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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전래(영국함대의 조선항해 관련)

麗尾박인태행정사 2007. 8. 17. 17:26
귀츨라프의 고대도 선교와 원산도 기념비의 비판적 고증

 

 

 

 

  귀츨라프의 고대도 선교와 원산도 기념비의 비판적 고증  

 

                          허호익(대전신학교 교수, 조직신학)

 

 

Ⅰ. 서 론

 

개신교 선교사로서 우리나라를 최초로 방문한 이는 중국선교사로 홍콩에 와 있던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1)라는 독일 출신 루터교 목사이다. 1832년 동인도회사에서는 극동의 새로운 통상지를 개척 탐사하려는 목적으로 타이완을 거쳐 조선 서해안과 제주도, 그리고 일본 오키나와에 이르는 항해를 계획하고 그 책임자로 린제이를 임명하였다.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는 중국 선교사 모리슨(R. Morrison)의 추천으로 중국어에 능통한 의사요 선교사인 귀츨라프 목사를 선의(船醫) 겸 통역관(通譯官)으로 동승시켰다. 동인도회사가 준비한 암허스트경호(Sir. S. Lord Amherst)는 1천 톤 급의 군함으로 선장 리tm(Rees)를 포함 67명의 승무원을 승선시켰다. 이 항해의 목적은 통상에 적당한 항구를 조사하고 그 지방관의 통상 개시에 관한 관심을 살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귀츨라프 목사는 이 항해를 극동의 조그마한 나라 조선에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절호의 선교 기회로 여긴 것이 분명하다. 모리슨도 그가 번역한 많은 한문성경을 지원하였고, 귀츨라프 자신도 선교에 필요한 책자와 선물을 많이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이 항해기간 동안 귀츨라프 선교사 일행은 1832년 7월 17일 장산곶(長山串)에 도착한 후 22일 녹도(鹿島) 동쪽의 작은 불모도(不毛島)를 거쳐 26일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소재한 고대도(古代島) 정박하였다. 그들은 홍주목사 이민회 등의 조선 관리들을 만나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조선 국왕에게 정식으로 통상을 청원하는 서한과 한문 성경을 비롯한 26종의 책자와 망원경을 포함한 많은 선물을 순조 임금에게 진상하도록 전달하였다. 그리고 조정의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고대도에 20일을 머무면서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과 전도문서와 서적 및 약품을 나눠주고, 감자를 심어주고, 감자와 포도주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가르쳐 주고 그리고 한글 자모를 받아 적은 다음 후에 이를 세계에 알리기도 하였다.

이는 시기적으로 보아 토마스 목사2)가 평양을 방문하여 대동강변에서 주민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다 순교한 1866년보다 34년 앞선 일이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인천에 상륙한 1885년보다 53년 앞선 일이었다.3) 그리고 최초의 가톨릭 선교사인 불란서 신부 모방(Pierre Maubant)이 내한한 1836년보다도 4년이나 앞선다.4)

귀츨라프의 서해안 방문에 관한 1차 사료는 귀츨라프 자신의 항해기5)와 린제이의 보고서6) 그리고《순조실록》을 비롯한 한국측 자료들이다.7) 이제까지의 연구는 이 모든 1차 사료를 비교 검토하지 않은 것이므로, 이 모든 1차 사료에 비추어 귀츨라프의 고대도 선교의 일정을 서술하고, 이와 더불어 귀츨라프 선교 150주년을 기해 1982년 원산도에 세워진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 기념비"의 역사적 고증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필자가 1998년 7월 14일 고대도와 원산도를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연구를 착수하게 된 것임을 밝혀 둔다.8)

 

 

Ⅱ. 귀츨라프의 조선 선교 일정(1832. 7. 17∼8. 17)  

 

귀츨라프 일행은 1832년 2월 27일 중국 꽝뚱(廣東)을 출발한 후 타이완을 거쳐, 7월 17일 "바실만 북쪽의 Chawang-shan이라는 섬"9)에 닻을 내렸다고 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중국에 거주하면서 조선 사정에 밝아 조선의 쇄국정책과 가톨릭에 대한 박해를 알고 있었으므로 위험을 무릅쓰고 해변에 올라가 두 조선인을 만나 어떤 한 노인에게 책 몇 권과 단추(lion buttons)를 주었다.

린제이의 항해기에는 7월 17일 정박한 곳이 대청군도(大靑群島, Sir James Hall's Group) 북쪽 'Chang-Shan Pungsang'이라 하였다.10) 이 날 린제이는 조선 국왕에게 보낼 통상을 청원하는 편지를 작성하였는데, 자신의 이름을 "Hoo Hea-me"(湖夏米)라 적고 날짜를 양력과 음력으로 '주후 1832년 7월 17일, 도광(道光) 12년 6월 20일'11)이라고 병기하였다. 이튿날(18일) 일행 8명 가운데 귀츨라프를 제외하고 모두 단검과 권총으로 무장한 뒤 상륙하니, 조선인 200명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이 불친절하고 식량을 팔지도 않고 서신도 받지 않고 방문자들을 떠나도록 요구하여서 아무 유익이 없었다고 한다.12)

이튿날인 18일(음력 6월 21일) 지역 관리를 만나 국왕에게 보낼 청원서를 전달할 고관을 찾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세히 알려 주지 않고 피하였다. 어떤 사람은 당장 물러가지 않으면 군병을 불러 몰아내겠다고 위협하였다. 몇몇 주민에게 책과 단추를 선물로 주었더니 손으로 목을 베는 시늉을 하면서, 책은 도로 돌려주고 갔다. 그래서 '책을 직접 전달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13)고 한다. 이틀 동안 'Chawang-shan island'에 머물면서 처음 만난 조선인에 대한 첫 인상을 귀츨라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인은 세상에서 가장 사람을 싫어하는(misanthropical) 민족이라 하지만, 협박과 상처를 입혀서라도 침략자를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민족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처음 조선인을 면담할 때부터 매우 의아하게 생각한 점인데, 그들이 겁이 많으며 무엇이든지 강하게 요구하면 불평없이 굴복한다는 나의 선입관을 입증할 만한 어떤 충분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 조선인들이 우리에게 냉담한 감정을 나타낸 것은 분명하지만, 악의 없는 외국인을 겉으로 원수같이 대접할 때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모든 인간의 가슴속에 있는 인간의 타고난 감정을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14)

 

동양 사정에 밝은 귀츨라프는 조선에서의 천주교의 박해 사실과 쇄국정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선입관과 달리 조선인들이 매우 용감하고 인정이 많다는 좋은 인상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7월 17∼18 양일간 귀츨라프 일행이 'Chang-shan이라는 섬'을 방문한 것은《순조실록》순조 32년 8월 11일자(양력 9월 6일) 황해감사(黃海監司) 김난순(金蘭淳)의 보고와 일치한다.  

