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그리움/진도문화

[스크랩] 우리고장 진도의 어제와 오늘(심심할때)

麗尾박인태행정사 2007. 8. 19. 22:13
 

 



 

  진도군



         목   차


1. 민속의 보물창고



2. 고려 인종 때부터 유배지로 쓰인 땅



3. 바깥 사람들한테서 입은 숱한 해



4. 울돌목에 세워질 허궁다리



5. 배 타는 일의 앞날도 어둡지 않다.



6. 구기자 재배에 보배로운 땅



7. 비자와 고니와



8. 진돗개의 전설과 역사



9. 진도의 개가 다 진돗개는 아니다



10.삼별초의 얼이 서린 곳



11. 옛빛이 도드라진 남도 석성



12. 바다가 갈라진다.



13. 뽕할머니 전설 얽힌 영등 사리





민속의 보물창고



진도 땅에서는 낯선 남자가 길을 가면 밭을 매던 아낙들이 들고 있던 '멱구


리'를 길 가운데에 턱 걸쳐놓아 가는 길을 막았다. 그리고 그가 노래를 한 가


락 부르면 그것을 치워 앞길을 열어 주나 만일에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 빈정


대며 놀려대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한 시대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가마를 타고 가던 사람 둘이 좁은 길에서 맞닥뜨리면 마치 외나무다리 위에


서 만난 염소들처럼 가마 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이 가마 싸움은 무턱대고 힘


으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가마에 타고 있던 주인이 길로 내려와서 처음


에는 서로 시짓기로 겨뤘고, 그 실력이 엇비슷하면 다시 노래 부르기를 했고,


그것마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우면 그제야 힘으로 싸웠다고 한다. 그런가 하


면 진도 사람치고 그림이나 글씨 못하는 사람 없고 목청 트이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도 있다.


풍류와 멋을 지니고 있는 고장답게 진도 땅은 발길 닿는 곳마다 '민속의 보


물 창고'임을 실감케 해 준다. 흔히 이순신 장군의 전술과 얽혀 있는 강강술래


의 터가 해남군 우수영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진도 사람의 말에 따르면 그


터는 울돌목 가까이에 있는 이 군의 군내면 녹진리의 망금산이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이 섬의 민속 문화로는 강강술래 말고도 많이 있다.


진도 들노래, 진도 아리랑, 진도 씻김굿, 진도 초분, 진도 도깨비굿, 진도 박


첨지굿, 진도 살랭이가 있거니와 보유한 기능이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사람만 따져 보아도, 진도 강강술래에 한 사람, 진도 들노래에 두 사람, 진도


씻김굿에 세 사람이나 된다. 진도 사람의 이런 기질과 분위기는 진도 땅의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고려 인종 때부터 유배지로 쓰인 땅



일찍이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던 이숙함은 진도를 두고 "섬됨이 아득히 떨어


져 있는 천부의 땅으로 지름이 오륙십리쯤이며 그 사이의 산은 높고 물은 깊


다. 땅이 또한 기름지고 목장의 말은 비단같이 들을 덮고 귤나무가 숲을 이루


니 그야말로 보물의 광이요 재물의 곳집으로 남쪽 고을의 으뜸이라"고 표현했


다. 그의 말마따나 진도는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고 보배로운 땅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로 이 땅은 역사의 굽이마다 한이 서려 있는 곳이 되고


말았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 때문에 오랫동안 유배지로 이용되었


고 보배로운 땅이라는 점 때문에 변란에 휩쓸리기 일쑤였다.


진도가 유배지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고려 시대 중기부터였다. 고려 17대


임금인 인종 때에 이자겸의 아들이었던 공의가 반란을 일으키려던 이자겸 때


문에 이곳으로 유배되었는데 그가 바로 진도 땅에 최초로 유배를 온 사람이


었다. 그 뒤로 18대 임금인 의종 때에 무신의 난을 일으켰던 정중부가 의종을


거제도로 추방하면서 태자인 왕기를 이곳으로 추방했으니, 그가 진도 땅에 둘


째로 유배온 사람이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진도 땅이 더 자주 유배지로 쓰였는데, 특히 14대


임금인 선조의 아들 둘과 상궁 이 씨로 알려진 여자가 진에 귀양왔었음은 눈


길을 끈다. 선조의 둘째아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 당쟁의 소용돌이 속


에서 그의 형인 임해군을 이 군 임회면 폐동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다시 강화


도로 옮긴 뒤에 죽였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이곳 폐동을 왕살이골창이라


고 부른다. 또 한 왕자는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인데, 그는 16대 임금인


인조 때에 역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어느 마을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


만 그의 맏형인 임해군이 귀양온지 스무해 만에 이곳에 귀양와서 죽었다. 또


상궁 이 씨는 본디 인조의 사랑을 받았던 이로 연적인 귀인 조 씨를 시샘하


다가 진도에 귀양보내졌는데, 이곳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가 지금의 진도읍


공원 근처의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었다고 한다.


이처럼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통틀어 왕실을 둘러싸고 반란이나 당파


싸움이 피바람을 몰고 올적마다 힘이 부친 왕족이나 양반은 진도 땅으로 귀


양보내졌다. 그런 일은 조선 시대 말기까지 계속되다가, 중국 하르빈에서 일본


수상인 가쓰라를 암살하려다가 붙잡혔던 선교사 손정도가 1912년에 마지막으


로 귀양온 것으로써 비로소 끝났다.


진도 땅에 귀양을 왔다가 귀양살이가 풀려 다시 벼슬길에 올랐던 이도 있


으나, 임금이 내린 약사발을 마시고 죽은 이도 많다. 조선 시대 영조 때에 한


전라도 감사가 조정에 "진도에는 유배자가 너무 많아 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죄없는 섬사람들까지 굶어죽을 판이니 유배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건


의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진도에 유배를 왔던 사


람은 낱낱이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던 듯하다.


그런데 진도 땅에 귀양을 왔던 이는 거의가 풍류깨나 앎직한 왕족이나 양


반들로서 그들은 지난날의 영화를 잊으려고 제 처지를 노래에 담거나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렸다. 이곳에 살던 본토박이들도 비록 귀양을 왔을망정 '귀


하신' 그들의 시름을 이곳의 고유한 노랫가락과 춤사위로 달래 주었을 것이다.


