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그리움/진도문화

[스크랩] 삼별초 궁녀둠벙(진도여행)

麗尾박인태행정사 2007. 8. 14. 16:33
삼별초 궁녀둠벙
  지정번호
향토유형유산 제4호
  소유자
국유(國有),
사유(私有 : 조성열외 6인)
  소재지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1029-11, 1029-12
  규모
가로 40m, 세로25m(1,000m2)
절벽높이 10~15m
  시대
고려후기
  지정년월일
2001년 10월 30일

 

☞삼별초 궁녀둠벙은 의신면 소재지인 돈지리에서 만길리 쪽으로 803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만길재’를 채 넘기전 왼쪽 언덕 아래에 있다.
이 둠벙의 유래와 관련한 그 단초는 고려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남하해 진도로 들어온 해는 1270년(원종 11) 8월이었다.
고려시대 진도를 역사상에 부각시킨 사건은 바로 이같은 삼별초의 입거에 의해서였다.
삼별초군은 고려왕실이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들어가 몽고에 항복하자 개경정부를 괴뢰정부라
주장하면서 진도로 남하하여 들어왔던 것이다.
진도에 근거지를 잡은 삼별초는 용장성을 쌓고 궁전을 세우며 그 세력을 뻗쳐나갔다.
이런 가운데 진도의 침공에 여러번 실패한 개경정부와 몽고 연합군은 전함을 대량 건조하여 마침내
모든 전투력을 총집결하여 진도의 공략을 감행하였다.
먼저 김방경과 몽고 장수 홍다구는 함께 중군을 거느리고 진도내 벽파정을 향해서 진격하였다.
이들의 본진이 있던 해남의 삼기원에서 벽파정까지는 약 4km정도에 불과하여 여기서 산등성이를
넘으면 곧 삼별초정부의 거점인 용장성이었다.
반대로 삼별초정부는 용장성의 선황산정(仙皇山頂)에 오르면 적의 움직임을 살필 수 있었다.
이들은 벽파정에서 김방경 등이 거느린 연합군측 중군의 내침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연합군측의 홍다구가 거느린 좌군은 ‘장항(獐項 : 노루목)’ 쪽으로 상륙하여 지막리?오산하리
‘두시난골’을 지나 용장성 뒷골짜기로 진격했다.
한편 대장군 김석(金錫)과 고을마(高乙麻)가 거느린 우군은 벽파정과 마산포의 중간지점인
‘군직구미(軍直仇味)’로 상륙하여 성 동쪽으로 진격했다. 이 싸움에서 삼별초정부는 방비와 대책을
소홀히 한데다가 몽고군이 사용하는 화기의 공세를 받아 함락되고 말았다.
연합군측에 진도가 함락되자 김통정은 삼별초의 잔류 부대를 이끌고 제주도로 쫓겨갔고,
배중손이 거느린 잔류부대는 임회면의 남도성 부근에서 최후까지 항거하다 전원 전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삼별초가 추대했던 왕족 출신 승화후 왕온은 지금의 의신면 침계리에 있는 ‘왕무덤재’에서
붙잡혀 ‘논수골’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전투중에 피난중이던 여기급창 등 궁녀들은 창포리에서 만길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만길재’를 넘다 몽고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언덕을 따라 내려가
지금의 둠벙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끓었다.
이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할 당시 3천 궁녀가 부여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끓었다는
내용과도 매우 흡사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 뒤 비가 오는 날이면 이곳 둠벙에서 여인네의 울음소리가 슬피 들려오고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밤에는 이곳을 지나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사연을 간직한 이곳 둠벙을 가리켜 이후 진도사람들은 ‘여기급창둠벙’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이곳 둠벙의 수심은 매우 깊어서 절굿대를 넣으면 우수영 또는 금갑앞바다로 나온다는 전설도
간직하고 있다.

지금의 의신면소재지인 돈지리와 창포리 앞 들녘은 예전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이다.
그리고 쌍계사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우항천에 입수되어 바닷물과 합쳐졌는데 그 물줄기가 돌아가던
‘만길재’밑 언덕 아래에는 깊은 둠벙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 둠벙이 바로 옛날 여기급창과 진도민 여인네들의 슬픔을 간직한 역사의 장인 ‘삼별초 궁녀둠벙’이다. 지금은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둠벙의 구실을 했던 흔적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바다를 매립하여 새로이 넓은 간척지를 조성하고 이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1958년
사천저수지 공사가 완공되면서부터 옛날의 모습은 차츰 없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하천 직강공사로 인해 우항천의 물줄기가 둠벙을 벗어나 흐르게 되면서부터는 이곳 둠벙은
메말라 논으로 변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일부 둠벙의 중심부만을 제외한 나머지 땅은 경지정리가
완료된 상태이다.
현재 둠벙의 중심지점은 잡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채 습지로 남아 있고, 간혹 비가 오면 한동안 물이
고여 있을 뿐이다.
남아 있는 둠벙의 면적은 가로 40m, 세로 25m정도로 약 1,000m2의 규모이다.
그리고 여기급창들이 이곳 둠벙으로 뛰어들었던 절벽으로 여겨지는 언덕과 둠벙과의 높이는
약 10~15m 정도이다.
절벽 위쪽 언덕에는 민묘가 있는데 이는 둠벙에 빠져 죽은 여기급창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함께
묻어둔 ‘떼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여미리를 아시나요
글쓴이 : 쏙대네식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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