 

지난 6월 21일[양력 7월 18일] 이양선 한 척이 長淵의 助泥鎭에 와 정박하자, 관내의 어부들이 생선과 서책을 바꾸고 그 鎭의 吏校 역시 筆札로 문답한 적이 있었는데,…… 추후에 들은 즉 배의 제작과 인물 언어 복색 등이 홍주에 정박한 英吉利배와 다름없었으나15)

 

이에 근거하여 진단학회의《한국사-최근세사후편》(1956)에는 귀츨라프 일행이 7월 18일 방문한 것으로 기록한 'Chang-shan도'(島)는 황해감사 김난순이 보고한 장연(長淵)의 조이진(助泥鎭) 앞바다이며 그곳이 현재의 '황해도 창선도(昌善島, 長淵縣16) 助泥津 夢金浦 前洋)라고 하였다.17)  

7월 23일 남쪽으로 계속 항해 한 끝에 여러 섬과 암초 사이에 닻을 내렸다고 한다.18) 린제이는 22일 바실만에 정박하였고, 23일 여러 조선인이 배에 찾아왔으나 필담을 나누지 못했고 23일 'Teng-no'라는 한문에 능한 조선인의 방문을 받고 필담을 통해 그들의 방문 목적을 전하였다고 한다.19) 그리고 그를 통해 그들이 정박한 곳이 'Lok-tao'(鹿島) 동쪽의 조그마한 불모도(不毛島)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20)   

7월 24일 'Teng-no'가 다시 찾아와 지금 정박한 곳이 대단히 위험하므로, 'Gan-Keang'이라는 항만으로 가면 안전히 닻을 내릴 수 있고 고관을 만나 무역상담을 하고 식량도 구할 수 있다고 권고하였다. 린제이는 그에게 그곳의 관리에게 자신들의 방문 목적을 적은 편지를 전했다.

7월 25일(음력 6월 28일) 'Gan-Keang이라는 항'21)에 도착하여 정박하기 알맞고 바람막이가 잘된 곳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Teng-no'와 함께 온 'Yang-chih'라는 자의 방문은 받는다. 린제이는 그를 'Yang-yih'라고 표기했고,22) '고관의 비서(書生)'라고 하였다. 백낙준은 홍주 목사의 서생(書生)일 것이라고 한다. 이 상이한 표현 때문에 김양선은 'Yang Chih'를 梁氏로 해석했고 백낙준은 김양선의 양씨설(梁氏說)은 근거가 없고, 이 서생의 이름은 '홍길동이'처럼 'OO양이'인데 서양인인 귀츨라프가 마지막 자 '양이'를 성(姓)으로 알고 쓴 것이라고 하였다.23) 어쨌든 그는 여러 가지를 질문하고 돌아 갔다.

7월 26일에는 나이가 지긋하고 위엄이 있는 "Kin이라는 성의 군관과 Le라는 성의 문관"24)의 방문을 받는다. 귀츨라프 일행은 그들이 조선을 방문한 목적이 국왕에게 통상을 정식으로 청원하는 서한과 함께 선물을 전하려는 것임을 밝히고, 조선관리들이 어느 정도의 호의를 보이자 한 나절 넘게 선물을 포장하였다.25) 그는 조선 국왕에게 성경책을 진상함으로 이 민족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감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린제이 선장은 성서 한 질과 내가 가지고 있는 전도문서 각 한 부씩을 포장하여 국왕에게 선물하라고 정중하게 요청하였다. 갑판 위에 찾아 온 사람들이 성서를 기쁘게 받는 것을 보고 아주 만족하였는데, 이제는 은둔국의 통치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유익을 얻기를 갈망하게 된 것이다. 국왕이라 하여도 죄 많은 인생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말씀보다 더 귀한 선물을 받을 수 있겠는가?26)

 

귀츨라프가 국왕에게 보낼 선물 목록은 성서 한 질과 전도문서 그리고 "유리 그릇, 옥양목(calicoes), 모직물(camlet), 담요 등과 한문으로 쓴 서한"27) 등이었다. 이 서한은 붉은 비단에 싼 통상청원서이다. 귀츨라프 일행은 마을에 상륙하여 서한과 헌상품을 두 고관에게 전달하였다. 그들은 위탁받은 물품을 빨리 진상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일에 관한 한국 측의 최초의 기록은 귀츨라프가 고대도에 도착한 지 10여 일이 지난 순조 32년 7월 8일(양력 8월 4일)자의 보고이다. 홍주목사(洪州 牧使) 이민회(李敏會)와 수군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綏)가 장계(狀啓)를 올려 이양선의 출현을 비변사에 보고하였고, 그 내용은 같은 날짜의《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과《일성록》(日省錄)에 기록되었다.

  

관내에 古代島에 표류한 사람이 있어 정박시킨 후 그곳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 필담으로 어느 나라 어느 지방 출신인지 물으니, 英吉利國이라 하였다.28)

 

이 보고를 받은 비변사는 다음 날인 7월 9일(양력 8월 5일) 이를 승정원에 보고한 것이다. 승정원에서는 통역관인 역학(譯學) 오계순(吳繼淳)을 파견하여 이양선의 동정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조치한다. 그리고 승정원의 지침에 따라 이 사건을 처리하다가 귀츨라프 일행이 고대도를 떠나도록 조치한 후 이 사안이 마무리되자 7월 21일(양력 8월 17일)자로 공충감사(公忠監司)29) 홍희근(洪羲瑾)으로 하여금 이 사건 전모를 정리하여 임금께 보고하도록 하였고, 이 날짜의 순조실록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6월 25일[양력 7월 22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三帆竹船 1척이 洪州 古代島 뒷 바다[後洋]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英吉利國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洪州 牧使 李敏會와 水軍虞候 金瑩綏로 하여금 달려가 問情하게 하였더니…30)

 

그리고 이 사건을 정리하여 예부(禮部)에 발송한 자문(咨文)은 다음과 같다.

  

본년 6월 2631)일 酉時 경에 異樣船 1척이 本州 古代道 安港에 정박하였는데, 듣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라서 譯學 吳繼淳을 차송하고 본 지방관 홍주 목사 이민회와 수군우후 김형수로 하여금 배가 정박한 곳으로 달려가서 합동으로 問情하게 하였더니…32)

 

따라서 귀츨라프의 조선 방문에 대한 1차 사료인 린제이 보고서와 귀츨라프의 항해기 그리고《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등 조정의 여러 기록을 비교해 보면 다음의 내용들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이양선이 서해안에 나타난 순조 32년 음력 6월 25일(충청도 감사 홍희근의 보고) 또는 26일(禮部에 보낸 咨文)은 암허스트경호가 서해안에 도착한 양력 1832년 7월 22일(린제이 보고서) 또는 23일(귀츨라프 항해기)과 일치한다.

둘째로 귀츨라프와 린제이가 정박지로 기록한 'Gan-Keang'이라는 항구 이름은 홍주 목사 이민회 등의 보고에 의해 충청도 홍주 '고대도 후양'(古代道 後洋) 또는 '안항'(安港)이라고 밝혀졌다.

셋째로 귀츨라프가 만난 "Kin이라는 성의 군관과 Le라는 성의 문관"은《순조실록》에 의해 수군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綏)와 홍주목사(洪州 牧使) 이민회(李敏會)로 확인되었다.

7월 27일에 다시 'Ten-no와 Yang-chih'가 와서 "모든 선원의 이름과 나이를 다시 세밀하게 적어 갔다"33)고 한다. 그리고《일성록》과《순조실록》에는 그 때 조사한 선원 67명의 명단이 한문으로 자세히 보고되어 있다.《일성록》과의 차이는 '의생'(醫生)을 '수생'(隨生)으로 표기했다는 점이다.《국역 순조실록》에는 이렇게 번역하였다.

 

船主는 四品 子爵 胡夏米이고, 六品 擧人은 隨生甲利 出海李士이며…34)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귀츨라프의 항해기와 린제이 보고서를 알지 못한데서 오는 정확하지 못한 것이므로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한다.