그런 역사의 배경을 지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늘날의 진도 문화는 한반도


의 서남쪽에 치우쳐 있는 섬답지 않게 그 수준이 매우 높다. 그래서 진도 땅


에서 동양화가와 서예가가 많이 나왔음도 오히려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국


전 초대 추천 작가만 해도 남농 허건씨를 비롯하여 다섯 명이나 있으며, 도전


에서 특선과 같은 높은 상을 탔던 작가는 자그마치 쉰 명이 넘는다. 그러나


진도군의 자랑거리로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압록강 동쪽에 그를


따를 이가 없다"는 평을 들었던 소치 허유씨로부터 그의 아들인 미산 허영씨,


손자인 남농 허건씨로 이어지는 허씨 집안의 동양화와 더불어 지난 1980년부


터 허건씨가 집안의 유품 전시관을 곁들여서 복원시키고 있는 운림 산방을


들 수가 있다. 운림 산방은 허유씨가 살았던 집으로서 의신면 사천리의 쌍계


사 곁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 나라 동양화단의 우뚝한 봉우리로 추켜세워지는 허백련씨


는 늘그막에 광주시 무등산 기슭에서 제자를 길러내었기 때문에 마치 광주


사람인 양 알고 있는 이가 많지만 그도 앞서 말했던 허씨 가문과 핏줄이 닿


아 있는 진도 사람이다.


진도에서 났던 큰 예술가로는 1981년 6월 15일에 세상을 뜬 서예가 소전


손재형씨도 있다. 추사 김정희 뒤로 이 나라 서예의 맥락을 이어 현대 한국


서예의 절정을 이룬 손재형씨를 두고 화가 서세옥씨는 "근세에 한국의 아름다


움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던 사람이 신안 출신인 서양화가 김환기씨와 함


께 진도 출신인 서예가 손재형씨인데, 특히 한글을 서예 예술로 발전시킨 소


전의 공로를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바깥 사람들한테서 입은 숱한 해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곡창지대인 나주지방보다도 먼저 진도에 쳐들어와


이곳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또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따로 하겠지만 삼별초의


난 때에도 이곳은 피로 얼룩졌으며, 그 뒤인 1350년 무렵에는 왜구의 침략을


숱하게 받아 마침내는 진도 군수를 비롯한 진도 사람들이 제가 살던 땅을 왜


구에게 넘겨주고 영암군 시종면으로 피난을 갔다. 이곳에서 또 해남군 삼산면


으로 떠돌아다녔던 이곳 사람들이 다시 진도 땅으로 들어왔던 때가 1437년이


었으니 자그마치 87년 동안이나 진도는 주인을 잃고 있었던 셈이다. 바깥 사


람들에게서 숱한 피해를 겪은 진도의 역사에서 그 주민은 알게 모르게 새로


운 것을 쉽게 따라가지 않은 보수성과 배타성을 익혔는지도 모른다. 다달이 2


일과 7일에 진도읍에서는 오일장의 구석구석에서 이 군이 나라의 후미진 구


석에 있는 데서 오는 낙후성과 함께 그런 성질이 배어 있음이 느껴지기도 한


다.


진돗개의 고장답게 손수레 안에 강아지 열댓 마리를 싣고 나온 제법 자본


이 있는 장사꾼도 있지만, 머릿수건을 뒤집어쓴 노파가 짚으로 엮은 삼태기


안에 강아지 한 마리를 '상품'으로 담아 내놓은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상품으


로 나오는 것은 강아지뿐만이 아니라 닭 한 마리, 거위 한 마리, 토끼 한 마리


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도시 사람의 눈에는 떫어서 먹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감 열댓개, 옥수수 몇 모개, 열무 몇단을 저마다 보자기에 늘어놓고 온종일 쭈


구리고 앉아있는 사람이 숱하다. 장터의 한쪽 귀퉁이에서는 강냉이나 쌀을 튀


기는 "펑" 소리가 이따금씩 들리고 또 다른 한 귀퉁이에서는 아낙 서넛이 둘


러선 채로 막걸리 사발을 들이키고 있다. 또 한 구석에서는 '성냥간'에서 낫,


호미, 쇠스랑 따위의 연장을 숯돌에 갈거나 담금질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옛 모습을 꽤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이 장터의 정겨운


풍물도 머지 않아서 사라질 것 같은 낌새를 보이고 있다. 곧 이곳 진도의 장


터에도 트럭 부대들이 몰려와 장사를 하는 모습이 얼마 전부터 눈에 띄기 시


작했다. 대구, 부산, 광주 같은 도회지에서 화물 트럭에 사과와 배 따위를 가


득 싣고 와서 마이크를 손에 쥐고 "열다섯개에 천원"을 외쳐 대는 신식 장돌


뱅이의 모습은 서울의 아파트 단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과 거의 똑같다.


다만 버젓하게 제값 받고 팔기는 힘들, 잘고 시들한 것들도 워낙 과일이 귀한


이곳 사람들에게는 꽤 잘 팔리는 모양이다.




울돌목에 세워질 허궁다리



진도군은 잔잔하고 아름다운 바다 위에 그림처럼 펼쳐있는 크고 작은 섬들


로 이루어져 있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전라남도의 물끝 지방인 해남군 해남읍


에서부터 진도읍까지 버스로 오갈 수 있는 물길이 있고 보면 이미 섬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물길이 있음을 알면서도 일부러 목포를 거쳐 빠른 배로


는 한 시간 만에 진도에 닿을 수 있는 뱃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


의 말로는 물길이 자그마치 백오십리가 넘는 거리인 데다가 포장이 되지 않


아 울퉁불퉁한 먼지투성이의 길을 두시간이 넘게 달리다 보면 허리를 다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물길에는 해남군 황산면 옥동에서부터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까지 1킬로미터쯤의 해협이 가로놓인 터라 진도군에서 나는 갖


가지 산물은 말할 것도 없고 버스나 승용차마저 두채의 도선 위에 얹혀서 건


너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지금까지 도선의 건널목이 되어 온 이 해협보다 훨씬 더 좁


은 해협이 진도와 뭍 사이에 있다.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의 끝과 진도군 군내


면 녹진리의 끝 사이에 가로놓인 바다가 그것인데 폭이 295미터밖에 되지


않아 마치 한 걸음에 건너뛸 수가 있을 것만 같다. 이 바다가 바로 울돌목이


며 한자이름으로 '명량'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수가 들고날 때마다 좁디좁은


