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펌)/고운글(펌)
[스크랩] 신라인들이 스키타이인이라는 엄청난 자료들!!!!
麗尾박인태행정사
2007. 8. 27. 16:06


[일연 삼국유사 진한(秦韓) 조(條)] 후한서(後漢書)에 말하되, "진한(秦韓)의 늙은이가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도망해온 놈들이 한국에 오니, 마한이 동쪽 경계 땅을 떼어주었다. 그러자 그들이 서로 불러모으니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언어는 秦나라 말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런 때문에 이곳을 秦韓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십이개의 소국(小國)이 있어 각각 일만호(一萬戶)정도 되었는데 저마다 나라라고 불렀다. 또 최치원(崔致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한(秦韓)은 본래 연(燕-춘추전국 시대 지금의 북경을 수도한 중국 변방의 나라)나라 사람들로 도망 온 놈들이다. 그래서, 탁수( 水-중국 하북성(河北省) 탁록현( 鹿縣) 탁록산( 鹿山)에 근원을 두고 하류는 俠河가 됨. 연나라에 있던 강이름이다.)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邑과 마을을 사탁(沙 ),점탁(漸 )등 이라고 불렀다. [본문:後漢書云. 秦韓耆老自言. 秦之亡人來適韓國. 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十二小國. 各萬戶. 稱國. 又崔治遠云. 秦韓本燕人避之者. 故取 水之名. 稱所居之邑里. 云沙 . 漸 等.] [양서 권 오십사] 신라라 하는 것은 그 먼저의 근본은 辰韓의 종족이다. 辰韓은 또한 秦韓이라고 말했다. (중국과) 서로 만리 떨어져 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秦나라 때 노역을 피하여 마한으로 투항해 오자 마한은 또한 그 동쪽 땅을 떼주어 그곳에 살게 하였다. 秦나라 사람이었으므로 그곳을 秦韓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언어와 사물의 이름에 중국과 유사함이 있었다. "국(國나라)"을 "방(邦)"이라고 하고 "궁(弓=활)을 호(弧)"라 하고,"적(賊=도둑)을 구(寇)"라 하고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한다. 모두 서로 불러모으니 무리가 되었으나 마한과 화동하지 못했다. 또한 辰韓王은 항상 마한인으로 왕을 세워 세세연연 서로 이었으니 진한은 스스로 왕을 세울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를 밝히면 유이민인 이유였다. 그래서 항상 마한의 다스림을 받았다. {梁書 卷 五十四} 新羅者,其先本辰韓種也.辰韓亦曰秦韓,相去萬里,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馬韓亦割其東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韓.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名國爲邦,弓爲弧,賊爲寇,行酒爲行觴.相呼皆爲徒,不與馬韓同.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世相係,辰韓不得自立爲王,明其流移之人故也,.恒爲馬韓所制. [김부식 삼국사기 혁거세 거서간 38년] 38년 봄 2월에 호공(瓠公)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다. "秦韓과 弁韓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소.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와 같은 거요?" -중략-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 중에 秦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다가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마한 동쪽에서 秦韓 사람들과 함께 살았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이와 같이 책망했던 것이다. ■ 말(馬)과 배(船)를 잘 부린 신라인들 삼국통일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수용하고 소화한 개방성과 주체성에서 나왔다. 역사학자 이도학(李道學) 교수(한국전통문화학교)가 쓴 「한국 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김영사)에서 필자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힘」을 이렇게 분석했다. 1. 고대국가의 국력 척도인 양질의 철광(鐵鑛)을 확보했다. 2. 국가를 위해 생명을 가볍게 던지는 무사도 정신. 3. 신라 국왕의 정교(政敎)일치적 권위로 해서 국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4. 지배세력의 거듭된 교체와 다양한 세력의 포용으로 활력을 더해갔다. 5. 왜(倭), 백제, 고구려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려오면서 내부 단합이 강화되었고 항상 사회의 긴장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李교수의 분석 중에서 특히 공감이 가는 것은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단에 고립되어 있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개방체제를 유지하여 다양한 세력과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의 생동력과 참신한 기풍을 유지하였다는 지적이다. 신라는 박(朴)-석(昔)-김(金)씨로 왕실이 교체되었다. 기록에 의한 것만으로도 중국 진(秦)의 유민, 고조선의 유민, 낙랑군의 유민이 신라지역으로 몰려왔는데 서로 배타적으로 적대시하지 않고 여섯 촌(村)을 이루며 더불어 산다. 이도학 교수는 『여러 경로로 들어온 민족의 수혈에 의해 참신한 기풍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신라는 흡수한 이방인이나 피정복민을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고 다양한 세력을 포용하였기 때문에 강력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요컨대 신라는 백제, 고구려, 조선에 비해서도 내부질서가 민주적이었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포용이 가능하다. 신라의 힘은 북진 해양세력과 남진 북방세력의 교차지로서의 용광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점에서 우러나온 통합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신라가, 해륙(海陸)의 문물을 다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 주체성과 개방성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신라의 국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라의 해군력을 알아야 한다. 512년 지증왕 때 이미 이사부는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점령했다. 울산항에 인도에서 보낸 쇠를 실은 배가 도착했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의 관등 중 파진찬(波珍)이란 직책은 「바다 칸」, 즉 「해간(海干)」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신라의 조선술은 당시 東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왜(倭)에 조선술을 가르쳐준 이나베(猪名部)는 신라 사람이다. 639년 선덕여왕 때 당나라 승려들이 신라 배를 타고 倭로 갔고 649년에는 倭의 승려가 신라 배를 타고 나라에서 귀환했다. 658년엔 倭의 승려 두 사람이 신라 배를 이용하여 당에 유학을 갔다. 그때 倭는 백제와 더 친했는데도 당을 오고갈 때 튼튼한 신라 배를 이용했다. 583년 진평왕 때는 병부(兵部)에 선부서(船府署)를 두어 선박사무를 관장하게 했고, 678년 문무왕 때는 병부, 즉 국방부와 동급인 선부령(船府令) 한 명을 두었다. 해양부가 국방부와 동급으로 독립한 나라는 東아시아에서 신라가 유일했다. 신라 해군이 고대일본 시절 오사카 부근 아카시노우라(明石浦)에 상륙하여 왜군을 격파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북방 기마민족 출신인 신라김씨 왕족은 말을 통해서 북방초원 루트를 경유한 로마와의 문화 교류를 유지하였고, 배를 통해서는 倭와 唐을 비롯한 외국과의 무역을 유지했다. 말과 배는 고대 사회에서 양대 기동수단이었다. 말로 상징되는 북방초원, 배로 상징되는 남방의 해원(海原)이 신라인의 활동공간이었다. 이 만한 스케일의 민족 무대를 갖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등장까지 기다려야 했다. 신라는 농업생산성과 기마군단, 그리고 철생산력과 해양력까지 두루 갖춘 입체적이고 다양한 국력의 조합(組合)을 갖고 있었다. 이는 남방계․북방계 등 다양한 민족의 공존과 융합에 의한 시너지 효과로서 설명될 것이다. 이런 복합성은 신라가 가진 주체성을 매개로 하여, 복잡성으로 전락하지 않고 높은 단합력을 발휘했다. 특히 신라는 전쟁이나 외교 등 국가적 위기 때 국내의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입체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신라는, 참으로 당차고 단수가 높은 나라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김(金)씨성을 사용한 사람은 '금일제' 라는 사람입니다.(라고합니다.) 이 사람은 흉노 출신이죠. 본격적인 얘기를 하기 전에 흉노에 대한 얘기를 해야겠네요. 배달한국(아마도 고조선을 말하는 듯 합니다)의 5세 태우의(太虞儀)천황의 막내 황자이신 태호복희(太虞伏羲)와 막내 딸이신 여와(女휶)께서 중국으로 이주하셨습니다. 삼황오제중 삼황의 맨 처음에 자리하시는 분이시죠. 팔괘(八卦)를 처음 만들고, 그물을 발명하여 중국인에게 어획·수렵(狩獵)의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분들의 후손들은 8개의 성씨로 나누어 중국의 각처로 흩어졌는데, 본래가 기마족(騎馬族) 출신들인 이들 중 중국을 벗어나 다시 북쪽이나 서쪽의 초원생활을 선택했다고합니다. 