 

船主 四品 子爵 '湖夏米'는 휴 헤밀턴 린제이(Hugh Hamilton Linsey이고, 6품 擧人으로 '隨生 또는 醫生'인 '甲利'는 칼 귀츨라프(Karl Gützlaff)이고, 出海 즉 船長 李士는 리스(Captin Rees)이다.

 

이렇게 번역해야 할 근거는 다음과 같다. 린제이가 1832년 7월 15일에 작성한 국왕에게 보낸 문서 말미에는 "Hoo Hea-me"와 "Kea-le"라는 서명(Sign)이 적혀 있다.《일성록》과《순조실록》등에 기록된 '호하미'(湖夏米)가 바로 린제이의 이름 "Hugh Hamilton"의 한역이다.35) 함께 서명한 "Kea-le"는 귀츨라프의 이름 "Karl"의 중국식 음역이며, 한문으로는 '갑리'(甲利)로 표기하였다. 그러므로 '수생(隨生) 또는 의생갑리(醫生甲利)'는 수행 의사 귀츨라프로 확인할 수 있다.36) 그리고 '출해이사'(出海李士)는 항해를 관장하는 선장 "Captin Rees"를 지칭한다.37) 린제이를 선장으로 표기한 책이 많으나 리스가 선장이고 린제이는 선주이기 때문이다.38)  

27일 귀츨라프 일행은 고대도에 상륙하여 섬 전체를 돌아보았다. 단골 조사관인 'Yang Chih'와 'Teng-no'의 방문을 받고 그들에게 처음으로 필담(筆談)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비종교적인 민족이어서 생사간에 위로를 주는 구원의 도리를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인류의 구세주에 관하여 이야기할 기회를 자주 가졌고, 기독교가 시작한 시대에 대해 설명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전능하신 하나님이 또한 그들의 구세주라는 것을 여러 번 들려주고 읽어 주었지만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 하였다.39)

 

그리고 받겠다는 사람에게는 전도문서와 복음서를 주었으며, 성서를 줄 때에는 역사와 지리책도 함께 주었다. 한국 땅 최초의 선교사역에 대해 귀츨라프는 이렇게 기대하였다.

   

이 모든 일들은 내가 늘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간구한 결과 이뤄진 하나님의 역사이다. 조선에 파종된 하나님의 진리는 사라져 버릴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머잖아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가 되면 많은 결실이 있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쇄국정책을 제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할 것이다.40)

 

그는 서민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것에 가장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귀츨라프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린제이의 항해기에는 이날 양이(Yang-yih)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고 번역하도록 시도한 기록이 있다.

 

27일 오랜 설득 끝에 우리는 양이(Yang-yih)에게 한글 자모 일체를 쓰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귀츨라프가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쓰자, 그는 그것을 한글로 읽는 동시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그의 손으로 목 자르는 표시를 반복하면서, 만약 고관들이 알면 목이 달아날 것이라는 경고하였다. 그는 그 종이를 없애버리기를 애걸하였다. 그의 염려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그가 보는 앞에서 그 종이를 상자 속에 넣어 잠그고 누구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시켰다.41)

 

김양선은 "양씨(梁氏, Yang Chih)의 도움으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은 성서 한글 역의 효시가 되는 의의 깊은 일이다"42)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6개 국어 이상에 능통하였던 귀츨라프가 이 날 받아 적은 한글 자모를 그 해 11월의 The China Repository에 발표하여 한글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조선 사람의 고유한 글인 한글이 완전한 표음문자이며, "글자의 짜임새가 매우 간단하면서도 착상이 교묘하다"43)고 하였다. 그는 한글 책자를 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7월 30일 오후 귀츨라프는 해변에 감자를 심으러 갔으며 감자를 성공적으로 재배하는 법을 글로 써서 주었다고 한다.44) 린제이는 이를 더욱 자세히 기록하였다.

 

우리는 가장 좋은 땅을 찾고 골라서 100개가 넘는 감자를 심었다. 수백 명의 주민이 둘러서서 놀란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았다. 재배법을 설명한 종이는 땅 주인에게 주었고, 그는 잘 가꾸겠다고 약속하였다.45)

 

7월 31일에는 며칠 전에 섬을 돌아보면서 야생 포도를 발견한 것을 기억하고 주민들에게 포도주와 포도즙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46)

8월 2일(음력 7월 6일)은 고관에게 서신과 진상품을 전달한 지 8일째 되는 날이다. 귀츨라프는 늘 하던 대로 약을 주었는데, 이 날은 감기 환자 노인 60명 분의 약을 처방하여 나눠주었다. 그리고 이날에는 조정에서 파견한 우(Woo)라는 3등급 문관의 방문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였다.47)

한편 7월 8일(양력 8월 4일) 홍주 목사 등으로부터 영길리(英吉理) 선박의 고대도 인박(引舶)에 관한 최초의 보고를 받은 다음 날인 7월 9일, 승정원에서는 문정역관(問情譯官) 오계순(吳繼淳)을 파견하여 이양선을 자세히 문정하도록 결정한다.48) 귀츨라프와 린제이가 말한 'Woo Tajin'이 바로 오계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의정 김이교(金履喬)의 지시와 승정원의 지침에 따라, 홍주 목사 등이 조정의 사전 허락을 받기도 전에 외국인의 통상 청원서와 진상품(奏文과 禮物)을 받은 것은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와 사적(私的)으로 통상한 부당한 처사이므로49) 차후 엄히 문책하기로 한다. 그리고 사사로이 받은 주문과 예물은 전례도 없는 일이므로 귀츨라프 일행에게 환급 조치할 것을 지시한다.

8월 5일(음력 7월 9일) 오계순은 암허스트호에 승선하여 화물을 자세히 조사한다. 그리고 그 내용이 7월 11일자로 조정에 보고된다.50)

8월 7일(음력 7월 11일)에는 오계순의 지시로 김형수(水軍虞候 金瑩綏)가 서한과 진상품을 도로 가지고 오자, 귀츨라프는 그것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김형수는 이 선물을 임금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한 일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근심하였다.

이 날 귀츨라프 일행은 작은 배로 큰 항만을 탐사하기 위해 서북쪽의 어느 섬에 상륙하여 주민들에게 책을 전해 주고 그 이튿날 새벽에 돌아왔다. 이날은 양력 8월 8일(음력 7월 12일)인데《순조실록》과《일성록》의 충청감사 홍희근(洪羲瑾)의 보고에는 "7월 12일 모양이 이상한 배 한 척이 서산(瑞山)의 간월도(看月島) 앞 바다로부터 태안(泰安)의 주사창리(舟師倉理) 앞 포구(浦口)에 와서"51) 책자 4권을 주고 갔다고 한다.  

8월 9일(음력 7월 13일) 조정에서 보낸 특사인 오계순이 다시 와서 귀츨라프에게 "당신의 서한과 선물을 받는 것은 불법이오. 우리는 당신과 이 일을 성사시킨 나이 많은 두 관리의 잘못을 물을 것이오. 이는 불법이므로 우리는 당신이 청한 대로 국왕에게 올릴 수 없으므로 모두 당신께 되돌려 주는 것이오"52)라고 하였다. 귀츨라프와 린제이는 필담을 통해 외국의 통상 사례를 들어 그들을 설득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 통상청원서와 진상품에 대한 조정의 회답을 기다리라고 하고선 이제는 국왕에게 알리지도 않았다고 하는 조선 관리들의 변덕을 비난하고,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였다고 후회하였다.