이 해협으로 바닷물이 한꺼번에 쏟아져드는데 한번 조루에 휩쓸리면 대형 기


선도 거스를 수가 없을 만큼 물살이 세다. 바로 그 물살을 이용해서 임진 왜


란때에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크게 무찔렀던 것인데 「택리지」에 그때의 광


경이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그때에 왜의 수군이 남해에서 북쪽으로 올라


왔는데, 수군대장 이순신이 해상에 머물러 쇠사슬로 여울 위를 가로막고 왜


수군을 기다렸다. 왜선이 여울 위에 이르자, 쇠사슬에 걸리어 그 아래로 거꾸


로 뒤집히고, 여울 위의 배는 낮은 곳이 보이지 않아 거꾸로 뒤집힌 것을 알


지 못하고, 그 여울을 넘어서 흐름에 따라 곧장 내려가는 줄로만 생각되었으


나 사실은 모두 거꾸로 뒤집혔다. 수세가 돌다리에 가까울수록 더욱더 급하게


되어 배는 이에 빠른 물살 속으로 들어가 돌아나올 틈이 없어서 오백채가 한


꺼번에 모두 빠져 한채도 남지 못하였다."


이 울돌목이 뭍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진도를 외진 곳으로 만들었


다. 그러나 1981년 4월 27일에 이 울돌목에 다리를 놓아 진도와 뭍을 이을 연


륙교의 기공식을 가졌으니, 앞으로 이 다리가 완성되면 숱한 변화가 일어날


듯하다. 울돌목은 세찬 물살과 강풍 그리고 깊은 수심을 갖추고 있어서 여느


방법대로 다릿발을 세울 수가 없는 곳이다. 그래서 이 다리의 공사를 맡은 현


대 건설은 영국의 건설회사인 RDLI 회사의 기술지원을 받아 이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이른바 캔틸레버 공법으로 허궁다리를 놓게 된다. 양쪽 해안에 다리


기둥을 두 개씩 세우고 한쪽의 두 꼭대기에서 케이블을 휘영청 늘어뜨려 다


른 쪽의 두 꼭대기에서 받게 하여 고정시키고 그 케이블에서 촘촘히 내려뜨


린 무쇠가락에 매달아 만드는 다리로서 전체적으로 볼 때에 두 개의 우산을


펼쳐놓은 듯한 형태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게 된다. 1984년까지 이곳에 폭이


11.7미터, 길이가 484미터, 높이 69미터인 이 연륙교가 놓이게 되고 또 해남읍


에서부터 진도읍까지의 울퉁불퉁한 자갈길이 포장되면 진도는 더는 교통이


불편한 섬이 아닐 터이다.



나락만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다.



진도군은 이 나라의 섬 중에 제주도, 거제도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큰 섬


인 진도를 비롯하여 유인도 49개와 무인도 196개로 이루어졌다. 이것을 행정


구역으로 따지면 진도읍과 면 6개 곧 군내면, 고군면, 의신면, 임회면, 지산면,


조도면으로 나뉘는데 그 중에 조도면을 뺀 여섯 지역이 모두 진도 안에 있다.


진도는 해남군에서부터 뻗어온 소백산맥의 한 줄기인 옥매산맥이 바다로


빠져들었다가 이곳에 와서 다시 산세를 일으키며 들어앉았길 때문에 구릉이


많다. 고군면과 의신면 사이에 자리잡은 높이 465미터의 첨찰산을 비롯하여


곳곳에 높지는 않으나 산이 여럿 있다. 그러나 고려 성종 때에 이곳을 기름진


지방이라는 뜻을 지닌 '옥주'로 불렀음에서 또 "한해 농사를 지우면 두해 반


동안 먹을 것 걱정이 없다"는 말에서 알 수가 있듯이 땅이 매우 기름지다.


전체 넓이가 405 평방 킬로미터인 이 군에는, 1980년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83,000명쯤이 살아 전라남도의 22개 군에서 넷째로 사람이 적게 사는 셈이다.


그러나 진도 땅 곳곳에 고인돌과 선돌이 숱하게 흩어져 있거나 무리지어 있


음을 보면 이 땅에는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많이 들어와 농사를 지었음직하


다. 그런데 뜻밖에도 「동국 여지승람」에는 이곳 사람들이 "고기와 소금에


의존하며 그다지 농사에 힘쓰지 않는다"고 쓰여 있고 또 이 지방의 특산물로


도 석류, 유자, 비자 같은 열매와 함께 낙지, 왕새우, 숭어, 굴, 홍합, 김, 미역,


전북, 해삼, 우뭇가사리 같은 수산물이 많이 났던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실제


로 이곳에서 이런 특산물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논과 밭이 전체


면적의 29퍼센트쯤을 차지하는 진도군에는 1980년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


구의 80퍼센트가 넘는 수효가 농사를 짓는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이 곧잘 하


는 "나락만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다"는 말로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듯이 주


로 쌀 농사를 짓는다.




배 타는 일의 앞날도 어둡지 않다.



진도 사람으로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으려는 이나 김, 미역 같은 양식업에


손을 대 보려고 하는 이는 거의가 '나락 농사'를 부칠 수가 없는 가난한 사람


들이기 때문에 배나 돈을 목포에 사는 객주한테 빌어다 쓰는 이가 많다. 목포


객주는 돈이나 배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진도 사람들이 잡거나 거두어들인


갖가지 해산물을 거의 다 목포 항구로 거둬가 판다. 이것을 돈의 횡포로 보는


이도 있으나, 진도군에서 배를 타는 사람은 주로 진도에서도 떨어져 있고 농


토가 적은 조도면에 사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잡은 생선은 어차피 식량이나


생활 용품으로 바꿔야 할 터이므로 진도읍보다는 물자가 풍부한 목포시에 내


다 파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 처지인 터라 진도군에서는 생


선을 목포시, 여수시, 부산시, 마산시에서 다시 사들여 온다. 그래서 '해변 산


중'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해산물을 구하기가 어렵고 값도 싸지 않다.