풍이(風夷)족들을 중국인들은 흉노(匈奴)라고 불렀고요. =============================================================== 잠깐.. 풍족에 대해서 '풍족(風族)은 한때 "스키타이" 라고도 불렸는데 이들 바람족은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을 휩쓸면서 풍류도(風流道), 풍월도(風月道) 즉 신선도(神仙道)를 신봉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여 (東夷)족 특유의 개성들을 고스란히 전승하고 있다' 고 합니다. ================================================================== 하여간... 김씨성을 처음으로 사용한 김일제로 돌아가면 이 분의 아버지이신 휴도왕(休屠王)께서는 지금의 서안(西安) 북쪽 땅인 무위(武危)의 언지산(焉支山)과 돈황(敦惶)의 삼위산(三危山)이 있는 감숙성(甘肅省) 지역의 흉노족의 왕이셨습니다. 기원전 128년에서 117년 사이에 한나라의 장군 곽거병이 흉노를 토벌하러 대병을 끌고옵니다. 하서지방을 같이 다스리던(어떻게 한 땅을 여럿이서 다스리냐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을꺼라 믿겠습니다. 이들은 유목민족이란걸 잊지마시길) 사람이 곤사왕(昆邪王)이었는데, 한나라의 토벌군에 계속 밀리던 곤사왕은 선우(흉노족의 황제를 말합니다)의 질책이 두려워 휴도왕과 함께 한에 투항하려합니다. 휴도왕이 반발하자 휴도왕을 죽이고 4만의 무리와 함께 곽거병에게 투항하죠. 이 때,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는 한나라로 끌려가게되고요. 그리고 한무제의 눈에 들어 시중부마도위, 광록대부를 거처 상장이 되었고, 우연히 무제를 암살하려는 자를 격투 끝에 체포한 공으로 한(漢)나라 제후국의 왕인 "투후" 라는 벼슬까지 받으며, 한무제로부터 금(金)이라는 성까지 받고 가장 아끼는 신하가 됩니다. 시간은 흘러흘러 왕망이 나오는 때가 됩니다. 왕망은 아시죠?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新)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사람입니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왕망이 신(新)을 건국하는데 일조해서 실세가 되죠. 하지만 신은 곧 멸망하고(왜 멸망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아시는 분 답해주세요) 신의 건국에 큰 역할을 했던 김일제의 후손들은 모두 도망치는데 이 때 도망친 무리중에 한 무리가 계림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금일제의 5대 손인 금성과 그의 금씨 집단으로 소위 계림의 황금닭에서 태어났다는 삼국사기전설의 주인공 금알지라고 합니다. 「만주원류고」에서 신라에 관계되는 인용 사료는 「북사, 양서, 통지, 수서, 책부원구, 구당서, 신당서, 태평 우기, 통고」등에 「北史, 梁書, 通志, 隋書, 冊府元龜, 舊唐書, 新唐書, 太平 宇記, 通考」 의하여 위치를 표현하고 있는데 「봉사행정록(奉使行程錄)」에서 "자함주북행지동주동망대산즉 신라산심처여고여접계"라 하였다. "自咸州北行至同州東望大山卽 新羅山深處與高麗接界" 안(案)에 의하면 함주는 今함평부이고 동주는 금동산 재철령 개원지간(在鐵嶺 開原之間), 동쪽으로 위원보(威遠堡) 즉 길림계(吉林界), 남쪽으로 봉천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허항정행정록(許亢定行程錄)」에 의한것이라 한다. 18세기에 나오는 지명 "철령 개원과 길림"이 지금도 있다. 또 신라구주(新羅九州) 항목에는 「신당서」당회요(唐會要)에 의하여 표현하였고 근안(謹案)에서 "기강토동남병유금조선지경상강원이도 서북직지길림오납우서근개원철령"이라 하였고 "其疆土東南竝有今朝鮮之慶尙江原二道 西北直至吉林烏拉又西近開原鐵領" 개원 이후 발해가 성할 때 압록강으로 경계하였다. 결국 신라강역은 북쪽의 동쪽은 길림에서 서쪽은 개월 철령까지라고 하였다. 동방박사는 신라인이었다. 동방박사들이 유대 나라를 내방하는데 약 2년이라는 긴 시간을 여행하였다면 그들의 고국은 유대 땅으로부터 아주 먼 동방이었을 것이다. 가장 먼 동방국은 신라에 해당된다. 따라서 우리는 동방박사들은 신라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을 때 동방으로부터 그를 예방하기 위해 찾아 온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노라``. 마2:1~2 그들은 박사들로서 천사들로부터 예수 탄생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마구간을 방문했던 목자들과는 달리 상류층의 사람들이었으며 또한 지식인들이었다. 아기 예수를 경배코자 유대나라를 내방했던 동방의 현자들은 동방의 어느 나라로부터 온 것인가? 성경은 분명히 그들은 고국이 있다고 말한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마2:12 그러나 고국의 명칭은 밝히지 않았기에 그들이 동방의 어느 나라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파사 & 신라? 성경주석가들은 동방박사들의 고국이 페르시아일 거이라고 추측한다. 그 이유는 BC 8세기에 이르는 동안 유대인들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질 때에 페르시아와 그 주변 나라들의 성읍으로 이주했던 유대인들이 (왕상17:6 에스라1:9 9:2) 그 나라에서 민수기 24장 17절에 기록된 예언에 따라 메시야가 탄생할 때에는 특별한 별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파했을 것이고 그 결과 메시야의 탄생을 알려주는 한 별이 페르시아의 박사들에게 나타나자 그들이 새로 나신 유대인의 왕께 경배드리기 위해 유대 땅을 행해 길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전적인 동방박사 페르시아인 설은 성경을 자세히 상고해보면 수긍할 만한 이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기존의 폐르시아인 설에 너무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아마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는 혁신적 주장이 되겠지만 동방박사들의 고국은 성경의 기록을 주의 깊게 살펴 볼 때 유대 땅에서 `가장 먼 나라인 신라`일 것이라고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동방박사들의 내방 사건은 마태복음 2장에 기록되어 있고 목자들의 마구간 방문 사건은 누가복음 2장에 기록되어 있다. 보통 누가복음 2장의 `마구산 기사` 기사와 마태복음 2장의 `동방박사 기사`를 동일한 시간상의 사건으로 생각한다. 많은 성탄 노래와 그림 성탄 관련 성극들이 그것을 조장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사건 사이에는 적어도 1년이상 2년이하의 시간적 격차가 있다. 한글 개역성경은 동방박사들이 방문했던 아기와 목자들이 방문했던 아기를 똑같은 아기라고 번역했지만 헬라어 성경에 기록된 아기는 헬라어 `브레포스`(βρεφωs) 가 사용되었고 (12절 16절) 동방박사들이 방문들이 방문하여 만났던 마태복음 2장의 아기는 헬라어 `파이디온`(παιδτον)이 사용되었다. (8,9,11,13,14,20절) 헬라어 사전에 의하면 βρεφωs는 `갓난아기`(baby)를 뜻하는 말이고, παιδτον은 `어린아이`(young child)를 뜻하는 말이다. 신약성경의 모든 용례를 살펴보면 이 두 단어는 나이의 개념을 분명히 할 때, 즉 `더 어리고` `덜 어린` 아이를 묘사할 때 쓰인다. 영어성경은 원어의 뜻에 맞게 누가복음 2장의 아기는 baby로 마태복음 2장의 아기는 child로 구분하여 잘 번역하였다. 아기라는 낱말에 대한 헬라 원어의 이와 같은 분명한 차이점으로 미루어 볼 때 누가복음 2장의 목자들 이야기와 마태복음 2장의 동방박사 이야기는 틀림없이 시간적 간격이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2장의 아기가 누가복음 2장의 아기보다 얼마나 더 자란 아기이기 때문이다. 브레포스(βρεφωs)와 파이디온(παιδτον) 그러면 누가복음 2장의 목자들 사건과 마태복음 2장의 동방박사들 사건은 어느 정도의 시간적 차이가 있을까? 최하 1년 이상 최고 2년 이하의 시간적 간격이 있다. 왜 그런가? 헤롯이 동방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모든 사내 아이들을 죽일 때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기 때문이다. 마태2:16 그 때가 만약 예수님이 갓 태어난 갓난 아기(baby)였다면 헤롯은 결코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한살부터 그 아래 혹은 생후 6개월부터 그 아래의 사내 아이들만 다 죽여도 헤롯은 충분히 안심했을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은 동방박삳르이 어린 예수를 만났을 때는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이후로 꽤 시간이 흘렀고 대략 최고 2년이 지난 시점이었으며 따라서 이 당시 예수님은 이미 두 살은 조금 못됐지만 상당히 자란 아이였을 것이라는 증거가 된다. 이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누가복음 2장의 목자들 이야기와 마태복음 2장의 동방박사들 이야기는 약2년의 시간적 격차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까지 약 2년에 걸쳐 여행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들이 동방에서 본 그 별은 아기 예수님이 유대 땅에서 탄생하셨음을 예고하는 별이 아니었다. 