8월 10일에는 이곳을 떠날 계획으로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관리들은 주민들이 암허스트호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정박지 근처의 가장 큰 섬에 상륙하여 잠시 둘러보았다. 이 섬은 인구가 조밀하고 지금까지 둘러본 섬 중에서 경작지가 제일 많다고 하였는데 고대도 건너편의 원산도로 짐작된다.53)

8월 11일(음력 7월 15일) 귀츨라프 일행이 요구한 물품이 공급되었다. 그리고 김형수(金瑩綏)가 서한과 진상품을 되돌려 주려는 마지막 시도를 하였지만, 귀츨라프는 한 번 준 것을 도로 받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하여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넓고 안전한 항구가 있는 'Gan-Kean''을 떠나며, 이해력은 많으나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주민들과 울면서 작별하는 심사를 이렇게 적어 놓았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큰 섭리로 자비로운 방문의 날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진리를 전파하도록 서둘러야겠다.

조선 국왕이 처음에는 거절하였던 성서를 지금 갖고 있는지 또한 읽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Gan-Keang'의 관리와 주민들은 성서를 받았다. 이 첫 전도는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실 것을 확신한다. 조선에 어두움이 가고 속히 새벽이 와서 밝은 날이 오기를 다같이 바랄 뿐이다.54)

 

귀츨라프가 홍주 목사 이민회와 수군우후 김형수에게 전달한 성서는 한양으로 보내지지 않았고, 그 경위만 보고되었다.《일성록》과《순조실록》에 의하면 음력 6월 17일 귀츨라프 일행이 떠난 후 그들이 남기고 간 주문(奏文)과 예물은 일일이 수량을 확인하여 궤에 봉하여 홍주 관고(官庫)에 보관하게 하고55), 충청 수사(水師) 이재형(李載亨)과 우후(虞候) 김형수와 홍주 목사 이민회는 타국과 사적으로 교류하고 문정(問情)을 지연하고 처리를 전착(顚着)한 죄를 물어 파직하였다고 한다.56)

 

 

Ⅲ.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 기념비」의 역사적 고증문제

 

최초의 내한 개신교 선교사인 귀츨라프 목사가 방한한 지 150년이 되는 1982년 7월 17일 이를 기념하여, 고대도(古代島)가 아닌 바로 건너편에 있는 원산도(元山島) 남쪽 해수욕장 동편 언덕에 역사적인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 기념비"가 세워진 것을 그곳에 방문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57) 기념비의 내용은 이러하다.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M.D) 기념비

 (화란선교협의회 소속, 독일신교 선교사)

 1803년 피릿즈 / 포다라니58)에서 출생

 1851년 홍콩에서 소천

 카알 귀츨라프(의사) 선교사는 1832년 7월 17일 이곳에 도착하여 한문으로 된 전도지와 주기도문, 그리고 감자 종자를 이곳 도민에게 전함. 그의 전기에는 그는 확신을 가지고 "보다 훌륭한 여명의 날이 한국에 빨리 오기를 바람"이라고 언급함.

 -그가 오셨든59) 150주년을 기념하여 1982년 7월 17일 이를 세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의회(KCMEA)

                 주한서독대사관

                 주한화란대사관

                 학교법인 송죽학원

                 지역사회개발위원회

 

기념비 뒷면에는 영문과 독문으로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기념비에 새겨진 송죽학원의 설립자 겸 이사장은 남장(男裝) 여인으로 유명한 국회의원 김옥선 씨라고 한다. 김옥선 씨는 원산도 출신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원산도에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고 학교도 세 곳이나 세웠으며,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애를 쓴 분으로 주민들의 신망이 높다고 한다. 기념비를 꼼꼼히 살피고 비문과 기단과 둘레를 실측(實測)하고 몇 장의 사진도 촬영하였다.60)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귀츨라프의 서해안 방문에 관한 1차 사료 어디에도 원산도라는 지명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귀츨라프 일행이 1832년 7월 17일 방문한 곳은 원산도가 아님이 분명하고, "한문으로 된 전도지와 주기도문, 그리고 감자 종자"를 전한 곳도 원산도가 아니고 그 날짜도 7월 17일이 아니다. 따라서 원산도 소재 "선교사 귀츨라프 기념비"의  내용 하나 하나에 대한 역사적 고증이 요청된다.

 

 

1. 귀츨라프는 1832년 7월 17일 원산도에 도착했는가?

 

먼저 귀츨라프가 1832년 7월 17일에 방문한 서해안의 지명을 고증해 볼 필요가 있다. 귀츨라프에 의하면 1832년 2월 27일 중국 꽝뚱(廣東)을 출발한 후 타이완을 거쳐, 7월 17일 "바실만 북쪽의 Chawang-shan이라는 섬"61)에 닻을 내렸다고 한다. 린제이의 항해기에는 7월 17일 정박한 곳이 대청군도(大靑群島, Sir James Hall's Group) 북쪽 'Chang-Shan Pungsang'이라 하였다.62) 이 날 린제이는 '도광(道光) 12년 6월 20일'63)이라고 병기하였다. 황해감사(黃海監司) 김난순(金蘭淳)의 보고에는 귀츨라프 일행이 방문한 날이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18일)이며 방문한 곳은 "장연(長淵)의 조이진(助泥鎭)"이라고 하였다.64) 이를 종합하여 진단학회의《한국사-최근세사후편》(1956)에는 귀츨라프 일행이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18일) 도착한 곳을 황해도 몽금포 앞 바다에 있는 "창선도(昌善島, 馬淵縣65) 助泥津 夢金浦 前洋)"66)라고 하였다.

그러나 리진호는 "Chawang-shan 또는 Chang-shan"은 발음상 창선보다는 장산(長山)에 가까우며, 린제이의 항해기에는 7월 17일 정박한 곳이 대청군도(大靑群島, Sir James Hall's Group) 북쪽이라 했으니, 그곳은 장산곶(長山串)이 확실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귀츨라프 일행이 방문한 홍주만 북쪽과 소청군도 남쪽에 위치한 'Chawang-shan 또는 Chang-shan이라는 섬'은 그들이 돌출된 지형으로 인해 섬으로 오해한 장산곶이 분명하다는 주장이다.  

귀츨라프 일행이 일 주일 후 고대도 앞 바다에 도착하였을 때 홍주 목사가 그들이 거쳐온 조선 지역을 문정(問情)한 후 그들이 장산(長山)과 녹도(鹿島) 동쪽의 작은 불모도(不毛島)를 경유하였다고 기록한 것67)으로 보아 귀츨라프와 린제이가 "Chawang-shan 또는 Chang-shan"이라고 기록한 섬은 장산곶이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러므로 귀츨라프가 1832년 7월 17일 방문한 곳은 황해도 장연군 조이진 몽금포 앞바다(長淵縣 助泥津 夢金浦 前洋)이거나 장산곶이므로, 원산도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귀츨라프가 "1832년 7월 17일 이곳[원산도]에 도착했다"는 기념비의 내용에 대한 1차 사료적 근거는 전무하다. 이 사건과 관련된 1차 사료 어디에도 1832년 7월 17일 귀츨라프 일행이 원산도에 왔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2. 귀츨라프가 주기도문과 감자를 전한 곳이 원산도인가?

