麗尾박인태행정사 2007. 8. 19. 19:30

혹보!

내 동생 별명이다.
진짜 이름은 큰 나래……

 

동생이 태어날 때 이야기다.
어머니는 산통이 시작되자 이웃에 따로 사시는 할머니를 모셔 오라고 하셨다.
여동생과 큰집에 가서 할머니를 급히 모셔 와야 했다.

달 없는 깜깜한 골목길을 막 뛰어 가는데……. 그렇게 아파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위로 뒤에서는 도  깨비가 달려드는 느낌으로 무서움 증으로 긴장했어야 했다.

호야 등을 켜들과 할머니와 함께 집에 돌아왔지만 우리는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서 방안의 동정을 엿들으며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갓난애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한참 후에 할머니가 미역을 기지고 나오시며 고추라고 환한 미소를 지으신다.
내 동생 혹보는 이렇게 태어났다.
비록 어렸지만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상당히 충격적이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참!
그런데 동생의 별명이 혹보로 불리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부산하고 걱정되는 밤을 보내고 호기심이 동하여 어머니 방으로 건너가서 갓난애를 가만히 들춰 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무 조그맣고 이상하게 생긴 모양하며 더욱 놀란 것은 제법 구술만한 물렁 주머니가 왼쪽 옆구리에 붙어있었다.

분명 혹 이였다.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혹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복주머니라고 우기셨다.
친척들이 숙덕이는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아마 아버지께서 동생 산달에 이웃집 수퇘지 불알을 까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앙(조상신)할미가 아들을 점지하여 주었는데도 부정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화가 나셔서 그 벌로 갓난애 옆구리에 표시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로 어린돼지 불알처럼 생긴 거 같았다.
어린 나의 생각에는 그냥 손톱으로 쥐어 뜯은 다음 빨간약을 발라주면 간단히 해결될 거 같은데, 우리 할머니께서는 동생이 태어난 그날부터 식사 때마다 먼저 정화수를 떠놓고 조앙할 메한테 두 손을 싹싹 빌면서 노여움을 거두어 달라고 치성에 정성을 다하셨다.

정성이 부족하였던지 조앙 할메는 무정하게 혹보의 혹을 없애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윤기만 자르르하고 오동통하게 조금씩 커지는 것 같았다.

할머니께서도 이제는 어쩔 수 없었던지 이웃 동네에 살고 있는 당골레(세습무당)할미를 모시고 오셨다.
아무래도 당골레는 천지신명하고 가까우니까 굿을 하실 모양 이였다.
당골레를 통하여 미리 무꾸리(신탁)를 통해 그 처방을 받은 대로 우리 집에서는 부산하게 준비가 한참이다.
혹보 태어나고 세이레 되던 날 아침........ 그동안 새팍(사립문)에 쳐두었던  굵은 새나꾸(새끼줄)에 빨간 고추와 숯을 매달아 둔 금줄이 걷어지고 마당 한가운데서 굿이 시작되었다.
당골레는 금줄을 불사르며 징을 두드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경문을 외운다.
여동생과 나는 너무 재미있어서 옆에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굿을 하는 과정에 제법 큰 수퇘지 한 마리가 할머니에 의해 끌려 나오며 꽥꽥 소리를 지르고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당골레 할미는 끌려나온 돼지를 미리 준비된 쑥물과 향 물로 번갈라 씻으면서 정결 의식을 치루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당골 할미가 돼지 뒷다리를 한손에 모아 쥐더니 다른 손으로 징을 여러 번 두드리며 경문을 외운 후에 돼지 불알을 주무르고…….  또 징 한번 두드리고 불알 한번 주무르고……. 하면서 이상한 굿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마 천지신명과 조앙님께 내 동생의 혹을 없애 달라고 열심히 비는 모습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그러던 중에 굿에 동원된 돼지가 꽤엑 고통스런 외마디를 지르면서 머리를 돌려서 당골레 할미의 집게손가락을 꽉 깨물어 버렸다.
어쩌면 돼지 불알을 너무 세게 주물러서 많이 아파 참을 수 없었던 거 같다.
사람도 불알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는 격어 본 남자라면 알 것이다.

그 순간 돼지는 도망가 버리고 당골 할미의 손가락에서는 뻘건 피가 흥건하여 도저히 굿을 진행할 수가 없게 되어 급히 된장으로 싸맨 후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동안 준비해온 세이레 당골 굿도 어긋나 버렸지만 옆에서 구경하던 우리는 너무 재미있어서 깔깔 웃으며 당골레를 놀려주고 있었다.
그 통에 할머니한테 야단을 단단히 들었으며, 굿을 망친 우리 집은 침울하기 까지 하였다.

 

그 이후로
혹 떨어져 달라고 빌고 빌었지만 혹은 점점 우리 혹보 동생과 함께 자라서 나중에는 아예 혹이 아닌 “복주머니” 또는 “똔(돈)”으로 할머니에 의해 온 가족은 불리게 되었다.

혹보는 크면서 복주머니 어디 있니? 하면
저고리를 올려서 자랑스럽게 혹을 자랑하곤 했다.

몇 년이 흘러서 혹보가 여섯 살 되던 여름의 일이다
혹보는 영리했고 명량해서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렸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물장난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부터 열이 몹시 나고 헛소리까지 하며 금방 죽을 것 같아 보였다.
동네 사람들은 물귀신에 씌어서 그렇다고 굿을 해야 된다고 야단했지만 자세히 살펴 본 결과 동생은 또래들과 놀다가 미끄러져서 그 커다란 옆구리 혹을 다친 것이었다.
복주머니는 퉁퉁 부어 금방 터질 듯 했다.

동네 사람들은 뱃속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칼을 대면 벌을 받는다고 수군거렸지만 할머니께서는 이러다가 애를 놓칠 수 있다는 염려로 부랴부랴 집에 있는 돈을 다 모아 동생을 들쳐 업고 6시간의 여객선을 타고 목포 병원에 입원시켰다.
뱃속에서 달고 나온 복주머니를 수술한다는 것이 가족을 두렵게 하였지만…….
꼭 일주일 후
내 동생 혹보는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할머님의 손을 잡고 동네 모퉁이 길을 내러 올 때 온 식구는 좋아서
혹보야! 환호성을 질렀다.
혹보는 좀 여의기는 하였지만 살결은 뽀얗고 상당히 예뻐져 있었던 것이다.
손에는 장난감 권총을 땅땅하는 시늉을 하면서 오히려 으시대면서…….
혹보…….
할머니께서는 자기의 치성이 비로소 이루어 지셨다며 금날 저녁 조앙 할미께 정화수 떠놓고 감사의 치성을 드리셨다.
그 후 식구들이 “복주머니 어딧어?”하고 물으면
혹보는 저고리를 걷어 올리곤 하였지만 거기에는 혹은 이미 없었다.
“없다........나 복주머니 없다”
혹은 사라졌지만 집안 어른들은 그냥 혹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