이것은 마태복음 2장2절에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실 이``를 찾는다고 하지 않았음을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그 별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을 때 동방에 나타났음에 틀림이 없고 아기(baby)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밤에 베들레헴 근처의 목자들이 천사들이 가르쳐준 메시야 탄생 소식을 듣고 즉시 마구간에 갔으며 먼 동방의 현자들은 그때부터 출발하여 약 2년의 긴 기간 동안 여행을 해서 마침내 유대 땅에 이르러 `파이디온`(어린아이: child)이신 예수님께 황금, 유향, 몰약을 바치며 경배드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직후 요셉의 가정은 헤롯의 학살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했으며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그러니까 당시의 아기 예수님의 나이는 한 살이 지나 두 살이 조금 되지 않은 나이였던 것이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방문했을 때는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이후로 꽤 시간이 흘렀고 대략 최고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구간과 집 따라서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 방문한 곳과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 방문한 장소는 다를 수밖에 없다. 누가복음 2장에서 목자들이 왔을 때 `아기` 브레포스: baby는 마구간 `구유`manger에 누워 있었다. ``빨리 가서 마리아와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눅2:16~17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마구간이 아닌 `집` house에서 파이디온:child께 경배했고 목자들이 방문했던 때와는 달리 요셉은 당시에 그곳에 없었다. ``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거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니니라`` 마2:11 이 구절에서 `집`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마구간도 아니고 여관도 아니고 분명히 `집`이라고 되어 있다. 동방박사들은 마구간이 아닌 집에서 갓난아기(baby)가 아닌 약 두 살쯤 된 어린아이(child)이신 예수님을 만났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이 구유에 있을 때 예수님을 방문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약 2년이 소요되는 여행 거리는 과연 페르시아인가? 극동인가? 별은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나타났음에 틀림없고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헤롯을 만나기까지는 1년 이상이 더 걸렸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동방으로부터 유대나라에 도착하기까지는 2년 가까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동방`(the east)은 그 밤에 별을 보고 그 밤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가 결코 아닌 것이다. 별은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출현하였고 그와 동시에 박사들이 그 별을 보고 인도되어 왔다면 시일이 상당히 걸린 후에 아기 예수님을 보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 사실은 동방박사들의 고국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동방박사들이 약 2년에 걸쳐서 여행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서구 성경학자들의 동방박사 페르시아인 설은 결코 지지할 수 없는 이론이다. 페르시아는 유대 나라로부터 가까운 동방으로서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일 이내에 갈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유대 나라를 약2년이라는 긴 시간을 여행하였다면 그들의 고국은 유대 땅으로부터 아주 먼 동방이었을 것이다. 그 가장 먼 동방국은 `신라`에 해당된다. 따라서 우리느 동방박사들은 신라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고대 역사책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박혁거세 편에 보면, ``54년 봄 2월(음력)에 패성(혜성)이 하고(견우성)에 나타났다``(五十四年春二月己酉, 悖聖于河鼓 오십사년춘이월기유 패성우하고)는 문구가 있는데 박혁거세 54년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년도인 BC 4년에 해당된다. (예수님은 한 겨울에 탄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양떼를 지킥 있었기 때문이다. 팔레스틴에 사는 목자들은 한겨울에 들판에서 밤을 지나지 않는다. ) 따라서 신라인에 의해 관측된 그 혜성은 동방박사들을 인도했던 메시야의 별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예수님 탄생 당시 천문학이 가장 발달한 곳은 중근동 지역이 아닌 극동지역이었다는 것이 현대 천문학계의 정설이다. 신라는 천문학 수준이 매우 높은 나라였다. 지금도 경주에 가면 신라인들이 별을 관측했던 세계 최고의 천문대인 첨성대가 우뚝 서 있다. 영국 왕립천문학회(BSC)에서는 1977년 학회기관지 12월호에 메시야의 별이 나타났다는 2천년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천문학이 발달한 곳이 중동과 극동이었고 중동에서는 태양력을 주로 연구한 반면 극동에서는 별의 운행을 주로 연구했기 때문에 만약 메시야의 별이 나타났다면 그 기록은 반드시 극동 쪽에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한국의 문헌을 뒤져서 앞서 소개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발표한 적이 있다. 아주 먼 동방나라라로부터...... 그러면 어떻게 신라인이 메시야의 별을 알아 볼 수 있었겠는가? 위고다르(G, Wigodar)는 솔로몬 사후인 B.C 721년 앗시라아 침공에 의해 북이스라엘의 10지파가 포로가 되었으며 세계 곳곳에서 그들의 자손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G, Wigodar, The Encyclopedia of Judaism, Jerusalem 1989. pp.714-715) 고대 이스라엘 역사 연구가인 요셉 아이델버그(Joseph Eikelberg)는 역설키를 B.C 721년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했을 때 북왕국 10부족 중 일부가 천산산맥--> 중앙아시아-->지나(支那.중국)-->한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고 한다. 이것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유물이 있다. 대동강변에서 제작 연대가 B.C 1200년으로 추정되는 고대 히브리어 문양이 새겨진 와당(瓦當)이 발견된 것이다.(국립중앙박물관) 그 내용은 ``도착했다`` `oleh`שרה라는 와당 문양과 함께 다음 몇 가지 글을 남겼다. ``신의 나라에 단결하여 들어가자``, ``성도가 모여 기도함으로 회복된다.`` ``잠언을 가르치는 사사가 통치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신의 나라에 단결하여 들어가자``는 글인데 '벨렉계 선민'이었던 그들은 백의민족이 살고 있는 우리나라가 '욕단계 선민'의 나라인 것을 알았던 것 같다.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만들어 각 방의 문설주를 비롯, 장독과 헛간 등에 뿌리던 우리 겨레의 풍습은 바로 rmef 곧 한반도까지 건너온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지파로부터 유래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붉은 색의 팥죽으로 양의 피를 대신한 유월절 행사였다. 출12:6.23 실제로 흩어진 북이스라엘의 10지파 중 일부가 수세기를 걸쳐 동쪽으로 이주하다가 마침내 한반도 남단까지 내려 왔으며 가야 왕국이나 신라 왕국을 세웠다면(신라왕의 이름 `거서간`居西干)의 뜻은 '西쪽에 거했던 왕(干)이라는 뜻이다) 그들을 통하여 메시야의 별에 대한 지식이 신라인에게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가락국기에 보면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 왕의 부인은 인도 중부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 이라고 했는데 '아유타'국은 `유대인 공동체`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아유타'의 '아'는 히브리어 정관사 h ``ה ``이고 '유타'는 '유다 יהירה'란 말로써 '아유타' יהירה-ה 아-유다 국은 바벨론 포로 이후 흩어진 남유다 왕국의 유민이 세운 나라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허왕후와 그 일행은 유대인들이었으며 그것은 신라와 아유타국 사이에 이미 왕래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로 그 과정에서 메시야의 별에 대한 지식이 신라이들에게 전파되었을 수도 있다. 동방박사들의 고국은 어디인가? 그들은 동방의 어느 나라 사람인가? 성경의 기록을 자세히 고찰해 보면 그들은 유대 땅에서 `근거리`가 아닌 `아주 먼 동방 나라`로부터 찾아 갔었다고 단정하게 된다. 따라서 동방박사들은 신라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 같은 이론은 상술한 바와 같이 한국의 고대역사 기록에 의해서도 뒷받침이 되고 있는 것으로서 기존의 페르시아인 설보다도 더욱 지지할 만하다. 신라의 천문박사들이 메시야의 별을 보고 황금(신라는 금이 많은 나라임), 유향(박하의 즙일 것이다), 몰약(소나무나 옷나무의 진일 것이다)을 예물로 가지고 약 2년에 걸쳐서 긴 여행을 하여 마침내 예수님이 계셨던 `집`에 도착해서 아기 예수께 경배했을 것이다. 그들이 바로 동방박사들이다. *新羅國,在高麗東南,居漢時樂浪之地,或稱斯羅。魏將毌丘儉討高麗,破之,奔 沃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 不耐、韓獩之地。