  

귀츨라프 일행은 장산곶을 떠나 남쪽으로 계속 항해 한 끝에 7월 23일 여러 섬과 암초 사이에 닻을 내렸다고 한다.68) 그러나 린제이는 22일 바실만(홍주만)에 정박하였고, 23일 그들이 정박한 곳이 'Lok-tao'(鹿島) 부근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69) 그리고 24일에는 그들이 정박한 곳이 대단히 위험하므로, 'Gan-Keang'이라는 항만으로 가면 안전히 닻을 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25일(음력 6월 28일) 'Gan-Keang'70)이라는 곳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귀츨라프와 린제이가 지방 관리를 만나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통상 청원서와 진상품을 전당하고, 한문으로 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고, 100개가 넘는 감자를 심어주고, 주민들에게 약을 나눠주고, 포도주 만드는 범을 가르쳐 준 곳이 'Gan-Keang'이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 지명은 현재의 지도상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는 지명이다. 그렇다면 이 'Gan-Keang'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가?

한국측 자료에는 홍주목사 이민회와 수군우후 김형수 그리고 문정역관 오계순 등이 귀츨라프 일행을 여러 번 만난 곳이 고대도(古代島)라고 보고하고 있다.71) 홍주 목사 등이 자기 관할 구역의 지명을 틀리게 국왕에게 보고하였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에, 귀츨라프가 'Gan-Keang'이라고 기록한 곳이 당시의 행정 구역상 고대도가 분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귀츨라프와 린제이는 왜 고대도를 'Gan-Keang'으로 표기하였을까? 귀츨라프는 예수회 수신지도(Jesuits' charts)를 가지고 있었는데72) 그가 상륙한 섬의 정확한 지명을 밝히지 않고 주민들의 부르는 대로 'Gan-Keang'이라고 한 것이 사실이다. 그 섬이 작은 섬이어서 그 지도에는 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신편동국여지승람》(1530)에는 고대도(古代島)가 고태도(古台島)로 표기되어 있을 뿐 'Gan-Keang'과 유사하게 표기되는 도서(島嶼)는 등장하지 않는다.73)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에 안면도 서남쪽 지금의 고대도가 있음직한 위치에 "경"(鏡)이라는 섬이 표기된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 '경'이라고 한 것을 귀츨라프가 'Gan-Keang'이라고 한 것이 아닌가라고 리진호는 추측하였다.74) 구스다(楠田斧三郞)는 이를 "강경"(江景)75)으로 번역했으나, 현재의 지명인 논산군 강경읍(江景邑)은 내륙에 있어 섬은 아니다.

김광수는 "귀츨라프 목사의 일기문에는 이 안항(安港)을 'Gan-Keang'이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중국 발음의 오기인 듯하다"76)고 하였다.

고대도의 주민들에게 조사해 보니 그들의 기억으로는 경 혹은 간경이나, 안항(安港)이라는 지명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고대도를 방문하였을 때 하옥희 권사는 고대도가 여러 섬으로 둘러싸여 있어 6·25 전쟁 때를 비롯하여 큰 배들이 태풍을 피해 고대도 앞에 정박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고 하면서 원산도에는 큰 배가 정박할 안전한 항이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천 톤급의 큰 배가 '정박하기가 알맞고 바람막이가 잘 된 곳'으로 알려진 'Gan-Keang' 즉, '고대도안항'(古代島安港)이 '고대도의 안전한 항구'가 아닌가 여겨진다. 지리적으로 농업을 주로 하는 원산도에 선착장이 개설된 시기는 근래이며, 고대도는 어업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선착장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77)

그리고 리진호는 귀츨라프가 7월 30일 이 섬에 상륙하여 감자를 심은 다음 찾아간 도광(道光) 3년(1823년)에 건축된 것으로 확인한 "언덕 위의 절"이 바로 고대도에 지금도 남아 있는 당제(堂祭)를 지내던 산당(山堂)임에 틀림없다고 확인하였다.78) 따라서 귀츨라프가 주기도문을 전하고 감자를 심어준 곳이 고대도인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원산도 소재 선교사 귀츨라프의 기념비가 "주기도문과 감자종자를 이곳[원산도] 도민에게 전함"이라고 기록한 것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 귀츨라프의 원산도 방문을 기록한 역사서가 있는가?

 

귀츨라프의 조선 서해안 방문에 관한 1차 사료들에는 원산도에 대한 언급이 전무하다. 그러나 2차 사료이긴 하지만 귀츨라프의 원산도 방문을 언급한 역사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귀츨라프의 서해안 방문을 언급한 2차 사료들의 진정성을 역사순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① 달레(C. Dallet)는 귀츨라프가 서해안을 방문한 지 42년이 지난 1874년에 저술한《한국천주교회사》에서 원산도를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그 해(1932) 여름에 조선 해안에는 英國의 國旗가 나타났다. 聖書協會의 몇몇 간부들이 보낸 듯 싶은 商船 한 척이 忠靑道 서쪽 해안에 이루어진 灣의 어귀 가까이에 있는 元山島에 접근해 왔다.79)

 

이 배는 '야소교'(耶蘇敎)라는 깃발을 달고 있어 그곳 주민 가운데 천주교인들이 몰래 방문하였다가 "어떤 개신교 목사가 '지신(地神)의 축복을 많이 받으시오'라고 외교인들이 즐겨 쓰는 인사말"80)을 하자 인사도 받지 않은 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배는 1개월 이상 그곳에 정박하면서 종교서적 궤짝을 해변 여러 곳에 내려놓고, 배를 방문한 관리들을 통해 한문책과 영어책을 여러 권 임금에게 드렸으나 왕은 그 선물들을 받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열지도 못하게 한 채 즉시 그 외국인들에게 환송(還送)케 하였다고 들은 것으로 적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상륙을 포기하고 "나라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판단"81)을 내리고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달레의 교회사(1874)에는 귀츨라프의 항해기(1834)나 린제이의 보고서(1833)가 있는지 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1832년 여름 동인도회사가 파견한 암허스트경호를 영국성서공회가 파견한 상선으로 오해한 것이나, 개신교 목사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들이 서해안에 도착한 날짜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렇다. 단지 소문으로 들은 것을 출처도 없이, 어떤 개신교 목사가 그 해(1832년) 여름 어느 날 원산도에 왔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달레(C. Dallet)의 기록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조선에 한번도 온 적이 없는 그가 귀츨라프가 서해안에 온 지 40년이 지나서 정확한 출처도 없이 기록한 것이 정확할 리가 없을 것이다.82)

② 휘트모어(Norman C. Whittemore)는 1920년 "귀츨라프 약전"83)에서 귀츨라프 항해기를 인용하여 1832년 7월 17일 전라도와 충청도 경계에 위치한 바실만(Basil's Bay) 북쪽 장산도에 닻을 내리고 몇 군데 섬과 내륙으로 들어가 "전도문서와 단추와 약품을 거저 나누어주었고 감자를 심어 재배법을 가르쳤다"84)고 하였다. 이는 정확한 것이 아니며 귀츨라프의 7월 17일자 일기와 불일치하는 내용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귀츨라프의 기록에 의하면 감자를 심어 준 곳은 그가 "Gan-Keang"이라 칭한 섬이며 날짜도 7월 30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휘트모어가 달레의 기록에 등장하는 '어떤 개신교 목사'가 바로 귀츨라프라는 것을 밝혀주었다는 점이다. 양자의 여행 연도와 여행지가 같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휘트모어는 'Gan-Keang이라는 더 좋은 정박지'가 원산도와 일치하는지 여부에 관해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③ 백낙준은 1927년 저술한《한국개신교사》(영문판)에서 1832년 여름 '배가 충청도 서해안 원산도에 정박'하였다는 달레(C. Dallet)의 글을 비판없이 그대로 인용하였다.85) 그러나 귀츨라프 일행이 원산도에 정박한 날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린제이 보고서만 인용하여 1832년 7월 27일 한자 주기도문을 한글로 베끼게 하였다고 적고 있을 뿐, 그 섬에 상륙하여 감자를 심어주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④ 이능화는 1928년《조선기독교급외교사》(하편)에서 "영국인이 와서 교역을 청하다"(英吉利人來請交易)라는 소제목으로《순조실록》의 해당 기사의 토를 달아 전제하였다. "선주는 4품 자작(子爵) 호하미(湖夏米) 6품 거인수생갑리출해이사(擧人隨生甲利出海李士)오"86)라고 하였을 뿐 이들이 누구인지 밝히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측 자료를 처음으로 밝힌 것은 큰 공헌이다.

