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그리움/진도문화

[스크랩] 유배의섬진도

麗尾박인태행정사 2007. 9. 7. 16:11
 



유배의섬진도 흔히귀양살이라고 말하는것은 나라에서 죄진 사람을 죽이지 않고 서울에서 멀리 가서 머물게하는 유배형벌을 말한다. 이형벌은 중국 당나라 때 시작된 것으로 통일 신라가 본따 시작했지만 왕건 태조가 고려를 세운뒤 범률로확정되었다. 조선시대는 명나라 형률을따랐지만 거의 같았다. 중국은 죄인을 보낼때2천리2천5백리.3천리의 세종류로 나눠행했지만. 한반도는 땅이좁아 명나라처럼 3천리 거리의 먼곳이없었 으므로 세종때"배소상정법" 이란것을 만들어 세종유의 유형지을 따로 정했다. 그래서 명나라 3천리밝에 속하는 중죄인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보내기로 하여 제주도와진도.거제도.남해도가 가장많은 귀양지로 쓰였다 유배형을 받은 죄인도 도사나 나장이 압송해 해당군의수령에게 인개하고 수령은 보수주인이라 하여 감시자을 지정해 위탁했다. 보수주인은 지방의유력자 중에서 선정하고 급식은 특명이없는한 죄인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이 때문에 위리안치 등과 같이 탱자 울타리로 막은 독립가옥에 가두고 고을의 나졸이 지키는 중죄인은 따로관리하지만 단순유배자는 생활 감당을 위해 형재간이나 부모가 따라갔다. 대부분 현지처를 두었으나 본처나 자녀가 같이 따라가 살기도 하고 왕래가 자유로웠다 다만 당 색에따라 수령을 잘못 만나면 여러가지 제한을 하기도 헸으나. "금갑도"라고 그 재한범위을 명시하지 않을 때는 진도고을 어디를 돌아다니며 살든지 관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농토를 사서 놓사도 짓기도 하고 서당을열고 학비을 받아 살아가기도 했다 대부분 유배형은 정치범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정쟁의악화로 사약을 받지 않으면 2~~~3년 내에 사면령으로 풀려나고 다시정계의 거물이 되기도 하여 현지 보수주인 이 덕을 입기도 하였다 그동안 역사기록에서 확인된 진도 유배자는 102명에 이른다. 첫 유배기록은 1122년의 이영(李永)이며 걷이어서 1126년 이자겸의 아들 이공의이고 세번째가 정중부사가 군사혁명에 성공한뒤1170년에 귀양보낸 의종의 아들 왕기(王祈1146--1170)이다 1357년의 조희직(曺希直.진도창령조씨입도조)등이다 조선조에 접어들어 1392위충(魏忡).1406년의 여의손(呂義孫)을 시작으로 구한말 친일 오적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이기(李沂).이필상(李弼相).최동식(崔東植).의병장 민종식(閔宗植). 양한규(梁漢圭)여규형(呂圭亨)박윤식(朴潤植)등이 있다. 개화당이였던 정만조(鄭萬朝.1858-1936)는 특히1896년 진도에 와서1908년 서울에 돌아간 뒤 친일파로 남작 직위를 받고 경성제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손재형..허백련 등 진도 인재 양성에 크게공헌했다 1504년 궁녀 전향(田香)과수근비(水斤非)가왔고 1803년에도 궁녀 희봉(喜鳳)이 왔다 1608년에는 선조 대왕의 왕자 임해군 이진(李津)이 오고 1628년 임성군 이기(李琪)가 왔으며 노수신.남이성.조태체.김수향.김이익등 정승.판서들이 수없이 왔다 연산군때 군내면 금골산으로 유배왔던 이주(李胄)는 금골산기라는 글을 남겨"동문선"에 실렸다. 이처럼 1백명이넘는 서울 고관대작과정치인들이 진도에 유배와 진도 현지사람들과 섞여 생활을 꾸려갔던 고장이라 진도는 외진 곳이면서도 서울 양반 문화나 궁실 문화를 직접 전수 받을 기회가 많았던 곳이다


출처 : 보배섬 진도
글쓴이 : 하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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