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傳祚至金真平,開皇十四 年,遣使貢方物。高祖拜真平為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其先附庸於百濟,後因百 濟征高麗,高麗人不堪戎役,相率歸之,遂致強盛,因襲百濟,附庸於迦羅國。 "신라국"은 "고려"의 동남쪽에 있고, "한"나라 때의 "낙랑"땅이다. 혹은 "사라"라고 한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려를 정벌하고, 깨지자 "옥저"로 달아났다. 그 후에 다시 옛땅에 돌아왔는데 남아있는 자들이 "신라"가 되었다. 옛부터 그 사람들은 "화하"와 "고려", "백제"에 섞여 있었는데 "옥저", "불내",, "한", "예"의 땅에 겸해 있는 것이다. 그 왕은 본래 "백제"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도망와 "신라"에 이르러 그나라의 왕이 되었다. 전하여 "김진평"에 이르러, "개황" 십사년에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받쳤다. "고조"가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을 내리었다. 먼저 "백제"에 의지하다가 후에 "백제"가 "고려"를 정벌하자 "고려"인들이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서로가 돌아갔는데, 후에 강성해저서 백제를 습격하자 "가라국"에 의지하였다. <隋書> 신라시대 토용. 완벽한 백인 얼굴이죠. . 아랍사람 술라이만(Sulaiman ad-Tajir)은 『중국과 인도 소식(Akhbaru'd Sinwa'l Hind)이라는 책에서 "신라인들은 '백인/白人' 으로서 中國황제와 서로 선물을 주고 받고 하는 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은 그들에게 비를 내려 주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의 모양은 모두 키가 크고 몸이 장대하며 머리털이 아름답고…] - 後漢書 東夷傳 韓 - http://www.int-pub-iran.com/Interview/interview01.htm Q: When did Aryans start to scatter? A: We can respond to this question through the language they spoke. From a linguistic standpoint, Aryan language has influenced the entire world and Korean language contains around 200 Aryan words. You must know that Koreans are totally different from Japanese and Chinese. We may find tall Koreans with blue eyes but we rarely find such cases in Japan or China. Therefore, Aryans have even affected the Korean culture. 변역: Q:아리안족은 언제부터 흩어졌습니까? A:언어를 통해서 그 질문을 대답할 수 있다. 아리안 언어는 온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했고, 한국어는 약 200개의 아리안 단어를 가지고 있다. 당신은 한민족은 일본인과 중국인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한다. 키가 건장하고 파란눈을 가진 한국인을 찾을수 있지만 일본과 중국에는 이런 예가 없다. 그러므로, 아리안족은 한민족의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http://orient4.orient.su.se/personal/tobias.hubinette/image_of_korea.pdf Ake Holmberg (1994: 36) has noted that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e difference between Japanese and Koreans was blurred for many Westerners, a fact which is not surprising considering the harsh and in many ways effective assimilation policy. The leading Swedish race biologist Dr. Bertil Lundman (1946) at Uppsala University wrote about the Koreans: Some have almost a Nordic appearance with high stature and light colors in eyes, hair and skin complexion, and these semi-European types who are numerous in Korea may speak a language related to Indo-European. The same theory was proposed by the American Wladimir Mitkewich (1956) who argued that the Koreans originated from ancient Greece:Koreans are White inwardly. So, let the Europeans and Americans accept Koreans, as brothers and sisters, on equal terms.” ... 웁프살라 대학의 스웨덴의 권위있는 인종 생물학자 버틸 룬드만 박사(1946)는 한국인에 관해 이렇게 썼다: 일부는 옅은 색의 눈, 머리 그리고 살색의 거의 완벽한 노르딕인의 모습을 가졌고, 그들은 코리아에 많이 존재하는 이런 반유럽류는 인도-유럽계의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같은 의론이 미국인 블레디머 미트케비치(1956)에 의해 코리안은 고대 그리스에서 발원했다고 제의... ... 한국인은 내면이 백인이므로 유럽과 미국이 동등하게 형제애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라(新羅)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중국의 25사(二十五史), 호태왕비문(好太王碑文) 등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나라가 존재했음을 알수 있다. 그 하나는 중원대륙에 존재했던 신라국(新羅國)으로 국호가 사로신라(斯盧新羅)였으며 나머지 하나는 반도에 존재했던 신라국(新羅國)으로 국호가 매금신라(寐錦新羅)였다. (1) 신라의 국호(國號)문제. ☞ 사서(史書)의 기록대로라면 신라는 서기 503년까지 국호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 힘의 역학관계가 “고구려>백제>신라” 로 나타난다. 신라의 국호는 건국당시(기원전 57년) 서나벌(徐那伐)로부터 시작하여 계림(鷄林), 신로(新盧), 신라(新羅), 사라(斯羅), 사로(斯盧) 등 여러 가지로 쓰여 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중국의 25사인 “위서(魏書)”에 의하면 위시(魏時:220~265년)에는 신로(新盧), 송시(宋時:420~479년)에는 신라(新羅) 또는 사라(斯羅)라 하였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307년에 “신라(新羅)”라고 불렀다고 기록되고 있고 또 503년에 또다시 국호를 “신라(新羅)”라고 부르자고 군신들이 국왕에게 건의한 기록이 있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을 분석해보면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건국한 이후에 500년 동안 확실한 국호를 확정하지 못하였다는 의미인데 그 당시 또 하나의 신라가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2) 신라 국왕에 대한 명칭.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국왕의 호칭이 '거서간(居西干) -> 차차웅(次次雄) -> 이사금(泥師今) -> 마립간(麻立干) -> 왕(王)'으로 되어 있고, 최치원(崔致遠)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에는 모두 왕(王)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김부식(金富軾)은 이를 두고 최치원(崔致遠)이 그 칭호가 야비해서 부를 것이 못된다는 생각 때문에 왕(王)으로 불렀을 것이라 밝히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왕(王) 칭호와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이사금(泥師今), 마립간(麻立干) 등이 모두 사용되었고 중국의 사서에는 왕(王)의 호칭 이외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있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 분명하지는 않으나 신라 국왕의 호칭이 서로 다르게 기록된 이유를 연구해볼 필요성이 있다. (3)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신라에 돌아왔을때 국왕의 이름이 다르다. ☞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지 않는 정신대왕(淨神大王)에게는 보천(寶川), 효명(效明) 두 왕자가 있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643년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오는데 이때 그를 맞이한 신라 국왕이 두사람이다. 선덕여왕(善德女王)과 정신대왕(淨神大王)이다. 그런데 정신대왕(淨神大王)은 정식 신라 국왕 계보에는 없다. 정신대왕(淨神大王)이 다스린 신라는 어디에 있는가? (4) 진평왕(眞平王)에 대한 국내 사서(史書)와 중국 사서(史書) 기록의 차이점.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진평왕(眞平王)이 신라(新羅) 제26대 국왕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중국 정사(正史)인 북사(北史)에는 진평왕(眞平王)을 신라 제30대 국왕으로 기록하고 있어 4대의 차이가 난다. ☞ 이것을 단순한 오기(誤記)라고 말할 수 있는가? (5) 신라의 특산물 ☞ 1363년 문익점(文益漸)이 가져온 목화는 이미 1천년전에 신라에서 생산되었다. 