"양반 유세한답시고 나락 농사만 중히 여기고 바다에는 안 나가려고 한다"


는 어떤 이의 말대로 이곳 사람은 바다에 나가는 일을 무척 꺼려 왔다. 그래


서 이곳은 항구도 생선도 없는 섬이 되고 말았으나 이웃 완도군이 김, 미역


같은 것을 기르는 양식업을 성공시켜 웬만한 도시 못지 않게 잘살게 되자, 이


곳 사람들의 생각이 한두해 전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여태까지는 주로


조도면의 끝인 병풍도 일대의 바다에 나가 고작 삼치, 꽃게, 병어, 조기 따위


를 잡아 올리는 것이 진도군의 수산업이었으나, 1985년까지는 조도면에 있는


서거차도에 이른바 어업 전진기지 항구가 만들어져 서남 해안의 수산물 집산


지가 될 것이라고 하니 그 앞날이 어둡지만은 않은 듯하다.


그런가 하면 항구가 없다는 달갑잖은 이야기가 따라다니던 진도에도 머지


않아 근대 항구가 들어설 듯하다. 항구가 들어설 곳으로는 진도읍에서 남쪽으


로 육십리쯤 내려가면 있는 임회면 서망리가 눈길을 끌고 있다. 이 마을은 지


금 까지는 버스와 여객선이 닿지 않았던 조그마한 갯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곳이다. 37가구가 모여 사는 이 마을은 어촌임에도 불구하고 바다에 나가 고


기를 잡을 만한 배는 한채도 없고 오직 일이톤쯤 되는 조그만 배 12채를 재


산으로 삼아 미역 양식에만 매달려 왔다.


이 갯마을에 어항 개발이라는 근대화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80년 7월


부터였다. 그때 마침 앞서 말했던 서거차도 어업 전진기지의 개발 현장을 둘


러보러 진도에 내려온 수산청장더러 이 군 사람들은 항구 없는 섬이라는 별


명도 함께 벗어버리도록 해 달라고 건의했고, 이어 지난 1980년 11월에는 나


흘 동안에 걸쳐서 관계 기관에서 사람이 내려와 조사를 했으며 여러 자연 조


건으로 보아 서망리가 적합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게다가 해남군과 이 군 녹


진리 사이에 연륙교가 놓이고 되고, 또 녹진리에서부터 서망리까지의 도로가


1981년 3월 19일에 국도로 승격된 것에 이어 앞으로 포장이 되면 서망리는


어항으로 뿐만이 아니라 유람지의 구실도 할 수가 있을 법하다. 그러나 미역


이나 뜯어먹고 살아 온 보잘것없는 서망리가 어항으로서 제구실을 할만큼 시


설을 갖추려면 이십칠억원쯤의 돈이 들것이기 때문에 그 개발이 더뎌지고 있


다.


또 한편으로 관매도, 병풍도, 불도, 가사도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섬 181개


로 이루어진 조도면 일대는, 한 진도 주민의 말을 빌면, "홍도가 와서 보면 이


제껏 다도해에서 제일 가는 명승으로 자랑해 왔던 자신의 낯에 부끄러워 스


스로 바다 밑으로 가라않고 말" 만큼 경치가 아름답다. 소설가 홍성유씨가 한


국일보에 「신풍토기」를 썼을 적에 조도 일대의 몇몇 섬의 경치를 살짝 맛


만 보고도 "고요하면 고요한 대로, 거칠면 거친대로, 해가 지고 달이 뜨면 또


그것대로, 기암괴석, 백사 청송, 세계의 종말을 묵시하는 절대의 고요와 황홀


경"이라고 했던 말이 조금도 허풍이 아니다.




구기자 재배에 보배로운 땅



옛날에 중국의 강서 지방에서 나이 열 예닐곱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가 여


든살쯤 되어 보이는 노인의 종아리를 걷어올리고 회초리로 매질을 하고 있어


서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젊은 여


자가 "이놈은 내 셋째아들인데 약을 먹기 싫어해 때리는 거요"라고 대답하더


란다. 더욱더 괴이쩍다는 생각이 든 나그네가 그 젊은 여자의 나이를 물어보


니 395살이라고 대답해, 이에 놀란 나그네가 "그처럼 늙지 않은 비결이 무엇


이냐"고 다시 묻자 들에서 자라는 구기자의 열매를 계속해서 먹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가 하면 진도에 3대를 내려오면서 늙지 않고


장수하는 집안이 있어 그 까닭을 알아보니 그 집 우물가에 서있는 몇 백년


묵은 구기자나무에서 우물 안으로 열매와 잎이 떨어져 들어가더라는 얘기도


있다.


이처럼 흔히 불로 장생제로 알려진 구기자는 가지과에 드는 야생초로서 여


느 식물과는 달리 한해에 두 차례씩 잎이 나며, 씨로 뿌려서는 나지 않고 이


른 봄철이나 늦가을에 가지를 베어 꺾꽂이를 해야 한다. 구덩이를 파서 두엄


을 넣고 흙을 덮은 뒤에 그 위에 꽂아 심으면 잘 살아난다. 찬서리가 내리는


음력 구월 무렵이면 고추처럼 생긴 조그마한 열매가 빨갛게 익기 시작한다.


음력 구월 말쯤부터 그 열매를 따서 열흘쯤을 말린다. 그 열매를 생강을 같이


넣고 끓여 구기자 차를 만들어 마시기도 하고, 소주에 넣어 구기자 술을 담그


기도 한다.


구기자는 충청남도 지방에서도 많이 나는데, 특히 진도 구기자가 유명한 것


은 진도 것이 구기자나무의 잎도 무성할뿐더러 그 열매도 훨씬 크고 씨가 작


아 살이 많고 약효까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진도 구기자의 이


름이 높아지자 이웃 지방인 해남군의 어느 농민이 일부러 이곳의 구기자 묘


목을 구하고 이곳 흙까지 떠다가 해남 땅에 심어 보았으나 그곳에서는 해남


구기자밖에 열리지 않아 '강남귤 하위지' 곧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로 변한다는 옛 중국의 고사를 실감케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보면, 진


도 땅이 구기자 재배에 보배로운 땅임은 틀림없는 듯하다. 약효가 뛰어난 것


이 널리 알려져 다른 지방 것의 일곱쯤이나 비싼 값에 팔려 나가는 진도 구


기자는 진돗개와 진도 석각 곧 진도 돌미역과 함께 진도의 보배 세 가지로


꼽힌다.


구기자말고도 이곳에서 나는 갖가지 한약 재료도 비싼 값을 받는다. 그런가


하면 기름진 진도의 밭은 좋은 씨앗을 내고 있어 이를 얻으려고 하는 씨앗


장수들이 눈독을 들이는 곳으로서 거의 날마다 광주나 서울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서 온 씨앗 장수까지 들락거리고 있다.




