도 결별하고 말았다. 창립 당시 회장으로 추대되었던 윤시병은 1905년 12월 일진회의 진용이 개편될 때 이용구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총무원으로 내려앉게 되었고, 대신 그의 동생 윤길병이 부회장이 되었다. 일진회 회원의 대다수를 이루는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있던 이용구나 일본과의 관계에서 확실한 끈을 갖고있던 송병준에 비해 일진회 내에서 윤시병의 기반은 그만큼 미약한 것이었다.
1909년 일진회의 모든 회무를 지휘·감독하는 직책으로 총재직을 신설하고 이를 투표로 뽑았을 때 34표를 얻은 그는 54표를 얻은 송병준에게 졌으며 이후 일진회의 운영을 둘러싸고 송병준과 총돌이 잦다가 결국 일진회를 떠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의 친일활동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바로조선노동협회라는 또 다른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이 단체를 이끌면서 일제의 한일'합병' 공작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미미하였고 합병 후에도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 1931년 친일의 생을 마감하였다.
■ 김경택 (연세대 사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