이미 이 시기 신라는 나침반(신라침반)의 재료인 자석과 침을 당나라에 주었으며 면(綿, 목화)를 고구려에 주었다. ☞ 교과서는 코메디 “한국에 목화가 전래된 것은 1363년(공민왕 12년) 원(元)나라에 서장관으로 갔던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서 붓두껍 속에 목화씨를 숨겨 가져온 후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재배에 성공, 경상도 산청(山淸)에서 재배하여 전국 각지에 보급되었다.“ 예(濊)와 마한(馬韓), 신라(新羅)에서 이미 생산하였다고 사서(史書)는 기록하고 있다. (6) 기 타 당나라의 운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전라도 순천에서 군사를 원조받을수 있을까? 일식 최적관측위치가 신라 초기에는 양자강(揚子江) 이남으로 나타난다! 지명(地名) 등등.... (7) 삼국사기(三國史記)만이 동신라(東新羅)와 서신라(西新羅)를 명확하게 구분짓고 있다. 민족사의 로마」 新羅를 다시 본다(1) (4/5) (2002.03.06) 조선일보 權寧弼 角杯의 특징을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첫째 지도층 인물과 연관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대관식 때 왕의 머리에 붓는 기름을 각배에 담았습니다. 신라, 가야의 왕족 무덤에서 각배가 발견되고 있다는 걸 봐도 각배와 지도자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둘째, 각배와 물과의 관계입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각배에 샘물이 나오게 하는 마력을 지닌 페가수스를 조각했으며 신라에서는 昔脫解가 東岳에서 샘물을 찾을 때 각배를 사용했습니다. 金秉模 각배는 유목민족이 「폭탄주」를 만드는 데도 사용된 것 같습니다. 몽골에 가니까 馬乳酒(마유주)를 담은 양푼에다 알코올 도수 100%의 독한 蒸溜酒(증류주)인 「사밍」을 채운 작은 은잔을 던져 넣어 그것을 돌려가며 마시는 풍속이 남아 있더군요. 옛날에는 은잔이 아니라 각배에 「사밍」을 담아 馬乳酒가 든 가죽 포대에 집어넣었고 합디다. 어떻든 우리의 「폭탄주」 제조 방식과 매우 비슷합니다. 權寧弼 각배는 세계적으로 지중해, 근동, 중앙아시아, 북중국, 신라, 가야, 일본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각배를 사용하는 풍습은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스키타이족, 흉노족으로 연결되는 스텝지역의 기마민족 간의 접촉과 민족이동 과정에서 전파된 것 같습니다. 사회 신라·가야 지역에선 角杯를 사용했는데, 고구려·백제 지역에선 角杯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金秉模 그것은 아마도 고구려·백제 왕족과 신라·가야 왕족의 고향이 달랐기 때문이겠지요.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은 대흥안령산맥 동쪽에 살던 夫餘系(부여계)이고, 신라와 가야의 지배층은 대흥안령산맥 서쪽에서 알타이산맥에 이르는 지역의 출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잡한 辰韓- 新羅의 주민 형성 사회 신라는 辰韓(진한) 12개국 중 하나인 斯盧(사로) 6촌이 합쳐 생긴 나라입니다. 따라서 신라인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辰韓人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면 됩니다. 權寧弼 三國志 東夷傳에는 辰韓 사람들이 중국 秦나라 땅에서 이주해 왔으며 馬韓 사람과 말이 달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秦은 戰國時代 7雄의 하나로 나머지 여섯 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221년에 中原을 통일했습니다.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秦의 始皇帝(시황제)는 북방 흉노족의 남침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고 咸陽(함양)에다 阿房宮(아방궁)을 지었습니다. 三國志에 기록된 「괴로운 부역」이란 바로 토목, 건축에 동원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신라의 주민 형성 과정은 4중, 5중으로 복잡한 것 같습니다. 申瀅植 우리 史書에도 신라의 인구 구성에 대해 좀더 자세한 기록이 있습니다. 三國史記 신라본기 赫居世 條에 보면 「이곳(서라벌)에는 오래 전부터 朝鮮의 유민들이 산 계곡에 나누어 살아서 여섯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또 유리왕 14년(서기 37년) 條에는 「고구려 無恤王(무휼왕=大武神王)이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 그 나라(낙랑) 사람들 5000명이 (신라에) 투항해 와서 6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金秉模 여러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들을 종합해 보면 신라인의 구성 과정은 여러 민족이 여러 시기에 걸쳐 혼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한-신라 지역에는 先史時代부터 살면서 수많은 고인돌을 남겨 놓은 토착 농경인들, 기원전 3세기중에 秦나라의 학정을 피해 이민해 온 사람들, 기원전 2세기에 이주해 온 古朝鮮의 유민들, 고구려에게 멸망당한 樂浪(낙랑)에서 내려온 사람 등입니다. 사회 고구려의 시조 朱蒙(주몽)은 東夫餘에서 망명한 인물이고, 百濟의 시조 溫祚(온조)는 朱蒙의 아들임을 자처했던 만큼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은 한 집안인 夫餘系(부여계)입니다. 반면에 신라의 왕족인 朴, 昔, 金의 3姓으로 그 出自는 다양합니다. 金秉模 신라 5대 왕인 婆娑(파사) 이사금은 페르시아와 無關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페르시아를 한자로 적으면 波斯(파사)입니다. 이 정도면 親緣性(친연성)이 매우 깊은 것입니다. 또 8대 왕인 阿達羅(아달라) 이사금은 흉노계로 보입니다. 東로마제국을 침략하여 엄청난 양의 금을 조공품으로 받아낸 훈族(흉노족)의 정복왕 아틸라와 이름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틸라는 阿達羅의 후손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것을 무시하면 古代史 못 합니다. 천여년전 진나라 말엽에 방사 한종(韓終)의 인솔하에 초(楚)나라 라(羅)씨와 로(盧)씨 씨족 3천여명이 한반도 동남부로 이주했으며, 이들이 진한(辰韓)과 변한(弁韓), 그리고 후의 신라국을 건립했다는 가설이 중국 학자에 의해 제기됐다. 중국 우한(武漢) 소재 중난민쭈(中南民族)대학 남방소수민족연구소의 양완쥐안(楊萬娟) 교수는 2천년 전을 거슬러 올라 역사적 문헌고증을 한 결과라며 이같은 가설을 제기했다. 그는 또 당시 한반도에 건너갔던 방사 한종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웅(桓雄)의 원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두고 한국과 중국이 역사왜곡 논쟁을 하는 와중에 나온 이같은 가설은 지방에 있는 한 중국인의 주장이라 하지만 향후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양 교수의 주장은 현지 신문인 호북일보(湖北日報)가 9일자에 보도했다. 양 교수의 주장을 요약하면 고대 삼국의 하나인 신라의 뿌리는 현재 중국 후베이(湖北)성 샹판(襄樊.고대에는 襄陽과 樊城)에서 비롯된다는 것. 양 교수는 우선 한국의 지명(주로 동부지역) 가운데 많은 곳이 현재 후베이성에 존재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어떤 역사적 연관'이 있지 않을까 호기심을 갖게됐다고 한다. 해당 지명은 강릉(江陵), 양양(襄陽), 단양(丹陽), 한강(漢江), 태백산(太白山)이다. 양 교수는 올 6월 단오제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한국 강원도 강릉지방을 방문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북방은 주(周)나라, 남방은 초(楚)나라가 있었고 초나라 건국지는 단양(丹陽)으로 한강(漢江) 상류지역이다. 초나라는 그후 세력을 넓혀 강릉(江陵)으로 도읍을 옮겨 단양 일대를 지배했다. 한강은 현재 산시(陝西)성 친링(秦嶺) 남쪽에 있는 태백산(太白山)에서 발원해서 동남쪽으로 흘러 우한에서 창장(長江.양자강)으로 합류하는데 그 하류지역이 한양(漢陽)이라고 양 교수는 지적했다. 양 교수는 또 단군설화의 중국 연관성도 주장했다. 한국 단군설화가 숭배하는 토템이 곰과 호랑이인데 초나라 토템 역시 곰이라는 것이다. 초나라 왕족 성은 슝(熊.곰)이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다 본 두 지역(三危와 太白)이 오늘날 쓰촨(四川)성과 간쑤(甘肅)성 교차지에 있는 민산(岷山)과 한국 강원도 태백산을 가리킨다고 양 교수는 주장했다. 그는 특히 일각에서 주장하는대로 `태백이 묘향산이라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지적했다. 환웅이 천부인(天符印.거울, 칼, 방울) 3개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것은 무속신앙의 무구를 가리키는 것인데 초나라는 무속신앙이 성행했고 초나라 후예 묘족(苗族)은 아직 각종 무속신앙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또 묘족은 지금도 단오절에 마늘과 쑥으로 잡귀를 쫓는다고 한다. 양 교수는 이러한 것이 단군신화가 고대 초나라 문화와 일맥상통하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다시 말해 단군신화와 한국의 일부 지명(주로 강원도)이 중국 고대 초나라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가설이다. 양 교수는 초나라 사람들이 한반도에 조직적으로 이주하게 되는 과정은 한종(韓終) 이라는 방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진시황 때 서복(徐福)이라는 방사가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간 것처럼 당시 한종은 한국의 강원도와 경상북도 접경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때 데리고 간 사람들이 라(羅)씨족과 로(盧)씨 씨족이다. 