비자와 고니와



진도군에는 천연 기념물이 많이 있다.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에는 천연 기념물 111호로 지정된 비자나무가 마치 90


가구가 모여사는 이 마을 전체를 보호해 주듯이 짙은 그늘을 만들고 있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이 나무가 언제 어떻게 심어졌는지를 알지 못하


지만, 서너 아름이나 되는 밑둥에 군데군데 큼직한 구멍이 있는 것으로 미루


어 보아 그 나이가 적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나무에 기어올라가 놀던


아이가 땅바닥에 떨어져도 크게 다친 일이 없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며 또 이


마을 사람들은 신령스러운 나무라고 하여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그 아래에


모여 마을을 지켜온 이 거목에 제사를 지낸다. 제주는 정월 초나흗날부터 몸


을 깨끗이 씻고 바깥 출입을 삼가며 금줄을 나무 둘레에 치고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고, 제수를 장만할 때에도 절대로 맛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소나 돼


지를 잡아 놓고 정갈하게 지은 메를 올려 제사를 지내는데, 이 풍습은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제를 올린 뒤에, 동네 남녀가 편을 가르되 머리


땋은 총각은 여자 편에 가담시켜 보름달 아래에 벌였던 줄다리기나, 줄다리기


가 끝난 뒤에 메밥과 고기를 함께 나눠 먹으며 즐겼던 운치있는 풍습은 일고


여덟해 전부터 끊기고 말았다.


또 진도읍에서 8킬로미터쯤 떨어진 의신면 사천리에는 쌍계사라는 절이 있


는데 그 절 주위에는 동백나무, 후박나무, 참가시나무, 감탕나무를 비롯한 갖


가지 상록수가 숲을 이루고 있어 천연기념물 107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조도


면 관매리 곧 관매도에 있는 관매 국민 학교 안에는 둘레가 3.4미터, 높이가


18미터나 되는 후박나무 두 그루가 있어 천연 기념물 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진도읍 수류리의 해안 일대는 해마다 11월에서 이듬해 2


월까지 고니가 날아드는 곳으로 천연 기념물 101호로 지정되어 있다. 흔히 이


새가 많이 날아오면 그 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하여 서조로 여기는 고니는


백조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몸이 배처럼 생겼고 물위에 떠다니며 물고기를


잡아먹는 고니는 한대 지방에 사는 철새로 겨울철이면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


면 일대나 창녕군의 호수와 늪을 거쳐 낙동강 하류 지역과 다도해 연안, 그리


고 진도의 해안 일대에서 겨우살이를 해 왔는데, 해안 지방 곳곳에서 진행되


고 있는 간척 사업에 밀려 쉴 터를 잃어 가고 있다.



진돗개의 전설과 역사



위의 여러 천연 기념물이 진도의 이름을 빛내는데 한몫을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진돗개이다. 1988년의 올림픽 경기를 서울에서 개


최할 것이 정해졌을 적에, 올림픽 기념표지는 이 나라를 상징할 만한 동물로


하자는 데에 뜻이 모였는데, 그때에 호랑이, 까치와 함께 진돗개가 후보에 올


랐으니, 진돗개는 진도만의 자랑이 아니라 이 나라의 자랑거리라고 부름직하


다.


술에 취한 주인이 들판에 잠들어 있는 동안에 산불이 나서 그 불길이 주인


이 누운 곳으로 번져 오자, 꼬리에 물을 적셔 야금야금 타 들어오는 불을 꺼


서 주인을 살려내고 스스로는 죽었다는 진돗개 이야기며, 진도에서 배와 기차


를 타고 서울로 팔려갔으나 무슨 수를 썼는지 진도로 되돌아왔다는 이야기며,


또 얼마나 영리한지 주인이 웃는 얼굴로 쓰다듬어 주면서도 말로는 욕을 했


더니 그것을 알아듣고 한쪽 구석으로 비켜 가더라는 진돗개 이야기들은 가슴


이 찡한 감동을 준다. 대개 서양의 개들이 살코기를 푸짐하게 먹이고 심지어


과일과 야채까지 먹이며 사육사를 따로 두어 날마다 훈련을 시킴으로써 명견


이 됨에 견주어 진돗개는 외진 섬 땅에서 사람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를


먹고 배가 고프면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두더지를 잡아먹으면서도 그처럼 출


중한 개'격' 도야를 해 왔다.


1140년쯤 중국 남송의 무역선이 진도 근해에서 조난을 당했을 대에 이곳에


떨어진 남송의 개가 오늘의 진돗개의 시조라는 이야기가 있고, 조선 초기에


진도군 지산면에 설치했던 국영 목장을 지키기 위해 몽고에서 수입했다거나,


또는 고려 시대 말기에 삼별초 군을 쳐부수기 위해 들어온 몽고군의 군 견이


남아서 진돗개의 시조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가 하면 석기 시대부터


우리 선조들이 기르던 개의 후예가 한국 고유 견으로 남아 번식되어 왔는데


진도에서만이 다른 개와 혼혈되지 않고 수수한 혈통을 지켜 진돗개가 되었다


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진도의 개가 다 진돗개는 아니다



진돗개는 네 다리가 늠름하고 털에 윤기가 흘러 전체적으로 체격이 꽉 차


이고 다부진 느낌을 준다. 사람의 잣대로 '참 진돗개'를 가려 뽑는 기준에 다


르면, 진돗개의 털빛은 흰색이나 노란색이고 앞에서 바라본 머리는 팔각형이


고, 굵직한 목에 등이 곧으며 세모꼴의 작은 귀는 앞쪽으로 숙이고 꼬리는 굵


고 힘차게 위쪽으로 말려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진돗개와 함께 살아 왔으며


지금은 진돗개 심사위원이기도 한 김정호씨의 주장에 따르면 "진돗개의 털빛


은 노란색이나 흰색이고 꼬리는 말려있어야 한다"는 판에 박힌 잣대는 비록


털빛이나 꼬리의 생김새는 그런 잣대에 어긋날 망정 정말로 우수한 품성을


가진 진돗개를 자칫하면 도태시켜 버리는 잘못을 저지르기가 쉽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는 많은 진돗개가 죽음을 당해 그 가죽은 일본의 군복


을 만드는 데에 쓰였다. 진돗개는 그때에 이미 천연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었


으므로 심사를 거쳐 진돗개임을 인정받은 개의 목에는'합격견 등록 견표'를 달


아 주었으나 진도 사람들은 집에서 길러 왔던 개를 새삼스럽게 심사하는 것


을 번거롭게 여긴 탓인지 대부분이 등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국주의 일


본의 관리들은 이런 사정을 알아주지 않은 채로 이 군의 면마다 등록되지 않


은 개를 때려죽이는 도견부를 설치하였다. 도견부의 관리는 마을을 돌며 목에


등록 견표가 없는 개를 발견하면 마구 몽둥이로 때려잡아 가죽을 벗겨갔다.