⑤ 연희전문학교 교수였던 로즈(H. A. Rhodes)는 1931년에 쓴 "최초의 한국개신교 선교사"87)라는 글에서 린제이의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1832년 7월 21일 오후 5시 조류가 돌아갔으므로 바실만 지점에 닻을 내렸는데 24일 한문에 정통한 'Teng-no'라는 조선인이 방문하여 10마일 떨어진 안전한 항구에 안내하고 25일에는 다시 녹도에서 7마일을 지난 곳으로 이동하였다고 적고 있다.88) 그리고 7월 27일 귀츨라프 일행이 해변에 상륙하였고, 이튿날에는 감자를 심으러 상륙하였다는 린제이의 기록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로즈도 귀츨라프가 상륙하여 감자를 심은 섬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다. 한국측 자료나 귀츨라프의 항해기는 인용하지 않았다.

⑥ 진단학회에서 1965년 발간한《한국사-최근세 후편》은《순조실록》(순조 32년 7월)과 귀츨라프의 항해기를 연결시켜 외국선으로서는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교역을 구하러 온 '영길리인'(英吉利人)이 바로 암허스트경호를 타고 온 린제이와 귀츨라프 일행인 것으로 밝히고 있다.89) 그리고 귀츨라프와 린제이가 7월 17일 처음 'Chawang-shan이라는 섬'을 거쳐 남하하여 7월 22일 녹도에 근처 무인도에 도착하였다가 7월 25일(음력 6월 28일) 고대도로 이동하여 정박하였다고 기록한 내용이《순조실록》의 기록과 일치함을 처음으로 밝혔다.

 

陰曆 六月 二十一日[양력 7월 17일]에 먼저 黃海道 昌善島(馬淵縣 助泥津 夢金浦 前洋)에 들러 현지 吏校와 筆答을 交換하고, 數日後에는 公忠道 洪州牧의 不毛島에 漂戈하는 것을, 二十八日(陽曆 七月 二十五日)에 邊吏들이 古代島安港에 引舶케 하였다.90)

 

귀츨라프와 린제이가 말한 'Chawang-shan 또는 Chang-shan이라는 섬'과 'Gan-Keang이라는 항'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들 일행이 7월 17일 거쳐온 섬은 창선도이고, 7월 25일 정박한 곳이 '고대도안항'으로 확인한 것은 이《한국사-최근세 후편》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 책도 린제이의 보고서는 참고하지 못했다.

⑦ 김양선은 1971년에 저술한《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귀츨라프 목사가 1832년 7월17일 황해도 백령도 부근에 상륙하여 도민에게 성경을 나눠주고, '25일 홍주(洪州) 고대도 안항(安港)에 도착하였다'91)고 하였다. 그리고 "귀츨라프 목사가 도민에게 감자 종자를 주고 그 심는 법과 저장법을 써 주어 감자가 충청도 일원에 퍼진 것"92)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양씨(梁氏, Yang Chih)의 도움으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은 성서 한글 역의 효시가 되는 의의 깊은 일"93)이라고 하였다. 김양선은 한국교회사가로서는 처음으로 귀츨라프가 성경을 나눠주고 감자를 심어주고 주기도문을 번역하여 가르쳐준 곳이 원산도가 아니라, 고대도라는 것을 밝혀 준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 출처는 밝히지 않았다.

⑧ 리진호는《귀츨라프와 고대도》(1997)라는 책에서 귀츨라프 항해기 등을 역주(譯註)하면서, 8월 10일의 일기에 "부근에 큰 섬에 올라갔는데 이 섬은 인구가 조밀하고 지금까지 둘러본 섬 중에서 경작지가 제일 많다"94)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원산도가 아닌가 추측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고대도 근방의 가장 큰 섬은 안면도인데 이 섬은 린제이 선장이 자기 이름을 따서 린제이 섬이라고 하였고, 그 다음으로 큰 섬이 원산도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95)

그러나 귀츨라프가 8월 10일 상륙한 '근처의 가장 큰 섬'이 원산도라고 추측하여도, 귀츨라프와 린제이의 기록에는 이 큰 섬에서도 감자나 주기도문을 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단지 한 노인에게 책 몇 권과 단추를 전해 주고 그 섬에서 쫓겨난 것이다.96) 그리고 '근처의 가장 큰 섬'은 조선 관리들에 의해 주민 접촉 금지가 내려진 이후 몰래 잠깐 방문한 곳이다. 귀츨라프 일행이 3일 전인 8월 7일 야간을 이용하여 관리들 몰래 간월도(間月島) 앞바다에서 태안의 주사창리(舟師倉理) 앞바다까지 접근하여 책자 4권을 주고 이튿날 돌아 온 것을 조선 관리들이 알고 그후부터는 그들에게 주민 접촉을 금하고 조선인들에게도 귀츨라프 일행에게 무엇이든지 받는 자는 엄히 다스린다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97) 그러므로 8월 10일에는 원산도에 상륙하여 장기간 머물면서 전도지나 주기도문이나 감자 종자를 나누어주는 일이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런 기록도 전무하다.

김양선의《한국기독교사 연구》(1971) 이후에 저술된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에서 언급한 논저 가운데 일부를 원용하여 귀츨라프 일행이 고대도에 상륙하여 감자를 심어주고 주기도문을 번역하고 성경과 전도책자와 약을 나눠주고 포도주 제조법을 가르쳐 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귀츨라프가 1932년 7월 17일 원산도에 도착하여 "한문으로 된 전도지와 주기도문, 그리고 감자 종자를 이곳 도민에게 전하였다"는 원산도의 '선교사 칼 귀츨라프 기념비'의 내용은 모두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역사적 기념비를 세울 때에는 철저한 역사적 고증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 귀츨라프에 생애에 관해서는 다음 자료를 참고할 것.

    이응호, "Gützlaff 목사가 쓴 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의 연구",〈명지어문학〉제10호, 1978, pp. 36∼39 ; 리진호,《귀츨라프와 고대도》, 감리교출판사, 1997, pp. 15∼119 ; 최완기, "귀츨라프와 토마스의 만남",〈신학과 신앙〉제4집, 1990, pp. 152∼158 ; H. A. Rodes, "First Protestant Missionary to Korea-1832", The Korea Mission Field, 1931.11, pp. 223∼228 ; N. C. Whittemore, "Notes on the life of Rev. Karl F. A. Gützlaff, First Protestant Missionary to visit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1920. 1, pp. 17∼19 ; Hermann Schlyter Herman, Der China-Missionar Karl Gützlaff und Seine Heimatbasis, Sweden : Ljungbergs Boktrycheri AB Klippan, 1976 ; G. E. Erdbrink, Gützlaff, de Postel der Chiezen, in Zijn Leven en Zijne Werkzaamheid, Rotterdam : M. Wijt & Zonen, 1885 ; K. F. Neumann, Gützlaff's Geschichte des chinesischen Reiches von den ältesten Zeiten bis auf Frieden von Nanking, Stuttgart und Tübingen : J. O. Cottaschen Buchhandlung, 1847 ; J. C. Lutz, "K. F. A. Gützlaff : Missionary Entpreneur," Christianity in China : Early Protestant Missionary Wrightings, eds. S. W. Barnett and J. K. Fairbank, Cambridge : Harvard Univ. 1985.