라국(羅國)과 로국(盧國)은 현재 후베이성 샹판 근처에 있었는데 기원전 690년 초나라에 정복되어 각각 라(羅)씨와 로(盧)씨성을 하사받고 남쪽으로 강제 이주당해 오늘날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와 후난성 펑황(鳳凰)현 일대에서 속국으로 지냈다고 한다. 양 교수는 이런 내용을 좌전(左傳) 등 고문헌에서 찾아냈다며 자신의 주장을 이어갔다. 진시황 말기 한종이라는 방사가 이들 라국과 노국 사람 3천여명을 데리고 한국으로 건너갔으며 이들이 한국에 정착해서 각각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을 세웠고 진한이 신라(新羅.새로운 라국)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라의 초기 국가명칭이 `사로국'인 것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다. 양 교수는 이 부분 논증과정에서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 한국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을 인용하고 있다. 한국(韓國)이라는 명칭도 이런데서 연유됐다고 양 교수는 주장한다. 특히 신라가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한 것도 진나라 말기 중국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한국의 라(羅)씨와 로(盧)씨 본가는 후베이성 샹판 지역이라고 양 교수는 주장한다. 일부에서 한국의 로씨의 본이 산둥(山東)성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덧붙였다. 산둥에 세운 나라(盧子國)를 세운 사람들은 한반도로 건너가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결국 이런 가설로 인해 신라 문화의 원류는 초나라 문화 특히 라(羅)와 로(盧)씨 문화이고, 그 결과 현재 한국의 경상북도 북부나 강원도 일대에 초나라 지명이 그대로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 양 교수의 결론이다. {연합뉴스} 기사 중에서... 그리스-알타이-신라를 이어 준 汗血馬의 질주 新羅의 신화·알타이의 눈보라·무덤 속의 女戰士·曲玉·금관·積石목곽분·싸랑·솟대·샤먼… 그 속에 감춰진 우리의 原形과 만나다 民族의 뿌리를 찾아서 비로소 피부로 접한 알타이 文化 알타이는 산 이름이다. 동시에 산맥 이름이며, 그 주변 지역의 이름이다. 중앙아시아 내륙지방의 고원지대에 알타이산이 솟아 있고 알타이 산맥이 東西로 흐른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카자흐인, 퉁구스인, 브리야트인, 에벤키인, 야쿠트인, 몽골인 등이 넓은 의미의 알타이족들이다. 이들의 각종 언어는 모두 알타이어족에 속하며 한국어와 일본어와도 깊은 親緣(친연) 관계에 있다. 나의 알타이에 대한 관심은 박시인 교수가 소개한 알타이 신화 때문이었다. 朴교수는 알타이 지역을 답사해 보지 못한 채 2차 자료만 가지고 알타이 문화를 소개하였지만, 그 내용에는 한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만 하는 것들이 수두룩하였다. 이를테면 영특한 새로서 까마귀의 기능이라든지, 씨족의 조상이나 최초의 왕이 등장하는 장소가 「신령스러운 나무(神樹)」 밑이라는 것 같은 내용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三足烏(삼족오)나, 鷄林(계림:경주)에서 발견되는 김알지 설화 같은 것이었다. 그런 내용을 읽어 가면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어는 알타이 계통의 언어다. 왜 가까운 중국어와 비슷하지 않고 저 멀리 알타이와 가깝단 말인가? 이런 소박한 의문에 대한 역사적·인류학적 해답이 없던 시절은 의외로 오래 계속되었다. 1990년 이후 러시아가 문호를 개방하고 나 같은 인문학 연구자들이 광활한 시베리아와 스텝지대를 자유롭게 탐사할 수 있게 된 연후에야 비로소 글자로만 접하던 알타이 문화를 피부로, 肉聲(육성)으로 만날 수 있었음은 참으로 커다란 행운이었다. 스키타이 女戰士의 모자 알타이 남서쪽에 살고 있는 카자흐족의 민속신앙에 위대한 샤먼의 탄생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 즉, 아기를 낳고 싶은 여인이 커다란 나무 밑에서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한다. 그 간절한 소원이 하늘의 절대자에게 전달되면 새들이 날아와 나무 위에 앉는다. 그러면 그 여인이 잉태한다. 엑스터시 과정이다. 그런 과정으로 태어난 아이가 커서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 나무 - 새- 엑스터시 잉태- 위대한 샤먼의 탄생이라는 圖式이다. 그래서 알타이 문화권에서 태어난 유능한 지도자는 모두 아버지가 없다. 한국사에서도 탄생과정이 신화로 처리되어 있는 사람이 씨족의 始祖(시조)나 왕으로 등장한 경우가 많다. 신라의 朴赫居世(박혁거세)와 김알지의 부모가 불분명하고, 昔脫解(석탈해)와 金首露(김수로)도 누구의 후손인지 모른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동쪽 이시크(Issyk) 고분에서 발견된 기원전 3세기경 사람인 스키타이 여자 戰士(전사)는 금으로 만든 솟대를 모자에 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신라 금관의 디자인과 똑같아서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알타이에 발굴되어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붙은 여자 귀족의 높이 올린 머리장식에서 금으로 만든 새가 여러 마리 달려 있어 솟대에도 여러 가지 디자인이 있음을 보여 준 사실이다. 신라 자비마립간의 여동생인 鳥生夫人(조생부인)은 이름도 새가 낳은 부인이라는 뜻이지만 그 여인의 직업도 의례를 관장하는 祭官(제관)이었다. 신라와 유사한 민족구성과 문화양상을 지닌 弁辰(변진)에서 大家(대가)가 죽으면 대문에 새의 날개를 달았다고 한다(魏志 東夷傳).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인 실물로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청동 조각품에 나무 위에 새들이 앉아 있는 것들은 한둘이 아니고, 경주 瑞鳳塚(서봉총)에서 발굴된 신라 금관은 여성용이었는데, 머리 부분에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었다. 하늘나라로 영혼을 인도하는 새들임에 틀림없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역사 속의 새는 아마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해(太陽)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일 것이다. 신라 왕족들의 무덤 형식은 積石墓(적석묘·Cairn)로서 기마민족의 전통이다. 통나무집에다 시신과 부장품을 집어넣고 막돌로 둥글게 덮는 모양이다. 그 문화를 스키타이-알타이式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된다. 금관의 제작시기는 5~6세기로서 주인공들은 모두 金씨계 인물들이다. 金씨계의 조상은 김알지이다. 그는 계림에서 발견한 상자 속에 있던 어린아이였다. 같은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도 하늘에서 날아온 말이 놓고 간 알(卵)에서 탄생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한국의 신화체계는 하늘에서 成人(성인)으로 내려와 통치자가 되는 고조선의 桓雄(환웅)이나 부여의 解慕漱(해모수)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알이나 상자(櫃)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으로 구별된다. 전자를 天孫(천손)신화라 부르고 후자를 卵生(난생)신화라고 부른다. 아시아에서 천손신화는 기마민족인 스키타이, 알타이, 몽골족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농경민족인 대만의 빠이완족, 타이족, 자바족, 인도의 문다족의 사회에서 발견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즉 천손신화는 北아시아의 기마 유목민족들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南아시아의 농경민족들의 신화이다. 漢字로 금(金)이라는 뜻은 「쇠(鐵)」의 뜻과 「순금」의 의미도 있지만 역사에 등장한 신라 김알지로 시작되는 「김」은 순금의 뜻이다. 따로 이야기하겠지만 김(金)이라는 말의 뜻이 기마민족의 언어인 알타이어로 「금(Gold)」이라는 뜻이다. 멀리 터키어에서부터 퉁구스어, 브리야트어, 몽골어에 이르기까지 알트, 알튼, 알타이 등이 모두 알타이어족의 공통적인 의미로 금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라 金氏族들은 일단 알타이 문화지역 출신이라는 심증은 충분하다. 신라인의 이중 구조: 북방+남방族 신라 金씨의 조상인 김알지의 이름도 알타이 계통 사람이라는 암시로 여겨진다. 알지-알치-알티로 어원 추적이 가능하므로 김알지의 이름은 알타이 출신 金씨라는 뜻으로 Gold-Gold라는 뜻이 중복된 흥미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김알지가 알타이 계통의 인물이라는 것은 그의 탄생설화가 얽혀 있는 곳이 鷄林(계림)으로 알타이적인 영웅탄생에 나무(神木)와 직결되어 있고, 그의 후손들의 무덤인 경주의 신라 왕족들의 積石木槨(적석목곽) 형식의 무덤들은 북방 기마민족들의 매장 전통을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김알지는 계림에서 발견된 상자 속에서 동자의 모습으로 발견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상자 속에서 동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난생신화의 구조이다. 나무, 즉 神木에서 주인공이 태어난다는 내용은 분명히 기마민족인 알타이적 천손신화인데, 정작 태어나는 순간은 남방 농경민족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으로 분장되어 있다. 왜 그럴까? 기마민족이면 떳떳하게 기마민족식 (알타이 민족의 신화인 하느님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天孫신화의 주인공이라고 하지 못하고 왜 구차하게 농경인들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처럼 탄생하였다고 꾸며져 있을까? 