그 뒤에 해방이 되자, 진돗개를 때려잡는 일은 없어졌으나 이번에는 다른 수


난이 시작되었다. 1956년에 대통령 이승만 씨가 진도에 들렀는데, 그때에 돈


오백만원을 주면서 진돗개를 세계적인 개로 길러내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한동안 등한시되던 진돗개가 갑자기 온 나라의 관심을 받게 되


었다. 진돗개가 명견이라고 선전이 되자 진도에서는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개장이 서게 되었다. 그리고 전국에서 진돗개 사육의 바람이 일면


서, 전방에서는 진도에 군인을 파견해 이름난 큰 개를 군용견으로 뽑아갔다.


그러나 뭍으로 뽑혀 나갔던 진돗개 강아지는 열 마리에 여다홉 마리는 죽었


으며 그러는 몇 해 동안에 진도에는 우수한 개가 거의 바닥이 났고 질이 떨


어진 개만 남게 되었다. 진도의 개가 곧 진돗개인 것은 아니었으나, 진도에 있


던 강아지는 무조건 다른 지방의 강아지보다 다섯곱쯤 비싸게 팔려 나갔기


때문에 심지어는 이웃 군이나 제주도에서 강아지를 싼값에 들여와 비싸게 되


파는 일까지 생겼으니 진돗개의 피가 더러워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법하다.


1938년에 일본인 동물학자 모리씨가 국제 동물학계에 보고함으로써 이 나


라에만 있는 우수한 품종의 개임이 밝혀져 천연 기념물 53호로 지정되어 보


호받는 진돗개는 이처럼 잡종과 마구 섞이는 바람에 나날이 순수한 피를 잃


어 간다. 진도군에서는 "똥개가 다된 진돗개"라는 말이 나돌기까지 하자 뒤늦


게나마 1968년에 진돗개 보육 협동조합을 만들어 진돗개의 보호와 번식을 위


해 애를 쓰고 있다. 여기서는 해마다 4월과 9월에 앞서 말한 바 있는 까다로


운 잣대에 따라서 우수한 진돗개를 가려뽑아 족보에 올리는가 하면 진돗개가


진도군 바깥으로 마구 팔려 나가는 것을 막고 있다.


진돗개 보육 조합의 통계를 빌면, 1981년에 진도에는 개가 9,500마리쯤 있었


는데 그 중에 순종 진돗개로 볼 수 있는 것은 1,300마리뿐이었다. 순종은 한


마리에 값이 백만원쯤이다.




삼별초의 얼이 서린 곳



진도 땅 곳곳에는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발길 닿는 곳마다 유적지가


널려 있다. 그런 유적지로 진도 사람들이 그들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에 먼


저 가리킴직한 곳이 삼별초의 발자취가 서린 용장 산성과 남도 석성이다.


일찍이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송지영씨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그 산하 그


인걸」에서 용장산성의 터를 둘러보고 삼별초의 뜻을 기렸던 적이 있다.


"삼별초군이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 쓰


러졌다고 해서, 또 비굴한 조정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역적의 반란으


로 몰아부침이 정녕 나라의 정통을 부르짖음이라 한다면, 강토는 진작 어느


오랑캐에게 짓밟혀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였을 것이며, 겨레는 푸줏간이나 생


선 가게의 어육이 되어 얼빠진 허수아비로 됐을 것이 아닌가."


이로써 쉽게 짐작할 수가 있듯이, 고려 원종때에 몽고족이 이 나라에 쳐들


어왔을 적에 강화도로 난을 피했던 고려 조정이 몽고족과 강화를 맺으려고


하자 삼별초는 그들에 맞서서 끝까지 싸우려고 했다. 삼별초의 뿌리를 캐려면,


고려 시대의 의종 때에 무신을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음에 울분을 품었던 무


신 정중부가 일으켰던 이른바 무신의 난까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때 정중


부가 의종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뒤부터 백년 동안에 걸쳐서 정중부는 경대


승에게, 경대승은 다시 이의만에게, 이의만은 최충헌에게 죽음을 당하고 하던


피의 역사가 계속되었으니 무신들의 칼놀림 밑에 파묻혀 있던 왕들은 차라리


오랑캐의 힘을 빌어서라도 무력해진 왕권을 되찾고 싶었을 법하다.


삼별초군이 원종의 육촌인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항거하자, 고려군과 몽


고군이 힘을 합쳐 삼별초를 쳐부수려고 하였고 장군 배중손은 쫓기고 흩어지


는 삼별초군을 모아 강화도를 떠난 지 두달 열 이레만에 진도에 다다랐다. 그


들은 벽파진에서 진도읍 쪽으로 가다가 보이는 높지는 않으나 우뚝 솟은 용


장산에 들어가 터를 잡았다. 그리고 풍수지리의 눈으로 보면 용 다섯 마리가


구슬 하나를 두고 싸우는 땅 모양을 갖추고 있는 이 산의 기슭에 나라를 세


워 원종의 육촌인 왕온을 임금으로 내세우고 연호를 오랑으로 삼았다. 진도에


자리를 잡은 삼별초군은 한동안 육지 일부와 제주도 지방을 함락시키고하여


그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마침내 1271년 5월 15일에 고려 장수 김방경과 몽


고 장수 홍다구가 이끄는 여-몽 연합군이 병선 사백채와 군사 만명을 이끌고


진도로 쳐들어왔다. 그 싸움에서 배중손과 왕온이 죽었으며, 지휘자를 잃은 삼


별초군을 김통정이 이끌고 제주도로 도망갔으나 두해 뒤에는 그들마저 완전


히 망하고 말았다.