 2) 민경배,《교회와 민족》, 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p. 50. 민경배는 토마스 목사가 조선을 방문한 것이 귀츨라프 항해기의 영향일 것으로 추정한다.

 3) 최완기, "귀츨라프와 토마스의 만남",〈신학과 신앙〉제4집, 1990, pp. 147∼152. 최완기는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귀츨라프가 루터교 목사인 것을 강조하면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라의 내한을 기점으로 "한국기독교100주년"으로 표기하는 한국교회사 기술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기산년도를 귀츨라프의 방한 연도인 1832년으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4) N. C. Whittmore, "Notes on the life of Rev. Karl F.A. Gützlaff, First  

   Protestant Missionary to visit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1920. 1. p. 18.

 5) Karl Gützlaff, The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 1833 with Notices of Siam, Corea and Loo Choo Island(London : Frederick Wesley & Davis), 1834, pp. 316∼355.

 6) H. H. Lindsay, H. H, Report of Proceedings on a Voyage to the Northern Ports of China in the Ship Lord Amherst, London : B. Fellowes, Ludgate Street, 1833. 이 책의 1부는 "Mr. Lindsay's Report(pp. 1∼168)"인데 그 중에 조선 탐방에 관한 것은 pp. 215∼268이다. 2부는 "Rev. Mr. Gutzlaff's Report"(pp. 269∼296)인데 조선 항목은 pp. 293∼294에 불과하다.

 7)《純祖實錄》순조 32年 7月 21日 公忠監司 洪羲瑾의 보고서 ;《純祖實錄》순조 32年 8月 11日 黃海監司 金蘭淳의 보고서 ;《日省錄》純祖 7月 8∼12, 14, 16, 18∼21日, 8月 7, 8, 11, 13, 23日 ;《承政院日記》道光 12年 7月 9, 10, 18, 19, 21日, 8月 7, 8, 10, 23日 ;《備邊司謄錄》純祖 32年 7月 6, 8, 11, 18, 21日 ;《同文彙考》原編續漂民五上國人.  

 8) 대전신학교 한국종교문화연구소에서는 중부권 선교 유적지 발굴을 위해 1998년 7월 14일 소장 정행업 학장과 연구위원 황순환 교수를 비롯한 필자가 고대도와 원산도를  답사한 바 있다. 그때의 고대도 탐방기는 필자의 아래의 글을 참고할 것. 허호익, "귀츨라프 선교사의 고대도 선교",〈청풍〉, 대전신학교 한국종교문제연구소, 1988, pp. 129∼163.  

 9) Karl Gützlaff, "Chawang-shan, an island north of Basil's Bay," 1834, p. 320.

10) H. H. Lindsay, 1833, p. 252.

11) 위의 책, p. 217. "Dated in the Year of Our Lord 1832, on the 17th day of  July. / Taou-Kwang, 12th Year, 6th moon, 20th Day." 여기서 道光은 중국 청나라 제8대 황제 旻窓(1821∼1850)의 연호이다.

12) 위의 책, p. 220.

13) Karl Gützlaff, 1834, p. 325.

14) 위의 책, p. 325.

15)《純祖實錄》순조 32年 7月 21日 ; 세종대왕기념사회편,《순조실록》13, p. 102.

16) 진단학회,《한국사-최근세사후편》, 1965, p. 402. 본문의 '馬淵'은《순조실록》의 長淵의 오식 같아 보인다.

17) 위의 책, p. 402.

18) Karl Gützlaff, 1834, p. 327.

19) H. H. Lindsey, 1833, pp. 221∼222.

20) 위의 책, p. 224 ;《日省錄》純祖 32年 7月 8日. "鹿島東小島下卽不毛島."《日省錄》은 이 날(음력 6월 26일) 그들이 도착한 곳이 녹도 동쪽 작은 무인도라고 한다. 녹도는 고대도와 마찬가지로 충남 보령군 오천면에 소재하고 있다.

21) Karl Gützlaff, 1834, p. 329 ;  H. H. Lindsey, 1833, p. 294.

22) Karl Gützlaff, 1834, p. 330 ;  H. H. Lindsey, 1833, p. 224.

23) 김양선, 1971, p. 43 ; 백낙준, 1973, p. 48(영문판 45).

24) Karl Gützlaff, 1834, p. 333 ; H. H. Lindsey, 1833, p. 225 ; H. A. Rhodes, 1931. 린제이는 전자를 'chief in general'인 Kin Tajin이라고 하였고, 후자를 'civil chief'인 Le Ta-lou-yay라고 하였다. H. A. Rhodes는 "Tajin is Taijin(great man)" 즉 大人이라고 하였다.

25)《純祖實錄》순조 32年 7月 21日. 그가 꾸린 짐은 奏文 1봉과 禮物 3봉이라 한다.

26) Karl Gützlaff, 1834, p. 332.

27) 위의 책, p. 333 ; H. H. Lindsey, 1833, p. 227. 린제이가 작성한 예물 목록은 다음과 같다. "여러 색깔로 된 최고급 넓은 천 4필, 옥양목 6필, 모직물 14필, 망원경 2개, 향수병과 꽃병 같은 유리 그릇 각 6개, 사자무늬 제복 단추 12다스, 성경전서 두 질, 지리 천문학 과학책 등 여러 종류의 책"이다.《純祖實錄》순조 32년 7월 21일(새종대왕기념사업회 역편, pp. 89∼90)의 충청도 감사 홍희근이 보고한 예물 목록은 大尼 홍색 1필, 청색 1필, 흑색 1필, 포도색 1필과, 牛毛 홍색 1필, 청색 1필, 포도색 1필, 종려색 1필, 황색 1필과 洋布 14필, 千里鏡 2개, 琉璃器 6건, 花金뉴 6배, 본국의 道理書 26종이다. 귀츨라프와 린제이와 실록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성경전서가 한 질인지 두 질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그 외는 실록의 목록이 제일 자세하고 정확한 것 같다.

28)《日省錄》純祖 32年 7月 8日 ;《備邊司謄錄》純祖 32年 壬辰 7月 初八日.

29) 공충은 현재의 충청도를 말한다.

30)《純祖實錄》순조 32년 7월 21일 ; 세종대왕기념사업회편,《순조실록》13, p. 87.

31) 충청도 감사 홍희근의 보고에는 6월 25일(양력 7월 22일)이라고 했으나, 咨文에는 6월 26(양력 7월 23일)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린제이는 7월 22일이라 했으나, 귀츨라프는 7월 23일이라고 한다.

32)《純祖實錄》순조 32年 7月 21日 ; 세종대왕기념사업회편,《순조실록》 13, p. 91. 같은 자문의 내용이《同文彙考》原編續漂民五上國人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33) Karl Gützlaff, 1834, p. 336.

34)《日省錄》純祖 32年 7月 8日 ;《純祖實錄》순조 32年 7月 21日.  

35) H. H. Lindsey, 1833, p. 4. 린제이는 자신이 Chuen-Choo(船主)로 행사했으며 그의 이름 Hugh Hamilton을 중국어로 Hoo Hea-me로 표기하기로 하였다고 적고 있다.