여기에 초창기 신라의 통치계층 인구들의 말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경주지방에는 선사시대부터 농경인 인구가 살고 있었다. 이는 경주 지역의 수많은 고인돌이 증명하고 있다. 그 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소수의 기마민족이 이민 왔다. 신라인들은 삼국지 위지 東夷傳(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는 辰韓(진한)족이다. 중국 서북쪽의 秦(진)나라에서 노역을 피하기 위하여 이민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다. 다수의 토착 농경인들 위에 통치자로 군림하기에는 인구가 모자랐다. 하는 수 없이 여러 代(대)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드디어 미추왕(麻立干) 때 처음으로 金氏系 인물이 최고통치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때 소수의 기마민족 출신 金氏系 인물이 다수의 농경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농경인들처럼 난생신화의 주인공이라고 분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궤짝 속에서 동자로 발견된 주인공이 북방계 토템인 신령스러운 나무, 즉 계림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꾸몄을 가능성이 짙다. 현대에 와서도 각종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후보자가 평소 믿지도 않던 불교의 부처님 點眼式(점안식)에도 참석하고, 한 번도 가 보지 않던 시장에 가서 아주머니들의 손을 붙잡는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치권으로 부상하려는 사람들이 별의별 변신방법을 다 동원하는 현상은 똑같다. 알타이 고분에서 미라로 발견된 동양계 여인의 盛裝한 모습에서 올린 머리에 장식된 순금제 새들이 있다. 이 새들도 주인공의 탄생과 죽음에 깊이 관여하였던 영혼의 새들로서 여주인공의 혼을 天上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신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금관의 이마 부분에 커다란 새의 날개 한 쌍(鳥翼形 裝飾)이 달려 있는 것과 똑같은 고대인의 영혼관이다. 南아시아적 생활+北아시아적 정신 얼마 전까지 나에게는 큰 근심이 있었다. 내가 대표로 되어 있는 유네스코 산하 국제박물관협의회(ICOM·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의 한국지부에서 세계총회를 서울로 유치하는 데 성공한 뒤였다. ICOM 총회는 3년에 한 번씩 개최되며 한 번은 박물관 문화가 일찍 발달한 유럽에서 다음 한 번은 非유럽 국가에서 개최해 왔다. ICOM의 회원국은 145개국이고 등록회원수가 평균 1만7000명이다. 총회에 참석하는 인원은 평균 2000~2500명으로 주최도시가 얼마나 문화적 흡인력이 있느냐가 최대의 관건이고, 주최 측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홍보하느냐에 따라 참가인원이 크게 달라진다. 2004년의 서울 대회는 ICOM 100여 년의 역사상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행사인 만큼 세계의 수많은 박물관 전문가들이 지대한 관심을 표해 오고 있어서 어느 대회보다 큰 규모의 행사가 될 전망이다. 그런데 세계대회를 하려면 본부 집행위원회가 인정하는 로고를 디자인하여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준비위원들은 지난 몇 달 동안 고민을 하였다. 아시아에서 처음 하는 행사이니까 로고의 내용을 아시아인 공통의 상징으로 할까, 아니면 서울市에서 개최하니까 서울의 상징인 북한산, 청와대, 남대문에서 로고를 딸까. 또는 이번 대회의 주제가 무형문화재이니까 탈춤이나 사물놀이를 내용으로 하느냐를 놓고 갑론을박하였다. 사람마다 주장이 그럴듯하고 어느 아이디어 하나 버릴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위에 열거된 상징들은 이미 다른 행사에서도 한두 번 이상 사용되었음직한 것들이라는 공통성이 있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명언이다. 한국 토착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문화유산으로는 농경문화의 상징으로 고인돌이 있고, 北아시아인들의 敬天(경천)사상을 상징하는 솟대(Totem Pole)가 있다. 한국에 수만 개나 남아 있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중에 나타난 南아시아 지역의 벼농사 기술자들 사회의 매장풍속이다. 반면에 솟대는 알타이, 야쿠티아, 바이칼, 몽골 지역 사람들의 神鳥思想(신조사상)이 그 뿌리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국인의 경제방식은 南아시아적인 농경생활이었다. 그러나 정신세계는 北아시아적인 敬天사상이 지배해 왔다. 솟대 위에 앉은 새는 지상의 인간들이 하늘에 계신 절대자를 향하여 祈福(기복) 행위를 할 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媒介者(매개자)이다. 그래서 端午祭(단오제) 때 솟대를 세우고 솟대 위에 새를 깎아 앉힌다. 새가 인간의 소원을 하늘에 전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神鳥사상이 퍼져 있는 알타이 문화권 전역에서 고루 발견된다. 카자흐족, 퉁구스족, 위구르족, 브리야트족, 몽골족, 한국, 일본의 민속이나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는 반드시 새가 등장한다. 솟대를 로고로 채택한 까닭 중국 고전 山海經(산해경)에 기록된 少昊國(소호국)에서는 모든 공경대부가 새(鳥)일 만큼 새들은 東아시아의 신화 속에서 중요한 주인공들이다. 신라 金氏 왕들의 조상인 김알지가 계림에서 발견되었을 때 온갖 새들이 노래하였다고 하며, 고구려 고분벽화의 태양 속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가 있음은 너무도 유명하다. 일본 古墳時代(고분시대)의 벽화에는 死者(사자)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작은 배(船)의 항해사로 새들이 앉아 있다. 나라(奈良)의 후지노키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관에는 십여 마리의 새들이 앉아 있다. 일본 神祠(신사)의 입구를 지키는 도리(鳥居: 門)도 새들이 앉는 곳이다. 이 모두가 알타이 문화권의 오랜 전통으로부터 현대 민속으로 계속되고 있는 솟대의 원형들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神鳥사상은 뿌리가 깊은 것이고 동북아시아 전체에 흐르고 있는 문화의 맥이다. 한국적인 것이 틀림없지만 중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로 도도히 흐르는 문화의 저류를 민속행사에 등장하는 솟대를 통하여 실감한다. 이처럼 새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있는 중요한 토템이자 東아시아 여러 민족의 공통적 토템이기에 아시아에서 처음 개최되는 세계 박물관 총회에 로고로 사용해도 격조에 맞을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로고는 단오제의 솟대를 기초로 하여 도안되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르기 직전의 흰색 오리 두 마리가 앞뒤로 앉아 있는 모습이 탄생하였다. 최선호 화백의 작품이다. 알타이산 북쪽은 고원지대로서 예니세이江의 발원지이다. 옛날부터 유목민들이 양(羊)을 기르며 평화롭게 살고 있는 땅인데 철기문명이 확산되면서 여러 민족이 드나들게 되었다. 지금 이 지역의 주민들은 러시아의 영향으로 백인들과 황인종이 섞여 있지만, 옛날에는 아시아계 몽골족 들이 이 땅의 주인이었다. 알타이 기사의 부적-曲玉의 의미 그 증거는 그림으로 남아 있다. 루덴코라는 학자가 이 지역의 파지리크라는 곳에서 2500년 전에 만들어진 고분들을 발굴하여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이 보고서는 1953년 러시아어로 출판되었고 1970년에야 영어로 번역되었다. 필자가 이 고분들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적석목곽묘이었기 때문이다. 신라 왕족들의 무덤보다 시간적으로는 약 900년 가량 빠른 것들이지만, 어쩌면 그렇게 구조가 같은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즉, 통나무집에 사람과 유물이 들어 있고 그 위에 막돌을 두껍게 덮어 놓은 형식이다. 어느 민족이든 고분 구조는 매우 보수적이어서 좀처럼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고분의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은 주인공들이 생전에 유사한 사유세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어쩌면 종족적인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라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신라인과 파지리크人과의 관계에 대하여 매우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다. 파지리크 5호 고분에서 나온 물건 중 통나무집 벽에 걸어 놓았던 모직 담요 펠트(Felt)가 있다. 수놓아 그린 그림에 두 사람이 보인다. 왼쪽 사람은 의자에 앉았는데, 동양인 얼굴에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이고 푸른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발굴자는 이 사람을 여성으로 보고 있다. 머리에는 가죽 같은 재질로 만든 관을 쓰고 있다. 왼손에 구불구불한 가지가 많이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어서 직업은 샤먼(巫師)이라고 해석되었다. 오른쪽 사람은 말 위에 앉은 남자 기사인데 튜닉형의 半두루마기를 입고 곱슬머리에 콧수염을 감아 올린 아랍인 型이다. 목 뒤로 날리는 스카프로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말은 다리가 긴 아라비아 계통의 말로서 옛날 漢(한) 武帝(무제)가 흉노를 격퇴하기 위해 간절하게 원했던 汗血馬(한혈마)이다. 