왕온은 쫓기다가 죽었던지 용장산으로부터 삼십리쯤 떨어진 의신면 침계리


산44번지에 그 무덤이 있다. 예부터 왕무덤재로 불리던 이 곳은 밤이면 왕도


깨비가 나오고 낮에도 고개 밑에 있는 엉바위에 돌멩이를 던지며 그의 넋을


달래야 무사히 지날 수가 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그 무덤은 식민지 시대


부터 도굴꾼이 수없이 파헤쳐 놓아 그 흔적조차 희미해졌던 것을 몇해 전에


진도 군청에서 다시 손질해 놓았다. 민속학자들은 그때에 진도 땅에 들어왔던


몽고군의 영향으로 몽고말과 풍습이 이곳에 남아 있다는 말을 곧잘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그것을 몹시 못마땅해한다.


그런데 용장산의 기슭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용장 산성이 언제 만들어졌


는지는 뚜렷하지가 않다. 「동국 여지 승람」에는 둘레가 38,741자이고 높이가


5자인, 돌로 쌓인 용장 산성이 "고려 원종 때에 삼별초가 모반하여 강화부로


부터 들어와 이 섬에 자리잡고 궁전을 크게 지었으나 김방경이 그것을 쳐서


평정"하였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문화재 관리국에서 펴낸 「문화 유적


총람」에 쓰여 있는 내용도 같다.


그러나 진도 고등학교 교사 박명석씨를 비롯한 이곳 사람들은 삼별초군이


이곳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산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용장 산성은 삼별초군이 들어왔을 때보다 백오십년쯤을 앞선 1018년


쯤에 백제 시대부터 고군면 고성리에 자리잡았던 읍성을 이곳 군내면 용장


들녘으로 옮겼을 때에 쌓은 것이다. 실제로 삼별초군은 겨우 아홉달 동안에


걸쳐서 용장산에 머물렀으니 그 짧은 기간에 우람한 용장 산성을 쌓았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옛빛이 도드라진 남도 석성



배중손이 죽은 곳으로 알려진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남도 석성도 삼별초근


이 쌓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많지만, 이것도 용장 산성의 유래와 마찬가지


로 믿을 만한 것은 못 된다. 「문화 유적 총람」에 따르면, 삼국 시대에 이미


이 성을 쌓았을 것이며, 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성은 의신면 금갑리의 금갑


진과 함께 이곳 남동리의 앞바다인 남도포에 수군 만호영이 들어섰던 시기인


조선 시대 세종때에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남도포의 앞바다는 "울돌목이 사


돈을 맺자고 해도 안 맺는다"는 말이 나왔을 만큼 물살이 셀 뿐만이 아니라


앞쪽에 섬이 가로막은 터라 바다 쪽에서는 마을이 잘 보이지 않지만, 높이


185미터의 남산을 낀 마을에서는 산에 오르면 바다 전체가 한눈에 들기 때문


에, 이 마을을 남해안의 군사 요새로 썼던 듯하고 그건 이유에서 남도 석성도


쌓았음직하다.


크기가 엇비슷한 돌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남도 석성은 언뜻 보기에도 짜


임새가 실팍한 성임을 알 수가 있다. 담쟁이덩굴이 얼키설키 뒤얽혀 있는 이


성은 임진 왜란 때에 무너졌던 것을 그 뒤에 다시 쌓았다고 하는데 오랜 세


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높이가 5.3미터이고 길이가 54미터인 성벽과 함께


동문, 서문, 남문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 이 나라에 전하는 여러 옛 성 중에서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것으로 손꼽힌다.


이 나라의 성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 까닭은 무엇보다도 적의 침입을 자


주 받았던 데에 있겠지만 대부분의 성이 돌로 쌓였던 데에도 있겠다. 조선 시


대의 실학자인 박제가는 그이 실할 사상을 적은 책인 「북학의」에서 성을


벽돌로 쌓지 않고 돌로 쌓는 것이 잘못임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던 바가 있다.


그의 생각을 빌자면 돌 한 개라 벽돌 한 개보다 견고할지는 모르지만, 돌 여


러개를 쌓는 것과 벽돌 여러개를 쌓는 것을 견주면 뒤엣것이 덜 실팍하다.


게다가 돌을 다듬는 데에 드는 품이 여간 큰 것이 아니고, 벽돌과 달라 돌은


큰 것과 작은 것이 고르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성을 쌓는 일도 어렵다고


하였다.


"이 나라에 있는 성이 돌을 다만 한겹으로만 쌓았기 때문에 바깥쪽은 비록


높고 험해도 안쪽에는 쌓은 돌끼리 이가 맞지 않아서 돌이 하나만 빠져도 넘


어갈 것 같으며 또 이를 막을 수가 없다"고 했던 그의 말마따나 이 나라의 성


은 적의 침임을 받을 때마다 허물어지지 않았던 적이 거의 없었으니 원형 그


대로 보존된 성이 드물 것은 뻔한 일이다.


남도 석성은 비록 돌로 쌓았을망정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점말고도 그 언저


리에 흙벽으로 담을 두른 초가집이 일흔 가구 남짓하게 예스런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더불어 고색을 돋보이게 한다. 전남 대학교 박물관장인 지춘상씨는


이 마을을 민속 보존 마을로 지정하자는 의견을 내 세웠으나 그런 곳의 '민속


보존'이 차를 타고 쉽게 드나드는 구경꾼만을 위한 것이라는 듯이 이곳이 버


스가 다니지 않는 외진 곳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바다가 갈라진다.



"모세가 팔을 바다로 뻗치자 야훼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바람을 일으켜 바닷


물을 뒤로 밀어 붙여 바다를 말리셨다. 바다가 갈라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바


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밟고 걸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이것은 기독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의 "출애굽기" 14장 21절부터 23절까지의 내


용인데, 홍해가 갈래져 바닷길이 열렸던 것을 흔히 '모세의 기적'이라고 일컫


는다.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에 있는 모도 곧 띠섬 사이의 바닷길 2.8킬


로미터는 해마다 음력 2월이나 3월의 어느 보름께나 그믐께에 마치 모세의


기적이 다시 일어나듯이 바다가 갈라진다. 보통 때는 수심 5미터에서 6미터까


지인 이 바다의 조수가 갈라지듯이 양쪽으로 밀려나가면서 폭이 30미터에서


60미터인 너른 뻘길을 이루어 놓으면서 회동 마을에서 그때를 기다리던 사람


들은 함성을 지르며 신비의 바닷길을 따라 마치 거대한 사람 기둥이 꿈틀거


리둣이 띠섬을 향해 몰려간다. 물길이 채 다 열리기도 전에 무릎까지 적셔 가


면서 가는 이도 있고, 하필이면 그 자리에까지 와서 바닥에 쳐진 바지락이나


낙지, 해삼, 소라들을 주으며 살생을 즐기는 이도 있고, 또 그곳에 대대로 내


려온 행사인 용왕제와 뽕할머니 기원제를 보거나, 진도 들노래를 듣거나 강강


술래를 구경하는 이도 있다.