36) 이응호, 1978. p. 36. "중국에서의 이름은 郭實獵이고, 한국에서의 이름은 甲里이다"라고 한다.  

37) H. H. Lindsey, 1833, p. 244. Captain Rees의 이름이 등장한다.  

38)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기독교의 역사 I》, 기독교문사, 1989, p. 4. 이 책에서는 린제이를 선장이라 했으나, 선장은 Captin Rees이다.

39) Karl Gützlaff, 1834, p. 338.

40) 위의 책, pp. 339∼340.

41) H. H. Lindsey, 1833, p. 239.

42) 김양선, 1971, p. 43.

43) 이응호, 1978, p. 61.

44) K. Gützlaff, 1834, pp. 341∼342.

45) H. H. Lindsey, 1833, p. 236 ; 김인수,《한국기독교회의 역사》, 장신대출판부, 1997, p. 100.  김인수는 "감자를 해안 100여 군데에 심어 준 것"으로 번역하였다.

46) K. Gützlaff, 1834, pp. 343∼344.

47) 위의 책, 1834, p. 347 ; H. H. Lindsey, 1833, p. 245. 린제이는 Woo Tajin(吳大人)이라고 하였다.

48)《純祖實錄》순조 32年 7月 21日 別定譯官이라고 하였다.

49)《日省錄》純祖 32年 7月 9日 ; 不當與他國之私交……是無前之例.

50)《日省錄》純祖 32年 7月 11日. 이 보고서에는 그들이 소지한 무기 종류도 자세히 조사되어 있다.  

51)《純祖實錄》순조 32年 7月 21日 ;《日省錄》순조 7月 23日.

52) Karl Gützlaff, 1834, p. 349.

53) 위의 책, p. 351.

54) 위의 책, p. 354.

55)《日省錄》純祖 32年 7月 21日.

56)《純祖實錄》순조 32年 7月 21日.

57) 리진호,《귀츨라프와 고대도-최초로 내한한 선교사와 고대도 전도》, 감리교출판사, 1997, p. 80. 이날 오후 1시 40분에 열린 기념비 제막식의 주체는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의회이며, 김옥선 장로와 원의중학교 학생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소영 목사(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의 설교(사도행전 1 : 8)가 있었다고 한다.

58) N. C. Whittemore, 1920, p. 17 ; 리진호, 1997, p. 19 ; 최완기, 1990, "귀츨라프와 토마스의 만남",〈신학과 신앙〉제4집, p. 152, 귀츨라프의 출생지 포다라니는 포메라니아(Pomerania)의 오기일 것이다. 기념비 뒷면에 영문으로 'Pomerania'로, 독문으로 'Pommern'이라 표기 된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59) '오셨든'은 문법적으로 '오셨던'으로 표기해야 할 것이다.

60) 비문의 크기는 가로 120㎝, 세로 75㎝, 폭 21㎝이며, 기단은 높이는 88㎝이고, 둘레는 393×221㎝이다.

61) Karl Gützlaff, 1834, p. 320. "Chawang-shan, an island north of Basil's Bay."  

62) H. H. Lindsay, 1833, p. 252.

63) 위의 책, p. 217. "Dated in the Year of Our Lord 1832, on the 17th day of July. / Taou-Kwang, 12th Year, 6th moon, 20th Day." 여기서 道光은 중국 청나라 제8대 황제 旻窓(1821∼1850)의 연호이다.

64)《純祖實錄》순조 32年 7月 21日 ; 세종대왕기념사업회편,《순조실록》 13, p. 102.

65) 진단학회 편,《한국사-최근세사후편》, 1965, p. 402. '馬淵'은《순조실록》의 長淵의 오식인 것 같아 보인다.

66) 위의 책, p. 402.

67)《日省錄》純祖 32年 7月 12日·14日.  

68) Karl Gützlaff, 1834, p. 327.

69) H. H. Lindsey, 1833, p. 224 ;《日省錄》純祖 32年 7月 8日. "鹿島東小島下卽不毛島."《日省錄》은 이 날(음력 6월 26일) 그들이 도착한 곳이 녹도 동쪽 작은 무인도라고 한다. 녹도는 고대도와 마찬가지로 충남 보령군 오천면에 소재하고 있다.

70) Karl Gützlaff, 1834, p. 329 ;  H. H. Lindsay, 1833, p. 294.

71) 주 7의 참고문헌을 참고할 것.《순조실록》에는 '古代島後洋'이라는 표현과 '古代島安港'이라는 표현이 동시에 나온다.

72) Karl Gützlaff, 1834, p. 348.

73)《新編東國與地勝覽》洪州牧. 홍주목 南海에 있는 6개의 섬만 기록하고 있다. 즉 元山島(주위 47리), 冬乙非島(주위 113리), 芿盆島(주위 95리), 沙邑詩島(주위 59리), 興兒音島(주위 29리), 古台島(주위 29리)이다.

74) 리진호, 1997, p. 57. 주 38.

75) 楠田斧三郞, "Gützlaff의 朝鮮沿岸航海記", 1933 ; 이원순 역,〈韓國天主敎會史 論文集〉제2집, 1977, p. 239.

76) 김광수,《한국기독교전래사》, 기독교문사, 1974, p. 236 주 6.

77) 리진호, 1997, p. 82. 리진호가 원산도 주민에게 확인한 사실이라고 적고 있다.

78) 위의 책, p. 66. 주 46 참조 ; 곽길보, "백오십 년만에 세워진 교회에서", 〈빛과소금〉1985년 10월호. 음력 정초에 한두 번씩 도민의 행복과 어업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堂祭를 드린 곳인데 곽길보 목사가 목회한 지 얼마 안 되는 1980년대 초에 당제는 폐지되었다고 한다.

79) C. Dallet,《한국천주교회사》(안응렬·최석우 역주), 분도, 1980, p. 194.

80) 위의 책, p. 195. 귀츨라프는 그곳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만나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달레는 가톨릭 신자의 개신교 목사 방문을 기록함으로서 당시 가톨릭 신자의 유무에 대한 논쟁이 제기되었다.

81) 위의 책, p. 195.

82) 리진호, 1997, p. 82.

83) N. C. Whittemore, "Notes on the life of Rev. Karl F. A. Gützlaff, First Protestant Missionary to visit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1920. 1, pp. 17∼19.

84) 위의 글, p. 17.

85) 백낙준,《한국개신교사 1832∼1910》, 연세대학교출판부, 1973, p. 48. 이 책의 영문판은 1927년 예일대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된 것이다.

86) 이능화,《朝鮮基督敎及外交史》(下篇), 1928, p. 131. 이능화는 이 사건이 "純祖三十一年 辛卯"에 해당하는 서기 1831年에 일어난 기사(p. 130)로 적고 있지만 이는 순조 32년(1832)의 오기이다.

87) H. A. Rhodes, "First Protestant Missionary to Korea-1832," The Korea Mission Field, 1931. 11, pp. 223∼228.

88) 위의 책, p. 225.

89) 진단학회 편, 1965, pp. 402∼405.

90) 위의 책, p. 402.

91) 김양선,《한국기독교사 연구》, 기독교문사, 1971, p. 42.

92) 위의 책, p. 43.

93) 위와 같음.

94) Karl Gützlaff, 1834, p. 351.

95) 리진호, 1997, p. 82.

96) Karl Gützlaff, 1834, p. 351

97)《純祖實錄》순조 32年 7月 21日 ;《日省錄》순조 32年 7月 23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