두 사람 중에 샤먼은 크게 그렸고 기사는 상대적으로 작은 비례로 그려져 있다. 고대 그림 기법으로 지체가 높은 사람은 크게, 낮은 사람은 작게 그려진 것을 감안하면 동양계 여인이 그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주인공임을 알 수 있고, 아랍인 기사는 아마도 멀리서 온 방문객이거나 용병쯤으로 해석된다. 내가 이 그림에서 눈여겨본 부분은 말에 달려 있는 曲玉(곡옥)이었다. 곡옥은 굽은 옥으로 커다란 머리와 가는 꼬리로 구성되고 머리 부분에 구멍이 뚫려 끈을 꿰어 매달 수 있는 장신구이다. 대부분 푸른 玉 제품이고 때로는 金製 또는 石製도 있다. 신라 왕족의 금관, 목걸이, 허리띠에 여러 개 달려 있어서 신라미술품 연구에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물건이다. 신라 왕족들이 왜 曲玉 장식을 좋아했는지, 왜 曲玉이 동물의 태아 때 모양을 하고 있는지, 사람마다 제각기 의견들을 제시하였다. 어떤 이는 맹수의 발톱 모양이니까 유능한 사냥꾼의 장식이라고 그럴듯한 해석을 하였고, 또 다른 이는 초승달 모양이므로 月神(월신)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철학적 해석을 시도한 적도 있다. 어느 의견도 1970년에 나온 S. 루덴코의 파지리크 보고서를 보지 못하고 내린 추측들이었다. 한국고대사에서 曲玉은 신라, 가야에서만 유행하였다. 고구려, 백제에서는 인기가 없는 디자인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曲玉의 의미를 연구할 가치가 충분한데, 한국 문화의 영향권 안에 있던 일본 이외의 외국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었으므로 비교연구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추측성 의견들만 난무하였었다. 파지리크의 曲玉은 기사가 탄 말의 가슴에 한 개, 콧잔등에 한 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보고서의 그림으로는 그 색깔이 코발트색으로 그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이 바뀐 레닌그라드의 에르미타지(Hermitage) 박물관에서 내가 본 실물은 신라의 曲玉과 같은 색인 초록색에 가까웠다. 신라와 그리스는 馬로 연결 曲玉의 의미는 지루한 추적 끝에 生命(생명)의 상징이라고 결론이 났다. 그리스에서는 이런 모양의 장식을 가지(Egg Plant)라고 부르고, 씨(種)를 잘 퍼뜨리는 열매로 규정하고 있다. 신라에서 왕으로 등장한 사람의 친부모의 금관에서만 曲玉이 달려 있는 현상도 曲玉의 의미가 多産(다산)과 관계 있는 것으로 쉽게 이해된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곡옥으로 장식한 말을 타고 있는 남자가 파지리크가 있는 알타이 지역의 원주민인 몽골로이드(Mongoloid)가 아닌 이란-아랍계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2500년 전 알타이 지역을 방문한 아랍계 기사는 누구인가? 혹시 黑海(흑해)지역에서 맹주 노릇을 하던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족은 아닐까. 그리스와 교역하며 화려한 그리스 문화에 눈이 부셔 엄청난 생필품을 주고 그리스의 금·은·옥 제품을 다량으로 구입하던 바로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후에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투스가 만난 용맹하고 민첩한 스키타이족이었다면 그 사람의 말에 장신구로 달려 있는 曲玉은 그리스에서 처음 디자인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고 보니 신라 유물 중에 동물 뿔 모양의 술잔인 角盃(각배)도 그리스, 스키타이, 알타이 지역에서 고루 발견되고 경주에서 발견된 기와에 그려진 날개 달린 天馬(천마)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페가수스(Pegasus)라고 해석해야 될 판이다. 그렇다면 신라인과 그리스인은 비록 時空을 달리하였지만 스키타이-알타이를 통한 말의 문화로 단단히 연결되었던 것 같다. 이쯤 되면 나도 머리가 복잡해진다. 도대체 고고학이라는 학문은 고금의 동서양을 떠도는 이상한 구름에서 문득문득 내리는 비와 무지개를 찾는 작업인 듯하여서이다. 에르미타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의 주인공인 기사여, 그대는 왜 푸른 곡옥으로 장식한 말을 타고 오셨는가? 파지리크에 왔더니 그곳 샤먼이 선물로 알타이 원산의 옥으로 깎은 曲玉을 부적 삼아 선물로 준 것인가? 이시크의 적석목곽묘에서 발견된 女戰士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인 알마티 동쪽으로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이시크(Issyk) 호수가 있다. 중국의 天山山脈(천산산맥)의 한 자락이 남북으로 달리는 끝자락에 스키타이 마지막 시기의 고분군이 있다. 이 지역은 고도가 높아서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만년설이 녹은 물이 흘러내려 이시크澔로 들어간다. 스키타이 왕족들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땅에다 조상을 모셨다. 이시크는 알타이 남쪽 天山산맥의 서쪽 끝자락에 있다. 현재는 카자흐스탄의 영역이고, 옛날에 스키타이족의 마지막 활동 무대이다. 스키타이 문화는 BC 8세기부터 BC 3세기 사이에 꽃피웠는데 이시크 시기는 BC 3세기에 해당된다. 알타이산의 북쪽 고원인 파지리크 문화보다 약 3세기 늦은 시기이다. 이시크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쿠르간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 몇 개를 러시아系 카자흐인 고고학자 아키세브 교수가 발굴하였다. 유물로는 순금 장식으로 덮은 갑옷을 입은 청년 戰士(전사)가 발견되어 「황금인간」이란 별명이 생겼다. 이 황금인간은 최근 프랑스 과학자들에 의하여 17세 전후의 여성으로 판명되어 또 한 번의 충격을 주었다. 남성 중심의 기마민족 사회에서 최고 통치자급의 의상과 유물을 갖고 있던 사람이 여성이라면 이 여성의 생전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실로 많은 연구과제를 던지고 있는 인물이다. 알타이 지방의 여러 곳을 탐사하던 중 알아낸 귀중한 한마디 말이 바로 「사랑」이란 단어의 뜻이다 한국 문학의 영원한 주제이자 모든 유행가 노랫말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말의 뜻은 의외에도 알타이 언어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었다. 알타이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로 세계적인 악명을 날리고 있다. 몽골 루트, 시베리아 루트, 중국 루트가 있는데 필자는 몽골·시베리아 루트는 과거에 탐사하였고 마지막으로 중국 루트를 탐사하게 되었다. 1996년 여름, 모험심에 가득 찬 소년들처럼 동문 임상현, 김두영, 김명용 제씨가 필자와 함께 항공편으로 실크로드(비단길)의 오아시스인 신강 위구르족 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에 도착하였다. 전세 낸 9인승 마이크로 버스에 몸을 싣고 북쪽으로 800km나 펼쳐진 중가리아 사막을 17시간이나 걸려 건너갔다 알타이는 산의 이름이다. 알타이산에서 동쪽으로 내달리는 산맥 이름이 알타이 산맥이고, 그 북쪽의 고원지대가 알타이 지방이다. 알타이라는 말은 금(Gold)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알타이 산맥 중에 해발 4974m의 만년설을 머리에 쓴 友誼峰(우의봉·중국식 이름) 밑에 마을이 있었다. 하늘 아래 첫 번째 마을이었는데, 이름도 아르타이(阿勒泰)이다. 그곳에서 알타이어를 사용하며 살고 있는 유목민 카자흐족 마을에서 인류학 조사를 하던 중 듣게 된 이야기가 바로 사랑 이야기이다. 유목민들에게는 귀한 손님에게 부인을 하룻밤 빌려 주는 풍습이 있다.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주인 남자는 부인을 텐트 속에 남겨 둔 채 집을 나가는 풍습이다. 인류학 용어로 貸妻婚(대처혼)이다. 어느 날 카자흐족 마을에 중국인 畵家(화가) 한 사람이 오게 되었다. 그 마을의 絶景(절경)인 깊은 계곡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였다. 밤이 되자 카자흐족 남편은 손님 대접을 잘 하려는 풍습대로 텐트 속에 손님과 자기 부인을 남겨 둔 채 집을 나갔다. 남겨진 두 남녀는 좁은 텐트 속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두 남녀의 잠자리 사이에는 베개를 하나 놓아 도덕적인 경계를 삼았다. 아무도 그 경계를 침범하지 않은 채 며칠이 흘렀다. 그리고 "九州之設東至吉林西至廣 跨海蓋而包朝鮮幅員式擴矣"라고 하였는데 "구주지설동지길림서지광 과해개이포조선폭원식확의" 길림 광령이 현재도 있고 광령 근처에 철령 개원이 있으니 신라의 서쪽은 "개원 철령 광령"으로 이어지는 선을 경계로 나타내고 동쪽은 길림으로 이어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18세기에도 있는 지명이 현재 요하의 심양을 중심으로 동북쪽에 철령과 개원이 있고 서쪽에 광령이 북진(北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北鎭=廣寧) 『三国志魏書』『後漢書』『晋書』辰韓伝 【有似秦人】【有似秦語】【言語有類秦人】 『梁書』『北史』新羅伝 【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 백제는...그 나라가 왜국과 가까워, 문신하는 자가 있다....그 말은 "하"(중국을 의미, 다시 말해 중국어)가 뒤섞여 있으니 또한 진한의 남은 풍속이다. //신라는 앞서 원래 진한의 종(족)이다. 진한(辰韓)은 또한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서로 만리나 떨어진 곳에서 진(秦)나라때 망명자들이 역을 피해 마한으로 오니, 마한이 그 동쪽 땅을 주어 살게 하니 고로 진(秦)나라 사람들이 나라 이름을 진한(秦)이라 했다고 서로 전해온다. 그 말과 물건 이름이 중국인과 비슷하다. |
출처 : ◆--◀ 진실과 미스테리 ▶--◆
글쓴이 : 진아지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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