모세의 기적을 보겠다고 몰려든 인파는 해마다 불어나서 지난 1980년의 경


우에는 외국 사람 천명쯤을 포함해서 줄잡아 이만오천명쯤이 한꺼번에 몰려


왔다.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모세의 기적이 아니라 바닷물의 간만


의 차이가 매우커져 바다 밑의 모래 언덕이 드러나는 현상을 뿐이다. 그것이


모세의 기적으로 떠들썩하게 소개된 것은 이 나라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주한 프랑스 대사로 일했던 랑뒤씨가 네댓해 전에 처


음으로 제나라 신문에 소개한 바 있고 그 뒤에 일본의 NHK방송국과 후지 텔


레비전 방송국이 「모세의 기적」으로 소개를 하여 방송을 내보낸 뒤부터 이


곳이 갑작스레 관광 명소로 들먹여지게 된 것이다. 관광객의 발길이 거의 없


었던 진도 땅에서도 외진 회동 마을에 한꺼번에 관광객이 몰려들었으니 소동


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서울서 진도로 갈 경우에 광주시까지


고속버스로 4시간 10분이 걸리고, 다시 광주시부터 해남읍까지 포장 도로로 2


시간 10분이 걸리고, 다시 해남읍으로부터 자갈투성이의 먼짓길을 두시간 남


짓 달린 뒤에, 곧 통틀어 여덟 시간이 넘게 걸린 뒤에야 비로소 진도군의 벽


파항을 마주 바라보는 옥동리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벽파항으로 건


너는 데에도 여느 때 같으면 기다리지 않고 금방 건너갈 수가 있으나 신비의


바닷길이 열릴 적에는 한꺼번에 많은 차량이 밀리는 바람에 몇 시간씩 기다


려야 한고 진도로 건너가서도 회동리까지 뱀길처럼 구불구불한 육십리 길을


가야 된다. 그렇게 해서 서울 사람들이 회동 마을에 도착하면 마땅한 숙박시


설도, 쉴 곳도 없을뿐더러 뒤보려면 꼭 있어야 된다고 믿는 수세식 칙간도 없


으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1980년의 경우 25,000명이 넘게 몰려온 관


광객 중에서 열 집이 채 못되는 여관에서 묵을 수 있었던 이는 1,000명쯤이고


민박할 수 있던 이도 3,500명쯤에 지나지 않았으니 '잠자리 소동'이 어떠했을


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주로 관광 회사들의 주선으로 먼 곳에서 해남을 거쳐 애써 이곳까지 찾아


왔던 사람 중에는 잠자리를 구하려고 다시 해남으로 되돌아가는 이도 생겼으


니 "관광이 아니라 고생길"이라는 둥, "다시는 안 오겠다"는 둥 하는 불평이


나왔을 것은 당연하다. 그런가 하면 진도의 뜻있는 사람들은 "어떤 곳을 몇


십억을 들여 호화 관광단지를 꾸며 놔도 사람이 찾아가지 않는데 우리는 동


전 한푼들이지 않고도 몇만명이 몰려오는 천혜의 보고를 갖고도 아무런 시설


을 마련하지 않아 멀리서 모처럼 관광객이 몰려든 기회를 놓치지나 않을지를


몹시 안타까워하고 있다.



뽕할머니 전설 얽힌 영등 사리



이 신비의 바닷길이 언제부터 열렸는지는 정확하게 아는 이가 없다. 그렇지


만 이 지방에 전해 오는 뽕할머니의 전설을 들어보면, 적어도 기독교가 이 땅


에 들어오기 훨씬 전에, 다시 말해서 이곳 사람들이 성경에 모세라는 사람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던 시절부터 바다가 열렸던 듯하다.


전설에 따르면, 회동 마을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던 것은 지금으로부


터 한 오백년 전인 조선 시대 초기부터이다. 그때에, 무슨 죄를 지어서였던지


는 알 수가 없지만, 손동지라는 사람이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가던 중에 풍파


를 만나 배가 부서지는 통에 지금의 회동 마을에 표류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마을이 이루어졌다. 그때는 이 마을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호동이라고 불렀다. 그 뒤로 한 이백년 동안에 걸쳐서 그 마을에 손동


지의 자손이 그럭저럭 살아왔는데, 날이 갈수록 호랑이의 폐해가 심해갔다. 마


침내 견디다 못한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 뗏목을 타고 마을 앞바다에 있


는 지금의 의신면 띠섬으로 피난을 갔다. 그런데 급하게 마을을 떠나는 바람


에 뽕이라고 불리는 할머니 한사람을 마을에 남겨 두게 되었다. 홀로 남게 된


뽕할머니는 흩어진 가족을 만나고 싶어 날마다 용왕님께 축원하였다. 마침내


음력 2월15일 밤 뽕할머니의 꿈에 용왕님이 나타나 "내일 무지개를 바다에 내


릴 터이니 그것을 타고 건너가라"고 하였다. 이튿날 뽕할머니는 띠섬에서 가


장 가까운 바닷가에 나가 때를 기다리면서 기도를 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호


동 마을의 뿔치 곧 끄트머리와 띠섬의 뿔치 사이에 무지개 모양의 치등 곧


모래 언덕이 생겼다. 띠섬에서 이 광경을 바라본 주민들이 뽕할머니를 찾기


위해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호동으로 몰려 왔는데, 뽕할머니는 너무나 지쳐서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뽕할머니의 소망이 치등이 되었으며 그의 넋이 하늘로 올라


갔다고 믿고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 뽕할머니의 넋이 등천했다고 하여 '영등사


리'로 불리는 이 제사를 올릴 때면 자식이 없는 사람,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


람이 몰려와 그들의 소망을 빈다. 또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이


호동 마을로 되돌아와 살았다 하여 호동을 회동이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출처 : 여미리를 아시나요
글쓴이 : 쏙대네식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